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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개혁교회와 위그노의 역사(3)민중의 눈으로 본 서유럽 여행기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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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6  13:4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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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개혁교회와 위그노의 역사(3)

<글 싣는 순서>

1. 로마와 바티칸
2. 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
3. 프랑스 파리 개혁교회와 위그노의 역사
4. 스위스 개혁교회와 WCC 
5. 체코 형제교회와 얀 후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학생혁명은 이후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철학적인 면에서도 의미가 있는 역사이다. 이번에 한국에서도 68혁명 50주년을 맞아 한국프랑스 철학회가 지난 5월 18~19일 양일 간 연세대학교에서 ‘1968년 50주년 철학, 혁명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봄 학술대회를 열었다. 

   
* 프랑스 혁명(Révolution française)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작

1787~99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 대혁명은 미국 독립전쟁 지원으로 프랑스 재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이 봉건체제를 폐지하고 국민의회를 구성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공표한 것에서 기인한다. 거기서 국민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했고 프랑스 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주변 국가들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시민군을 결성해 주변국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공포정치를 펼쳐갔다. 비록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혁명은 일단락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은 봉건체제의 유럽 사회에 자유와 평등 사상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혁명국가 답게 프랑스는 학문과 세계에 대하여 개방적이다.  그러나 68혁명에 대한 추억이나 기림이 아직도 여전한지는 알 수 없다. 이번에 학국 프랑스 전공 학자들이 보는 68은 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같은 ‘고전적인 혁명’이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과거 정치적 전복이나 체제의 전환이 아닌 일상을 포함하는 사회 전 영역의 위계와 권위에 도전해 새로운 삶의 편재를 꿈 꾼 혁명이되, 결코 끝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1962년부터 시작된 구조주의 철학은 “구세대” “한물간 사람”으로 여겨지던 63살의 마르크스주의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이 68혁명를 통하여 지적 생명을 연장했는 데 시위대의 폭력 사용을 옹호하므로 소르본대학을 점거한 학생들에게 초청받아 발언할 기회가 주어진 유일한 지식인이라는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68혁명으로 “사망 진단서”를 받았다는 평까지 나온 구조주의는 이후 포스트 구조주의로 발전해 가는 계기를 마련했고 <라캉 또는 알튀세르>의 저자 최원 단국대 철학과 강사는 “구조는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라는 뤼시앙 골드망의 비판에 자크 라캉이 응수한 “구조가 거리로 나간다”고 한 말을 발표의 중심 주제를 한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알튀세르가 추구한 중국의 문화혁명과 같은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혁명의 한계를 지적하고, 계급·성·인종·국민 등 갈등하는 복수의 주체화 작업의 필요성을 제안하는 논문으로 관심을 모았다. 철학자 김재인은 혁명이 좌절된 원인으로 ‘인간의 자기 예속 욕망’을 탐구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과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를 중심으로 ‘무의식을 생산하는 삶’을 살아갈 방법을 풀어냈다. 도승연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부교수는 6.8혁명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학자로 꼽히는 미셸 푸코가 도모한 ‘정복당한 지식의 반란’의 모습을 그려냈다.

주재형 연세대 철학과 강사는 자크 데리다가 ‘비제도적인 혁명’인 6.8혁명과 거리를 두고 국제철학학교 창립 등 ‘탈-제도적 실천’을 추구한 이유에 대해 철학적으로 해명했으며 강초롱 서울대 불문과 강사는 6.8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여성해방운동이 내부의 갈등과 미국 학계를 거치면서 ‘차이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으로 왜곡된 과정을 되짚었다.

