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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K와 에큐메니칼 운동(WCC) 2.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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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19  20: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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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큐메니칼 운동과 PCK

글 싣는 순서

1. WCC 신학과 역사
2. 에큐메니칼 운동과 PCK
3. PCK 에큐메니칼 지도자들
4. 우리에게 맡겨진 에큐메니칼운동의 의의
결론: WCC 후임 총무 연속 도전의 교훈과 과제

2. 에큐메니칼 운동과 PCK

WCC는 2021년 독일의 칼스루에서 11차 총회를 예고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8년간 WCC 총무를 역임한 노루웨이 출신 울라프 픽세 목사는 임기를 마친다. 이에 지난 2018년 WCC는 후임 총무 인선을 위하여 가입교회와 단체에 공고하고 인선위원회(25인)을 조직하여 공모한 결과 2명의 복수후보가 결정되었고 오는 3월 제네바에서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해 다음 해 총회에 보고 예정이다.

우리교단 기록에서 WCC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대표단이 파송된 것은 아주 초창기 부터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식민지 상황이었고 피선교국가로 대표성도 그렇고 그 역할론에서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WCC가 교단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 것은 합동측과 분열의 과정에서다, 분열의 원인은 당시 신학교 건축비용 3천만환 유용 문제(1957년)였지만 이를 덥기 위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지목하면서 WCC 탈퇴를 들고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1958년 9월 43회 총회 서기와 총무를 5년간 역임한 안광국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총회는 아빙돈 단권 주석 번역 사건으로 인한 조선신학교 측의 이탈이 되는 자유주의 신학사조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시 총회 임원이나 교단의 주류는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  그러나 1959년에 대전에서 모인 44회 총회에서 개회벽부에 NAE를 반대하는 에큐측의 강신명 목사가 제출한 경기노회 총대 명단을 받는 것을 반대하는 당시 노진현 총회장이 일방적으로 정회하자 에큐측은 단상에서 임원 불신임을 선언한다.
   
 
교단 분열을 하면서도 지킨 가치

당시 장신대 신학생들은 어떤 입장이었을 까?  1959년 10월 2일에 발표된 성명서(학우회장: 나귀환) 3항을 보면 학우회는 교단분열에 대하여 “우리는 에큐메니칼운동자나 NAE운동자들의 분파적인 사무를 거절하고 그의 이용물이 되지 않는 다” 라는 글귀가 눈에 보인다. 당시 신학생들도 교단의 문제에 대하여 민감하게 대응하고 행동한다. 청년들이 당시나 지금이나 의협심은 있었으나 당대 세계교회의 흐름이나 교단입장에는 어두웠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렇게 대전에서 파행된 총회가 통합은 9월 28일 채필근 목사의 사회로 연동교회서, 합동은 11월 24일 승동교회서 노진현 목사를 회장으로 결국 따로 모인 것을 계기로 결별을 하게 된다. 교단의 분열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53년 37회 총회서 기장측으로 불리우는 김재준 목사에 대한 신신학 비판기류가 형성되었다. 기장의 탈퇴를 촉진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이북 노회 총대들을 받는 것에서 탄력을 받는 다.

당시 총회 서기(총무 겸임)인 안광국 목사는 이북 노회 총대 허입문제로 옥신각신 할때에 총회의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보수성향의 이북노회원 67명을 남북교회의 연합총회라는 명분으로 받는 다. 그러나 이는 조선측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문제였다. 그것은 장신측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한 세 불림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총회 임원과 지도부가 역전되고 조선측의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면서 기장은 이탈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출옥성도를 대표하는 한상동 목사등이 고려파가 분열해 나간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국의 남북장로교회와 호주연합교회, 선교부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리고 1960년 양측에 속하지 않은 중도파와 승동파가 새문안교회에서 모여 지금의 통합 총회를 창립하게 된다. 그리고 1962년 경동노회 교역자회가 장로교 합동을 위한 간담회 요청으로 문서에서 통합은 조건없는 통합을 합동측은 WCC와 NCC 탈퇴, 공기관의 공동관리, 신학교 재산 공유를 제안받는 다.
   
 
에큐메니칼 신학은 우리교단의 기초

이런 대화의 노력은 여러노회와 모임에서 지속되고 그해 9월 총회에서 양측 총회는 위원들을 내고 대화의 노력들을 하지만 합동측이 요구하는 3가지 조건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1963년 대구제일교회서 모인 최종회의서 합의점을 이루지 못한다. 당시 합동측이 요구하는 것중 하나는 WCC 탈퇴건을 이를 반대한 교단의 주류인사는 안광국, 유호준, 성갑식, 황광은, 김동수 목사였고 강신명, 김종대 목사의 지지가 있었다. 그 뒷 배경에는 한경직 목사의 신중론도 한몫 하였다고 한다.

