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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宗敎狀況과 宗敎間의 對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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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01  21:5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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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多宗敎狀況과 宗敎間의 對話 

김종희목사(경신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졸업(B.Th), 교육대학원 졸업(M.Ed),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졸업(M.Div), 서울대학교종교학과 중등교사양성소수료, 메코믹. 장신 공동 박사원 졸업(D.Min)
Kyungshinjh@hanmail.net(논문 자료를 원하시는 분은 메일로 신청)

경력
경신학교 명예교목, 우리교단 교목전국연합회 명예회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장, 학원선교위원장 역임. 6.25참전.국가유공자,구국영웅, 육군6사단 제19연대 제대(육군보병제대), 논산훈련소 사병의집(현 장병의집)개척, 경신교회 개척, 경신중.고등학교 교목 38년 

맥코믹(시카코)신학대학원과 장신대 공동학위인  목회학박사 논문 (The Revitalizing Project Of The Religious Education In The Context Of The Multiple Religion At A Mission School) 을 요약하여 강의록으로 만든 내용이다.  필자는 이 논문을 쓰기 전에 서울대학교 임시교사 양성소에서 종교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코스로 1년간 공부한 것을 기초로 하였다. 이후 서울노회 산하 성서학원에서 '비교종교학' 이라는 과목으로 12년간 강의(8강)을 한 것을 요약 정리한 것중 하나이다.  

이 논문의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는 한국과 같은 세계적인 유례가 없는 다종교상황에서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대화해야하는데 특히 다종교상황에서 종교교육을 38년 한 사람으로 고민을 풀어보려고 한 것이다. 더 자료가 필요하신 분들이 있으면 나머지를 보내드릴 것이다. 종교적 진리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는 문제는 고대로부터 인간 마음을 괴롭힌 하나의 숙제였다.

오늘날 세계가 점점 하나로 가까워지면서 인류는 종교적, 문화적 다원화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따라서 진리의 一과 多의 문제는 그 어느때보다 인류에게 절박한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종교적 진리는 절대화 되는 성향이 있어 그 진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뿐이며 구원은 그 하나 뿐인 길을 통해서만 완벽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들 흔히 믿고 있다.

과연 그렇다면 종교 다원화 현상과 이 하나뿐인 진리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진리는 하나인데 길은 여럿이란 말인가. 아니면 오직 하나의 길만이 진리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여러 길이 결국은 같은 곳에 이르나 다소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종교도 종교인가? 에 대한 연구자의 고민의 산물이다.
 

세가지 신앙적 태도(信仰的 態度)
현재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통일된 답은 없다. 일반적으로 신앙의 태도와 입장에 따라 그 형태가 셋으로 구분돤다.

첫째는 유일주의적 태도(唯一主義-Exclusivism)
둘째는 단일주의적 태도(單一主義-Inclusivism)
셋째는 다원주의적 태도(多元主義-Pluralism)

부르는 사람에따라
유일주의(唯一主義)를 배타주의(排他主義) 혹은 획일주의(劃一主義), 절대주의(絶對主義) 혹은 보수주의(保守主義) 라고도 하고, 단일주의(單一主義)를 우월주의(優越主義), 단계주의(段階主義), 포용주의(包容主義),포괄주의(包括主義)라고도 하며, 그리고 다원주의(多元主義)를 상대주의(相對主義)적인 신앙태도(信仰態度)라고도 한다.
이 세 유형의 신앙태도를 차례로 검토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답을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는 유일주의적(唯一主義的)신앙태도-Exclusivism) - 은 하나뿐
유일주의적 신앙태도는 오직 한 종교만이 진리를 가르치고 그 종교만이 구원 혹은 자유에 이르게게 한다는 입장이다.이같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는 종교는 주로 셈족(Semitic)계통의 서양 유일신(唯一神)종교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이런 배타적 입장은 동양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셈족계통의 종교-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만일 기독교가 자기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할 때 물론 그 주장이 옳을 수도 있겠으나 그 주장이 타종교인에게 배타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타종교인도 함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 근거가 결여된 상태에서 주장되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가 그들의 경전인 성서를 근거로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한다면, 똑같은 방법으로 이슬람교도가 자기네 경전인 코란을 근거로 모하메드만이 인류 최종의 구원자라고 주장할때 어떻게 전자는 맞고 후자는 그르다고 판정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서 기독교 경전(성서)만이 올바른 하나님의 메시지요 나머지 경전들은 그렇지 않다고 자할 때 근거는 더디에 있는 것일까. 혹자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대답할지 모르겠으나, 남도 똑같이 믿음에 근거하여 다른 주장을 할 때, 내 종교를 믿는 나의 믿음만이 옳고 다른 종교를 믿는 남의 믿음은 그르다는 판단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내가 믿음에 근거했다면 남의 믿음도 똑같이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종교적 주장들이 흔히 배타적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주장의 근거를 믿음에 내세우면서 내 믿음은 옳고 남의 믿음은 그르다는 편파적 태도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없이는 구원에 이르기 어렵다"는 믿음의 순기능과 "그 믿음이 바로 타종교인을 배타적으로 만든다"는 믿음의 역기능간의 딜레마에 부디친다. 즉 대부분의 종교에서 믿음이 신앙의 필요불가결의 요소로 강조되고 있고, 또 믿음이 신앙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이 바로 현재 믿고 있는 자기 종교의 절대성과 최고성이요, 따라서 믿음이 종교인을 배타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또한 흔히 셈계통의 종교 특히 기독교를 배타적경향이 강한 종교라고 하지만 그것은 타 종교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종교만이 참이라는 자신의 신앙고백에서나온 결과이며, 또한 인류를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이끌어 보겠다는 뜨거운 정렬이 함께 있기대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볼때 과연 절대적 믿음과 배타성은 필연적으로 함께 하는 것인가? 자기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함께 남의 종교를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일까?

유일주의(唯一主義) 신앙태도의 장단점(長短點)
이 태도는 '절대진리'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갖고 있으나, 비타협적이고 남의 신앙을 무시, 혹은 이단시하는 위험이 있다.

