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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순절의 선택
김인주 기자  |  thpr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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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24  17: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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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의 선택

김인주 목사(제주 봉성교회)
예배를 모여서 드리고 싶은 목회자나 신앙인들의 바람이 제한받으면서, 이에 관한 언급이나 주장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부딪히는 것을 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공존의 지혜를 찾는 것도 구조적으로 쉽지 않고, 이를 기회로 삼아 해묵은 대립이 다시 표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예는 교회의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CCM 수용과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아직도 주일 오전예배에서는, 옛날에는 이를 흔히 대예배라 불렀는데, CCM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 내가 사역하는 교회도 그렇다. 많은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CCM을 구분하지 않고 활용한다. 스크린에 영상이나 악보를 보여주는 시대가 되면서, 예전을 위해 꼭 지참해야 했던 텍스트로서의 성경이나 찬송가의 권위는 논란거리가 못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예배에서 한 번도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목회자도 있다. 모두 CCM으로 대치했다는 뜻일 게다.

찬송가와 CCM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이 논쟁이 별 가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심각하게 대어드는 사람들에게는 생사를 건 선택이 되는 듯이 보인다. “혹여 예배 시간에 찬송가 대신 CCM을 부르다가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면, 책임지실 겁니까?”라는 질문이 논쟁 끝에 나왔다는 교회도 있었다고 한다.

내가 볼 때에는 우리의 찬송가에 수록된 찬양은 대부분 낡은 CCM이다. 21세기 새찬송가에는 신작 CCM이 몇 곡 보인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이 전해준 찬송, 많이 부르던 곡조에 익숙해 있으므로, 이천 년 동안 불러왔다는 착각이 있을 뿐이다. 작곡된 시점에서는 신곡이었고, 세대를 지나면서 스탠다드로, 그리고 클래식으로 인정받는 과정을 거쳤다. 익숙하다는 현실 이외에도, 오랜 검증을 거쳐 살아남은 교회음악이기에 경건함을 담아 표현하기에 현실적으로 무리없다고 느껴지도록 교회문화의 일부가 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1521년의 비텐베르크
1520년에 루터가 교회의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였다. 이를 보통 종교개혁의 3대문서라 부른다. 잘못하여 루터의 3대 저서라 착각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내가 목사고시를 보던 해에도, 교회사 과목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나는 답을 “노예의지론”, “갈라디아서 대강해”, “창세기 강해”로 썼지만, 아직도 자신은 없다. 그렇게까지 루터의 저작을 면밀히 연구하고 분량이나 함량을 놓고 줄을 세워 평가해보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당시 내가 쓴 답은 오답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출제자가 요구한 답은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였을 것이다. 제명에서 ABC라 기억해도 된다. 1520년 말에 차례로 발표된 교회의 개혁안에 해당된다.

루터는 1521년 4월 보름스에서 모이는 제국의회에 소환되었고, 황제나 제후들 설득하고 인정받는 데는 실패했다. 황제는 로마천주교 신앙을 고수했고, 루터에게 추방(vogelfrei)을 선언했다. 어디서 누가 덤벼들어 상해당하고 시신을 새들이 쪼아먹는다 해도 공권력은 책임 안 진다는 선언이다. 루터는 담담하게 귀환하면서 가는 곳마다 환대받으며 군중들에게 개혁의 뜻을 설파했다. 그러다가 아이제나흐 근처를 지날 때,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정중히 모셔진다.

선제후는 이러한 구금 혹은 보호와 직접 상관은 없었다. 당연히 루터를 보호해야 할 입장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 제국의 황제에게 신실하게 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소재지를 알면서 추궁에 모른다고 답할 수는 없는 시대였으니, 그는 사실을 인지하되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해야만 했다. 실제 이 일을 기획하고 집행한 사람은 선제후의 비서였던 슈팔라틴이었다. 그는 선제후와 루터 사이를 중개하는 소통의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루터는 선제후 생전에 독대하거나 직접 대화한 일이 없었다. 예배에서 설교자와 회중으로 지근거리에서 보는 정도가 가장 밀접한 접촉이었다 보인다.

바르트부르크에서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소논문도 몇 편 집필하였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와는 멜랑히톤을 통해서 긴밀히 연락하며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멜랑히톤은 루터의 대역을 감당하기에는 현실 경험이 부족했다. 쯔비카우에서 온 자칭 선지자 두어명의 화려한 언변을 듣자 솔깃해서 그들의 은사를 비판하지 못하였다. 20대 초반의 백면서생으로, 책으로만 배운 사람의 한계를 드러냈다.

