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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 덕산교회 111년 역사와 놋종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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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3  1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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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금 덕산교회 111년 역사와 놋종  
   
 
비금도 덕산교회는 금년에 111년을 맞는 교회다. 목포노회 신안시찰 소속으로 1907년에 목포선교부의 맹현리(멕콜리)선교사가 해남, 진도, 강진,완도, 장흥에서 사역하던중 비금 출신 강낙언을 만나 그를 조사로 채용하는 데서 시작이 된다.

강낙언은 맹현리 선교사를 10시가이 걸려  배로 비금도로 안내하여 첫 예배를 드린 것에서 비금. 도초에서의 첫 제단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신안군에는 많은 섬들이 있었지만 비금 덕산교회가 가장 먼져 복음의 터전을 내린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보여진다.
   
 
비금교회의 시작

이렇게 시작된 덕산교회는 망동에서 시작하여 매립으로 현 위치(비금면 비금 북부길 31, 전화 275-7304)로 이전 하기 까지 초기에는 아동교육을 위한 망동학원(초등학교)을 운영했다.  당시 문맹을 퇴치에 전념하고 지역 문화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사와 신앙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성탄절이 되면 연극, 합창, 율동, 암송과 같은 교회학교의 발표회는 학예회의 전신이요 요즘으로 하면 마을의 큰 축제였다. 섬마을에서 들려지는 성탄의 캐롤송은 한밤중에 천사들의 합창이었고 주민들에게 영혼의 잠을 깨우는 소리로 이 복음의 소리를 듣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비금도에서 배출되었다. 
   
 
더욱이 새벽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당시 시계가 없던 마을에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천상이 소리였고 희망의 종소리였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교회도 일제압박으로 인한 신앙의 위기를 지나면서 독립과 민족교육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교인들이 이주도 빈번했다.   
   
 
해방후 신안군 지금까지 덕산교회는 인근 마을에 14개의 교회들을 분가하고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덕산교회 출신으로는 가장 유명한 이는 김수진 목사(교회사학자)로  지난 2008년 덕산교회 100년을 맞이하면서(예수님께서 오신 아름다운 섬-비금 기독교 100년사)을 낸 바 있다.

그리고 한일장신대 전신에서부터 학장과 총장을 역임한 강택현 목사도 덕산교회가 배출한 큰 지도자다. 이외에도 덕산교회에서 분가한 이웃 도초에서는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가 나왔다.
   
 
아름다운 섬 비금도 

비금도(飛禽島)이름은 날아가는 새를 상징하는 데 천혜의 기름진 땅으로  해산물과 농산물등 부족한 것이 없는 섬이었다. 오지였으나 천성이 부지런한 주민들의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가난을 극복했다. 이제는 명사십리 해수욕장과 하트 해수욕장(해안이 하트모양)과 바닷가를 낀  자전거 도로등으로 유명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목포 북항에서 배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지금은  압해대교와 천사대교가 완공되여 목포서 차로 와서 암태 남강에서 차를 배에 실고 30분이면 가산항에 도착을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외로운 섬이 아닌 곳으로 많은 외지인들의 방문이 줄을 잇고 있다.

과거는 농사와 염전이 주산물이었으나 최근에는 겨울 시금치가 일품으로 주민들의 큰 소득으로 잡았다. 1004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여 천사의 섬으로 불리우는 데 신안군은 천혜의 자원으로 세계에 유일한 해상공원을 꿈꾸고 있다.  이외에도 암태도는 소작쟁의로 안좌는 김환기 화백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또 세계 바둑계의 천재  이세돌 기사(알파고와 대결)도 비금도 출신이다.   
   
                        * 1968년 12월 성탄 음악제를 조천기 전도사가 지도하였다.
덕산교회의 일제하 역사와 기록은 부실하지만 해방후 첫 목회자로는 도상욱 목사(1914-2007)이 시무하면서 기틀을 잡았다. 그러나 1946년 영광읍교회로 이임을 한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인민위원회등으로 온 섬이 원치 않는 고초를 겪는 다.

9대 김영욱 목사는 1952-1953간 시무하다가 1955년 해남 황산교회로 이임한다. 이후 윤희석 목사가 25평의 기와교회당을 건축한다 그후 미국으로 이민목회를 떠난다. 그리고 안수받지 않은 전도사들의 시무도 이어졌다.
   