학회장을 역임했던 1세대 프랑스철학자인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다양한 발표를 들으며 6.8혁명이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다중 혁명으로 보았다. 서양철학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를 이루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아테네, 18세기 말 독일 예나처럼 6.8혁명 또한 이후 사상사를 결정할 철학혁명이기도 함을 확인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학회는 이번 학술대회에 발표된 글들은 수정·보완을 거쳐 오는 10월 이학사에서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suhHD_wfqaw(프랑스 혁명)

파라의 명물 에펠탑

프랑스 파리는 세계를 대표할 만한 지적 문화적 유산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 세계로부터 약탈한 것은 물론인데 우리나라의 문화재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에서 가자 오래된 금속활자로 제작된 '직지심체요절' 같은 것은 우리가 프랑스 고속철도(TGV)를 놓는 조건으로 되돌려 받았다. 프랑스의 많은 문화 유산 중 첫째는 에필탑인데 프랑스 혁명 100주년 및 세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워진 철골 조형물로 박람회 이후 철거하기로 했다고 한다. 모파상 등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들과 문인들은 아름다운 건축물에 높이 솟은 이 구조물을 괴물 시하고 반대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 방송국의 중계탑과 군 통신망으로 살아남게 되었고 오늘날 프랑스와 파리를 대표하는 구조물로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효자가 된 것이다.

   
* 에펠탑

에펠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는데 건물 전체가 철골 구조로 강한 바람에도 꼭대기가 13cm 이상 흔들리지 않고, 기타 위험으로부터 탑을 잘 고정시켜 주는 공법이다. 철골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는 15cm가 더 길어지지만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공모를 통하여 선정된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최초의 철골구조로 이후 교량과 건축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에펠은 이미 3년 전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높이는 총 320m, 3층까지 총 1,652개의 계단이 있고, 2천 5백만 개의 못이 사용되었으며 전체의 무게는 10,000톤, 4년마다 도색 작업을 하는 데 들어가는 페인트의 양만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당시 100여 점의 설계안이 제출되었으나, 프상스 시면혁명 100주년 기념위원회에서는 유명한 교량 기술자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당시 높이 300m의 노출격자형 철구조를 세우려는 에펠의 파격적인 구상은 경이와 회의를 불러일으켰으며, 미학적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반대를 받았다. 조금이라도 이와 비슷한 구조물은 그때까지 지어진 적이 없었을 뿐더러 이 탑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나 이집트 기자의 대(大)피라미드보다 2배나 높았다. 이후 철골 구조는 교량과 건축에 도입된다. 당시의 다른 기념물들과는 달리 에펠의 탑은 적은 노동력과 싼 비용으로 짧은 기간에 건설되어 1889년 3월 31일 준공식을 했다. 에펠탑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그해 5월이었다. 에펠탑은 1930년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될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지위를 지켰다.

   
* 종지기 과지모도가 거주했던 노트르담 사원 정문

이외에도 파리에는 세느강변에 둘러쌓인 노트르탐 사원과 루브르박물관, 개선문에서 시작되는 샹젤리제 거리와 길거리 화가들의 몽마르트 언덕 등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파리 리용역 근처에 묵었던 우리는 어디서고 물 한 모금도 돈을 주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불편함과 길거리의 노숙자와 걸인들은 세계적인 도시라는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되는 개선문

프랑스 개혁교회

종교개혁 초기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은 일찍부터 등장했다.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자로 떠오르기 전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은 이미 성서 연구와 더욱 순수한 형태의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가졌다. 프랑수아 1세의 누이 앙굴렘의 마르그리트는 개혁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모(Meaux) 그룹으로 알려진 인문주의자 집단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이 성서와 신학에 관해 쓴 많은 저서들을 프로테스탄트들이 읽게 되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집단을 떠나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1555년까지 프랑스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없었으나, 그 이후 종교개혁 운동이 급속히 퍼졌고 1562년부터는 내전이 잇달아 일어나고, 위그노교도(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은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겪게 되었다. 이 투쟁기간 동안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1572)이 일어나 수많은 위그노교도가 살해 당했다.