1520년 말 성탄절을 두고서 벌어진 변화를 멜랑히톤은 방관한 것이 아니고 협조 혹은 주도했다고 나는 보고 싶다. 12월 초에 루터가 남의 눈을 피해 비텐베르크를 방문하고 멜랑히톤을 만났으며, 개혁은 순조롭게 진전된다고 평가하였다. 그 뜻을 젊은 동역자는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칼슈타트의 개혁
이 시점에 칼슈타트가 개혁의 전면에 나섰다. 이름이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이지만, 출신 도시를 따라서 별명처럼 부르던 것이 이름인 양 통한다. 루터보다 3살 적지만, 루터가 공부하던 당시부터 교수였다. 루터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시점에서는 그는 신학부장 즉 학장이었다. 루터의 지도교수는 아니었지만, 그의 학위취득은 칼슈타트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칼슈타트는 성탄절에 빵과 더불어 잔도 평신도에게 분배한다고 광고하였다. 우리 표현으로 보통 양종성찬이라 부르는 일이 현실화되는 장면이다. 영주교회(제일교회)를 2,000명이 꽉 메웠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시민들의 숫자가 2,000이었으니 꽤 과장된 숫자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그 공간에서 몇 명 수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500명 내외라는 답이 나온다. 빵과 잔을 함께 나누는 경험은 낯선 것이었고, 실수하고 당황하는 회중도 있었다.

1월에는 더욱 더 진전된 계획이 나온다. 시민교회(중앙교회)의 성화들을 철거하고, 빈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공동모금에 관한 규정이 입법된다. 이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교회 안에 많은 성화들이 있었고, 하나하나가 제단 구실을 하고 모금함이 마련되었다. 모아진 연보로 구제하거나 장학기금으로 활용하던 시대였다.

또한 독신제도를 거부하고 나이차가 꽤 있는 젊은 여성과 혼인하기로 발표하였다. 중세시대 사제독신제도는 명분상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위성직자들의 경우 가족이나 자녀가 없고, 후계자 선정이나 유산을 놓고서 분쟁이 생기는 염려도 없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모두가 지킨 것은 아니다. 지역의 사제들은 여인들과 동거하며 자녀를 낳은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약간의 벌금을 물고 무마되었다. 자녀들은 서출로 분류되어 사회활동에 다소 지장이 있을 수 있다. 에라스무스가 이러한 경우여서, 유럽 제일의 실력자로 인정받으면서도 학문세계에서의 경력이나 성취는 의외로 낮았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이에 별로 타격을 받지 않고 살아갔다.

그러나 일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매우 상식적이며 타당한 개혁은 장애를 만났다. 선제후는 당황했으며, 시민들은 불편하게 느끼면서 개혁을 소요사태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이 전체적으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지는 상화으로 급변하였다. 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하는 일차자료 비텐베르크 개혁운동 사료집(Wittenberger Bewegung)도 경우에 따라서 침묵하거나 후일에 변개된 듯이 보인다. 칼슈타트와 멜랑히톤은 의기투합하여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저항 혹은 불평을 만나면서 길이 갈리게 된다. 이를 소급하여 멜랑히톤의 입장이나 발언이 보호되는 느낌이 든다.

이후 칼슈타트는 루터로부터 철저히 비난받으며 배제되었다. 때로는 논쟁으로 몰아부쳤고, 혹은 경제적 압박으로 괴롭혔다. 여러 해가 지나 루터도 결혼하자 그 부부가 잠시 비텐베르크에서 그에게 의탁했던 기간에, 그의 아내는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에게 무참히 시달렸다. 마치 하녀처럼 취급했다고 한다.  

그는 작센 땅에서 살아남지 못할 지경으로 몰렸다. 그리고 스위스를 택하여 바젤로 갔다. 거기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의 생각이 스위스 개혁자들과 잘 통하는 점이 많았다. 후일에도, 루터나 그 동역자들은 스위스 개혁자들을 칼슈타트와 같은 부류라고 평가절하하곤 했다. 이런 생각은 공적으로는 20세기 말까지 지속되었고,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살아있는 편견이다.

