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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형제교회와 얀 후스(5)민중의 눈으로 본 서유럽 여행기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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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7  00: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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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형제교회와 얀 후스(5)

<글 싣는 순서>

1. 로마와 바티칸
2. 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
3. 프랑스 파리 개혁교회와 위그노의 역사
4. 스위스 개혁교회와 WCC
5. 체코 형제교회와 얀 후스

체코는 6세기부터 슬라브계(系)의 체히인이 정착한 뒤 9세기 무렵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민족이 통일국가를 수립하였다. 10세 기 초 슬로바키아 지방이 헝가리에 점령되었고 체코도 1620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붕괴되자 1918 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 나 그 뒤에도 독일·소련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48년에는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하여 인민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68년에는 당 제 1 서기인 A. 두브체크의 주도로 자유화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시도하였으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입으로 좌절되었다. 69년 4월 두브체크 축출 후 G. 후사크 정권이 들어서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 등 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를 채택하였다.

   
 

1977년에 다시 일어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은 정부의 인권탄압에 항의하고 헬싱키조약 준수를 촉구하는 <77헌장>을 공표하였다. 이어 89년에는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벨벳혁명>을 일으켰고 90년에는 최초의 자유선거로 재야단체인 <시민포럼> 중심의 비공산연립정권을 출범시켰다. 공산정권 붕괴 후 슬로바키아공화국측의 연방분리 운동이 크게 일어나면서 연방 붕괴 위기가 대두되었고, 92년 6월 체코와 슬로바키아 공화국 대표의 합의로 93년 1월 1일부터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이 달성되었다.

체스케 부데요비체(Ceske Budejovice)
프라하의 남쪽 120km, 블타바강의 연안에 위치한다. 13세기에 건설된 도시이며, 아름다운 광장과 고딕풍의 교회·수도원 등이 있다. 근교에는 아름다운 성이 많아, 국정보호도시로 지정되어 있다. 1827∼1829년에는 이곳에서 오스트리아의 린츠까지 유럽 최초의 마차철도가 부설되었다. 연필과 맥주의 생산으로 유명하며, 그 밖에 기계·담배·목재·제지·식품 등의 공장이 있다.

체스키크룸로프는 블타바강 만곡부(灣曲部)에 있는 도시로서, 봉건귀족 비데크가(家)의 보호를 받아 14∼16세기에 수공업과 상업으로 번영하였다. 옛시가지에는 체스키크룸로프성을 중심으로 중세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강변에는 스메타나의 생가와 음학원이 있으며 전설적인 르네쌍스풍의 건물들이 모여 있다.

13세기에 창건한 체스키크룸로프성 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조폐소 등이 있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하였는데, 개축 당시 둥근 지붕이 덮인 탑과 회랑을 만들었다. 궁전에 있는 가면의 방은 로코코 양식으로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풍경화로 장식해 놓았다. 라트란 지구에는 14세기에 건설하여 16세기에 개축한 성체(聖體) 성당과 성요스트 성당이 있다. 옛시장터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리와 후기고딕 양식의 성비토 성당이 보존되어 있다. 성당은 1309년 착공한 건물로서 내부에는 그물 모양의 볼트와 바로크 양식의 제단이 있고, 건물 서쪽에는 좁고 높은 탑이 서 있다. 1994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체코의 역사
5~7세기 슬라브족은 체코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방에 정착한 집단과 슬로바키아 지방에 정착한 집단으로 나뉘었다. 830년 두 슬라브족이 연방해서 모라비아 왕국을 세웠는데, 한때 헝가리와 폴란드의 일부까지 장악한 거대한 왕국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906년 헝가리의 마자르족이 침략하여 모라비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후 슬로바키아는 1000년간 헝가리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체코 지방은 독자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을 건립하고 번창하였는데, 초기에는 프르셰미슬 왕가가 통치하다가 1307년부터 독일계 룩셈부르크 왕가가 뒤를 잇게 된다. 1346년 룩셈부르크 왕가의 제2대 왕 카를 4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면서,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에 이르기까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15세기 중엽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을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300년간 체코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합스부르크 왕가가 무너지자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독립을 선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나치 독일의 통치를 받게 된다. 망명 정부는 구 소련과 동맹을 맺고 나치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 1960년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

