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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과 개신교회의 역할
김인주  |  thpr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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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7  15:5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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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과 개신교회의 역할

/ 김인주 목사(독일 본 에어랑겐 대학 수학, 현 제주 봉성교회)

이 글은 총회 ‘북한선교위원회’ 가 발행하는 계간지 북한선교 30호(2019,4)수록된 내용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소개한다.

이차대전 이후 분단의 세월을 보내던 독일이 재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개신교회는 무엇을 하였나? 기여한 일이 있다면, 그 몫은 얼마 만큼이었나? 이 질문에 대하여 입장에 따라 여러 답이 나온다. 매우 지대했다고 이해하며, 통일과정을 교회 위주로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반대로, 그 영향력을 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도 만나게 된다. 마치, 기미년 독립운동에서 교회의 역할을 자리매김하는 것과도 흡사한 상황이 된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소망하는 한국교회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사례가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독일과 한국의 교회는역사와 문화가 매우 다르며, 시대적 환경과 사고방식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부각될 정도로 비교하는 것이 어렵다. 이 글에서는 희망사항을 단순하게 부풀리기 보다는, 독일개신교가 분단의 세월 동안 통일을 어떻게 준비하였는지 역사적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자 한다.

동독 지역은 종교개혁의 진원지였고, 주민들은 대다수가 개신교도들이었다. 이 때문에, 서독의 개신교는 동쪽의 그리스도인들을 보살피고 연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늘 인식하고 있었다. 한 민족 두 국가 시절에도 이들은 가능하면 서로 왕래하려 하였고, 동일한 신앙으로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 속에서 어려움을 견뎌야 했다.  우리의 분단 상황과 뚜렷이 다른 점을 지적하여 본다. 방송을 통하여 단절을 일부 해소할 수 있었다. 은퇴자들은 비교적 쉽게 왕래하였다.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거나 지도력을 향유하는 이들에게는 장벽이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분단을 넘어서 개신교 조직은 하나가 되려 하였다
이차대전이 종결되면서, 히틀러를 지지하던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은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고백교회를 중심으로 저항하던 인사들이 새로운 교회건설의 구심점이 되었다. 1934년 “바르멘 선언”을 통하여 잘못된 국가권력에 순복하기를 거부한 교회는, 1945년 10월에 “슈트트가르트 죄책고백”을 통하여 세계교회 앞에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였다. 독일감리교회(EmK) 역시 1945년 12월에 죄책고백을 채택하고, 현재 독일 국민이 겪고 있는 고통은 제3제국의 범죄에 대한 결과임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민족 앞에 역사청산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교회의 죄책고백이 독일교회가 건강하게 영적인 지도력을 회복하고 도덕성을 인정받는 토대가 되었다.

1948년 7월에는 아이제나흐에서 독일개신교교회협의회(EKD)가 출범하였다. 루터교회, 개혁교회 그리고 연합교회의 지역조직으로 25개 지역교회가 그 회원이 되었다. 19세기 초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하나로 뭉치기를 원하였던 프로이센의 정책에 따라 연합교회가 구성되었으나, 마무리되지 못하였다. 연합교회를 조직한 지역도 있으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루터교회 혹은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교회들도 있다. 이로써 교파적 성격으로 볼 때 세 종류의 교회가 아직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동독의 교회는 8개 지역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도 함께 EKD를 형성하였다.

덧붙인다면, 독일의 모든 개신교회가 EKD 조직의 일원은 아니다. 감리교회(EmK)는 자유로운 입장을 택한다. 이 보다도 더 자유롭게 작은 교회공동체로 존재하기도 한다. 교회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시민교회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백교회로 모이는 공동체들도 있다. 이 경우 고백교회란 히틀러 시대의 고백교회와 같은 뜻을 갖는다. 국가의 관리 혹은 보호를 거부하는 신앙인들이 모인 교회를 말한다. 따라서 용어로는 고백교회이지만, 그 신앙의 줄기로 볼 때에는 제3제국 시대의 고백교회와는 무관하다.

장벽이 세워진 이후에도, 서독과 동독의 교회들은 서로 교류하였고, 단일한 조직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독 당국의 압력은 나날이 거세어졌고, 1968년에 신헌법을 채택하면서 교회가 존립할 수 있는 환경이 크게 변화되었다. 1969년에는 동독의 8개 지역교회가 동독개신교연맹(BEK)이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구성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안에 있는 교회”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재통일을 성취한 이후에는, 양측의 교회가 다시 하나로 집결하게 되었다. 1991년에 동독의 8개 교회가 EKD에 재가입하였다. 이는 국가 혹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동독 5개주가 다시 독일연방공화국(BRD)에 편입하여 하나의 나라를 이룬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계산해 보면, 동독의 교회가 독자적으로 조직을 구성했던 세월은 22년에 지나지 않았다.  

