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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목회자 운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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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24  19: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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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장목회자 운동의 역사

이 원고는 초록입니다. 예장목회자 운동이 지금 새로운 모색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새시대, 현목, 현신, 건목협, 바른목회, 생명목회, 열바, 예목연, 아트폰테스등 시대와 조류에 따라 다양한 이름과 조직으로 이어져왔습니다. 그 조직들은 나름대로 필요와 조건에 따른 선택이었습니다. 달라진 시대에 역사를 조망하면서  우선 공개하오니 부족한 것은 체워가기를 원합니다. 기회가 되면 함께 회고와 전망의 좌담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실명 공개를 했는 데 원치 않는 분들은 연락주시면 수정하곘습니다.
   
                                    * 2014년 예장 목회자 협의회 창립 모임(초대 회장 임규일 목사)
예장 목회자 운동은 시대적인 산물이다. 당시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인권운동은 있었지만 목회자 운동이라고 이름을 붙힐만한 운동은 흔지 않았다. 그런데 PCK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1990년 목회자운동이라는 이름을 붙힌 목회자 조직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나 목회를 하기 위해서 혹은 목회자의 친목과 활동을 위한 목회자 이익과 권익을 위한 성격의 조직은 아니였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적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의 면모를 보면 그렇다. 그들은 한국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주의와 경제에 있어서의 분배정의에 대한 염원을 갖고 이미 여러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산언선교나 인권운동을 하던 선배분들이였다. 따라서 정치와 시국에 대척점을 이루 분야에서 이념공세가 집중되고 있어 활동공강을 넓히고 대중화 시키기 위하여 교회와 목회자들의 참여로 눈을 돌린 것이다.

PCK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고 영향력도  있어 일부라도 목회자들을 깨워 민주화운동에 동참케 하기 위한 교단내 목회들의 대중운동을 활성화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사회참여와 기독교적인 책임사회 응답에 기인한다. 그렇게 처음 조직된 "예장목회자협의회"(초대 회장 이정학 목사, 총무 인명진 목사)는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활발하고 신나고 의미 있는 교회내의 재야운동 조직이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의식있는 목회자들이 대화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전국적인 조직이 없었는데 이 모임으로 말미암아 목회자들은 합법적인 회합들을 하고 의식을 고양시키고 성장해갔던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것 처럼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목회자들은 교단의 합법적인 보호아래 군사정부에서 사람이 바뀌면서 계속되는 지긋지긋한 민주주의에 대한 압살과 정치적 탄압의 사회현상이 개선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회세력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것이 솔찍할 것이다.

전국적으로도 언론의 통제로 인하여 시국의 정보에 메마르고 가슴이 뜨거운 이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그리고 당시 자유로운 외국의 자유로운 상황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홍성현목사 이삼열박사 김종렬 목사 김용복 박사등이 단골강사로 신학이나 이론들을 제공했다. 이분들도 이미 장신대 재학시절 부터 교권과 억압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신학에 대한 거부와 목마름으로 저항하면서 나름대로 목회자 모임들을 한 분들이었다.

“예목협" 이 전국 조직이 되자 이미 지역과 노회에서 목회적으로도 인정받은 중견목회자들이 가세하자 교단내에서 누구도 무시못할 명실상부한 목회자 조직이 되었다. 그리고 하부 동원 조직으로는 당시 막 졸업을 한 '현대신학연구회' 회원들은 실천조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87년 6월에 열린 새문안교회에서의 시국기도회도 그렇고 시국집회와 목회자 대회는 언제나 '현신회원' 들이 주고객이었고  “예목협” 은 목회자에게 가장 가장 전위적인 예장운동권이었다.
   
                     *고환규 목사(기독공보 편집국장을 거쳐 예목협 홍보위원장으로 신문 발행)
정치권과 목회자운동
그리고 야당과 시민사회 운동과 합류하여 6.29 선언을 쟁취했지만 대선의 판도는 먹구름이 끼였다. 여당은 노태우 단독후보였는데 반해 야당은 분열되였다. 민주화운동의 두 거두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실패하고 이 과정에서의 정치권은 물론 재야운동권과 기독교도 분열을 맞게 된다. 당시 예장의 인명진 목사가 호주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면서 87 국본에 합류하게 된다.