합동측이 제기한 WCC 탈퇴요구를 당시 대화에 참여한 이들로써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총회는 합동측과의 대화와 통합을 염두에 두고 이후에 결국은 WCC를 탈퇴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WCC 총회나 모임에 공식적이지는 않치만 개인적인 끊은 놓치 않았다. 그러던중 1968년 서울노회 수송교회(당회장: 김용준 목사)와 평양노회 최중해 목사(영주교회)가 총회에 청원한 WCC 재가입 청원은 처음에는 부결된다. 당시 총회분위기는 유호준 목사(용산교회)등이 한경직 목사에게 이건에 대하여 내락을 얻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함께 서명한 김종대 목사의 번복때문이었다고 하는 데  당시 부총회장으로 후보로 이태준 목사와 안광국 목사가 경합을 하는 데 총회에서 WCC 문제가 불거지면 안광국 목사에게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으로 후술된다. 그래서 한해를 걸러 1969년에 총회에 상정되지만 장로들의 반발에 부딕치는 데 당시 김재호 장로(청량리중앙)등의 반대 기류가 이후 장로회보을 창간한다.  이후  교단 내 보수 근거지가 되여 WCC와 산업선교, 에큐운동에 대하여 반대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당시 장신대 마펫학장등 우리교단 프린스턴 출신 동문들을 중심으로 가입정서가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144/79로 가결된다.

그러나 우리총회가 WCC 재 가입의사를 밝히기 이전인 1967년 김동수 목사(성광교회)가 당시 WCC 청년국에 근무하는 박상증 목사에게 서신을 보내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열리는 4차 총회에 우리교단 대표들의 방문을 타진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총무였던 미국인 유진 브레이크에게 상의한 결과 미국장로교회의 도움으로 3천달러를 지원 받아 강신명 목사와 김형직 총장(숭실대)가 옵져버로 참석한다,

물론 WCC 창립의 근원이 되는 1910년 에딘바라 회의에 윤치호등이 참석한 이래 예루살렘회의에 김활란 박사가 참여하였고 일제하에는 선교사들이 참여하는 등 교단적으로 국제교류는 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어 왔다. 이는 미국장로교의 본산인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우리교단의 유학파들이 교단적으로 명망있고 안정적인 목회를 하고 있었고 교단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행한 일로 지도자란 언제나 세계와 미래를 공부하고 예측하며 소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안광국 목사 1969년 54회 총회장 역임
WCC에 극적으로 재 가입

그후 가입청원을 냈을 때 WCC가 답신하기로는 이전에 탈퇴처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통합측은 재가입 절차없이 그대로 복귀하는 형식이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교단이 합동측과 일방적으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이후 꾸준한 통합의 노력을 기우렸다는 것과 당시 세계교회의 조류에서 도퇴되지 않고 큰 흐름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합동측의 요구는 당시 우리교단의 미래와 진로에 결코 받아드릴 수 없는 무리한 조건들이라고 판단한 선진들의 혜안이 놀랍다. 

따라서 교단통합은 무조건이 옳거나 좋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합동측등 다른 장로교단들과 우리교단이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알지 못하는 우리교단의 목회자들이나 혹은 평신도들은 지금더 여전히  케케묵은 옛날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에나 지금이나 늘 이런저런 이유로 WCC를 비방하고 욕하고 탈퇴하자는 운동을 하는 분들이 다음과 같은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개인이 습득한 신앙이나 목회자로 배운 신학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와 소통속에서 검증받아야 한다. 특히 자기가 속한 교단의 역사와 신학을 부정하고 바꾸라고 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우리교단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큰 아픔과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곳이다. 그리고 세계교회와의 연대속에서 발전해 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안된다. 따라서 WCC 탈퇴주장은 우리교단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지금은 단체나 조직의 강제보다 개인의 의사가 중요시 되는 시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단에서 공부하고 안수받은 사람이 이런 문제로 교단을 시끄럽게 하면서 영웅시 되고 순교자 추앙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잘못이다. 자기가 싫거나 원치 않으면 교단을 떠나는 것이 도리로 보여진다. 그만한 신학과 결연한 의지로 좋아하는 교단으로 가던지 독립교회를 하던지 해야지 노회나 총회에 나와서 자신의 협소한 신학과 신앙을 주장하고 펼치는 것은 안된다.
   
                                         * 김형태 목사 1987년 72회 총회장 역임
그렇게 하여 PCK총회는 1975년 나이로비 WCC 총회에 본격적으로 김형태목사,김윤식목사,노정현장로를 파송했다. 그리고 그런 결과는 교단의 사회선교정책에 즉각 반영되었다. 1977년에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교회 선교정책'을 발표하여,교단의 선교정책이 에큐메니칼적임을 명시했고,1978년에 '도시산업선교원리 및 지침'을 발표하여 산업선교 활동을 보호했다. 1980년 12월 8일에는 고신 기장 통합 합동의 총회장 및 총무가 모여 '장로교협의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는데 이것이 '장로교총연합회'의 출발이다.
   

   * 고인이 되신 역대 총회장들 뒷줄 왼쪽 부터 김만제, 김종대,  한완석, 임택진, 장동진, 김형태, 김두봉 목사
                                                         아랫줄 림인식(생존), 한경직목사, 김세진 목사, 최거덕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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