1968년 자유주의를 외치는 시민 운동인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지만 소련에 의해 좌절되었고, 1977년 1월 극작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저항하며 ‘77 헌장’을 선언했다. 1988년 구 소련에서 개혁이 시작되고, 이듬해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유럽에도 민주화 물결이 일어나게 되자,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시민 포럼’이 중심이 되어 시민들이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리게 되었다. 1989년 민주화 물결의 지도자였던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상 처음으로 비공산주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국명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공화국’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1993년 연방 의회 승인에 따라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면서 체코 공화국이 탄생했다. 2004년에는 EU에 가입하여 유럽의 관광 대국으로 손꼽힐 정도로 급부상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체코는 공산화 해체이후 동구권 나라중 가장 먼져 개방화를 한 국가로 체코항공은 모든 동구권에 취항을 한다. 체코항공의 공매에 세계 유수한 항공사들이 입찰에 응했지만 대한항공이 응찰을 하고 체코 공항 운영권도 투자를 하게 된다. 그러나 체코항공은 이후 중국항공에 매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자동자 조립공장이 있으며 체코공항은 동구권 허브공항으로 손색이 없다.

이번 여행에서 특이한 것은 EU 국가들은 처음 들어갈 때만 입국심사를 하는 데 그것도 항공권으로 대치되여 외교부의 사증제도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EU국가 간의 이동은 열차나 항공이나 모두 입국 항공권 확인만으로 통용되고 입국자와 출국자들의 통로가 따로 없는 것도 신기하였다. 그렇게 되면 인원 절감과 업무 중복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새로 개청한 인천공항 2청사도 무인 전자 여권확인만으로 출국하여 출국 도장제도가 없어진 것으로 보였다.

체코에 아시아인으로는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늘고 있다. 다른 EU국가에 비하여 저렴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문화가 장점으로 보인다. 특히 대한항공의 취항과 한국인의 소득증대로 인한 동구권 관광 붐으로 인하여 앞으로도 관광 인구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시내에는 한인 식당들이 성업 중인데 딱히 한국인 식당으로만 운영하지 않고 일식과 중국식을 혼용하는 상업적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 한국음식만으로도 한국인과 프랑스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엄마밥” 이라는 식당의 예로 보아 마켓팅에서 배워야 할 것으로 보였다.

체코의 음식
체코는 바다가 없고 북위에 위치해 있다는 지형적인 특성상 해산물이나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기 중심의 식생활을 하고 있다. 프라하는 관광객이 워낙 많이 찾는 도시이기 때문에 갈 만한 레스토랑도 많고, 서유럽에 비해 가격도 적당하며 음식 맛도 한국인에게 잘 맞아 프라하를 찾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 바츨라프 광장과 구시가지 광장 주변의 레스토랑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고 심지어 맥도널드도 위치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프라하에서 가장 비싼 맥도널드는 카를교에서 말로스트란스케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다.

체코는 내륙에 위치해 있어 육류 요리가 발달하였다. 그중에서도 돼지의 넓적다리를 삶거나 훈제한 뒤 구운 요리를 콜레노라고 한다. 얼핏 보기엔 우리나라 족발과도 흡사해 보이는데, 훈제하지 않고 삶아서 구운 콜레노는 맛도 우리나라 족발과 비슷하다. 체코 전통 레스토랑이라면 어디서든 콜레노를 맛볼 수 있는데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은 아니라서 2~3명이 함께 주문하는 것이 좋다.

체코의 기독교 역사
체코는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과거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프라하대학은 13세기에 세워진 유서깊은 학교다. 당시는 육로의 거점으로 동서양의 문화가 낳은 국제도시가 된 것으로 일찍이 조성된 석조건물과 성당등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한다. 세계 최대 크기의 프라하성과 시내전경의 붉은 기와는 그야 말로 장관이다. 체코 공화국의 그리스도교는 929년 벤체슬라오 왕자가 순교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1973년 이후 프라하는 교구로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3세기경 본당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설립되었다. 탁발 수도회(mendicant order)들은 13세기 라틴 예법 교회와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 다음 세기에 보헤미아의 얀 후스(Hus)의 가르침은 이단과 이교 화형에 처해져 교회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은 체코인의 정신적 신앙적 민족 영웅이다