둘째는 단일주의적(單一主義的)신앙태도(Inclusivism)-많은 길, 최종은 하나
단일주의적(포괄주의) 신앙태도는 하나의 특정종교가 최종적 혹은 최고의 진리를 갖고 있고, 다른 종교는 그 최종적 진리에 이르는 부분적 혹은 과정적 진리를 갖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신앙태도는 성격상 첫번재 유일주의와 다음에 언급되는 세번재 다원주의의 중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단일주의(포괄주의)는 오직 자기 종교만이 진리라고는 하지는 않지만 자기 종교를 최우위에 놓는, 역시 자기 중심적 요소가 있어 한편으로는 배타주의와 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열을 가리면서도 남의 종교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어 다원주의와도 통한다. 전통적으로 인도계통의 종교들(불교,힌두교등)이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어느 종교가 배타적이다 포용주의다를 말할때에는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배타적이란 말에는 속이 좁고 이기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있는데 반해, 사실은 처음부터 남의 종교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 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자신의 신앙고백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특정 종교의 입장이 진리일 가능성도 전혀 부인할 수는 없다. 최후의 심판일이 도래해서 인류의 모든 종교가 심판을 받을 대 오직 그 종교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었다라고 결정이 난다면 지금의 그 종교의 입장은 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적 입장이었다고 말해질 것이다. 따라서 명백히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두고 배타주의라는 라벨을 붙이는 것은 부당할지도 모른다.
포괄주의가 되었던 배타주의가 되었던 문제는 늘 상대 종교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상대종교가 자기보다 못하다든가 아니면 잘못된 종교라고 급히 판단하는 데 있다. 물론 어떤 종교도 잘못된 점이 있을 수 있다. 또 전체로서의(in totality)종교 A가 B보다 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종교간 비교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할 수 없으며, 건전한 비판이라면 상호 비판을 통해서 각 종교가 피차 성장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호 비판이 편견이 배제된 속에서 정확한 지식을 토대로 행해질 수 있는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어렵다면 차라리 다원주의자들이 충고하는대로 성급히 판단하려 하기 보다는 우선은 이해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더 바람직 스러울 것이다.
포괄주의가 자기중심적이라는 면에서는 배타주의와 크게 다를 것이 없겠으나, 인도계통의 종교 특히 불교의 포괄주의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이 하나 있다.
즉 불교등 인도계통의 종교의 이론 중에 인간의 정신세계는 미숙한 단계로부터 성숙한 단계까지 점진적으로 다양한 단계가 있으니, 구원의 가르침도 개인의 정신단계에 알맞게 가르쳐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점진적 구원관은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방편설(方便說)로 나타나며, 특히 중국 불교에서는 교상판석(敎相判釋)으로 후일 발전된다.(교상판석=인도에서 수백년 동안 형성되어온 경전을 들여온 중국으로서는 제대로 정리하기라 어려웠다. 즉 근본불교와 소승불교 그리고 대승불교가 이루어진 후 수입되었으므로 대소승 경전이 섞여 있있다. 그러므로 수입된 경전을 판별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기와 내용으로 판별하는 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한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방편적 포괄주의는 분명 타종파, 타종교를 이단시하는 배타주의에 비하면 훨씬 원만하고 포용적인 입장임에 틀림없다. 천태종의 교상판석과 같은 점진적 구원관은 심리학적으로도 상당한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불교 내에서도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을, 진언종에서는 대일경을 각각 불타의 최고의 가르침으로 내세우면서 타종단의 소의경전에 비해 자기 종단의 소의경전이 수승함을 주장하고 있다.(우월성을 주장함)
그리고 불교인들은 불교가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심오한 종교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자기 중심적 포괄주의이다.
전통적으로 배타주의적 입장을 취했던 기독교도(측히 로마가톨릭에서) 최근에는 한결 완화된 포괄주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칼 라너(Karl Rahner)인데 그의 입장은 '신(神) 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보편적 구원의지는 우리 인간의 본성에 "초월적 계시"로서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도 이러한 초자연적 은혜로움이 없다고 부정할 수 없다' 는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도 남을 위한 사랑 속에서 신의 은혜를 가슴 깊이 받아들인 타종교 사람들을 "익명(匿名)의 기독교인"(anonymous Christians)이라고 불렀다.
이는 말하자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자의적으로 기독교의 이름을 갖다 붙이려는 뜻이 아니고, 타종교를 단순히 이교도로 여기기보다는 같은 신의 의지가 그들 속에서도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불교의 포괄주의에서 본 것과 같이 칼 라너(Karl Rahner) 역시 기독교를 구원의 '완성'으로 봄으로써 최종적으로는 자기중심적 포괄주의적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신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고 있지만, 그 구원은 최종적으로 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며, 따라서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남는것보다는 적극적인 참여 등을 통한 역사적인 독교인이 되는 것이 팔요하다고 함으로 불교에서와 같은 자기중심적 포괄주의를 넘지 못하고 있다.

셋째 다원주의 (多元主義)적 신앙태도-Pluralism=Parallelism-길도 목표도 각각 다르다.(One God many Christ)

앞에 소개한 단일주의와 포괄주의에 반대하여 나온 입장이 다원주의이다. 여러 종교의 공존(共存)을 인정하는 다원주의 사상 자체는 고대부터 존재했던 것이지만, 전 지구적(global) 차원에서 모든 종교의 공존을 주장하게 된 것은 극히 현대의 일이다.
보다 정확히는 단일적 입장의 기독교를 종교로 가졌던 서구인들이, 특히 신학자들이 동양의 문헌들을 연구하면서 다른 종교에도 절대 신념 체계가 있음을 앎으로 세계 여러 종교들의 가치를 경험하게 되고 종래 그들이 가졌던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그리고 불교등 동양의 포괄주의에도 비판을 가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다원주의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히는 죤 힉(John. Hick-기독교목사) 에 의하면, 앞으로 인류는 전통적 자기 중심적 종교관에서 벗어나 코페르니쿠스적(copericus) 세계관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기 종교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던 과거의 종교관은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던 프톨레미적 세계관인(claudius-ptolemy)데 반해,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은 모든 혹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다시 말해 모든 종교는 보다 높은 절대자를 같이 향해 같이 돌고 있다는 범인류적 세계관이다.
존 힉(John. Hick)에 의하면 모든 위대한 종교들은 동일한 궁극적 실체에 대한 인류의 다양한 반응이며, 종교간 다름이 있는 것은 궁극적 실체를 경험하는 인간의 의식(意識)이 각기 다른 역사적 문화적 전통 속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각 종교들은 서로를 적이나 라이벌로 보지 말고 상호(相互) 배울 수 있는 동반자(同伴者)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힉은 궁극에는 모든 종교가 한 형제라는 것을 깨닫고 종교들이 서로 협력하며 교류하는 하나의 이상세계가 올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힉은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의 이론적 뒷받침을 위해 "지구적 신학" (global theology)의 성립을 주창하고 있다.
힉의 주장에 의하면 {神學 즉 지구적 신학이란 "영원한 一者"(the Eternal One)가 각기 다른 문화(文化)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인지되었는가를 모든 종교의 협력속에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힉은 종래 그리스도(christocentric)중심의 기독교의 신학이 아니라 신중심적 신학(Got centric theology)으로 전환(轉換)할 것을 주장하며, 그리스도 자신이 신 중심적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또한 서구 종교의 배타주의적 입장뿐만 아니라 동양 종교의 포괄주의적 입장도 비판하고 있다. 즉 타종교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기 종교를 여러 종교 중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는 포괄주의적 입장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자기중심주의(self-centrism)일 뿐이기 때문이다.

* 참宗敎의 基準과 救援 혹은 自由의 定意
죤 힉(John. Hick)은 다원주의(多元主義)가 상대주의(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종교간에 우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적 현상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으로 "인간의 구원 혹은 자유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가?"를 제시하고, 구원 혹은 자유의 정의(定義)를 "자기 중심주의에서 리얼리티 중심(Reality-centeredness)에로의 전이(轉移)에서 생기는 보다 나은 인간존재의 구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Reality는 實在 또든 神을 의미한다.