여기서 처음으로 도입된 대변인을 맡으면서 또 한번의 변신을 한다. 호주서 영어공부도 하여 외신들과 자유롭게 소통한 것도 새롭다.  영등포산선 총무로 노동운동과 재야운동을 통하여 체즉한 천부적인 운동감각과 논리, 과단성으로 기성 정치권의 깊은 관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당시 기독교는 소위 단일화(YS측)는 주로 기장교단이 주류로 서울 제일교회 박형규목사와 오재식 선생, 권호경 목사, 감리교는 김동완 목사 예장은 인명진 목사와 보수교회 장로구룹이 가세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 지지파(DJ)로는 김상근 목사, 이재정 신부, 예장의 고 조남기목사, 금영균목사 차선각목사 그리고 젊은 목회자들이 있었다. 예장에서 놀란 것은 인명진목사의 변신었다. 훗날 알려진 것은 오재식 선생의 논리였다.  김대중 선생이 집권한다면 그의 성향이나 주변의 인물들로 보아 재야(기독교)의 설자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따라서 좀 쳐지는 김영삼을 통하여 집권하게 하고 기독교의 공간을 열자는 의도로 그럴 듯해 보인다.   

인명진 목사는 산업선교와 인권운동 목회자운동의 창시자에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리며 앞장섰던 정신으로 보아 모두 DJ를 지지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예상외로 YS를 지지했다. 이일로 인하여 그는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인목사는 이때 부터 소위 양지의 길을 걷는 다. 김영삼이 집권하자 부방위와 행정쇄신위, KBS이사를 역임하고 훗날 한나라당의 윤리위원장 까지 하였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어찌되였든 우리 사회 집권층 보수여당의 집권을 위하여 복무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후 개신교를 대표하는 인사로 한나라당의 윤리위원장 참여도 비판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몰락한 것은 2016년 촛불정국하에서의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의 수락이었다. 나이가 먹고 사는 형편이 달라져서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정신과 몸은 그런 기득권의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노동자와 인권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서 인식은 엇갈린다.

정치를 안다는 분이었지만 기성정치의 벽을 넘지는 못하였다. 정당에서 그것도 지역구에서 당선된 사람을 퇴출시킫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전국민적 지지를 받지도 못했는데 없어져야 할 당을 살린다고 간 것도 오판이었다. 건전한 보수론도 당시의 촛불집회로 점화된 탄핵과 정권교체의 열망을 비겨가지는 못했다. 이후 와싱상담하면서 잊혀진 사람으로 은둔중이다. 이후 갈릴리교회 후임인 최호득 목사를 내쫒고 영등포산선 진방주 목사도 내 쫒는 다.

인목사는 당시 자신을 따르던 노동자들과 같이 개척한 구로동의 갈릴리교회에서 이후 정치적인 변신과정에서 갈등으로 인하여 분열이 되였다. 그렇게 예장의 목회자 운동은 핵심인사들의 정치적인 선택과 노선의 갈등과 달라진 시대의 풍요로 말미암아 운동은 와해되지 시작하였다. 정치적인 상황도 양김이 싸우다가 정권교체를 못한 책임 떠넘기기와 자괴감으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김영삼의 대변신으로 그는 야당으로가 아닌 집권당이 되어 집권하게 되고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권력 맛을 보게 된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역사에서 의미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후 김대중선생의 집권을 위한 토대를 만들엇고 민주주의를 위한 많은 기초를 조성했다. YS는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과는 반대로 군부의 개혁과 금융실명제 하나회 해체등 그만이 할 수 있었는 일들을 차근 차근 해냈다
   
* 87년 6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총회 인권위 주최 직선개헌 시국기도회에 고 김형태 목사가 격려
예장 인권위원회