   
* 이종실 목사가 번역한 얀후스의 일대기

1415년 그의 화형은 일련의 종교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교회 재산은 몰수되고 수도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살해되기도 하였다. 교회 조직은 완전히 붕괴되고 수 많은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가 소수인 보헤미아 형제회(Bohemia Brethren)에 결합하였다. 종교개혁은 오히려 교회를 심각하게 오염시켰다. 1560년대에 들어서 시작된 반종교 개혁 운동은 국가주의 교회 제도, 계몽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혼탁한 정치 현실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교회를 차츰 회복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된 2년 후,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교회는 프라하 선언을 하고 이 선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1948년 초 가트발트가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일부 지역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교회의 병원, 학교, 재산이 국유화하였고 가톨릭 단체들이 해체되었다. 1949년 정부는 교회 설립에 실패한 교회 인력이나 그 하수인을 동원하여 꼭두각시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같은 해 프라하 대교구 베란 대교구장은 연금되었다. 1950년 주교들과 사제들에 대한 재판이 연극과 같이 수없이 연출되었다. 그 탄압은 동방 정교회와 연합하고 있던 슬로바키아 동방 가톨릭 교회에도 가해졌다. 이후 십여 년 동안 수천 명의 사제들이 체포되었고 수백 명의 사제들이 추방되었으며, 또한 동방 가톨릭 교회에 정부가 인정한 “평화의 사제단” 설립을 강요하였다.

   
* 체코 역사 최초로 하층 여성들을 위하여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드려진 채플 

이에 교황 비오 12세는 공산주의 박해 기간에 체코 교회의 비상 권력자에게 사제의 임명권을 승인하였다. 1968년 1월부터 10월까지 교회와 국가 관계는 두벡 통치 아래서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많은 사제가 복권되었고 3,000명의 사제들이 사목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1,500명의 사제들에게는 여전히 사목 활동이 막혀 있었다. “평화 사제단” 조직도 해산되었다.

147개의 본당을 가진 동방 가톨릭 교회가 다시 설립되었다. 1969년 사제들과 수도자들에 대한 복권 재판이 끝났지만, 그들에게 생활과 직무가 합당하게 부활된 것은 아니었다. 정부의 탄압으로 계속해서 사제들과 수녀들의 활동은 막혔다. 77개 항의 인권 선언의 서명은 특별히 정부의 탄압과 보복에 목표를 두었다.

1983년 12월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은 바티칸에서 교황을 알현하였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주의 치하에 들어간 이래 체코 정부 고위 당국자가 교황을 만난 최초의 일이었다. 1984년 바티칸 공식 사절 2명이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하였다. 1988년 3명의 새 주교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73년 이후 처음으로 서품을 받았다. 1989년에 더 많은 주교가 임명되었다. 1989년 후반에 공산주의 정부가 몰락하였다.

1990년에 공석 중인 주교가 모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교황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교 관계가 재수립되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나라를 방문하였다. 1997년 공산주의 치하에서 비밀리에 거행된 기혼자의 사제 서품 문제는 이 나라의 동방 가톨릭 교회에서 사목 활동을 새로 시작하면서 해결되었다. 1949년 사제를 문화부 소속 직원으로 한 법령의 반포로 지금까지도 체코의 사제들은 국가에서 임금을 받는다. 한 교회의 대변인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치 중에 교회 재산을 몰수한 것이 아직까지도 사제들의 재정 문제를 국가에 의존하게 한다고 했다.

현재 우리 총회 파송선교사로 25년째 사역하고 있는 이종실 목사는 체코 시내의 꼬빌리시 한인교회 설립자로 지금은 다인종들이 모이는 연합교회로 발전했다. 이 목사 사모는 체코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로도 일한 바 있다.  이 목사는 체코형제교회가 발행한 얀 후스에 대한 책자를 작년에 후스 순교 600주년 기념으로 번역하여 낸바 있다. 이 목사와 체코교회는 앞으로 그동안 체코 형제교회가 국가소속으로 교회운영에 대하여 인건비등을 지급받았는 데 앞으로 2030년이면 체코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 분리한다고 한다. 따라서 향후 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 인구중 가토릭이 15% 체코형제교회가 1% 로 보고 있어 교세는 미미하지만 유일한 개혁교회의 전통을 갖은 단일 교파로 세계교회나 우리교단과 선교협정을 맺고 있는 교단이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설을 기반으로 성서를 그리스도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할 것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을 보였으며, 교황 등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으며,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신학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개신교 공동체인 보헤미안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 체코의 민족영웅 얀 후스를 기념하는 동판

후대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동상을 세웠으나 화형 당할 때 그의 얼굴이 그려진 모든 그림들이 다 태워졌기에 동상의 얼굴은 상상의 얼굴이라고 한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순교 500주년 기념해인 1915년 구 시가지 광장에 청동으로 세웠는데 앞에 보이는 글은 "서로 사랑하라, 모두에게 진리를 베풀라!" 는 글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1520년 루터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루터를 지지하던 독일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꼭 100 년전 보헤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교회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얀 후스가 화형(火刑)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얀 후스(Jan Hus)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보헤미아 지역 출신이었다(1993년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보헤미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게 들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는 교향곡 ‘신세계’를 작곡한 안톤 드보르자크도 보헤미아 출신이다.