評價와 問題

존 힉의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태도는 분명히 전통적인 자기 중심적 종교관들에 비해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의 종교적 상황(다종교)을 비추어볼 때 분명 다원주의는 시대에 적절한 현대인의 종교적 태도이며, 상호간 이해하고 대화하자는 다원주의자들의 태도에서 전통적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자들이 분명 배울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원주의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다원주의적 입장과 실제의 신앙생활 사이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다음과 같은 문제 들이 있다.

1. 신앙은 하나의 대상을 선택하고 그 한 대상에 절대헌신(絶對獻身)하는 성격이 있어 불가피하게 "이것도 저것도(both-and)"의 다원주의 논리가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ether-or)"의 배중률(排中律)의 놀리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면 마치 여러 남자중에 한 남자(여자)를 선택하고 선택한 후에는 그 남자를 최고로 알고 자신을 바치는 여인처럼 신앙은 한 종교를 선택한 후에는 그 종교에 오로지 충실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다른 종교에게는 불가피하게 관심갖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마치 한 여인이 한 남자체 충실하다보면 다른 남자에 관심갖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2. 信仰이 選擇의 問題라면 선택의 과정에서 (우열을)比較 判斷하지 않을 수 없다. 다원주의의 입장에서는 그 우열을 가리기가 불가능하며 상호 비교 판단보다 상호 이해하고 배우려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함하나, 그러나 학자가 아닌 이상 일반 대중들은 언제까지나 타종교와 대화하고 배우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종교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 안의 여러 파, 여러 의견 사이에서도 비교 판단을 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하는 實存的 決斷에 부딪치게 되는데 정상적으로는 보다 깊고 옳은 길을 택하기 마련이며, 나머지 길은 자연히 排除될 수 밖에 없게 된다.

3. 信仰은 絶對 最高의 價値를 追求하며 또한 普遍的 價値를 추구한다. 또한 신앙이 추구하는 가치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 혼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전 인류를 상대하는 普遍, 絶對的인 것이다.
따라서 "이 좋은 것을 나만 가질 수 없고 남도 같이 나누어야한다"는 구원의 보편 의지는 宣敎 혹은 改宗의 論理로 發展된다. 그러나 다원주의의 입장에서는 여러 길이 동등한 길이요, 서로의 신앙을 상호 존중하자는 논리이기 때문에 선교 혹은 개종의 논리가 설 자리가 없다. 물론 상대의 종교를 깊이 이해하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행해지는 선교나 개종의 태도는 지양도어야 하지만, 선교의 본래 취지인 "좋은 것을 모두 함께 나누자"는 선의의 宣敎意志는 尊重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은 선택적 성격을 가졌고, 그리고 신앙이 선택인 이상 愚劣의 比較 判斷이 不可避하며, 또한 선택한 가치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믿기 때문에 宣敎의 論理도 成立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 문제들이 다원주의 모델에서는 '상호존중'이라는 입장에 가려 未解決의 문제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종교간 상호 이해와 협력이라는 이상과 앞서 열거한(세가지)실제적인 신앙의 문제들을 어떻게 調和시킬 수 있는 냐는 課題를 지니고 있다.

宗敎 葛藤의 原因 과 對話의 임하는 態度

* 宗敎는 絶對信念體系 *
인간의 정신활동의 결과인 문화현상(文化現象)으로서의 종교(宗敎)를 우리는 절대신념체계(絶對信念體系) 내지 궁극적 종합가치체계(窮極的 綜合價値體系)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종교(宗敎)는 정치도 경제도 예술도 철학과 과학도 그 무엇도 그 존재의 절대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다만 그런 것들은 종교에 봉사 할 수 있는 相對的 價値만 認定하려 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종교 이외에 다른 문화형태(文化形態)에 대하여만 상대방의 절대성을 인정치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他宗敎)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갖는다. 한마디로 타종교에 대한 자기종교의 절대성 내지 優越性을주장하게 된다.

종교다원현상(多宗敎狀況)

한 사회에 종교가 하나만 있든가 아니면 강력한 주도적(主導的)위치에 있는 종교가 있는 경우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아니하지만, 현재 한국사회와 같이 여러 宗敎가 共存하는 경우에는 모든 종교들이 다같이 자기절대성(自己絶對性) 내지 자기우월성(自己優越性)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분리신화(分離神話)
종교적 絶對確信으로서의 信仰이 인간에게 그 무엇보다 확고한 자기정체감(自己整體感-self-identity)을 심어주고 그 무엇보다 흔들리지 아니한 삶의 統一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신앙이야 말로 가장 성숙한 내면적 삶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그의 정서와 사고와 윤리적 결단, 이 모든 분야에서 종교인은 높은 가치기준 위에서 통일된 삶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이 종교인으로 하여금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권위를 지니게 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자기 정체감이 이처럼 종교인의 內面的 成熟과 삶의 통일을 이룩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에 대한 比較意識을 동반할 때 危險한 態度를 露出하기 시작한다.
즉 自我正體感이 품고 있는 自己存在의 價値에 대한 確信은 언제나 특정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동반하고 있다. 따라서 정체감의 확신이 크면 클수록 자기존재의 가치에 확신이 높아지고 자기의 삶을 통일시켜 주는 근거로서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한 확신이 커진다. 이러한 내면적 확신이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優越感을 갖게 한다.
이러한 우월감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것이지 객관적인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종교적 확신이 우월감으로 전환되기 시작하면 자기로부터 타인을, 자기 종교로부터 타종교를 분리(分離)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사실 정체감은 그 자체가 자아를 내가 아닌 타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 分離現像은 내면적으로는 自己成熟의 基本條件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외적으로는 自己優越感을 갖게 하는 두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와같이 종교적 정체감의 분리현상이 우월주의와 결합될 때 첫째, 자기 종교 밖의 사람들을 저주의 대상이나 적으로 여기는 단죄주의(斷罪主義). 둘째, 타종교인들에 대한 제국주의적(帝國主義的) 태도를 지닌 지배주의(支配主義), 셋째, 타종교인들을 자기 종교의 세계관으로 계도하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후견주의(後見主義-patronism)로 나타나게 된다.
사상적으로 경직된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이 타종교인들에게 단죄(condemnation)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흔히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 비롯된다.
宗敎狂信主義者들의 이와 같은 반지성석(反知性的) 태도는 타종교인들과의 이성적 의사소통과 건전한 사호관계의 문이 源泉的으로 封鎖된다. 따라서 타종교에 대한 반지성적 단죄주의가 사회의 분리 분쟁을 직접적으로 야기시키는 導火線이 되는 것이다. 심하면 이같은 분시신화에 빠지면 宗敎戰爭까지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葛藤과 摩擦
자기 우월성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종교들 상호간의 갈등과 마찰을 초래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놓쳐서는 안될 점은 바로 종교는 본질적(本質的)으로 자기 우월성 내지 자기절대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多宗敎現狀 자체가 종교간의마찰과 葛藤의 基盤이 되는 것이다.