평신도대회를 통하여 교회 저변에서부터 통하다
1948년과 1949년 두 개의 정부가 출범하고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그리고 서독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독일민족은 분단되었다. 하지만 장벽을 넘어 교회는 여전히 하나의 조직을 유지하였으며 평신도대회(Kirchentag)를 통하여 서로 오가며 만나고 일체감을 확인하였다. 우리들에게 흔히 교회의 날로 알려진 이 모임은, 신앙인들이 함께 장벽 없이 회집하는 행사가 된다. 이와 대조되는 조직은 NCC에 해당되는 Kirchenrat이다. 연방참의원(Bundesrat)의 회원은 각 주정부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이다. 이에 비해 연방하원(Bundestag)이 우리의 국회에 해당되는데, 여기는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의 성격을 갖는다. 모두 일시에 모일 수 없으니 대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현실이긴 하다.

이러한 움직임은 천주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주교에서도 평신도대회(Katholikentag)가 생겨났다. 혼선을 피하기 위하여 양측이 격년으로 엇갈리게 모이고 있다. 6월 하순에 해마다 찾아오는 이 절기는, 강당을 숙소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학교는 방학을 하든지 혹은 참여하는 학생들의 활동을 수업의 연장으로 인정하고 배려한다.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평신도대회의 전통은, 이차대전 이후 냉전으로 대립이 드러나고 분단이 고착화되던 과정에서도, 서독과 동독 지역을 아우르며 번갈아가며 개최하였다. 함부르크(1954), 라이프찌히(1954), 동·서 베를린(Gesamt-Berlin, 1951) 그리고 베를린장벽 건설 직전 서베를린(1961) 행사까지 양 지역의 교회가 연합하여 평신도대회를 개최하였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고 양교회의 교류가 현실적으로 봉쇄된 이후에는 연합집회도 교류도 불가능해졌다.

평신도대회이지만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모임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기구는 상설화되어, 카셀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운영한다. 이들의 계획에 따라 교회뿐 만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대표들이 함께 의견을 내고 토론하는 장으로 활용한다. 정치 지도자들도 함께 어울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교회가 직면한 현안들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개진되고, 대중의 반응을 살피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이차대전 직후 어려웠던 시절에는, 많은 숫자가 모이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임이었다. 경제부흥을 통하여 안정을 추구하고, 휴양과 유흥이 사회저변을 지배하면서 교회의 예배참여율도 낮아졌다.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하는 대형집회로서 평신도대회가 움직이는 것도 현실이다.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 분단의 어려운 현실이 종종 평신도대회의 주제가 되곤 하였다. 남한과 북한의 교회대표들을 동시에 초청하여 만남과 대화를 주선하였던 것도 고마운 일이다.

교회의 재정을 끝없이 지원하다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치르고 패망하면서, 독일은 붕괴의 현실을 겪어야 했고, 국가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차대전 이후에 교회의 재정은 국가의 세금과 재정지출의 틀 안에서 유지되게 된다. 이른바 교회세의 등장이다. 양극화에 대응하는 재분배의 원리를 고수하면서 독일 시민들의 담세율은 소득에 따라 매우 차이가 크며, 지나치다고 할 정도의 누진세를 적용한다. 평균하면, 소득의 25%를 세금과 공과금 혹은 보험료로 지출해야 하는데, 이 중에서 8% 정도가 교회에 봉헌하는 헌금으로 계산된다. 수입의 2%가 교회 수입이 되므로 한국교회의 십일조에 비하면 적어 보인다. 하지만, 모든 신도들이 골고루 재정부담의 짐을 나누게 되는 것이 장점이다.

동독은 이러한 방법을 거부하고, 각 교회가 재정을 스스로 감당하는 종래의 방법으로 유지되도록 하였다. 신자들은 열악한 경제 환경에서 힘껏 감당하려 하였지만, 전제 재정규모의 40% 정도에 그쳤다. 40%는 서독교회가 지원하는 것으로 꾸려나갔다. 20%는 동독정부의 교부금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졌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역시 서독교회의 지원으로, 전달되는 통로를 달리했을 뿐이었다.