후스는 1372년께 보헤미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그 지역의 최고 명문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황제가 세운 대학이었고 따라서 ‘카를 대학’ 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유럽 굴지의 대학이었고 프라하를 중부 유럽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얀 후스는 그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약관 29세에 철학부의 학장이 되었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후스는 그만큼 인정 받았던 출중한 학자였다. 그가 37세가 되었을 때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학자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후스 생애의 큰 전환점은 그가 존 위클리프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성을 떨치던 교수였던 위클리프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점,고쳐야 할 점을 지적하는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종교개혁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위클리프의 글을 읽고 후스는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글들을 체코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후스는 당시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의 모습과는 큰 거리가 있다는 위클리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후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죽음을 두려워말고,진리를 사수하라.” 그에게 진리의 근원과 진리의 표준은 성경 말씀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도덕적 해이를 책망했고 교황이 갖고 있던 교황권은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명설교가였다. 보헤미아 지역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로마교황청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고 그의 입을 막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1414년 가톨릭교회의 종교회의가 독일 남단에 위치한 콘스탄츠에서 개최되었다. 후스는 이 종교회의에 참석,자기의 입장을 알리고 교회개혁을 설득하기로 마음 먹었다. 독일 황제로부터 신변 안전을 보장받은 그는 콘스탄츠를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한 후스는 즉시 체포돼 투옥되고 말았다. 그는 당대 명문대학 총장이었고 최고 지성인이요 유럽의 유명인사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볼 때 그는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였고 ‘이단자’에게는 관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후스는 투옥된 상태에서 그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고 강요 당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츠 종교회의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지적해주지 않는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맞섰다. 독일 황제가 중재에 나섰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결국 1415년 7월 당시 로마교회는 후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그가 화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이 보헤미아 지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라하 대학은 총장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으로 선포했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오늘날도 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이며 “주님의 진리가 승리하리라!”고 하는 그의 삶의 모토는 현재 체코 공화국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후스는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였다. 그런데 후스의 최후에 관해서 한 가지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화형대에서 뜨거운 불길이 후스의 몸을 삼키려 할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는 이제 ‘거위’와 같이 불에 타 죽지만 앞으로 ‘백조’와 같은 인물이 내 뒤를 이으리라.” 마르틴 루터가 역사의 무대에 출현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00년전 후스가 말했던 ‘백조’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를 ‘백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백조’를 바라보는 당시 독일 사람들의 시선은 불안하기만 했다. 후스가 당했던 운명을 루터가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391년에서 1394년까지 진보적인 설교자인 얀 밀리츠 크로메리체의 추종자들이 공회당을 개축하여 지은 예배당이다. 이곳은 주로 설교장으로 쓰였는데, 1402년에서 1413년 사이에 얀 후스가 이 교회당에서 설교하여 많은 추종자를 끌어모았다. 영국인 종교 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은 후스는 교회의 부패한 관행을 비난하여 성서만이 교리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산전투(Battle of the White Mountain)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불법으로 규정된 후 이 건물은 예수교파로 넘어갔다. 예수교파는 이를 여섯개의 본당 회중석을 갖춘 건물로 완전 개축했다. 1786년에는 건물이 거의 철거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후에야 옛 그림에 따라 재건축 사업이 시도되었다. 매년 7월 5일 후스가 화형에 처해지기 전날에는 그를 추모하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보헤미안(체코) 지역의 기존 캐톨릭교회 의 화려한 양식에서 탈피한 검소한 양식으로 이루어진 교회로서의 개혁의지를 갖고 있는 교회, 교회 안에 우물이 있는데 우물은 지역 사회에 대한 배려로서의 교회의 개혁의미를 담고 있다. 