* 신앙의 확신(確信)과 반지성적(反知性的)인 태도 는 區分되어야 한다.
자기 절대성에 대한 확신이 없는곳에는 이른바 신앙(信仰)이 있을 수 없다. 신앙이 없는 곳에 종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가 있는 곳에 자기절대성에 대한 확신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現代의 지성(知性)은 최소한도 타종교인들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신앙에 대한 확신과 자기 절대성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타종교의 자기절대성에 대한 확신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 자체가 스스로의 절대성을 양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한마디로 종교간의 대화를 유도하게 된다.

* 종교간의 對話의 유의점*
상대방의 이해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지름길. 교대화(宗敎對話)는 한마디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태도로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과 같은 다종교상황(多宗敎狀況)하에서 상대방의 이해는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제공해 준다.
예를 든다면 외국어를 배우면서 비로소 모국어의 언어적 특성을 그 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보다 순수한 모국어의 구사와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는 그 자체가 자기 종교와 스스로의 신앙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覺性하는 종요한 契機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는 갈등 해소의 가장 직접적인 대안(代案)일 뿐만 아니라 自己啓發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들이 서로 대화에 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종교만이 절대적이요 최고의 가치라는 반지성적 獨斷論을 넘어서 자기성찰(自己省察)에 이르는 知性的 文化態度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뜻하는 것이다.

종교대화에 임하는 態度
시대적 요청-종교간의 대화는 오늘의 문화사회 정황에서(다종교상황) 크게 요청된다는 사실과, 진정한 대화는 가능하다는 전제 위헤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

종교대화에서 주의할 점
종교간의 대화는 세계적으로는 19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교대화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으며, 우리나라 국내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구체적으로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모두 종교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와 확신위에서 전개되어 왔다. 따라서 대화에 있어서 유의해야할 점은,

1.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기 절대화의 태도를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는 점이다.
2. 종교는 모두 같다는 낭만적인 태도도 문제이다.(정신적 이중 멍에)
서로 다른 종교인이 대화를 한다는 것은 타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자기종교가 절대가 아니고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라고하는 자기 종교의 歷史的 相對性을 인정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자기종교에 대한 절대헌신의 필요를 느끼게 된다. 즉 자기 신앙의 상대성과 자기 신앙에의 절대헌신을 동시에 받아들이지 아니할 수 없는 精神的 二重멍에를 대화에서 느끼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기 절대화의 태로를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 점은 다종교 상황에서 상호갈등과 마찰을 불가피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보았다. 따라서 多宗敎狀況은 宗敎對話를 要請하게 된다. 종교대화는 시대적 요청이라는점에서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다음으로 대화는 獨白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없다. 정신적 이중멍에 즉 상대방종교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자기종교의 절대성을 확신해야 하는 어려움을 받아들일때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는 이 어려움을 받아들인 주체자와 주체자, 곧 신앙인들 사이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의 자세는 첫째 타종교와의 나의 종교와의 差異를 인정하는 것과, 둘째 비록 그 교리와 역사적 전통은 다르지만 대화에 응하는 상대방 종교인은 나와 같이 정신적 이중멍에를 지는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 이 두가지으 각성을 수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대화는 첫째 시대적 요청 둘째 정신적 이중멍에의 수용에 따르는 자기 결단, 세째 타종교와 자기종교의 차이에 대한 각성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이 셋을 합하여 우리는 知性的 現實主義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종교대화는 이 지성적 현실주의에 의하여서만 가능하다. 지성적 현실주의자들은 고민하고 극복하려는 타종교인의 신앙 태도에서 형제애를 느끽게 되고, 시대 사명의 인식과 共同努力에서 同伴者의 友誼를 나누게 된다. 이때 비로소 종교인들 간에 그들이 각기 믿고 獻身하는 종교들의 差異點과 共通點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相互尊重과 協力의 길을 摸索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는 敎理나 理念에서부터가 아니라 종교인의 兄弟愛에서부터 始作되어야 할 것이다.

3. * 韓國의 많은 宗敎 *
한국 사회는 다종교상황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종교학자 버거(Berger)와 같은 대부분의 서구 사회학자들이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할 때 그것은 대체로 개신교와 개신교 교파들의 공존을 의미하며 기껏해야 카톨릭, 유대교의 공존상황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韓國의 狀況은 철저한 多宗敎, 多敎派, 多宗派狀況의 전형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우선 크게 불교, 유교, 개신교, 카톨릭, 원불교, 천도교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共存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敎派들이 그들 종교 가운데서 다시 나뉘어져 공존하고 있다. 불교의 경우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등 18개 종단으로, 개신교의 경우에도 예장(통합),예장(합동), 기장 , 예감,기감, 예성,기성 등 94개 교단으로 나누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동학계열, 정역계열, 증산계열(30개), 단군계(30개), 유교계열, 무속계열(30개), 기독교계(60개), 불교계(70개), 계통불명(30개) 등 수많은 신흥 종교들의 분파를 보면 그 숫자가 조사된 것만도 무려 393개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다가 민간신앙(民間信仰)까지도 교려한다면 한국 사회는 가히 종교의 전시장(宗敎展示場)이며, 宗敎 多元主義가 가장 현저하게 보여지고 있는 사회라고 하겠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宗敎 自由, 政敎分離)
다종교사회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교분리는 국교(國敎)를 부인하고, 특정종교에 대한 우대나 차별대우를 금지하며, 국가의 종교적 활동을 금지하는 세가지 원칙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원칙들은 국가가 종교적 중립을 지켜야 하고, 국민의 영성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원칙들은 역(逆)으로 모든 종교들이 국교나 특별한 優待를 받는 위치를 차지하려는 경쟁적 노력보다는 共存의 관계질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선교의 자유를 다종교사회에서 얼마나 조화스럽게 行事하는 가의 정도가 그 종교의 문화적 성숙도를 말해준다.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라고 규정한 종교에 대한 헌법정신은 국가는 적극적으로 종교적 활동을 행하지 않아야 하며, 한편 특정의 신앙을 가진 사실을 이유로 차별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신은 나아가서 신앙의 자유가 각 사람들에게, 포교의 자유가 각 종교들에게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고 종교뿐만 아니라 종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절대신념체계와 종교간의 갈등(絶對信念體系와 宗敎間의 葛藤)
다종교상황(多宗敎狀況)은 개인들엑게 宗敎的 선택(選擇)의 폭을 넓혀주는 이점이 있다. 인간의 가치관이 다양하듯이 다양한 종교적 가치들의 공존은 다양한 개인들의 요구와 관심을 다양하게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곧 인류역사가 지닌 지성과 지혜의 전통을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러 절대신념체계와 가치관들이 공종한다는 것은 다원가치사회를 의미하고, 따라서 모든 가치관들 사이의 새로운 關係秩序를 啓發하고 유지하게 될 대 開放社會를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절대신념체계가 여럿이 공존하는 다종교 상황은 다원절대가치상황(多元絶對價値狀況)을 뜻한다. 즉 제각기 자기 종교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주장을 하는 이런 다가치상황(多價値商況)은 그 안에 사는 개인의 정신적 내면 세계에 價値觀의 混沌을 안겨준다. 예를 들어서 많은 한국인이 필요에 따라 불교 사찰에 갔다가 기독교 교회에 번갈아 가서 똑같은 동기로 기복(祈福) 행위를 하면서도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아니한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는 개별 종교집단들이 경쟁적으로 자기 확장 내지 무분별한 전교(선교,포교)활동을 전개할 때 불가피하게 마찰(摩擦)이 되따르게 된다. 몇가지 사례를 든다면 과거에 대통령이나 중요 인사의 사망시에 개신교, 카톨릭, 불교, 그리고 때로는 유교의 종교 의례들을 모두 행하도록 된 일이라던가, 각 종교마다 종교적 휴일을 얻기 위해 충돌한일, 국정교과서의 기독교적 성향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 단군성전 건립에 대한 기독교의 반대 등을 들 수 있고, 그 외에도 사소한 갈등과 대립은 생활 가운데서 흔히 나타나고 있다. 최근 초등학교 건물 벽면에 다보탑 석가탑벽화 건축이 문제가 되어 수지기독교연합회가 11월11일에 연합기도회를 갖고 지속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2001년 10월27일자 목회자신문11쪽에 <초등학교에 특정종교상징 세워-성북초등학교 건물벽면에 건축-문화재로 교육적효과 있다주장>