위그노의 지도자인 나바라의 엔리케가 프랑스 왕(앙리 4세, 1589~1610 재위)이 되어 로마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임으로 평화를 되찾았다. 이 일은 로마 가톨릭교도들을 만족시켰고, 앙리는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하여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보장했다. 그뒤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들은 박해의 상처를 말끔히 회복했으나,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했고, 프로테스탄트들은 이 조치를 전후하여 다시 한 번 박해를 당했으며, 이민을 법으로 금지했는데도 25만 명 이상의 위그노교도들이 독일·네덜란드·잉글랜드·스위스·아메리카로 도피했다.

프랑스에 남은 사람들은 사실상 지하운동으로 명맥을 유지했고,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충분한 권리를 되찾지 못했다. 1848년 이후 프랑스에는 개혁교회들의 연합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정통파와 자유파가 견해 차이로 분열했다. 정통파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엄격히 고수한 반면, 자유파는 개인 양심의 자유를 장려했고 강제성을 띤 신앙고백에 반대했다. 이러한 분쟁들의 결과로 20세기초 프랑스에는 4개의 주요 개혁교회 그룹이 있었다. 1905년 프랑스는 법으로 모든 종교 단체들을 국가로부터 분리했고, 교회는 이때부터 정부의 지원 없이 자립해야 했다.

4개의 개혁교회 그룹들이 연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1933년 총회를 열어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고, 1936년 공동신앙선언을 채택했으며, 그 결과 1938년 프랑스 개혁교회가 조직되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의 개혁교회들과 루터 교회들은 프랑스 정부가 지원하는데, 1870~71년 프랑스-독일 전쟁이 끝나고 알자스 로렌이 독일에 합병될 당시부터 프랑스 교회들은 이러한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 지역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로 귀속되었다.

   
* 2018년 5월 10일 제5차 프랑스연합개혁교회 총회에 참석한 총회장과 일행들 

우리교단과 프랑스 개혁교회와의 관계는 총회장 김정서 목사 시절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 교두보는 현재 프랑스 개혁교회와 동역하는 성원용 선교사가 다리를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6월 3일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개최되는 제104차 프랑스개혁교회(ERF) 총회에 참석해 양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그로부터 교단  신학교 교류, 지역교회 간 교류, 선교사역 교류 등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공식 합의를 했지만 이것의 실현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가운데 102회기 총회 최기학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단이 지난 10~12일 프랑스 리제(Lezay)에서 열린 제5차 프랑스연합개혁교회 총회(총회장:엠마누엘 세이볼트 목사)에 참석, 한국과 프랑스간의 선교와 목회, 신학교류를 더욱 확대해 나갈 것을 논의했다.

여기서 양 교단은 오는 8월 29~9월 5일 프랑스 남부지역 세벤느에서 '제1차 한불 목회와 신학 아카데미'를 열고, 양 교단의 역사와 신학, 목회에 대한 교류의 장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일에는 처음부터 프랑스개혁교회와 선교협정을 맺는 데 산파역할을 한 성원용 목사의 공로가 컸다 임원들은 성 목사가 개척해 담임하고 있는 파리선한장로교회를 방문하고 부총회장 림형석 목사가와 총회장 최기학 목사가 1, 2부 예배 설교를 전했다. 프랑스연합개혁교회는 지난 2012년 프랑스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통합하면서 '프랑스연합개혁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발한 교단이다.

위그노(프랑스어: Huguenot)는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칼뱅주의를 추종한 프랑스 개신교 신자들은 스위스 주네브에서 세력을 규합하는데, 후에 이들을 프라이부르크, 베른, 제네바의 동맹이라는 뜻으로 위그노라고 불렀다. 프랑수아 1세는 그의 통치 기간에 위그노의 수가 늘어나도록, 그들을 관대하게 다루었다. 앙리 2세 때는 위그노들이 큰 세력있는 단체가 되었다. 그들이 강해지자, 정부는 그들을 더욱 더 박해하였다.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나바라의 군주 앙투완도 위그노들었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이끄는 기즈 가족과 프랑수아 2세는 위그노들에게 대항하였다.