국가의 차원에서는 동독에 구금된 저항인사들 혹은 스파이로 지목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지불하였다. 서독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고속도로에서는 함정단속으로 시민들이 터무니없는 과속 범칙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 돈이 누구에게 들어가고 어떻게 사용되는 지 묻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넓은 생각으로 도와주었다. 우리 표현대로라면,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처럼 보이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였다. 무한대의 퍼주기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서독에서는 집집마다 동쪽으로 보내는 선물상자를 만들어 보내었다. 연고자가 없어도, 주소도 없이 누군가에게 전달될 물품들을 보내는 일이 범국민적으로 벌여졌다. 그러면서도, 생색을 내는 일이 아니었고, 상대방 동포들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학술교류로 협력하고 양보하다
독일 신학자들의 연구와 교류를 견인하는 매월 발행되는 정기간행물로 신착신학도서정보(ThLZ)가 있다. 다른 나라에서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신학비평지이다. 최근에 출판된 저작들의 서평을 모아놓은 것인데, 저자와 대등한 학문적 능력을 갖춘 평자가 객관적으로 그리고 꼼꼼하게 잘잘못을 지적하는 글들이다.

올해로 144년째 간행되는 전통을 자랑하는데, 이 잡지는 라이프찌히에서 발간된다. 어려웠던 분단시대에도, 지속적으로 라이프찌히가 그 중심에 섰다. 혹 서독에서 이를 승계하거나 대체하여 새로운 제호로 출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러한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지질이 나쁘고, 활자가 낡은 것이 보기 싫기도 하였을 텐데, 무던히 견뎌냈다. 인적 혹은 학문적 교류가 원활하지 못하여서 좋은 필진을 내세우기가 어렵더라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통일 이후에는 개선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신학분야의 도서들은 다수가 서독과 동독에서 동시에 발간되었다. 간혹 검열로 말미암아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종이와 인쇄술에서 뒤진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러한 협력과 교류가 지속되었다. 독일교회 특히 루터교회의 입장에서 동독은 개혁의 진원지였다.

반전 평화운동으로 연대하다
냉전시대에 핵무장으로 결국 누구를 겨냥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개신교회는 보다 심각하게 제기하였다. 전쟁이 혹은 폭격이 일어나면 피해자는 바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라는 생각에서 핵무장을 반대하거나, 군목제도를 통하여 교회와 국가가 군사적인 면에서 결합하는 것에 저항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어, 양독의 관계가 급속도로 경직되고 있을 때, EKD는 튀빙겐 각서(1961)라는 독일민족의 통일을 예비한 교회의 예언자 정신이 담긴 역사적인 문서를 발표하였다. 독일정부를 향해 냉전기 동서 진영 간의 평화정책,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동유럽 인접국과의 화해를 촉구하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독일 개신교회의 정책 제안서로, 핵무장에 의한 군비증강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웃을 점령하고 확장했던 시대의 영토를 영구히 포기하자고 호소하였다. 팽창정책을 쓰던 시대에 슐레지엔이라는 폴란드의 큰 부분을 점령하였기에, 이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제 이를 포기하고, 이차대전 패전 직후 전승국들이 그어놓은 국경선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를 독일에서는 오데르, 나이세 두 강을 경계로 삼는다고 표현한다(Oder-Neiße-Grenze).

이 선언문이 발표되자, 서독사회 내부에서 이 선언문에 대한 극렬한 반대여론이 일었다. 이념논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하지만 정부에 제출된 이 문서는 10년간 연구, 검토된 후 1969년에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도 경계선을 지키겠다고 먼저 선언하여, 통일의 기회를 현실로 만들었다.

   
 

역사적 책임에 응답하다
전후 아데나워는 새로운 정당으로 기독교민주동맹(CDU)을 조직하고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보통 기민당이라 부르는 보수적인 입장의 우파 정당이다. 어쩌면 히틀러시대에 보통 나찌로 알려진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의 지지층이 바로 변신하였다고 해도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사 청산이라는 여과지를 통과하였기에 새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청산은 철저했을까?

사회민주당(SPD)은 20세기 초에 발족한 최대 정당이며, 구성원으로 볼 때,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전통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집권 계획을 실현하였다. 교회의 측면에서 본다면, 사민당은 개신교 지역에서, 기민당은 천주교 지역에서 기반이 더 튼튼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에 따라 지지정당이나 정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득표전략은 더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역사가논쟁이 벌어졌다. 그 시발점은 제3제국시대의 죄과를 후세대가 져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현대사, 사회학, 정치학 등 관련분야의 학자들이 나서서 주장을 펴고 논전을 벌였다. 독일에서는 대학교수는 물론 고교 교사들도 정당활동이 보장되고 많이 참여한다.

죄과에 대한 책임은 수평적일뿐만 아니라 수직적이라는 것이 사민당의 입장이었다. 선조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면 다시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염려를 내세웠다. 기민당은 세대를 뛰어넘는 책임추궁은 가당치 않으며, 전후세대들의 도덕적 짐을 벗겨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학자들의 논쟁이었지만, 실제 두 거대정당의 세계와 역사에 대한 입장이 부딪힌 것이다.