이와같이 각 종교가 각각 자기 종교가 유일하고 최고의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대중을 하나님의(神)의 이름으로 구원하기 위새서는 순교를 각오한 선교활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중생의 마지막 존재가 제도(制度)되기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포교에 헌신하겠다는 보살정신(菩薩精神)으로, 불신자뿐만 아니라 타 종교를 가진 사람까지 개종을 시켜야 한다는 종교적 절대신념체계의 성격상, 심하면 종교전쟁까지도 불사하는 모순된 결과를 빚어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예는 과거30년 전쟁등 현재에도 에이레의 가톨릭교인과 새신교인들, 인도의 힌두교인과 시크교인들, 레바논의 이스람교인과 기독교인들,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교인과 이라크의 순니파 이슬람교인간의 유혈충돌 등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최근에도 자기들의 신인 알라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바 최근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 유태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종교적 절대가치가 공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한 이해가 될 것이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불교, 기독교, 유교, 사머니즘, 해방후 신흥종교로 그 세력을 확장해가는 민족종교 등 의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경우에도 이러한 충돌의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결과적으로 종교가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긍적적인 기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해체 또는 분열의 원인이 됨으로써 종교의 否定的인 逆機能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확대시키게 된다

종교자유와 대화의 필요(宗敎自由와 對話의 必要)
우리나라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모든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종교의 자유는 信念의 자유와 宗敎行爲의 자유 두 가지로 구분된다. 종교적 신념의 자유는 내적 良心의 自由가 그 대표적 예이다. 對社會的 宗敎行爲는 의례, 집회결사, 종교교육, 그리고 선교활동 등이 있은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傳敎(선교, 포교)이다. 다라서 종교행위의 자유는 실제로 전교(선교. 포교)의 자유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종교행위의 자유는 그 자체가 대사회적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의 일반규범의 범위 안에서 행해져야 하는 制約을 받게 된다. 특히 앞서 언급한것과 같이 현대의 다종교사회에서 선교의 자유가 경쟁적으로 표출될 때 종교간의 마찰위험이 따른다. 오늘날 종교적 마찰이 사회 전체를 붕회시키는 사례를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중교가 무절제한 자기 膨脹主義를 극복하고 종교간의 대화를 통한 새로운 관계질서를 모색함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종교 시장(世界宗敎 市場)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다종교상황이 사회.문화 현실의 특징이 되어있다. 漢文文化圈을 대표하는 유교, 印度文化를 대표하는 불교, 그리고 유태교와 이슬람을 포함한 中東과 西洋社會의 유일신관(선교열이 강함)을 대표하는 기독교와 같은 이른바 世界宗敎들이 공존하는 이른바 世界 三大宗敎와 韓國 三大宗敎가 공존하면서도 어느 하나도 현재 우리 사회의 문화가치 체계를 主導하는 위체에 있지 못하고 있는 獨特한 狀況이다.
이와같이 세계 삼대종교와 한국 삼대종교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先史時代에서부터 내려오는 巫俗 내지 샤마니즘과 19세기 가치관의 격변기 이후에 나타난 수 많은 民族自生宗敎들이 공존하고 있는 宗敎博物館을 방불케 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처한 종교문화 정황이 空間的으로는 세계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東西洋의 종교전통들과, 時間的으로는 先史時代부터 오늘에 이르는 모든 종교전통요인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종교시장상황-宗敎市場狀況)

韓國에 있어서의 宗敎葛藤의 潛在力
우리는 역사적으로 다종교상황에 살아왔지만 놀랍게도 커다란 마찰은 피하면서 지내온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정신적 관용성을 인정하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하여 유교와 불교, 유교와 기독교의 분쟁과 마찰의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동시에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정신사(精神史)에는 相互摩擦의 위험과 寬容共存의 지혜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적 다종교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절대가치체계가 한국이라는 같은 상황에서 그 성격상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데 대한 이해가 부족하든가. 일제통치하와 해방, 한국동란, 그후 정치적 변화로 인한 사회적 변동의 그늘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宗敎間의 潛在的 小康狀態를 안일하게 받아들인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잠재적 위험 속에서부터 어떻게 상호관용의 지혜전통을 재확인하고 생활화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 아닐수 없다.
종교간의 대화는 이 시대의 특히 한국 사회의 시급한 것이며 불가피한 과제이다. 문제는 현대의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 각 종교의 신봉자들이 다른 종교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자기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매우 힘겨운 實踐的인 問題와도 직결된다.

* 相互共存의 智慧-相互寬容의 智慧로 理想的 社會 實現 *
다종교상황에서 상호공존의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곧 한 사회 안에서 절대가치들이 상호관계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한마디로 다원가치. 개방사회를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원.개방사회, 이는 곧 現代社會의 이상(理想)이며 指向이기 때문에, 한국적 다종교상황에서 절대가치들 상호간의 관계질서를 창조한다는 것은 곧 우리 사회를 역사적 유례가 없는 成熟된 現代社會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현재 한국의 다종교상황은 상호 마찰의 파괴적 가능성과 유례없이 성숙된 현대사회로의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 있는 갈림길에 와 있다. 여기에 종교대화의 문제가 한국사회발전이나 개별 종교의 바람직한 성숙을 위한 最大의 課題임을 實感하는 것이다.