1562년 위그노 전쟁,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등으로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교리적으로도 혼란을 겪었다.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뱅주의의 특징상 주로 상공업자 중에서 신도가 많았다.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사망하자, 샤를 9세와 황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정부를 지배하였다. 카트린은 기즈 공에 대항하는 위그노들의 균형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두 교파 간의 기분은 내란이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원인을 가져왔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프랑스 전국에서 가톨릭 교도들이 수천명의 위그노들을 학살하였다. 앙리 3세가 암살되고, 나바라의 군주 앙리(엔리케)가 부르봉 왕조를 열고, 앙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낭트 칙령을 세워 위그노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후 루이 14세가 가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기 위하여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 수 많은 위그노들이 네덜란드, 영국, 프로이센 등지로 망명하였다. 일부는 북아메리카 (현재의 뉴욕과 캐롤라이나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상공업은 물론, 여러가지 기술을 지니었던 그들이 망명하자, 프랑스의 경제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을 가져왔다.

위그노들의 신념, 파리에까지 개혁교회를

뚜상(Toussaint, 만성절)날 깔뱅(칼빈)의 친구인 니콜라 꼽이 마튀랭(Mathurins)교회에서 파리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깔뱅은 박해를 받고 도망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분노한 프랑수와 1세는 12월 10일 의회에 루터 이단에 대한 내용의 서한을 보냈고, 파리 소르본 신학부 교수진과 로마 가톨릭 고위 사제들은 그 연설문이 이단자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박해를 가하게 된다.

   
* 니콜라 꼽(파리대학 총장 취임)의 연설문 자리를 기리는 표식(설명, 파리선한장로교회 성원용 선교사)

이때 깔뱅도 앙골렘으로 피신하여 친구 루이 듀 띠에(Louis du Tillet) 집에 은신하였다가, 1534년 5월 4일 생가 느와용에 가서 사제직을 반납한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에 왕의 침실문에까지 미사를 반대하고 성직자를 비난하는 벽보가 나붙은 사건으로 개신교 핍박은 더 강해진다. 프랑수와 1세는 수백 명의 개신교들은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깔뱅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다. 그 다음해에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더욱 잘 보이기 위해 자기 영토 내의 모든 이단들을 완전 제거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한다.

   
*  '칼뱅이 기숙했던 자리'라는 표식

칼뱅 역시 망명자가 되어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깔뱅은 26세의 나이로 개신교의 실상을 왕에게 알리는 변증서인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1535년 8월 23일에 완성하고, 1536년 3월 바젤의 인쇄업자 토마스 플래터가 이를 출판한다. 그 후 1547년에 프랑수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y 2)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 심해졌다. 앙리는 1551년 샤토 브리앙 칙령을 선포하여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1550년 경부터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칼뱅이 자신의 제자들을 프랑스로 보내어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게 된다. 이 때 칼뱅의 가르침을 따른 프랑스 개혁자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세력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나간다. 대학 교수, 의사, 변호사와 같은 지식층은 개혁 운동만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 동참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위그노 최대 박해자 중 하나인 앙리의 재위 중인 1555년, 파리 최초의 개신교 교회가 비스꽁티(rue Visconti) 거리에 세워진다. 과거 이곳은 많은 야채(maraîchère)를 재배했기에 마레 거리(rue des Marais)라 불렸다. 이 거리는 현 개신교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장소요, 개신교 교회의요람과 같은 곳이기에 ‘작은 제네바’라 불린다. 이 거리가 개신교인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이중 사법권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23미터 길이의 이 거리동쪽 7개의 집은 성당의 권한에 속하는 곳이었기에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비밀히 개방하여 교제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파리 최초의 개신교회가 세워진 비스꽁티 거리. 과거에는 마레 거리라고 불렸다. 지역의 매력은 이중 사법권만이 아니다. 그 당시는 이곳에 많은 건물이 건축되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집들은 시골집이거나 시골 기와집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강을 따라 긴 들판과 많은 초목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파리 시내에 있는이 좁은 길에 많은 사람들이 모임을 가졌으나 소리는 좀처럼 나지 않았다.

