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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전경련 점거농성 25주기를 맞이하여민중교회 목회자 연합의 태동으로 이어져
유재무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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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9.01  20: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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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전경련 점거농성 25주기를 맞이하며

이 사건을 통하여 "한국민중교회 목회자 연합" 태동이 이뤄졌다. 그리고 각 교단이나 개인적으로 민중현장에서 사역을 해온 모든 동역자들을 모시고  9월 17일(월) 오후 6시 충정로 기사련에서 예배와 친교를 나눕니다.  사회: 윤인중 목사 설교: 조화순 목사

   
                     경찰에 연행되여 나오는 안경쓴이 이춘섭 목사와 이원돈 목사

시대적인 상황
 1987년은 한국정치사에 있어서나 노동운동사나 민중교회들에게도 의미있는 한해였다. 그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위를 군사정권은 잠재울 수가 없었다. 당시 모든 요구는 오직 “호헌철폐(당시 간선제의 헌법을 페지하고) 직선개헌”(직선제로 개헌) 이였있다. 그것은 1980년 5.17, 12.12로 정권를 찬탈하고 장악한 일부 경상도 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중심이된 민정당 정권의 종말을 보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요구였다. 

 78년 10월 유신체제로 장기집권을 노리는 박정희는 그의 심복 중정부장 김재규로 부터 술자리에서 총탄을 맞는 다. 그리고 전두환은 보안 사령관으로 죽음과 관련된 조사를 하다가 마침 국가원수도 없는 틈을 타 정권에 욕심을 갖은 합동수사본부장과 안기부장을 겸직하며 그의 고향 친구들과 육사에서 하나회로 구성된 소위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대통령의 재가 없이는 체포할수 없는 참모총장을 사전 허락없이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살상을 하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그후 군복을 벗고 통치를 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사필귀정이라 결국은 전직 대통령 둘은 예우를 박탈 당했으며 반란죄로 감옥까지 갔다가 왔다. 

박정희는 그래도 민간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성한 국민의 군대로 하여금 광주에서 총을 쏘았다. 그런 전두환 정부는 정권의 정통성를 부정하는 민주화운동의 저항과 도전으로 집권 5년 내내 시달리다가 임기 말이 되자 불안한 나머지 자신들의 안전과 민정당의 생존을 담보할 후계자로 육사 동기 노태우에게 정권을 이양하기 위하여 현행법(간선) 대로 선거를 하겠다는 것이 였다.

그러나 군대가 우위인 민정당 정부의 종식을 원하는 사회전반의 열화와 같은 욕구는 그 누구도 잠재우지 못했다. 소위 넥타이 부대까지 참가한 시위와 최초의 시민운동 연합 기구인 ”민주쟁위 국민운동본부“의 동시다발 자동차 경적시위는 통일성과 일체감을 형성하여 민주화의 열기로 이어졌다.

보수적인 예장까지 가세한 반 정부 집회는 처음
당시 예장 통합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활동하던 pck 총회 인권위(조남기 목사 금영균 목사) 예목협(이정학 목사 차관영 목사) 은  6월 19일 새문안교회에서 전국의 목회자와 신도들과 시국기도회를 했다.  교회를 빌려준 새문안도 대단하지만 모인 사람들도 만만찮았다. 약 2천여면이 회집하고 집회를 마친 목회자와 신도들은 밖으로 밀려 나온 다.

행사 책임자인 인명진 목사는 불상사를 대비하여 막았지만 시위대는 밖으로 나갔다. 마침 준비하고 있던 진압경찰은 최류탄을 쏘며 강경진압을 하게 되자 다시 교회로 들어가 밤샘농성을 하고 아침에 기도회를 하고 해산하였다. 그날 장00 여전도사(당진교회) 와 잡혀간 청년 학생들은 후일 석방이 되었다.