대화(對話)의 자세(姿勢)--(존중과 이해-尊重과 理解) - 애정적 자세
세계와 한국의 종교적 다원사회를 직시하고, 서구의 신학과 발을 맞추어 "대화"라는 형식으로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미국에서는 100년전 시카고에서의 종교박람회, 한국에서는 60년대 이후 일부 교계지도자간에)
대화는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데서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자신이 성장하며 나아가서는 자신의 개혁과 더 나아가서 제3의 발전에 대한 기대까지 포함할 수 있는 것이 대화이다.
대화의 목적은 이해이다. 종교간의 대화는 상대방을 제압한다든지 서로 완전한 합의에 이르거나 어떤 우주적. 보변적 종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대화에서 바라는 이상은 자신의 언어로써 자기 고유의 통찰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서로간의 무지와 오해의 深淵에 다리(架橋)를 놓기 위한 意思疏通에 있다.
토착화 신학 등 풍유신학으로 유명한 신학자 유동식 교수는 이런 대화를 多元主義的對話論이라고 했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대화론의 배후에는 모든 종교들이 자기종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종교의 우주는 신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이른바 <코페르니크스적 전환>의 인식이 깔려있다. 결론 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종교는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종교를 무속까지를 포함해서 同一 선상(線上)에상서 보는 말하자면 타 종교에 대한 애정적인 자세가 있어야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종교대화의 이유* * 宗敎 對話의 理由 *

1. 정치적(政治的) 이유(理由)
세계는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하나의 세계"(하나의 촌-global village(world))가 되었다. 세계의 모든 인류는 공동의 운명을 걱정하고 인류 공동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양과 서양, 한국과 외국, 종교와 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이 "이에는 이로써"대하는 태도보다는 사랑, 자비, 인(仁)으로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다. 21세기 로빈슨 크루소는 존재할 수 없다.

2. 인류학적 이유(人類學的 理由)
종교간의 대화는 시대적인 당위성(當爲性)일 뿐만 아니라 人間的인 당위성이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類似性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유사성은 어떤 규범적인 가치 판단으로서는 절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과 고대인, 한국인과 외국인,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는 여러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유사성이 있으며, 이렇게 유사서을 가진 인간이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를 추구하는 종교에도 언제나 差異點과 더불어 類似性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사회학적 이유(社會學的 理由)
종교는 단순한 사회의 부산물은 아니더라도 다양한 사회적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신적인 바탕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돕고 사회에 기여를 할 수 있어야 된다. 따라서 종교가 진정으로 사회에 기여를 하려면 종교와 종교간의 협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례는 모든 종교가 대의(민족독립)를 위하여 단합했던 3.1운동에서 歷史的 事例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4. 종교학적 이유(宗敎學的 理由)
모든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일종의 우월감을 갖게 마련이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이나 집단에 있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자기 주장은 극히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이다.(폴틸리히)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면 먼저 타인의 종교를 알아야 한다. 남을 모르는 나의 장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남을 아는 것은 나를 알 수 있는 필요 조견이 된다.( 비교종교학자 요아킴 바흐(Joachim Wach)가 "하나의 종교를 알면 모든 종교를 안다"는 입장이 아니라 "모든 종교를 알아야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하나의 종교를 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5. 신학적(神學的) 이유(이유)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우물안의 개구리는 언젠가는 밖으로 나와야 하고, 밖으로 나온 개구리는 다른 개구리와 함께 생활을 해야 된다. 종교학자 바흐는"기독교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민들어지는 것"(Hhristians are not born, but made)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화를 위한 신학적 태도 * 對話를 위한 神學的 態度
(세가지 信仰態度와 관련)


Ⅰ. 극단적인 배타주의(極端的 排他主義-an extreme exclusivism)를 피할것.
종교간의 대화를 전혀 불가능한것으로 보든지 혹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종교의 진리를 바탕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배타주의(an extreme exclusivism)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질리는 여러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Truth is many-faceted)진리를 독점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언어의 해석은 불완전한 인간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유일한 해석"이란 있을 수가 없다.

Ⅱ. 극단적인 포괄주의(極端 包括主義-an extrem inclusivism)를 주의할 것.
모든 종교를 받아 들이되 최종적인 구원은 자기 종교에 있다는 자기중심적인 관용주의이다. 이 주장은 모든 종교는 같다는 종교적 상대주의에 빠지기 쉽고 자기 우월감에 도취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Ⅲ.다원주의(多元主義-pluralism)혹은 병행주의
기독교의 사랑(愛)이나 불교의 자비(慈悲)나 유교의 인(仁)이 결국에는 만날쑤 있는 "비슷한 길"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하나의 저마다의 종착역을 행햐서 달리는 평행선이라고 하는주장-이 주장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하고, 존중하고, 가치판단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등 혼합주의와 절충주의를 동시에 배격하며, 종교간의 경계선을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대화를 하는 장점이 있으나 지금까지 종교는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피차 영향을 끼침으로 성장해왔다는 역사적인 사실과 만남이 없이는 개인이나 종교는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 따라서 다원주의 또는 병행주의의 주장에 의하면 개종이란 있을쑤 없다.(즉 개종까지도 각오하는 열린 대화가 아니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Ⅳ. 활동적 복수주의(活動的 複數主義-a dynamic pluralism)적 태도가 가장 바람직한 태도이다.
종교간의 대화의 가장 바람직한 태도로서 이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다양성과 종교경험의 다양성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활동적인 복수주의란 상호간의 아무 관련이 없는 복수현상(an unrelated plurality)이나 단일적인 동일체(a monolithic unity)를 내세우는 양극단의 입장을 동시에 배격한다는 뜻이다. 한 종교의 완전한 승리와 모든 종교의 완전한 합의를 다같이 물리치고, 모든 종교가 서로 차이점과 유사점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다른 종교를 나의 종교에 대한 "선생님"으로 인정해서 배워 나갈 수 있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승리(victory)나 통합(unity)이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를 추구하고 그 이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활동적인 복수주의이다. 종교는 만나야 한다 그러나 정체된 만남이 아니라 활동적인 상황에서 서로 만나야 한다.
위의 네가지 태도는 어디까지나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단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첫째보다 둘재가 둘째보다 셋째가 더 밞직한 태도이며 가장 바람직한 태도가 넷째번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對話를 위한 前提 條件 *

종교와 종교와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어서은 안된다. 단순한 만남(meeting)은 어긋난 만남(mismeeting)이 될 수 있기대문이다. 상대방을 관찰(Look)하면서도 진실로 쳐다보지(see)않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도(hear) 경청(listen)하지 않는 상태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철학을 제창한 부버(M. Buber)의 주장과 같이 마치 "혼자있음(to be alone)의 고독이 "같이있음의(to be together)고독보다 차라리 견디기 쉽고, 군중속의 외로움이 개인의 외로움보다 더욱 철저한 것과 마친가지이다.
우리는 종교와 종교의 만남이 엉터리 만남, 어긋난 만남, 독백의 향연(feast of monologues)되기 쉽고 또한 실제를 그렇게 끝나는 경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종교와 종교의 만남이 진정한 만남, 결실의 만남, 대화의 향연(feast of dialogues)이 되려면 어떠한 法則을 前提로 삼아야 한다.