   
* 체코형제교회의 역사서, 번역 김진아 사모(이종실 목사 부인) 

벨벳 혁명 당시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벨벳 혁명은 1989년 11월 17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혁명으로 당시 공산당 정권을 무너트린다. 이 벨벳 혁명은 동유럽 민주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에 경찰은 프라하에서 일어난 평화적인 학생 시위를 탄압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11월 19일부터 12월 말까지 대중 시위가 이어지게 된다. 11월 20일에 프라하에 운집한 평화 시위자의 수는 전날 200,000여 명에서 500,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11월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2시간의 총파업을 결행하였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거리 시위가 늘어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1월 28일에 당이 권력을 포기하고 일당제 제도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2월 초에 오스트리아, 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에서 철조망과 여타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사크 대통령이 1948년 이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음으로 非공산당 정부를 지명하고 사임하였다.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1989년 12월 28일에 연방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다음날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직에 올랐다. 1990년 6월에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이래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를 치렀다. "벨벳 혁명"이란 말은 국제 사회에서 이 혁명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체코 내부에서도 이 표현을 쓴다.

1993년에는 인종이 다른 체코슬로바키아와 분리되면서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사람들이 처음부터 쓰던 표현인 "신사 혁명"이란 말을 쓴다. 체코에서는 계속 이 사건을 "벨벳 혁명"으로 칭한다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은 이름 그대로 1295년 체코를 다스리던 바츨라프(Wenceslas) 2세를 기리기 지어졌다. 바츨라프 2세는 12세기 말~13세기 초의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폴란드 왕과 헝가리 왕의 세 나라 왕위를 겸하였고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대왕이 되어 중앙 유럽과 동유럽 대합동국가의 군주로서 유럽에 군림하였다.

10세기경 보헤미안 기사들과 함께 적군을 물리치고 체코의 국난을 극복했다는 체코의 영웅이기도하다. 그는 1300년 화폐 제도를 실시하여, 왕국 전체를 하나의 조폐국 제도로 통일하였으며 프라하의 시민들에게 맥주 양조 권리를 주면서 맥주 양조가 일반화시켰다. 바츨라프 2세는 성 비타 성당의 문앞에서 이복 동생들에 의해 저격당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성당에 그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설립 때도, 1939년 프라하를 함락한 나치군에 저항하던 곳도, 1968년 러시아에 의해 무참히 끝나버린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 때도, 그리고 1989년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 때도 모두 바츨라프 광장이 수많은 체코인을 모아준 장소였다. 체코 국립 박물관에서부터 무스테크 광장까지 총 750m에 달하는 긴 광장은 오늘날 프라하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댄다.

프라하 국립박물관에서 구시청사 광장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길을 신시가지라고 하며 이 신시가지의 바츨라프 기마상이 서 있는 곳을 바츨라프 광장(Vaclavske Namesti)이라 부른다. 바츨라프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 대로 같은 느낌이 강하며 상점, 은행, 카페, 페스트푸드점이 줄지어 있다. 중세에는 말을 파는 시장이 서던 곳이며 지금 보이는 건물은 대부분 20세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 광장은 체코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1963년에 시작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은 1968년 소련을 포함한 바르샤바 동맹군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대항해 시민 궐기가 일어났고 1969년 프라하 대학 경제학부의 얀 팔라흐(Jan Palach)가 바츨라프 동상 앞에서 분신자살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 뒤에도 2명의 학생이 더 분신하여 시위는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결국 소련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 프라하 인근에 교황의 관용 이후 최로로 세워진 리비시교회(얀 팔라흐가 다녔던 교회) 
   
 
   
* 리비시교회에 붙어있는 얀 팔라흐의 동판에 소개된 글

이 사건이 바로 '프라하의 봄'이다. 1989년의 '벨벳 혁명' 때에도 시민들이 모여 민주화를 쟁취하였다. 이후 바츨라프의 동상 앞에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지금까지도 그들을 추모하는 헌화가 끊이질 않고 있다. 그 앞으로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서 각종 집회나 콘서트 등이 열리고 있다. 동상 남쪽으로 750m 정도 길게 이어진 길 양쪽으로는 한국 서울의 명동을 방불케 하는 각종 상점과 레스토랑 등이 화려한 불빛을 뽐내며 늘어서 있다.

그 때문인지 이곳은 언제나 많은 인파들로 붐비기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역사적이면서도 초현대적인 이 광장은 프라하의 이색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미 650여년의 역사를 지닌 이곳은 프라하 여행의 출발지로 이곳에서 카를다리, 구시청사, 화약탑 등 다른 명소들 또한 도보로 쉽게 찾을 수 있는 데 마치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의 촛불이 민주화를 실현한 것 처럼 역사적이고 의미있는 광장으로 각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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