예장 인권위 조직은 전국적으로 시국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조직으로 확대가 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희생을 당해온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전,남북의 정서는 한이 서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조직되여 활동을 하고 있었던 NCCK 인권위에 대한 정부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의 하중을 분산시키고 활동폭을 넓혀 공교회와 목회자들의 참여를 위한 것이 였다.  그후 NCC도 예장의 인권위를 기반으로 하여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훗날 KBS시청료 거부운동이나 국민운동 지역본부 공명선거 감시단 활동 한겨레신문 창간과 같은 시민민주주의 활동의 모체가 되는 맹아다. 그후 초교파적으로 지역단위의 인권선교협의로 발전한다. 한예로 광산지역에 조직된 태백인권위(태백, 고한 사북 영월)은 지역의 특성에 맞게 모든 정치적이든 노동문제든 억압받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인권문제로 물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시국문제를 자연히 기독교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예장내에 총회에 인권위를 전도부 안에 조직되였는데  교단내의 기구로 만드는 일을 추진한 사람들은 금영균, 윤두호, 홍성현, 김덕재 목사등이다. 소위 장신 15기로 불리는 장신대 출신들로는 가장 먼저 학내외서 활동들을 한 1기 운동권들이다. 이들은 장신대 입학 초기부터 학내에서 교수강의에 대해서 사회적으로는 사회적 현상에 대하여 신풍회라는 초교파 목회자들로 개혁적인 활동을 한 경력을 갖고 있다. 15기는 전체 깃수로는 62기인데 자기들이 정규학제(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을 받기 시작한 첫 회라는 자부심으로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은퇴를 한 지금 까지도 왕성한 활동들을 하신다. 당시 이들을 중심으로한 선후배들은 우리 총회를 움직이는 중대형교회의 목회자이며 총대들이였다. 그들도 지독한 군사정부와 신군부에 대한 비민주적인 정치제도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중견 목회자로 시국과 정치적 발언에는 몸을 사렸다 하지만 총회에 대한 제도개혁과 교회개혁에 대해서는 매년 총회전에 회합하여 문서를 내는 등 교회개혁 활동을 했었더, 

그들 동기들중에는 앞장서서 나서지는 못했지만 나서 활동하는 동문들을 합법적으로 돕고 단체의 일원이 돼서 총회내의 합법적인 기구에서 인정받고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게 되자 전폭적인 지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함께한 분들의 일도 새롭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인권위는 총회내의 특별위원회로 독립하여 지속적으로 지금 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본격적인 야당의 집권이 시작된 이후에도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군의문사, 민주화운동 회복과 명예회복, 보상문제, 국가폭력, 정보기관의 문민화등 사회민주화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일도 모두 시민단체와 종교단체의 몫이였다.

또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받는 이들과 환경문제등 인권유린과 탄압의 현장을 고발하는 등 최일선에서 활동을 하였다. 인권위의 위원장과 위원은 총회에서 추천을 하였다. 그러나 이 인권위는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는 기구이다. 전직 위원들의 면모를 보아도 그렇고 현장성과 투쟁성이 없이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위원회였다.

당시 예장 인권위원 이라고 하면 목회자로 민주화운동에 가장 헌신적인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특히 1987년 인권위가 주관한 “나라를 위한 기도회” 는 새문안교회에서 열렸는데 집회의 목적은 독재정권의 타도였다.  정국은 신군부의 실세이던 전두환 대통령이 총칼로 집권하고 5년 임기를 끝내고 차기로는 자기의 권력을 계속해서 발휘할 욕심으로 육사동기인 노태우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이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열화와 같이 이 헌법을 개정하라는 “호헌철폐” “직선개헌” 을 구호로 최초로 조직화된 시민운동으로 “민주쟁취위원회” 을 통하여 반대운동을 하게 된다.
   
                             * 1987년 6월 22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나라를 위한 기도회
예장 총회 노동상담소년