1. 다른 종교에 대하여 성급한 가치판단(價値判斷)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타인의 종교를 알기란 그리 쉬운것이 아니며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만남은 동위선상(同位線上-horizontal)의 만남이기 때문에 모든 가치판단을 정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경청하는 마음의 개방성과 상대방을 신뢰하는 믿음의 관용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성서적인 종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모든 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이다. 역사속에 한 종교가 이 모든 신앙을 혼자 다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할 종교는 없다는 말이다) 타 종교를 인정하나 最終的으로는 자기 종교뿐이라는 包括主義를 배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종교간의 성급한 구별(區別)을 삼가야 한다.
동양의 주관주의와 서양의 합리주의, 중국인의 대류성과 일본인의 섬나라 근성, 한극적인 상황과 미국적인 상황은 그리 쉽게 그리고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병행주의를 배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란 지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감정적인 행위이며 영혼의 행위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행위이기때문이다. 종교간의 진정한 만남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차이점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불교의 자비나, 기독교의 사랑, 유교의 인을 비교하면서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특정종교의 개념을 가지고 모든 타종교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불교인을 잠재적인 기독교인(potential christians)으로 보거나 기독교인을 잠재적인 불교인(potential Buddhists)으로보는 기독교인과 불교인의 독단을 버려야 한다.

3. 종교간의 유사성(類似性)과 차이점(差異点)을 (인정)認定
성급한 판단이나 성급한 구별을 짓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제나름대로의 진리 주장을 내세우는 모든 종교의 유사성(類似性)과 차이점(差異点) 을 동시에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유사성만 내세우면 공허한 보편주의(emty universalism)가 되고 차이점만 내세우면 편협한 국지주의(a narrow provencialism)가 된다. 전자는 종교의 독특성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인간의 종교성을 무시하는 것이된다.
종교마다의 독특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피차간에 우월성을 주장 할 수 없다는 것이며 독특성이 바로 절대성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느 종교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기때문에 어느 하나의 종교가 종교간의 대화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느 특정종교가 자기가 모델이 되어서 모든 종교를 통합하거나 그 종교의 개념위에 모든 것을 재설명 및 재건하려는 생각은 미련한 생각이고 결국 무지의 소치이다.
종교의 대화가 지향하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이해이며, 지배(dominance)가 아니라 발전(development)이기 때문이다. 슈바이쳐가 기독교를 삶과 세계를 肯定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인디아의 종교를 삶과 세계를 否定하는 종교로 규정했던 것도 이와 같은 종교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동시에 인정하지 않은 데서 오는 誤謬였다

4. 종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인정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일(a grave difficult thing)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간의 대화가 진정으로 활동적인 복수주의의 입장에 서서 모든 종교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동시에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며 전혀 불가능할지도 모든다는 두렵고 신중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종교는 예외없이 절대적이었다.  종교를 삶의 방편으로 삼을 때도 있었지만 종교는 항상 삶의 목표요 삶의 근원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종교는 절대명령과 절대 복종을 요구한다. 단순한 삶의 중간적인 연관성(an unintermediate link)이 아니라 궁극적인 참(an ultimate commitment)參與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실한 종교인은 타종교를 알기가 극히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다음은 타종교를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것임을 알게한다.

* 宗敎에 대한 認識論的 理解 *
실제로 타종교를 안다고 주장(knowledge claim)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단계를 거쳐야 한다

1.哲學的인 배움(a philosophical learning)
먼저 다른종교의 기본적인 교리, 의례, 상징, 언어를 지적(intellectual)으로 알되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알아야한다. 이는 결코 짧은 시간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지적(知的) 철학적(哲學的) 단계(段階)라고 할 수 있다.

2. 神學的인 배움(a theological learning)
그 다음에는 타 종교의 교리, 의례, 상징, 언어를 직접 觀察(observation)해야한다. 미사드리는 광경을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가톨릭에 대하여 말할 수 없고, 참선(參禪)하는 광경을 한번도 보지않은 사람은 선불교(禪佛敎)에 대하여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종교란 철학적인 이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對面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를 신학적인 배움이라고 부른다.參與(Participation)라고도 할 수 있다.

3. 宗敎的인 배움(a religious learning)종교는 어디까지나 체험(experience)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다. 황홀경(ecstasy)을 경험하지 못한 무당은 돌파리 무당이며 선무당에 불과하다. 불교를 직접 경험(필자인 나는 체험이라고 한다)하지 못한 기독교인은 불교를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단계를 종교적인 배움이라고 부른다. 차라리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앎의 시초가 된다"는 쏘크라테스의 명언을 되새기는 것이 좋겠다.

대화는 만남을 전제로 하고, 만남은 비교를 전제로 하고, 비교는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지식은 철학이나 신학에서 끝나지 않고 체험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한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모든 종교에 대해서 이 세가지 배움의 단계를 모두 거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종교 외에 다른 종교를 안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자기 종교에 대해서도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진 사람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다른 종교인과 대하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가 극히 어려운 일이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겸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야 할 것이다.
P.Tillich는 말하기를 종교학에서 필요한 입장은 단순한 관찰자(a simple observer)가 아니라,"관찰하는 참여자"(an observing participant)라고 주장했다.

개종(改宗)까지도 감행할 수 있는 개방성(open-mindness)을 가져야 한다.
타 종교를 배우는 過程에서 타종교가 자신의 종교보다도 더욱 진리에 가깝다는 신념을 가질 수도 있고, 도 이러한 신념이 확고히 선다면 改宗까지도 敢行할 수있는 개방성(開放性)을 가져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더욱 커다란 진리를 추구하려는 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하며, 종교간의 진정한 대화는 지금까지 몸담고 있었던 종교를 헌신짝처럼(草芥) 버려야하는 아픔을 동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개종의 가능성을 인정할 때에만 타종교를 통해서 지신의 종교의 장단점을 더욱 인식 및 보완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타종교에 대한 더욱 열열한 신앙심까지도 갖게 되다는 뜻이다. 개종은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까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정한 중교간의 대화는 한갓 空念佛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모든 종교인들이 개종을 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간디나 머톤(Thomas Merton)과 같이 다른 종교를 통하여 자신의 종교에 대한 더욱 불타는 신앙을 가질 수도 있다.
간디는 평생동안 힌두교인이었고 또한 힌두교인임을 언제나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세계인(cosmopolitan)으로 여기지 않고 힌두교인만으로 인정하려는 모든 사람의 태도를 배척했던 것이다. 간디에게 있어서 "하나의 종교"와 "다양한 종교"는 갈등을 이르키지 않았다.

