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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마을목회 세미나 열려성석환 교수 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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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8  21: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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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회 총회 마을목회 세미나 열려

총회 마을목회 위원회가 주관하고 예장마을만들기 네트웍이 주최한 “2019년 마을목회계획 세미나“가 지난 11월 8일(목) 직전 총회장 최기학 목사가 시무하는 상현교회에서 있었다.
   
 
전국에서 참석한 70여명의 목회자들이 윤성종 목사(정각 별빛교회)의 인도로 1부 예배를 드렸는 데 천정명 목사(옥방교회, 총회 농어촌부 부장)가 기도하고 요3:16의 말씀을 근거로 전 총회장 최기학 목사가 “거룩한 교회 세상속으로” 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식사후 오후 1시에 사무국장 최준 목사의 사회로 장신대 성석환 교수가 “2018-9년 한국사회에서의 마을목회의 의미”로 강연을 했다(강의록 첨부) 둘째 강의는 이원돈 목사(새롬교회)가 “지역에큐메니즘에 기초한 작은 마을 공동체” 에 대하여 강연했다.
   
 
이어 선택 강의로 도시목회에 대하여 1. 이상연 목사(벽제 벧엘교회)가 “작은 교회 동아리 문화목회” 을 2. 최준 목사(행복이 가득한 교회)가 직접 운영중인 “카페교회 이야기”에 대하여 대화를 나눴다.

농촌목회에 대해서는 1. 정경옥 목사(신실한 교회, 알링힐토스 협동조합)이 “신실한 교회의 힐링알토스 협동조합” 의 경험을 2. 오필승 목사(신동리 교회, 마을목회연구소)가 “귀농귀촌 마을만들기”를 소개했다.

이어 유재무 목사(예장뉴스)의 사회로 “마을목회 활성화와 자립화 방안” 에 대하여 종합토의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전국적으로 마을목회를 하는 동역자들과의 네트웍을 강화하고 정보나누기와 지역별 모임의 활성화로 자신들이 주최로 하는 마을목회 운동성을 강화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어 대표회장 오필승 목사의 사회로 “예장마을만들기 네트웍”의 임시총회가 열렸는 데 사무국장 최준 목사가 사업보고를 하고 임원개선은  5개 권역별 대표로 1. 수도원(서울 경기북부) 송기섭 목사 1. 경기권(인천 경기 남부) 정재현 목사 3. 중부권(강원 충청) 오필승 목사 4. 영남권 윤성종 목사 5. 호남권 강성용 목사(연임)를 선임했다.
   
              * 좌로부터 새로운 임원진 사무국장:최준, 대표회장:오필승, 공동대표: 윤성종, 정재현 목시

대표회장에는 현 오필승 목사를 연임하기로 하고 사무국장에 현 사무국장인 최 준 목사를 연임하고 “마을목회지원센타장” 도 당분간 겸임하기로 하였다. 한편 상현교회에서는 중식과 석식, 간식을 공급하였다.
   
 

                  2018-9년 한국사회에서 마을목회의 의미

성석환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 문화)

103회기 총회의 주제는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히 13:12-6, 합 3:2)이다. 이는 102회기의 주제였던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를 이어받아 교회가 직면한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적 신앙의 회복과 사회적 연대를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102회기의 실천적 프로그램이었던 ‘마을목회’는 “세상 속으로” 향해 가는 교회의 역동성을 표현함으로써 기왕에 전개되고 있었던 한국사회의 ‘마을 만들기’, ‘지역공동체 운동’을 교회의 새로운 선교적 전략으로 채택하여 많은 교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구체적인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고, 총회임원의 임기가 1년임을 감안하면 ‘마을목회’의 필요성을 각 지역교회에 전달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해야 한다. 더구나 지난 1년간 우리 총회는 전례 없는 혼란과 분란을 겪은 터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새로운 선교적 표현을 ‘마을목회’라는 용어를 통해 증언할 수 있었던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102회기 ‘마을목회’ 1년 무엇을 남겼나?

지난 회기 ‘마을목회’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어떤 의미가 있었나? 매년 채택되는 주제를 목회현장에서 수용하여 실천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총회나 노회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 주제를 부각시킨다고 해도 지역교회들의 형편이 다 달라서 적합한 실천을 도모하는 일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회기 ‘마을목회’로 대변되는 “세상 속으로”으로의 도전은 비교적 명확하게 그 방향성이 제시되었고, 각 지역교회들이 이미 전개하고 있는 지역선교 프로그램을 재정비하거나 재정향하는 방식으로 실천된 탓에 의미 있는 성과들을 남겼다.