예장은 한국에서 산업선교를 가장 먼져 시작한 교단이다. 이미 1957년에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도부안에 오철호 목사(미국이주)와 조지송 목사(영산 초대 총무) 를 간사를 두어 활동을 하였고 후일 한국 산업선교의 본거지 영등포산선을 세우게 된다. 그래서 초기에는 공장전도와 각 교회 기독정년들의 교양이나 조합교육 그리고 소 조직등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노조와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실현을 위하여 큰 성과를 내였고 1980년 초 인명진 목사는 청주산선에 강사로 가서 유신헌법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설교로 기소되였고 다른 노동현장에 영향을 주는 선동적인 강연자였다. 또 당시 현장 강성노조인 원풍과 해태 롯데 노동조합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한노총의 어용화로 인하여 영등포산선에 속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으로 인하여 감시와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노동자들과 사회로 부터 가장 존경받는 조지송, 인명진 목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교권으로 부터도 문을 닫던지 문제되는 실무자를 교체하라는 압박과 받고 있었으며 결국은 “산업선교"  라는 이름을 “산업전도” 로 개명하라는 헌의가 당시 영락교회에서 열린 총회에 상정되였다. 그리고 총회는 기존의 산업선교 활동에 대하여 새로운 지침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대신학연구회" 회원들이 총회장소로 가서 침묵시위와 산업선교에 대한 지원과 지지는 총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목회자들도 신학생들의 행동과 참여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후 정권과 탄압과 교권의 비협력은 기구적인 차원의 산업선교활동을 더 이상 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그래서 선배들은 다시 총회 전도부의 인권위 안에 노동상담소를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영등포산선이 과거와 같은 활발한 센타형의 산업선교를 더 이상 하기 어렵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속에서도 노동문제는 외면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노동자” 의 문제가 총회 안에 어떻게 던지 두워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교회가 그들을 지켜주고 현장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신학적인 판단과 운동적인 사고를 한 것 이다.

인권위원장을 지내신 고 조남기 목사가 초대 이사장이 되셨다.  그 분은 서울 남노회 파송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위원을 지냈기에 영등포산선이나 노동자 사정을 잘알고 있었다. 소장은 인명진 목사가 맡았는 데 총회 인권위나 상담소나 나중에 조직되는 예장 목회자 협의회의 초대 총무도 맡게 된다. 당시 많은 후배들은 산업선교를 하고 구속과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일해온 인명진를 선후배들이 인정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 고 조남기 목사(NCCK 인권위원장) 회갑연  
예장목회자협의회
서론에서 말한 대로 예장 목회자들이 조직한 이 단체는 사실 목회자들이 목회를 위한 것보다는 대 사회적 책임과 당시 탄압받고 힘없는 재야을 돕고 야당들과 연대하여 사회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조직이였다. 그렇기에 기성목회자들과 지방의 목회자들이 대거 참여를 하게 되고 특히 영남과 호남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된다.

이는 당시 한국 민주화의 상징인 김영삼 김대중씨에 대한 지지자들이 가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훗날 목회자운동의 분열을 가져왔고 자기들의 이익이 실현되자 같이 기득권자가 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예목협의 초대 회장은 산선 위원장을 지내신  이정학 목사 맡았고 그후는 조남기 목사가 맡고 총무 역시 인명진 목사가 맡았다.

이 분들은 이미 산선에서 마음과 생각과 맞춘 분들이다. 조남기 목사는 신학교 졸업후  청담교회에 부르셔서 가까이서 모신바 잇다. 일제하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시고 월남하여 군 정훈관으로 입대하셔서 군목을 지내시다가 중령으로 제대하셔서 봉천교회나 수유동교회를 거쳐서 청담교회로 부임하셨다. 

처음에는 NCCK  인원위원장으로 어렵고 가장 힘든 시기에 (1972년부터 82년 까지 약 10년) 예장 목회자로는 유일하게 구속학생들과 해고된 노동자들 해직교수들의 인권을 위하여 앞장 서셨다.당시 소위 재야운동은 70년 말까지만 해도 신문사의 해직기자와 대학의 해직교수와 양당 그리고 소수의 기독교였다.

한국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NCC와 인권위, EYC, KSCF, 각 교단의 산업선교회와 사회선교협의회 우리교단은 영등포산업선교회(URM)가 최전선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의 인자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킨 곳은 우리 교단 최초의 의식화 구룹으로 불리우는 새문안교회의 청년 대학부로 이들은 장청의 지도부가 되고 목회자가 된다. 그러나 당시 우리교단의 기성 목회자들은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을 잘몰랐다.

그러나 현대신학연구회는 신학연구보다는 사회과학에 대한 학습과 이론연구에 더 관심이 컸다.  신학생으로 보다는 한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써의 운동이 더 필요한 때였다. 복음적인 신앙과 보편적 인권에 대한 양심의 바탕에서 시작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사회과학과 만난 것이다. 오직 신앙에 입각한 정의감과 민중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무장된 것이다. 그렇기에 순수했고 운동도 잘되였다. 모든 집회와 행사에는 참석자가 차고 넘쳤으며 재정도 충분했다.