이를 정리한 것이 바이체커 대통령의 종전 40주년 기념식 연설이었다. 그는 개신교도로서 평신도대회 중앙위원이었고, 베를린 시장 출신이었다. 그리고 기민당 소속이었다. 물론 대통령 선출과 더불어 당적은 무의미하게 되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종전이 독일의 몰락이 아니고 해방이었다고 정의하면서, 그는 역사가논쟁에서 중도 입장의 해법을 제시하였다. 후세대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나, 도적적으로 이를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쟁을 종결지었다. 이러한 입장의 정리,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통일의 전초작업으로 의미가 있었다.

사회주의 속의 교회는 어떻게 존속하였나?
분단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서독을 향하였다. 동시에, 지식인 혹은 예술가로서 사회주의 동독을 일부러 택한 이들도 있었다. 한반도 분단과정에서 일어났던 선택과 이동이나 비슷한 양상이었다. 사회주의가 이상국가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지만, 어렵기에 그쪽을 택한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함부르크의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도 그 중 하나였다.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고향을 찾아 동독으로 향하였다.

감시받는 사회에서 활동이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의 공간이었고, 목사관은 토론의 공간이 되었다. 사회에서는 불이익을 받아, 신앙인 혹은 그 자녀들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자유롭게 직업을 택할 수 없었다. 많은 자녀들이 불가피하게 교회를 떠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도 그의 딸 앙겔라는 통일 과정에서 적응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총리가 되었다.

요아힘 가우크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저항의 뜻을 품고 자라났다. 결국 그가 택할 수 있는 진로는 신학교 뿐이었다. 변혁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몫을 감당한 그에게, 동독시절의 국가안전부(슈타지)의 문서를 정리하는 책임이 주어졌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감당하였고, 2012-2017년에 대통령 직에 오르게 되었다.

나찌 시대보다 더 광범위한 정보활동으로 인민을 감시했던 동독정권은 막대한 슈타지문서를 양산하였다. 대부분 동독의 지도자들의 언행은 늘 보고의 대상이었으며, 한 편으로는 정보기관의 협조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통일이 되자, 동독의 지도자들로 부상한 인물들이 대부분 슈타지 문서의 장애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카스너 목사도 문서상으로 협조한 인물로 드러났다. 그러나 또한, 과장 혹은 허위 보고의 가능성도 늘 잠재하기에, 판단은 쉽지 않았다. 브란덴부르크 주지사가 된 만프레드 슈톨페의 경우도 결론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법률가로서 동독교회의 실무책임자로 활동하였는데, 슈타지 문서에서는 그 역시 협력자였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동독정부의 협조 혹은 지원이 필요했다는 것도 현실이었다. 슈톨페는 특이하게도, 거듭 드러나는 문서에도 불구하고 버텼고,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폭력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장벽을 무너뜨리다
철의 장막 시기에 서독과 동독의 교회는 하나 됨을 추구하였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미4:1-4)라는 기치로 1981년부터 양 교회에서 매년 11월에 열흘간 집중적으로 전개된 평화기원운동(Friedensdekade)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도 평화기도회(Friedensgebet)에서 발전하였다.

1989년 가을 동독지역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이 비폭력 평화혁명으로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대에도 양 교회의 지속적인 평화운동에서 축적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종전 후부터 통일을 이룬 1990년까지 양 체제하의 독일민족에게 끊임없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교회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제시한 교회의 역할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촛불을 들고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것을 활용할 가능성을 포기하는 선택이었다. 기성세대에 반항하며 새로운 좌파운동으로 일어났던 1968년 시위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였다. 보도블럭, 각목과 화염병으로 격렬하게 의사표시하는 장면은 우리 역사의 민주화운동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촛불시위에서는 국면이 달라졌다.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평화로운 행진이 되었던 것이다.

1989년 가을, 라이프찌히 성 니콜라이교회를 중심으로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가 퍼져나갔다. 온갖 것을 인민에게 약속하며,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된 동독의 헌법을 토대로, 질문하는 것이었다. 촛불혁명에서 “이게 나라냐?”라는 근원적인 질문과도 통하는 선언이었다.  이 흐름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로 구호가 바뀌어, 통일에 대한 요구로 전환되었다. 사태는 수습할 수 없이 급속히 진전되었고 11월 9일 동독정권은 손을 들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서독의 지식인들, 그리고 동독의 혁명의 과정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동시에 바랐던 희망이 있었다. 동독 시대를 철저히 악마화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사회주의가 이룩한 성과 중에서 보존하거나 발전시킬 만한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거대한 흐름 속에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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