우선, 신학적으로 볼 때, “세상 속으로” 향하는 교회의 선교적 방향성을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역설적 도전으로 제시했다. 사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 선언이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더 크다. 예수는 믿으나 교회는 가지 않는다는 소위 ‘가나안 교인’의 수는 이미 200만을 헤아리고, 2015년 통계청의 ‘인구총주택조사’에 따르면 56.1%에 달하는 인구가 종교가 없다고 답했다. 젊은층에서 기독교는 미래에 선택한 종교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고 있으며, 다음 세대로 표시되는 청소년, 청년층의 교회 이탈은 점 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 ‘담임목사직 세습’을 둘러싼 논란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국면에 기름을 부어 교회의 대 사회적 이미지는 과거 그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정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이 와중에 “다시 세상 속으로”를 외쳤는데, 자칫 공허한 구호에 그칠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현주소가 암울하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졸거나 쉬고 계신 것은 아니다. 주제 위원들과 임원들은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고백을 하였고, 그 새로운 하나님의 선교의 증표로 ‘마을목회’를 주목하였다. ‘마을목회’는 기성교회들이 겪는 위기의 요소들을 극복하고, 2018년 한국사회가 요청하는 새로운 교회의 존재양식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성장주의와 물량주의 등 그 동안 한국교회의 성장동력이 되어 왔던 담론들을 교회 외부의 세상과 마을과 시민사회로 눈을 돌리는 그야말로 “세상 속으로”의 담론으로 대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선교적 교회’ 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으로 북미와 영국에서도 새로운 교회의 선교운동으로 제시되고 있는 바였다. 그래서 어쩌면 큰 장애물이었던 ‘세습논란’은 ‘마을목회’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발견하는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마을목회’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화, 지역네트워크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정책 총회, 실행 노회”라는 노선을 채택했지만 현실은 전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노회가 지역교회의 실천적 목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목회자 혹은 교회지도자들만의 관계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총회 역시 정책을 결정하고 내려 보내는 상층부만의 논의가 아니라, 노회와 지역교회의 필요와 요청을 파악하여 신학적 판단과 목회적 정보를 제공하고 상호 연결하는 네트워크 허브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정신이다.

이런 점에서 ‘마을목회’는 필연적으로 지역네트워크를 요청하는 바, ‘마을목회’를 통해서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들과 교회와 관이 함께 연결되는 경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상 속으로”는 구호이지만, 그 실천은 구체적으로 마을과 동네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중심적 사고와 기독교중심적 세계관을 넘어 공동체적이며 공존하는 다양한 주체들과의 협력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지역사회의 주인이 주민이며, 그 주인은 곧 납세자라는 점에서 교인들도 주민의 일원이라는 것과 교회가 교인들에게 지역사회의 주인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 역시 선교적 요청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사실, ‘마을목회’는 ‘마을’ 자체를 만들자는 것으로만 볼 수가 없다. 그것이 가능한 지역도 있겠으나 특히 도시적 삶을 누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을’이란 일종의 ‘메타포(은유)’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시간 열심히 살아오느라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분절되고 고립된 현대인이 서로 위하고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교회가 헌신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중심이 되자는 20세기의 ‘변혁적’ 패러다임을 넘어서 이제 교회가 지역의 일원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세상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전환이다. 그러니 지역사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노회나 지역교회가 지역사회의 관계망을 통해 발견하는 지역사회의 필요를 중심으로 관과 시민사회와 함께 협력해야 한다.