 사실 예장 통합 교단이 그것도 광화문 한복판에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이런 집회를 했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것도 당시 교계의 중진 일반 목회자(전 총회장 유의웅 목사) 까지 참여한 집회였다. 그 만큼 당시 정권에 대한 반대의 정도가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로 부터 몇일후 간선으로 대통령의 꿈을 꾸는 노태우는 소위 6. 29 선언을 한다. 그 골자는 직선제를 받아드린 다는 것이며 모든 시민운동의 승리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정당 활동도 하게 되였지만 직선제는 결국 양김의 분열을 가져왔고 교회 마져도 갈라져 기독교운동의 순수성과 에너지는 분산되엿고 주체적인 입장없이 기독교 내부의 상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권은 가져오지 못했다. 

사회전반의 욕구분출로 인한 노조 조직율 급증
그러나 87년 그해 여름의 혼란과 불안은 정치권만의 문제는 아니였다. 폭력적인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눌려있던 민중들의 분노와 한 맺혔던 민중들의 분노를 폭팔하기 시작했다. 이미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학생 시민운동은 기폭제가 되여 연일 시위를 하였다. 이에 저항하는 많은 양심세력과 젊은 학생들이 잡혀가서 무차별 폭력과 고문으로 감옥에 가거나 강제징집되였다.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들이 분출되였다. 모든 민간 부분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극심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민주화를 염원했던 노동현장에서 가장 활발한 노조의 조직화를 이룬다. 그 이전에 여성과 소규모 중소 기업의 조합운동에서 대기업과 남성 기간산업중심으로 조합들이 조직되고 노동운동은 그 양상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부나 경찰력 그리고 언론은 신군부의 눈치를 보거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정당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막고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탄압하자 노동자들도 억눌린 감정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불상사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당한 노동운동를 폭도만들기
그러나 기업과 언론들은 일부 현장에서의 불상사와 문제들을 대서특필하게 하고 폭력선동과 안보문제를 걸어서 모처럼의 기회를 무산시켜려는 시도들을 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경련이 적극 나서서 사측을 옹호하고 노동자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오직 자기 정치의 공간확보만을 위하여 투쟁했던 정당들은 이 문제는 관심밖이였다. 학생들도 학내문제로 바뻤다. 모두가 나서지 못할때 그때 우리 민중교회의 목회자들이 결단을 해야 할 시간이였다. 그리고 그러한 부름에 우리는 지체하지 않았다.

 과거의 NCCK를 중심으로 한 재야 기독교 운동은 주로 집회를 열어서 공간을 확보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투쟁을 하기 보다는 구속학생들의 뒷바라지나 변호사 선임, 영치금 차임, 소식알리기가 전부였다. 산업선교 세력들도 극심한 탄압을 받은 후라 실무진도 노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민중교회를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같은 용사들을 예비해놓으셨다. 각 교단에는 진보적인 사고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여서 오갈 길이 없자 신학교로 대거 입학을 하게 된다. 이제 운동은 장기전이며 밥을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 안정된 교회로 들어가서 목회자가 되여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을 해야 겠다는 결단들이 있었다. 교단을 뛰여넘어 일어난 현상이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악이 판치는 시대에 평범한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한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같은 학생운동 출신 친구들이 이미 공장과 농촌으로 현장으로 이전하고 민중과의 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회자에 대한 사회적 합법성을 획득하고 지역에 들어가 공단이나 빈민들의 거주지에 작은 교회를 얻고 민중들을 만나고 교육하는 의식화 사업을 시작한 것이였다.

 민중교회 설립에 대한 초기역사
이러한 민중교회의 설립은 예장이나 기장 감리교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다만 예장의 경우가 좀 달랐는데 영등포산업선교회라는 전통적인 산업선교기관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의 노동자선교가 어렵다고 판단한 조지송 목사와 인명진 목사(당시 총무)가 1983년부 터 신학생들을 모아서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영등포의 성문밖교회와 성수 삼일교회(제3 일)를 시작으로 안양의 버린돌 교회(한무리) 대구의 달구벌교회 대전의 빈들교회였다. 

기독교장로회는 이미 성남의 주민교회나 향린교회등이 있었고 민중교회의 정신을 갖은 교회들이 구로동의 신명교회나 사랑교회, 안산등지에서 생겨나기 시작되였다. 감리교회도 부평의 백마교회나 사당동의 광야교회 구로동의 한울교회등이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였다. 동기는 개신교의 특성상 개척교회는 목회자의 의도로 목회할 수 있으니 노동자들이나 도시 빈민들을 중심으로 한 민중공동체를 한다는 생각이였다. 