많은 기성교회의 목회자들이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지원을 하였다. 한편 이 모든 운동의 중심축이였던 인명진 목사는 정권의 집중적인 탄압과 감시로 위축되는 산선에서의 노동자선교와 노동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눈을 교회(교단)으로 돌린 것이 바로 노동상담소다.

좀더 합법적인 위치에서 교회의 울타리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노동자들과 가까이 한다는 생각이였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프랑스에서도 노동운동이 활성화 될 때 막 시작된 페비언 사회주의와 노동자들의 급진성으로 인하여 기성사회와 교회(보수 카토릭)도 불온시 하고 두려워 하였다. 그러자 진보적인 교회의 인사들은 직접 노동운동에는 관여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을 후방에서 돕고 지원하는 상담소를 전국적으로 본당에 설치하게 된다.

그렇게 PCK 전국의 노회산하에 노동상담소가 한때 15개 지역에서 개설되여 운영되기도 하였다. 당시 목회자 운동의 최일선에서 이름을 걸고 앞장서신 분들도 모두 영등포산선의 활동을 지원하고 보호해주던 중진들로 고 이정학, 조남기, 이정규 목사와 차관영 목사가 있었다. 당시는 정당도 탄압받고 있었고 그나마 NCC가 유일하게 정부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재야운동의 중심축이였다.

영등포는 유일하게 국제적으로도 네트웍을 갖고 있는 단체였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안식처요 피난처였다. 해직된 교수들은 강연회로 해직된 기자들은 연구와 조사활동, 변호사들은 시국사건 변호인으로 심지여 유능한 학생들의 유학도 주선하였다. 그렇다가 보니 NCC 에게 과도하게 부여되는 시선과 탄압의 집중으로 인하여 반체제 운동을 다변화하고 확산할 유일한 공간이 바로 교회였다.

1985년 우리교단의 고 고영근와 인명진목사가 구속되여 있었고 이를 계기로 당시 총회장(임택진목사)이 주관하는 석방기도회를 새문안교회에서 연적도 있었다. 그때 앞장서서 반체제 투쟁을 찬성하고 참여하는 것은 어려워도 목회자의 신앙과 양심상 정의와 민주를 위한 발언이나 활동을 한 같은 성직자의 구속한 정부에 대하여는 비판적인 의견이 우세하였다.
   
                                                                       * 건목협 여름 대회
현대신학연구회
사실 우리 예장은 이 두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70-80년대 한국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그나마 이런 저런 할말이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학생 청년운동을 마치고 민족 민주운동에 대한 고민을 하던 기독학생, 청년들중  서울노회 회장을 지낸 이근복 목사를 필두로 신학교에 대거 입학한다. 이는 운동의 장기전을 예상한 것이다. 우선은 존재가 가능해야 운동을 할 수 있다고 보고 먹는 것이 해결되고 지속적으로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교회를 택한 것이다. 이들에게 신학교는 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내몰린 곳이다.

그것은 노태우의 집권으로 아무래도 운동은 장기전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누가 가자는 선동을 한 것도 아니고 학교에 가니 와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77기에도 서울대 민비련 활동을 하던 김도현 목사와 과 연대서 제적을 당하고 대전신를 졸업한 김규복, 영신의 현순호, 장청 총무 출신의 허춘중등이 입학과 복학을 한다. 그리고 안수는 받지 않았지만 전응휘, 김민수와 새문안 출신과 연동교회 출신으로 기독학생운동을 하던 조성우, 이원돈, 조하무등도 78기로 입학을 하면서 학내현신은 활기를 띄게 된다.

이들은 현대신학연구회는 장신대 최초 이념 서클이라고 할 수 있다. 76기와 77기들이 의기투합을 하고 77기 부터는 신대원만이 아니라 목연도 연합하는 데 이미 지방신학교(서울장신, 대전, 영남, 부산)의 학부에서부터 운동을 하던 이들이 올라온 것이다.  이는 과거 신대원 출신(3년)중심의 모임에서 유일하게 목연과 통합된 서클이었다는 것이 특색이다.