                                        * 윤희석 목사의 미국 송별예배후 기념사진

역대 교역자 및 장로 임직자

1920년 김성규 초대 장로 임직, 1927년 김금환 장로 임직, 1928년 정인배 전도사 부임, 1938년 김인환, 유정동 장로 임직, 1944년 김영욱 장로 임직, 1946년 노금섭 장로 임직, 1947년 도상욱 목사 부임, 1952년 김영국 목사부임,  1967년 강명채, 김영희 장로 임직, 1968년 조천기 전도사 부임, 1971년 이길수 전도사 부임, 1972년 김피즉 장로 임직, 1975년 김일동,강영석 장로 임직, 1977년 주춘옥 전도사 재부임,1975년 김갑수 전도사 부임, 1980년 이옥재 전도사 부임, 1982년 김종문 전도사 부임, 1984년 김종남, 김일출,강기원 장로 임직, 1985년 박정규 목사 부임, 1988년 차양수 목사 부임, 1991년 장경호 목사 부임, 1997년 주신웅 목사 부임, 2004년 강병고 목사 부임, 2007년 유성광 김남출 장로 임직,

비금교회로부터 분가된 신안군내 교회는 다음과 같은 데 비금 서부교회, 제일교회, 보고교회,당산교회,서산교회, 영광교회, 동부교회,송치교회, 신안교회,신안일교회, 비금중앙교회, 갈보리교회, 가산교회, 비금실로암기도원등 14개 이다.  이외 증도는 CCC의 김준곤 목사와 문준경 전도사의 출생지로도 유명하고 우리교단 100회기 총회장을 지낸 채영남 목사도 신안군 출신이시다.

덕산교회의 전설은 신안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것 외에도 이 교회의 종에 있다. 이 종은 지금도 현존하는 데 오랫동안 방치된 것을 2016년 부임한 황규석 목사가 이 종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종탑을 세워 보존하게 된다.
   
 
현재 황규석 목사와 원로: 강기원, 노용무, 은퇴: 유남출, 시무: 김성관 장로가 있다. 출석교인은 약 100여명으로 오랜 역사 답게 지역의 복음화와 지역사회에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황 목사는 영주교회 출신으로 남미 선교사와 충청도와 경기도 고양시, 강원도등에서 목회를 하다가 이제 마지막 시무지로 알고 충성하고 있다.  
   
                                            * 22대 황규석 목사 위임식과 임직식
비금 덕산 교회 놋종

 놋종으로 유명한 덕산교회의 이 종의 헌납역사는 이렇다. 덕산교회의 설립자 맹현리 교사는 김경운 조사의 후임으로 김봉현 조사를 임명하였는 데 그는 당시 비금교회 4대 교역자가 된다. 조사 제도란 정식 신학교육이 시작되기 이전에 평신도중에서 기도와 교수능력이 있는 이들을 선발하여 작은 교회들을 시무케 한 제도이다.  이들은 목표의 선교부에서 달(月)성경학교를 이수케 하고 노회가 임명하는 준 교역자였다.

김봉현 조사의 동생 김봉신은 당시 목포 양동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크게 감동을 받아서 고향교회에도 자신이 종을 헌납하리라 작정하고 3년간 점심을 금식하여 모은 양식을 팔아 당시 평양에서만 주조가 되는 놋쇠종을 1910년에 주문한다.  그리고 이 종을 성종(聖鐘)으로 불리우는 당시 어촌교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 종에는 관서로종이라고 한글로 써있는 데 전문가들은 평양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 많은 종이 있지만 이남에서 이북의 평양으로 종을 주문한 것이 특이하다고 한다.

당대 교회 종들은 주로 철로 제작되었는 데 어촌의 교회가 거금을 드려서 놋종을 주문한 것은 보통 신심이 아니다.  이것 하나만 봐도 덕산교회 교인들의 신앙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 여유로 인하여 교단 총회의 역사위원회는 이 종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실사하기 위하여 8월 11일(화)에 방문한다. 그러나 종에 대한 주문서나 제작회사 혹은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구전과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종을 제작한 후  비금교회에서는 매일 새벽과 주일낮과 저녁,  수요일에 온 동네에 시계역활을 하였다.   종소리는 상암, 논골은 물론 죽립리, 망동, 서산부락까지 펴져 이곳의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이 종소리듣 듣고 성장한 김수진 목사는 광나루문학 제11집(2003.9.10.)이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한 바 있다.

김수진 목사는 덕산교회 출신 목사중 한분으로 장신대와 단국대를 졸업하고 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과 동지사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미국 훌러와 코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 대광교회 목사와 한영신학대학 교수, 서울성서신학원 원감과 한일장신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비금덕산교회 종소리

들녘을 가로 지르면서 조그만 한 재
하나만 넘으면
이느덧 교회 종소리는
초종을 알리고 있었다.

그 초종소리에 발걸음을 재촉하여
교회 문턱에 들어서면 재종소리는 뒷상 봉우리에
메아리 울려 더 크게 울려오고 있었다.

교회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친정집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포근할 수 가 없었다.

늦으면 앞자리를 빼앗길 텐데
종소리를 듣고
열심히 모여 들었던 비금도 섬사람들
그 종소리가 해방의 종소리로 들릴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알리려 나 했던
비금 덕산교회 종도
어느 긴 칼을 차고 온 일본 순사의 손에 내려지는 순간
교회 종소리는 끝내 멈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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