전경련 점거을 하게 된 원인
당시 1987년 9월 5일 정부는 비상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제안한 보고서를 통해 노동자들의 쟁의를 ‘비윤리적, 패륜적’ 행위로 매도하고 노동자들의 폭력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여론몰이를 전개했다. 당시 이러한 보도와 회의 내용 그리고 정부의 정책이 노사관계를 더 악화시킬 것이며 그 본질을 왜곡시켜서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였다.

 그래서 이제 개척한지도 얼마안되고 교회와 지역의 기반도 취약하고 자생성도 약한 교회들이 였지만 수도권의 민중교회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정당한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인 왜곡보도로 재갈물리려는 일을 묵과 할 수가 없었다. 정부와 전경련의 이러한 흐름을 강력하게 제어할 방안들을 논의 하시 시작하였다.

 그래서 우선은 NCCK 의 인권위에 모여 민중교회 목회자와 실무자들 30여명이 항의 단식 농성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업가들의 총본산 전경련을 점거하자는 논의를 하게 되었고 9월 19일(토)을 기해 젊은 교역자 23여명은 당시 목협의장이셧던 장성용목사와 조화순 목사를 대동하고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 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단식 농성 중 사전 답사와 도상 훈련 
전경련을 기야 한다는 말은 농성 이틀째에 나왔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전경련에 가서 회장을 면담하는 것으로 하고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자는 결정을 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시국관을 비판하고 정당한 노동운동을 보장하는 것이 기업이나 노동자나 건전하게 발전 할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을 전달하자는 형식으로 일치를 보았다. 그래서 몇 명은 여의도 전경련회관을 사전 답사하엿고 시행연습도 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와 정당한 쟁의행위가 왜곡되는 현상을 세상에 똑바로 알리기 위해서 우리들은 행동을 하기로 했다. 평소 정장을 입지 않았지만 모두 정장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지정된 장소에 모였다. 사실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은 있었지만 당당하고 의연하게 하나 둘 전경련 회관 근처를 모였고 약속시각에 2층 정문 수위에게 말을 걸어서 주위를 돌리는 순간에 전경련 회장실로 몰려들어 갔다.

 정경련 점거를 통하여 일어난 상과들
이춘섭 목사는 후일 모 언론에 쓴 글에서 “정장차림의 우리들은 일시에 회장실을 열고 들어가, 회장단 원탁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당황한 직원들은 "나가라"고 소리치다가 세 불리를 알아차리고 즉각 영등포경찰서에 연락을 하고, 또한 직원들을 불러댔다. 삽시간에 회장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어" 우리들은 차분히 둘러앉아 즉석 집회를 하면서, 우리가 전경련 회장실에 찾아온 이유를 주장하며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조화순, 장성룡 목사님의 감동적인 연설과 찬송으로 드린 그날의 집회는 지금도 가슴 벅찬 기억으로 남아있다" 고 적고 있다. 

말이 회장단 면담이지 사실은 점거 농성이였다. 회장이 우리를 순순히 만나 줄리가 없었다. 그들은 정중히 퇴장을 원했지만 우리는 끌려나갈지언정 제발로 나갈수는 없었다. 서너 시간이 지났을까, 사복경찰들이 대거 진입하여 농성 중인 목회자들을 모두 영등포경찰서로 연행하면서 상황은 일단 끝났다“ 그리고 다음날 주일예배를 끝난 교회들과 참여하지 못한 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댜거 영등포경찰서 마당으로 모여 들었다. 시위대로 변한 경찰과 대처허였고 경찰들이 격리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던 다수가 폭행을 당했고 심지여 갈릴리교회 인명진 목사는 머리까지 잡아당기도 폭행을 당했으며 전부 버스에 태워 난지도 근방에다가 내려놓았다고 한다.