한편 당시 장신대는 이미 대학교에서 해직된 교수(전북대 남정길 교수, 조선대 국문과 000교수)와 고무송(언론인) 과 KSCF 출신으로 부산에 있던 차선각 선배와 80기로 김형기 선배도 입학을 했다. 그들은 모두 기독 학생운동으로 세례를 받은 기독자의식이 있는 분들이었다. 운동의 단결 되었지만 지역과 각 분야에서 헌신하게 된다. 학생들은 노동현장이나 공단주변의 야학, 출판과 번역, 민중문화운동등으로 분화되여 갔고 신학생이 된 이들은 졸업후 공단지역에서 노동자교회을 하게 된다.
   
                                                                         * 현신 동우회
장청과 장신대
그리고 모두 목회자라는 동질감으로 목회자운동으로 다시 하나가 된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PCK의 청년회 활동(장청)이다. 76년에 대구에서 열린 겨울선교대회로부터 전환하여 당시 시국의 상황을 담은 내용과 이슈를 주제로 강연과 토론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장청은 우리교단의 개혁과 진보 운동 인자들의 집합소가 되고 여기서 다시 대거 신학교와 재야운동에 투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장청의 운동의 내용이나 방향이 자연히 민족, 민중으로 중심축이 이전하기 시작하였고 많은 청년 학생들이 참여를 하게 된다. 한편 우리 경제는 최고의 호황을 맞는다. 자동차와 IT산업 중공업등에서 세계최고가 되었다. 농업도 연일 풍년으로 GNP가 2만불을 상회하였다. 따라서 교회들도 과거의 전통적인 교회들의 성장은 정체되고 신도시와 그 주변의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또한 인구의 증가와 교통의 발달, 인터넷과 목회자의 급증등 목회 전문훈련등으로 단순한 개척교회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하는 교회들로 증가했다.

그리고 장신대 학부는 바로 많은 현신 출신의 배출대가 된다. 이들의 연대감과 운동성은 현신만이 아니라 농목이나 다른 조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장신대 학부 출신 현신 멤버는 76기 박진석, 77기 안기성 83기 안광덕, 79기 박충호 진방주, 82기 박천응,  오현선등이 있었다. 
   
 
예장 바른 목회 협의회의 태동
장신대에서는 62기(15기)을 중심으로 한 "새시대 목회자" 라는 구룹들이 학내와 교단 목회자운동의 중심이였고 이후 72기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현대목회연구회" 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 전쟁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정규 대학교육을 받은 세대들로 젊고 의식있는 구룹들이였다. 조성기 정태봉 기현두 정태일 최양춘 김기복등이다.

이들은 년령적으로 부목사 시대를 끝내고 중소형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소 무거운 예목협의활동과 과제를 좀더 일반화 시켜 큰 부담없이 목회자운동의 대중화를 모색한다. 그렇게 해서 "바목"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까지 이름에서 보여지듯 목회자권익이나 이익적 관점이 아닌 사회와 목회 삶에서의 "바름" 을 토모로 하고 있었다. 나중에 초교파적을 한국목회자협의회 까지 조직한 가장 큰 공로자 조성기목사의 구룹의 성과였다.

그런데 문제는 목회자 운동의 대중화라는 방향이 바목의 창립멤버를 각 노회의 총대급 이상, 교인 300명 정도 목회자(조직교회) 들을 회원으로 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에 부합하지 못하는 과거 투쟁 경력의 목회자들은 심한 소외감을 갖게 된다. 그 당시 창립 총회도 처음으로 일류 호텔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모였는데 어떻튼 인근에 조성기목사가 시무하는 인천제일교회로 이동하여 성황리에 창립을 하게 된다.

창립을 계기로 이 모임의 장소는 호텔급으로 격상되였고 마침 자가용이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하여 과거 유성이나 온양온천이 단골이였던 모임이 다소 고급화 되여 전국의 유명호텔과 명승지로 총회와 세미나를 개최하기에 이르는데도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을 하게 된다.