지난 회기 노회와 지역교회에서 다양한 세미나와 발표회를 진행하면서, 많은 사례들이 이러한 지역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밝혔다. 교회가 고립되어 섬처럼 존재해서는 어떤 프로그램도 교회성장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가 없고, 또 그러한 패러다임으로서는 더 이상 교회의 존재의 의미를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인식에 공감대를 이루었다. 그래서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들과 협력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는 가장 큰 자본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 속으로”의 ‘마을목회’는 한국교회가 보냄 받은 한국사회에 대한 보다 심도 높은 연구를 요청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한국교회를 향해 “세상 속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공동체이며 동시에 선교공동체이기에 반드시 “세상 가운데” 거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어쩌다가 타자를 섬겨야 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타자가 되었을까? 이를 해명하려면 한국사회의 변동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미처 대처할 시간이 없었으며, 그러다보니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던 80년대 민주화 시기의 특수했던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문화적 지도력을 상실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자본과 상품으로 무장한 대중문화의 전면적인 도전에 교회는 사실 아무런 대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문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도 보수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마치 신앙을 수호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진보와 보수의 치열한 갈등이 지속되면서도 한국사회는 세계가 일정할 만큼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2007년 IMF 사태를 겪으며 급격히 신자유주의 물결에 통합되면서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적 발전은 한국사회의 가치와 윤리의 혼란을 가져왔다. 함께 살아가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이념과 경쟁과 생존을 지향하는 이념이 혼재되어 공동체적 가치는 약화되고 돈과 권력을 향한 욕망은 커졌다. 이 국면에서 한국교회는 문화적 보수성에 근거한 정치적 보수화를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세속적 부에 대한 욕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하게 되었다. 이 비극적 결합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 고립의 본질적 원인이 된다. 생존 자체에 내몰린 이들이 볼 때,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중산층을 대변하는 종교의 이미지가 굳어져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대부분의 시민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정의, 평등, 평화 등의 담론을 펼치는 시민사회가 복음의 정체성을 수호하면서도 교회의 성장과 세속적 성공을 지향하는 한국교회가 피차 멀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세상 속으로”의 ‘마을목회’는 한국의 시민사회와 함께 하지 않으면 향후 한국교회는 사회적 타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마을’은 너와 나를 우리로 엮어 준다. 윗집 아랫집이 서로 살핀다. 주인집과 전셋집이 서로 왕래한다. 그러자면 한국사회의 경쟁구조와 물질만능주의를 복음적 가치로 극복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마을목회’는 지금 세상이 간절히 소망하는 “더 정의로운 사회”, “더 공평한 세상”을 교회가 제일 잘 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정치가 제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인식으로, 성경에서 증언하는 ‘하나님나라’를 전하는 것이 바로 오늘 한국 시민사회에서 감당해야 할 교회의 ‘마을목회’의 방향성이다. 그래서 ‘마을목회’는 사회적 경제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만들기 위한 시민사회의 논의에 교회도 참여하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증언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적이며 정의로운 삶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마을목회’를 실천하는 교회가 곧 한국사회로 파송 받았다는 선교적 소명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즉 한국사회의 다양한 의제들, 빈부격차, 청년실업, 노인빈곤 등이 모두 ‘마을목회’의 관심사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회적 고통과 어둠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에서 지역에서 동네에서 교회공동체에게 허락하신 물적, 인적 자원들을 동원하는 것이 바로 ‘마을목회’이다. 한국사회로 파송되었고, 우리 마을과 동네로 파송된 신앙공동체가 파송된 곳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면 파송된 곳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마을목회’는 이러한 선교적 고백 위에서 한국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점 역시 이번 ‘마을목회’의 전개를 통해 남겨진 중요한 인식전환의 하나였다.