교회의 설립은 라 페리에(La Ferriere)라는 가정에 아이가 출생하는 일로 시작된다. 당시 개신교도들은 교황청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야간에 모이고 헛간이나, 동굴, 인적 없는 장소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렸다. 목사가 없는 가운데서 성경공부와 예배를 위한 모임으로 가정 중심의 모임으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라 페리에는 자신의 아이가 신부가 아닌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받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목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목사에게 세례를 요청하기 위해서 파리에서 540km나 떨어진 제네바까지 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성례를 위해 개혁교회의 설립은 긴급한 요청이었고, 23세의 쟝 르 마송(Jean le Maçon)이 라 페리에의 집에서 파리 최초의 개신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교인들은 쟝 르 마송을 목사로 선출하고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를 조직한 후, 라페리에의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파리 최초의 교회에서, 개신교 최초의 세례가 베풀어졌으며, 최초의 총회가 열린다. 이들은 극한 위험 가운데서도 사제들에 의한 미사를 거부하고 목사에 의한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모(meaux), 엉제(Angers), 루동(Loudon), 쁘와띠에(Poitiers), 그리고 아베르(Arvert) 지역 등 4개 처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에는 디에프(Dieppe), 뚜르(Tours) 등에도 교회가 설립되어 1559년경까지 개혁교회 수는 72개 처에 이르렀다. 또 1561년 말에는 프랑스 전역에 670 여개의 개혁교회가 설립되었다. 칼뱅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가 프랑스 내에서 속속히 세워지자, 제네바에 더 많은 목회자를 파송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사역자들이 교회를 맡게되자 사회 지도적 인사들도 많이 출석하게 된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바로 옆 비스꽁티 거리에서 열매를 맺어 개신교 교회의 요람이 된다. 이 거리의 지하실은 다른 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경찰의 습격에도 도주하기에 용이했다. 1685년 예배의 자유를 허락한 낭트 칙령이 취소된 후 위그노를 박해할 때에도 이곳 거리에 비밀리 총회를 갖는다.

   
* 위그노들은 루브로 박물관 옆의 성당종소리를 맞춰 대학살이 시작되었고 그 시체들이 세느강에 버려졌고 그 시체들의 무덤위에 에펠탑이 서있다고 한다.

1572년 바돌로매 대학살 때 비스꽁티 거리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필립 아구스트(Philippe Auguste) 시대의 성벽이 있는 곳에서 대부분 순교한다. 작은 제네바에 거주하던 위그노들은 세느강 쪽으로 도주하지만 이곳 문을 닫는 바람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곳은 프랑스 개신교의 요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에도 이곳의 개신교 역사를 알리는 표지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과거와 달리 해외 여행이 자유로워진 관계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파리를 방문한다. 하지만 대부분 많이 알려진 곳에 와서 겨우 사진 찍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에 바쁜 일정이라 그곳의 역사의 정취를 맛보고 가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파리는 개신교 교회의 순교 현장이기도 하다. 강이 아름답다고 여기며 강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 없지만 그곳 세느강이 바로 순교의 현장이며, 다리 아프게 다니며 여기 저기 기웃기웃하는 루브르 박물관 주변이 또한 그러하며, 빅토 위고의 집 근처 보쥬 광장이 그러하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였던 서기 542년, 클로비스 왕의 아들인 쉴드베르 왕이 예수님이 못 박혔던 십자가의 일부를 포함한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수도원을 지으면서 이 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생 제르망이라는 이름은 당시 파리의 주교였던 생 제르마누스(Saint Germanus)의 이름을 딴 것이며, 프레(Près)는 풀밭이라는 뜻으로 ‘풀밭의 성 제르마누스 성당’이라는 의미다.

이 성당은 메로빙거 왕조가 끝날 때까지 건립자인 쉴드베르 왕을 비롯한 메로빙거 왕가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8세기 들어 가톨릭 수도회 중의 하나인 베네딕트파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수도회가 되어 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톨릭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약탈로 인하여 파괴된 성당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한 것은 11세기를 전후해서였다.