시대도 변하니 중심과제도 정치민주화나 산업선교, 노동문제에서 목회적 소재인 지역사회와 복지문제, 환경 봉사등의 과제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다시 그 그 수명을 다하고 “생명목회협의회” 로 아직 활동을 하고 있어 의식들은 있지만 개인들의 이해와 교권에 기대는 문제로 현장의 소리를 듣거나 참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87년 이후는 여러 가지면에서 기록될 만 한데 그 이전 까지만 해도 기독교운동은 NCC중심에서 각 교단의 청년, 목회자운동으로 분화되고 확산되면서 새로운 이슈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중 당시 정권의 시녀가 된 공영방송 KBS의 보도와 아부가 극에 달해 전 국민적인 반감을 사게 되고 마침 전교조교사들로 인하여 전국적인 네트웍이 형성되여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이 시작되였고 크게 성공한다.

다시 공명선거 실천운동, 선거감시등 약간은 식상한 것 같은 이슈들이 의외로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였고 이 과정에서 진보 보수 가릴 것이 참여하게 되는데 이른바 복음주의권의 시민사회운동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된다.

이는 박정희에서 전두환에 이르는 군사 독재정권의 지배 하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 활동을 전개하지 못한 채 사회참여의 부담감을 느꼈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1987년 12월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을 창립했으며, 대선 정국에서 공명선거기독교대책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한국형 복음주의 운동이 현실화된 것으로 분석한다.

현신이후의 운동
2000년 이후의 목회자 운동 이후의 목회자 운동은 아무래도 현대신학연구회를 중심으로 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큰 흐름만 정리하면 현신도 학내에서 조직되여 가장 많은 재생산을 한 목회자 조직운동이였다. 훗날 지방의 신학대에서 까지 같은 이름의 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없이 커지는 조직을 담보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지방화로 인하여 결국은 "건강한 목회와 교회를 위한 목회자" 라는 조직으로 변화하게 된다.

또 장신대에는 현신과는 별도로 "열린신학 바른 목회" 라는 조직으로 활동을 한다. 태동은 좀 늦게 신학교에 입학한 류태선, 변창배 목사등이 조직한 모임으로 이후 졸업을 해서는 "열바실" 로 하여 2017년 부터 시작된 명성교회 세습반대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들을 하기도 한다.

이후 장신대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학생운동은 퇴조기에 들어간다.  졸업한 현신출신들도 너무 친교가 깊은 나머지 외연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지역노회에 자리를 잡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터 목회자 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변신의 필용성이 나온다. 학내 경험이 없는 좋은 목회자들을 회원을 받아드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건목협" 이다. 이에 대하여 반대자와 이론도 있었지만  강행되었다.  그후 총회나 목회구조가 지역구도와 교권화되면서  운동성은 퇴색된다. 성장한 인자들은 총회로 나가 교권 활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교권과 재야가 연대할 고리도 형성된다.  그런 케이스로는 한기총 탈퇴을 위한 예장대책위가 빛을 냈다.  총회의 사안에 대하여도 성명서를 내는 등 연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도부가 총회 총대나 노회의 중심 지도력으로 변화하고 있고 후배들을 배출하는 재생산구조가 없어서 옛날 친구 만나서 회포 푸는 방식의 모임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이 세대들도 지역과 목회의 장에서 자리를 잡고 지도자가 되면서 교권과 지역파벌 동기회등으로 분화되여 가고 있는 데 이것을 거스릴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의 한계를 곧 운동과 조직의 한계가 되게 해는 안된다.