언론도 신이 나서 보도한 사건
당시 신문도 평소 보도거리가 없어서인지 속시원하다는 듯이 연일 대서특필을 하였다. 교단과 교회는 발칵 뒤짚혔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도 우리는 일체 함구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계 관계, 배후세력을 놓고 밤샘조사를 하는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으니, 이름 석자만 적어놓고 밤새 조사관과 씨름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다시 가장 연장자인 조화순 목사, 장성룡 목사(강동, 정의평화실천목회자협의회 의장)와 이근복 목사(영등포산산업선교회 총무), 이광호 목사(안산), 이춘섭 목사(성수산선 총무) 등 다섯 명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다음날 풀려나왔다. 

남은 사람들은 목협의장단과 산업선교회 실무들이며 다른 사람은 수위를 폭행했다는 지목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다섯 명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삼개월 정도만 수감되었다가 대통령선거(12월 16일)가 끝나던 시기에 재판을 받지 않고, 구속정지로 석방되었다.

 한민연의 탄생은 시대적 사명
이와 같이 전경련 점거농성사건은 사실 민중교회와 민중목회자들이 그런 일을 할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때였다. 설립초기로 교인들도 정착이 되지 않았고 내적인 힘이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 변혁을 위하여 성장되고 서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여한 것이였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사회참여 였고 발언이였다. 말로만 하는 빛과 소금의 사명이 아니라 아무도 말하지 못할때 그리고 침묵할때 우리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작은 몸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진정한 기독자들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의 실현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한 일치와 연대를 기초로 그동안 흩허져서 활동하던 각 교단간의 민중교회에 복무자들이 사회적 약자를 돕고 대처하기 위하여는 더욱 힘을 공고히 하고 큰 세력으로 규합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있어서 다음해인 1988년에 각 교단의 젊은 목회자들로 구성된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을 결성하게 된다. 당시의 민중교회는 지역의 노동조합, 민중운동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하면서 지역센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지역과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사명들을 회피하지 않고 감당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많은 민중교회들은 지역의 요구와 목회자들의 교체 그리고 달라진 환경으로 인하여 지역교회로 전환 되거나 새로운 사역들을 찾아서 당시에 갖았던 의미들은 변화되였다. 지역사회 공부방, 노숙자, 다문화  생명목회, 주민과 마을 만들기등으로 분화되거나 변화되여 달라진 시대적 소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전반에 걸쳐서 많은 민주화가 이뤄지고 사실 노동운동도 이제는 강한 힘을 갖게 된것도 사실이다. 

 민주정부 10년과 MB정부 5년의 평가
올 말 대선은 지난 5년간의 무능과 양극화로 이 나라를 근심에 빠트린 사람들을 심판하는 해이다. 그리고 고 김근태 선배의 유언이 된 “2012년을 점거하라“ 말이 새롭다. 과거 김대중대통령의 민주정부 5년를 지나고 다행히도 노무현대통령의 참여 정부를 탄생시키고 집권한 5년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체 정권을 내어 주웠다. 

그러나 많은 부문에서는 이전에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뤘다. 그러나 MB정부는 지난 5년간 이러한 과제를 발전시키기는 커녕 퇴보시켰다. 그래서 다가오는 이번 년말 대선은 정말 중요한 때이다. 그것은 기존의 정당들만 믿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진보 신당사람들 마져도 자리와 이권에 안주하면서도 이념과 파벌을 민주와 정의로 위장한체 끝없는 분란으로 가는 것에 대한 국민들은 극도의 실망으로 인하여 정권교체의 앞날 마져 어둡게 하고 있다. 

 다행히도 밖에서 부는 안철수 현상으로 인하여 우리는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나 기존의 정당과 밖의 세력들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정권교체는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으로 부터 25년전 우리가 했던 일은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라도 해서 말할수 밖에 없었던 일이였음을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의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과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고 친구가 되여 주는 것이 바로 민중교회의 출발이였듯이 지금도 그러한 정신으로 이 땅의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 가는 이들을 섬기는 사역이 바로 민중선교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올해 9월 25년 처음으로 그날을 회고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삼고자 한다. 그날의 주역들과 이후 "한민연" 에 참여하고 교파를 초월하여 지금 까지 민중선교 분야에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이날을 회고하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지, 또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모이는 일시: 9월 11일(화) 오후 6시 서대문구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기사련 지하 이젯 홀

                              연락책임/ 윤인중 목사  이승봉 목사 김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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