민족의 동반자로 가는 영적 부흥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는 ‘영적 부흥’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과거 우리가 민족의 아픔에 함께 하며 동반자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영적인 능력’에서 찾았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능력’은 물론 육과 영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영적인 능력’이란 오히려 세상에 거하며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속으로” 향하는 교회로서 세상의 법을 극복하고 경쟁과 다툼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을 증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영적인 능력’이란 “세상 속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거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살아갈 능력을 말한다. ‘영적인 부흥’은 바로 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영적인 부흥’이 의미하는 바가 세속적인 관심사를 일절 끊어버리고 오로지 교회중심적 종교생활에 몰입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분명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며 살아갈 능력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일 것이다.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합 3:2)라고 절규하는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했다. 바벨론의 침략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패망을 바라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어 회복의 약속을 요청하는 기도였다. 즉 이는 개인의 문제를 위탁하거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를 거론함이 아니라, 민족적이며 역사적이며 공적인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을 의미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선언한 “영적 부흥”은 곧 교회의 공적 책임을 회복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03회기 총회의 주제는 그 회복의 장을 ‘도시’로 고백한다. 히브리서 저자의 증언과 같이 도시의 영문 밖으로 나가신 주님처럼, 또 다가올 새 하늘의 도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히 13:16) 기뻐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도시는 두 가지 선교적 의미로 도전한다. 우선 도시적 삶이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본축적을 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의 새로운 공간화가 필요하며 이는 곧 공동체적 삶을 복원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도시야말로 하나님의 동원하시는 선교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시는 반역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유통시키고 전파할 수 있는 가장 필요한 자원들이 충만한 곳이다. 문화적 자원과 관계망들은 교회가 참여하고 활용할 수 있는 최대의 장치들이다. 그래서 최근 카페를 통해 도서관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표현하려는 많은 사역자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전통교회들이 담당하지 못했던 새로운 선교적 표현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선교적 거점을 확보하는 일에는 ‘마을목회’의 전략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효과적이다. ‘마을목회’는 ‘영적 부흥’의 선교적 표현이며, 그것은 도시적 삶에 지친 이들에게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할 능력을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공적으로 증언하는 능력을 구비토록 하는 일이다. 더 이상 ‘영적 부흥’이라는 표현이 수적 증가나 세력 확장으로만 고려될 수 없는 시대적 요청 앞에 서 있다. 더구나 ‘민족의 동반자’가 되자면, 지금 직면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한반도의 변화는 동북아정세는 급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평화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 아마도 “민족의 동반자”라는 의미는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갈망하는 신앙적 표현일 것이라고 본다.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서 ‘민족의 동반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영적인 부흥’이 곧 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그 능력의 회복은 곧 교회의 공적인 책임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선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민족의 동반자’로서 교회는 이 한반도가 직면한 운명적인 시대정신에 어떻게 책임을 다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영적인 부흥’을 통해 교회의 공적 책임을 회복하고, 한반도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평화의 여정에 어떻게 동참하고 주도적으로 헌신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이미 사회로부터 타자취급을 받는 교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 또한 ‘영적 부흥’의 본질적 과제인 것이다.

‘마을목회’로 ‘민족의 동반자’가 되자!

우리는 이미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행사를 통해, 또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를 통해 행사는 다만 행사일 뿐이라는 점을 배웠다. 그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고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따라 결단하고 실천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동원하고 별 의미 없는 행사를 기획하여 진행하는 것으로는 오늘의 시대적 요청인 교회개혁은 고사하고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렵다. 교회의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백성의 공적 헌신의 능력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곧 이 사회의 변화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라는 확신과 고백이 우리에게 있다면, 더 이상 이러한 과시적이고 전시적인 행사에 우리의 힘과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대안은 바로 지역교회이다. 중앙에서 치러지는 행사의 비중을 줄이고, 모든 의미의 실천을 지역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역교회가 없는 총회나 노회를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선언과 총회주제 등이 지역교회의 공감과 협력이 없이 진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지역교회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력이 가능한 모델을 찾아내어 우리가 고백하는 신학이 우리의 공동체적 비전을 든든하게 지지할 수 있도록 고안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을목회’는 우리 민족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시대적 과제에 책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 수 없다. 남북화해와 협력, 세대갈등과 긴장의 완화, 보수와 진보의 갈등해소 등 모두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의제인데, 교회가 이 문제를 동일하게 정치적 수준에서 사회적 담론의 수준에서 접근하면 어느 한 편에 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교회는 화해와 협력과 배려와 공감의 자리에 서 있을 때 비로서 ‘민족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혁과 공의를 향하는 공적인 회복의 능력을 바탕으로, 화해와 협력의 능력 또한 시민사회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하다.

‘마을목회’는 교회중심적 관점을 탈피할 것을 요청한다. 우리의 관점을 세상, 도시, 마을, 동네로 돌려서 그들과 함께 고통의 자리에 서라고 요청한다. 이러한 미시적 공동체 운동이 없이 남북화해와 평화의 담론은 자칫 공허한 정치적 구호가 될 뿐이다. 한국인의 마음에 공동체와 사랑과 배려의 문화가 자리하지 못하면 통일은 오히려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윤리적 태도를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사회가 통일문제와 세대갈등과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선교적 소명이다. ‘민족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 바로 이렇게 사랑과 정의와 배려의 가치를 사람들의 삶 속에 다시 회복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마을목회’이다. ‘마을목회’를 프로그램인 이벤트처럼 인식해서, 정부의 자금을 끌어 오거나 사업을 위탁받는 일로만 보는 태도는 ‘마을목회’를 교회성장의 동력으로 여기는 구시대적 관점을 다시 답습하는 것이다. ‘마을목회’는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오늘의 한반도의 변화가 제대로 공의롭게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서,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시적이고 기초적인 자리인 동네와 마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서로 엮고 배려하는 문화를 만들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우리의 삶 가운데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동반자’가 되는 길이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는 가장 절실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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