루터의 선택
선제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귀환한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는 멜랑히톤과 긴밀하게 상의하면서, 칼슈타트와는 결별하려고 하였다. 시민들과 대학의 동료들을 위해 그는 일주일간 중앙교회의 강단에 서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강한 카리스마와 더불어 짜임새 있는 논리는 개혁의 속도를 진정시켰고, 교회를 안정시켰다. 이 설교는 초록이 남아 있으며, 사순절 첫 주간 설교(Invokavitpredigt)로 통한다.

성화철거에 대해서 그는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우상은 우리 마음 속에도 있으며, 밖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마음에 우상이 없다면, 밖에 무엇이 있어도 걸릴 게 없다. 우상이 안에 있다면, 밖에 세우지 않더라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해석은 이 주제를 다루는데 매우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중에 약한 사람들이 있으니 저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개혁을 진행하지고 제안한다. 말하자면 개혁의 연착륙이다. 이로써 상황은 수습했지만, 문제는 남게 되었다. 성화 문제를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루터교회는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는 그리 심각하거나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adiaphora) 사활을 걸고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할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후 루터교회는 교회의 조형예술에 대해 초연한 입장을 고수했다. 자연스럽게, 한때 융성했던 문화와 재능있는 사람들을 교회가 수용하지 못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뒤러, 크라나흐, 그뤼네발트 등 세계회화사에서도 정점에 선 명인들이 그 맥을 잇지 못하고, 독일은 조형예술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교회는 훨씬 수준이 낮고 구시대의 전통을 고수하는 화풍에 의해서 제작된 그림들을 활용하는 입장이 되었다.

예술은 장기간 배려하고 투자하는 환경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알아서 하라는 것은 식으로 관심을 안 보이는 것은, 반대하는 것보다 더 나쁜 환경이 되기도 한다.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렘브란트나 고흐가 나온 것에 비해 루터교회의 예술가들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스위스 쯔빙글리의 주장
개혁자 쯔빙글리의 주장을 들어보자. 스위스의 교회개혁은 쮜리히에서 1519년 사순절,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기간에, 소시지를 나눠 먹으면서, 먹든 안 먹든 우리의 자유요 선택이라는 선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 쯔빙글리가 있었는데 먹지는 않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쯔빙글리가 그러한 시도를 지지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를 발전시켜 몇 차례 신앙고백으로 혹은 신학 저술로 입장을 밝혔다. 1525년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석”은 개신교의 첫 교의학 저술로 꼽힌다. 1521년 멜랑히톤의 “신학해제 loci communes”는 조직신학 교과서이긴 하지만 교의학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의 생각은 성찬론에서 더 직설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나온다. 성찬은 그 주체가 사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도 아니고, 교회공동체라 이해한 것이다. 사제가 정해진 지침에 따라서 거행하면, 하나님은 혹은 성령님은 자동적으로 끌려나오게 되느냐는 질문을 한다. 마치, 자판기 앞에서 적절한 과정을 거치면 수행되는 것처럼, 인간의 작동에 의해 하나님의 역사가 좌우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성찬은 그리고 예배는 철저히 모인 회중의 잔치일 뿐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임재하는지 안 하는지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2020년 한국교회의 사순절
한국교회의 신학적 스펙트럼은 매우 폭이 넓다. 아주 극단적인 주장들도 그 위치를 모른 채 발언하거나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주창자나 추종자들은 성경의 중심을 꿰뚫고 세계의 한복판에서도 통하는 생각이라는 착각을 갖고 있다. 사순절은 성경에 없는 절기이니 지키는 게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다는 사도의 권유를 새겨 들어야 한다.

11시에 우리교회의 본당에서 모이는 예배가 대예배이고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된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예배는 다양하고, 역동적이며, 소통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들만의 리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국교회 일부의 비상식을 통탄한다. 성전 제사를 절대시하던 유대인들은 포로시대에 회당예배와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았다. 제사의 틀이 공간에서 시간으로 전환된 것이다.

종교학을 배우던 시절 교수님이 통렬하게 지적한 것을 기억한다. “스위스로 휴양을 즐기러 간 가족이 있었는데, 아이가 식사를 못하게 되었다. 집에 식탁 옆에 자연스레 붙어 있던 십자가가 없으니, 감사드릴 수 없고 음식이 안 넘어간다는 것이다. 부모는 교회의 지침을 순전히 그리고 꾸준히 따랐는데...” 그 부모는 신앙교육을 제대로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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