중세의 건축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손꼽히는 이 성당은 12세기에 건축을 시작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유명하고 세력이 강한 성당으로, 한때 교황과 파리 주교의 세력이 대립하던 현장이었다. 고딕식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비교되는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인 이 성당의 겉모습은 화려하거나 웅장하다는 느낌 대신 강건한 요새와 같은 느낌을 준다.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종탑도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이런 오래된 성당이 프랑스 개신교의 종교 개혁의 발생지가 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프랑스의 초기 종교개혁운동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개혁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교황이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프랑스 왕에게 양보하기로 조약을 맺은 1516년부터이다.

그 대표적인 개혁 운동을 이끈 인물이 르페브르(Jacque LeFevre d''Etaples, 1450-1537)이다. 그러나 르페브르가 이런 개혁 운동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인물이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1472경~1534. 1. 24)이다. 르페브르는 브리소네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개혁주의 노선을 걸었으며 자신의 주교구에서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자기 주위에 젊은 인재를 불러 모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알려진 인물이 기욤 파렐(Guillaume Farel)로서, 나중에 칼빈에게 아주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는 1507년에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교회 내의 종교 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신학자이며 인문주의자인 르페브르에게 개혁의 일을 맡겼다. 르페브르는 고대와 성인들의 글을 근거로 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제도적인 로마 교회에 도전하였다. 1508년에 시편 주석을 시작으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이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을 1512년 출판한 ‘바울 서신 주석’에 진술하였다.

1518년 브리소네는 Meaux 지방 주교로 발령나게 되는데, 그는 르페브르를 자신의 보좌 신부로 임명하게 된다. 르페브르는 1522년에는 ‘복음서 주석’을 출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복음, 자유, 희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극찬하였다. 성경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초래한다고 확신한 그는 1523년 프랑스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백성들 가운데 널리 보급하여 프랑스인의 가슴 속에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었다.

르페브르의 영향으로, 성경에 근거하여 믿고 생활하자는 운동이 지성인들 사이에 번져 갔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도원장 기욤 브리소네(Guillaume Briconnet), 프랑스 콜레쥬 창립자 기욤 부데(Guillaume Bude),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 훗날 칼빈이 도피 중 브리소네를 만나러 네락(Nérac)으로 갔을 때 만나게 되는 궁중 설교가 루셀(Gerard Roussel),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훗날 파리 주교가 되는 Jean du bellay 등이 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위그노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그의 누이 마르그리트로 인해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는 환영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르그리트의 딸 쟌느 달베르는 개혁운동을 지지하였고, 그녀의 아들인 나바르의 앙리는 개혁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칼빈 역시 수도원장 Guillaume Briconnet의 부름을 받아 파리로 오게 되며, 이름도 Jean Cauvin에서 Jean Calvin(라틴어로는 Ioannis Calvinus)로 바꾸게 된다. 칼빈은 1521년 브리소네의 도움으로 설교를 시작하게 된다.

인문주의적인 개혁운동은 급진적인 개혁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개혁 사상의 보급과 함께 많은 무리가 로마 천주교회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최초 루터주의자 쟝 발리에르(Jean Vallière)가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브레소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개혁주의적 친구들에게 더 이상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다. 그러나 파렐은 그런 금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주의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 후에 브리소네는 지역 공의회(synod)를 소집하여 루터의 저작들을 정죄하였고, 연옥과 성인 숭배, 마리아 숭배 등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는 사제들을 책망하였다.

하지만 브리소네는 소르본느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프랑수와 1세는 그를 투옥시킨다. 그러자 르페브르와 그의 제자들은 스트라스부르그로 도주하게 된다. 그리고 남이 있는 사람들은 1546년에 비밀리에 모(Meaux) 지역에 최초로 개혁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 박해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불행한 것은 개신교의 자유를 일부 허락한 낭트 칙령이 취소되면서 프랑스 내 모든 개신교회들은 다 파괴되었기에 건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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