복음주의 계열의 사회참여
특히 87년이후 복음주의권도 복음과 상황등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한 전문직 기독교인들과 목사들이 중심이 되었고 복음적 전위는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영향력이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여의도순복음교회, 금란교회, 사랑의 교회, 광림교회 등 중대형 교회들 마져 이 시민불복종 운동에 물적, 인적 자원을 제공해줬다. 하지만 이들 교회의 목사들이 매우 현실적이며 정치적으로 자원 동력과 물적제공에는 용이한 위치에 있었지만 교회의 내부는 기득권 구조에 편입돼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정치적 지향은 급진적인 변혁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기윤실은 사회의 구조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보다는 개인적이고 문화적 수준의 윤리적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뤘고, 당시 대선정국 가운데서도 중립적 태도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이어 87년형 복음주의는 수구적 우익 보수기독교와 일정한 구분선을 그으면서도 교회협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운동과는 명백하게 차별성을 드러내는 기독교 진영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교회갱신 못지않게 사회적 불의를 시정하는 사회참여가 중요한 사명임을 깨닫게 했다. 제한적 민주화가 제도화된 87년체제 성립기에 형성된 한국형 복음주의는 사회참여라는 모토를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복음과 상황" "뉴스엔죠이" 는 최초의 인터넷 진보신문으로 지금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외에도 "성서한국" "새벽이슬" "IVF" "성토모" 등의 청년 목회자 조직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주의 운동이 주로 보여주는 모습은 "한기총 해체" 나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 사건,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 박사학위 논문대필 사건등에 휘말렸다. 대적전선이 보수권 자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보수 기독교 진영은 현재 한국사회의 복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해 명확하게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가치의 다원성과 소수자들의 권리를 실천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뜻’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나 ‘그리스도의 사회적 책임’ 내지는 ‘사회참여’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또 다른 부문인 복음주의권은 사회참여와 교회갱신에 능동적으로 헌신하는 청년 대중들을 재생산해 내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어온 최상급 리더들인 이만열, 순봉호, 홍정길, 이동원, 옥한흠 등 1세대 복음주의자들이 일선에서 은퇴했거나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적 궤도에서 이탈하면서 새로운 리더십이 탄생을 하고 있다.

방인성 목사나 박득훈 목사 교갱협과 기윤실, 그 외 실천신학대학원의 정재영 교수나 조성돈 교수의 역할은 대단하다. 그리고 평신도로 활동중인 서울공대 출신의 청어람의 양희송 같은 분들이 있다. 복음주의 운동의 위기는 카리스마 지도자들에 대한 강한 의존 구조라는 패러다임의 한계 및 운동의 자원동력 시스템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 이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복음주의가 어떤 정치제도를 지지하는지, 어떤 경제체제를 옹호하는지, 어떤 사회질서를 실현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한계나 복음주의 신학적 성찰의 빈곤으로 인하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운동은 불합리한 시대적 모순을 집단적으로 지속적으로 대항하며 보다 낳은 진보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우리는 운동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까?

이들중에도 장신대에 입학한 이들이 적지 않다. 장신대 교수 서원모가 바로 서울대학 기독학생출신이고 지금은 우익적 활동을 하는 고형석 목사도 서울대 기독학생운동 출신이다. 현신처럼 전위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은 이들 가운데도 의식있고 강단있는 이들이 장신대에서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다. 목회자외에도 연극인, 정당인, 운동가등이 나왔다.

현대신학연구회 홈커밍 데이

35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모였던 2014년 현대신학연구회의 회고의 날 친교는 여러 가지로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은 1세대들이 은퇴를 하였다. 이미 76기의 이은태(제주) 이어 이종윤(부산)  이춘수(조기은퇴, 평택 동산) 이다. 그리고 총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동역자들도 있다.  충남노회 82기 최태순(대천)과 대구동노회 박노택(80기)은 총회적으로 한번도 힘든 임원을 2회나 하였고 강원동노회 이상진(80기)는 평신도지도위원회와 농어촌부, 부장고시부 부장을 지냈다. 

그 외 포항의 김영결(82기) 목사와 제주 노회 서기를 지낸 안광덕(83기) 목사, 당시  광주 정태진(77기)는 노회장이었고 이미 노회장을 지낸 사람도 나왔다.  진방주(79기) 목사는 국내선교부 총무를 지냈고 영등포산선 총무를 지냈다. 이홍정(80기)는 총회 사무총장을 지냈고 현재는 NCCK총무로 사역중이다. 

교수로 활동하는 현신은 한일장신대서 은퇴한 임희모 교수(80기) 와 현 총장인 구춘서 목사(77기)와 장신대 임희국 교수(77기)  부산 장신대 황홍렬 교수(79기) 오현선(전 호신대)가 있다. 

* 건목협, 예사협, 예목연, 예장농목, 열바, 예마넷등은 추후 정리할 예정  
   
                                                       * 예목연 2차 총회 2대 대표회장: 이상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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