* 多宗敎狀況과 成熟한 文化 *
한국종교 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다종교상화(multi-religions situation)이다. 유교. 불교. 기독교와 같은 대표적인 세계종교, 수많은 민족종교들, 그리고 샤머니즘과 같은 선사종교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어떤 종교도 현대 한국문화를 代表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살아 있는 문화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世界宗敎史를 통하여 그 類例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국교(國敎)가 인정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는 모든 종교가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자기 종교의 歷史的 相對性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 현재 지성인의 고민(現代 知性人의 苦悶)
합리적 사상으로 훈련된 현대인에게는 경전이나 자기의 종교적 중심 교훈이 절대진리라는 도그마티즘의 테두리 밖에서는 자기 종교의 교리가 다른 종교의 교리에 비해 더 참된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현대 종교인은 다종교 상황이라는 사회문화적 여건과 합리적 논리성 때문에 자기 종교의 역사적 상대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종교인이 자기신앙의 역사적 상대성을 받다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衝激이 아닐 수 없다.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당위적(當爲的-Imperial)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삶을 자기 신앙에 獻身할 것을 강요한다. 삶의 전체적 헌신 없는 신앙은 종교적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 종교인은 한편으로는 자기 신앙의 역사적 상대성을 받다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신앙에 絶對歸依하지 않을 수 없는 養心의 葛藤을 안게 된다. 현대 지성인은 누구나 이러한 자기신앙이 갖는 양심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2. 문화사적 책임(文化史的 責任)
신앙의 갈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까닭은 바로 종교인이 현대 多元文化 情況에서 져야 할 문화사적 책임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세계 근세사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문화적(文化的) 제국주의(帝國主義)는 인류사회를 혼돈과 파괴로 몰고 간다는 역사적 교훈을 갖고 있다.
구식 기계공업 체계보다 전산두뇌의 기능을 도입한 생산체계가 더 우수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도 증명이 사실로 검증되는 것처럼 한 체제(體制)의 우수성(優位性)이 명확히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든 문화가치 체계들은 사회의 진보라는 이름이나 종교적 신념에 근거해서 다른 가치체계를 배척. 억압 또는 일방적으로 홉수하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현대의 지성인들은 아마 모두 긍정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종교계는 文化帝國主義의 여러가지 나쁜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宣敎 내지 布敎 傳敎라는 이름 아래 敎勢擴張에 무제한 힘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계의 실정이다. 이같은 현상은 선교200주년과 100주년을 맞이한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더욱 더 잘 나타난다. 신학교육과 목회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목회자의 양산과 그들에 의하여 세워진 개척교회들의 급증은 교회자체를 위해서도 여러가지 문제를 가져다 준다. 국가사회의 복음화가 기독교의 至上課題라는것 자체를 객관적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복음화 운동의 방향과 선교정책의 방법은 한국사회의 다종교 상황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안 될 수 없다.
만약 기독교의 선교의지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라면, 불교나 기타 종교의 포교의지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이런 상태에서 지금과 같이 무절제한 선교(포교,전교)경쟁이 지속된다면 다종교 상황에 있는 한국사회는 언제인가 문화적 카오스 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선교경쟁 때문에 종교간에, 특히 기독교신자들과 불교신자들 사이의 마찰이 있어 왔고 최근 들어 더 심한 상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 종교의 선교정책 때문에 한국 문화체계에 위험신호가 생기게 된다면 이는 이미 해당 종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다종교 상황에서 선교정책은 그 방향과 방법의 문제에 관한 한 현대사회의 문화적 정황(culrural setting)이 허용하는 규범 위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주어진 역사적 요청이다.
1996년 1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국방부 구내 국군중앙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을 놓고 불교계가 거세게 항의하고 나서 청화대가 곤혹스러움을 당한 사건은 하나의 예이다. (96년 1월25일 한게레신문4쪽참고).
만약 이 역사적 요청을 인정한다면, 각 종교는 선교(포교)의 절대당위성과 사회정황의 역사적 요청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노력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이는 신앙의 절대성과 자기신앙의 역사적 상대성, 선교 이상(理想)의 절대적 당위성과 사회문화 정황의 역사적 요청,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를 향한 종교인의 신앙과 현대에 사는 지성인의 판단, 이런 상반되는 요청을 현제의 행동에서 조화시켜 보려는 이성적 노력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원숙한 현대인의 태도이며, 이러한 문화는 圓熟한 文化이다.
H. 리챠드 니버는 그의 저서 <근본적 유일신과 서양문화>에서 기독교회의 우월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가치의 하나의 근원과 원인으로서의 神(God as the On Source and Cause of all the Values)"에 대한 믿음이 교회라는 제도나 문화전통에 이전되어 버린 변형된 神觀, 이른바 기독교 헤너디즘(christian henotheism)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神과 사랑의 이름으로 교회와 교회, 교파와 교파 사이의 분쟁 알력이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볼 때, 기독교 헤너디이즘의 증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한국 기독교에 이러한 분쟁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개별교회와 교파들이 각각 교세확장 경쟁을 꾀하는 것이 기독교 헤너디이즘의 증상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니버는 다시 神中心主義로 겸허하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내 교회, 내 교리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우월감을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종교의 근본 기능의 하나인 自己拒否의 필요를 확인한다.

1. 문화제국주의적 종교팽창주(膨脹主義)의는 일단 중지되어야 한다.
2. 종교는 다원가치 상황 안에서 하나의 가치집단의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말하자면 현대 복합사회에서의 가치 및 이익집단간의 공존 협력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종교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집단이란 점을 감안할 때 원숙한 사회태도에 입각한 종교간의 성공적인 공존 협력 관계의 수립으로 한국사회의 성숙화에 초석이 될 것이다.
3. 종교는 자기전통이 사상의 활발한 연구와 현대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부흥하는 사상적 再創造의 노력에 힘을 기우려야 한다.

연구자의 질의 응답

1. " 7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 라는 기독교의 선교 선전은 무슨의미를 갖는가. 한국적인 다종교상황에서 이 '스로간'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논하여보라.
2. 종교다원현상으로 일어나는 문제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 과거 역사나 현실사회속에서 찾아보자.
3. 절대신념체게가 갖는 독단적 사고와 상대성을 인정하는 대화의 어려움은 어떤 것들인가.

硏究問題 答

1. 문. " 7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 라는 기독교의 선교 선전은 무슨의미를 갖는가. 한국적 인 다종교상황에서 이 '스로간'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논하여보라.

답. 자기 종교에 대한 확신을 고취시키고 선교적 열정을 불러 일으키므로 교세를 확장 하는 면에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스로간이다. 다종교상황에서 모든 종교가 그같은 경쟁적인 노력을 할때 마찰과 갈등은 피할길이 없을 것이다.

2. 문. 절대신념체게가 갖는 독단적 사고와 상대성을 인정하는 대화의 어려움은 어떤 것 들인가.

답. 대화를 할려면 상대가 되는 종교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야 하는데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만큼, 그리고 나의 종교를 내가 절대시하는 것만큼 그의 종교를 절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 되기 때문에 자기 종교가 인류구원의 절대 기준임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상대방을 똑같이 인정하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自己超越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3. 문. 타인의 종교를 안다고 주장 할려면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나.또는 타인의 종교를 안다고 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답. 1. 타 종교에 대한 역사적 지적인식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
2. 타 종교 행사에 참여해 보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
3. 타 종교에 신앙에 체험을 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
4. 타 종교에서 체험한 신앙을 실천까지 해야 비로서 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다른 종교를 충분히 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여러 종교를 다 경험해 보고 실천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마치 한 아내를 둔 사람이 자기 아내가 진정한 아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아내를 경험해야 한다는 모순된 논리이다. 이와 같이 남의 종교를 진정으로 알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알고 참여하고 체험한 종교를 기준으로 남의 종교를 비판하거나 판단하는 일은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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