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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문창교회와 주기철 목사(1897-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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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17  23: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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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철 목사(1897-1944년)와 마산 문창교회 

지난 10월 15일자 국민일보 [전정희 기자의 캡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웅천교회’ 술집 됐다" 라는 보도가 나와 일파만파다. 이에 이 교회 건물 자리를 인수한 교회 집사와 웅천교회 목사까지 나서 이 보도로 인한 사회적 비난으로 인하여 장사가 안되어 호소를 하면서 해명을 하기도 했다. 도에 넘는 비판에는 법적인 대응도 한다는 소식이다.

한국의 대표적 순교자 주기철(1897~1944) 목사가 신앙생활을 한 선교 유적 경남 창원 웅천교회 예배당이 술집과 음식점, 카페 등으로 변해 SNS에서 비판과 탄식으로 교회나 교단 기독교 전체가 큰 오해를 받고 신뢰가 떨너졌다는 것이다. 이 웅천교회는 현재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측의 교회이고 담임은 오성한 목사다. .

이 교회는 고 주기철 목사가 예수를 영접하고 성장한 교회다. 웅천교회는 1950년 5월 20일에 창립되었으며 이후 주기철 목사가 시무도 한 교회다. 현재 이 마을 인근에 관과 경남노회 지역 기독교연합회가 주도하여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데 현재 관리는 통합측이 하고 있다고 한다. 이외 아들 주관준 장로(영락교회)와 손자로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 가 있다. 

그러나 전정희 기자의 보도를 자세히 보면 웅천교회가 술집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웅천교회는 이사를 하였고 구 교회 터와 건물을 누가 인수하여 임대 했는 데 아래층에 식당, 카페, 미용실 등에 임대하고 2층 예배당은 원형대로 유지하여 한 교회에 임대한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식당이 들어 섰으니 움식도 팔고 고기도 팔고 음료와 주류를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모습을 본 이들이 사진을 찍고 교회가 술집이 되었다는 식으로 소문을 낸 것이다. 그러나 술을 안판 것은 아니지만 소위 유흥주점(술집)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 원래 웅천교회는 어디로 갔을 까? 이 교회는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676-9으로 이전을 했는 데 부흥하여 새교회당을 짓고 도시로 나간 것이다. 따라서 주기철 목사가 성장했고 시무한 교회가 술집이 되었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 이런 보도가 나가자 이전한 웅천교회서도 그렇고 구 건물을 인수한 분들의 불만이 크다. 이들은 원형을 지키위 위하여 전통을 고수해야 하는 ? 아니면 미래를 향한 발전적 선택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동안 존경받던 기독교의 인물들이나 사역 그리고 건물들 까지 이런 시비가 이는 것은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따라서 역사나 건물 명예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가가 관건이다. 녹슨 헌장에 기대여 순교자 피장사 관팔이를 하지 말고 주어진 선교 현장에서 초기 기독교와 같이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들을 위한 피난처, 위로자,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
주기철(朱基徹)[1897~1944] 목사는 경상남도 현 창원시가 배출한 위대한 목회자이자 순교자였고 민족 운동가였다.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 교회와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설교자·순교자·민족 운동가로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주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북부리(北部里)에서 주현성(朱炫聲) 장로와 조재선(曺在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인 1906년 고향 웅천의 개통 학교(開通學校)에 입학하여 7년간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주기철은 신식 교육을 접하게 되었고 민족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1916년 3월 오산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5년에 설립된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안질로 시력이 약해져 수학하기 어려워지자 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웅천으로 돌아온 그는 약 4년 반 동안 실의와 좌절의 날들을 보냈다. 20세가 되던 1917년에는 김해 출신 안갑수(安甲守)[1900~1933]와 결혼하였고, 후일 5남 1녀를 두었다.

웅천에서 칩거하던 주기철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에 참석하여 목회자의 길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에 1922년 3월에는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5년 9월 17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부산 초량 교회[1926~1931], 마산 문창 교회[1931~1936], 평양 산정현 교회[1936~1944]에서 담임 목사로 봉사하였다.
   
                                * 장청 선배회원들이 문창교회 출신 성대경 장로의 인도로 방문하다.

주기철 목사와 마산 문창 교회
주 목사가 문창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1933년 5월에 부인 안갑수와 사별하였고, 2년 후인 1935년 안 사모의 유언에 따라서 교사였던 오정모(吳貞模)와 재혼하였다. 1935년 이후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여 1938년 2월 제1차 검속 이후 약 6년간 옥중에서 투쟁하였고, 1944년 4월 21일 밤 47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문창교회는 마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데 1901.3.19. 백도명씨의 전도로 김마리아 김인모씨 등 여자 7인이 모여 예배하니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후 선교사 노세영이 와서 학습자 7인을 세우고 부산교회 제직이 윤회 인도하였다. 이것이 마산 최초의 교회이고, 그 후에 김주은씨가 호주 선교사 손안로(A.Adamson)에게서 복음을 듣고 믿어 그 아들 이승규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니 동지 수십인이 입교하게 되어 손안로 선교사가 사옥을 사들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두 교회를 통합하여 마산포교회가 된다.
   
                                                       * 현 문창교회

그후 1952.2.24. 고신과의 분규로 예배당과 주일학교 교사에서 한 달씩 교대하여 예배드리기 시작하다가 1977년 1. 19.  문창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제일문창교회로 이름하고 분가해 나간다. 이로써 문창교회의 목사를 지낸 고신측의 거두 한상동 목사에 이어 고신은 경남지방에서 시작된 것이다.  근래에는 총회 임원을 지낸 김기현 목사 김세권 목사에 2013년 17대 위임 목사로 이형준 목사가 시무중이다. 

우리교단 장로교 청년연합회 경남노회 연합회장을 지낸 성대경 장로 부친 성낙훈 장로는 1971년 장로로 임직받았고 그 가족들의 모교회이기도 하다. 그후 1972년 15대 위임 목사로 김기현 목사가 부임하게 된다.  현재 성장로는 같은 시찰내 다른 교회에 출석하지만 문창교회에 대한 강한 애증을 갖고 있다. 그 한가지 예로 고신과 분열이후에도 서로 주기철 목사에 대한 순교의 정신을 잇기 보댜는 공적을 기념을 독점하려는 경쟁적 태도를 지적한다.   

문창 교회는 마산 지역 최초의 교회이자 영향력 있는 교회로써 지역 사회 문화 운동을 주도하였고, 지난 110여 년 동안 유수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장로, 한석진 목사, 박정찬 목사, 김길창 목사, 후일 부통령이 되는 함태영 목사, 이효재 교수의 부친인 이약신 목사, 순교자 주기철 목사, 신사 참배 거부자 한상동 목사 등이 봉사했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과 손명순 여사가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고신과의 분열 역사
호주 선교부와 북장로교 선교부의 공동 선교 구역이었던 마산은 두 갈래로 개신교가 전래된다. 먼저 1901년 백도명의 전도로 김마리아와 김인모 등 7명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 교회는 북장로교 선교사 로스(Cyrill Ross)의 지도를 받았다. 또 하나는 호주선교사 아담슨(Andrew Adamson)위 영향을 받아 이승규가 세운 교회였다.

분쟁을 겪던 두 교회는 통합하여 마산포교회가 되었다. 이승규는 아담슨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성호리에 있던 마산포교회당에 독서숙을 세우게 되는데 이 학교는 1909년 당시 대한제국 학부의 인가를 받아 마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하였다.

1911년 상남동에 자리 잡았던 마산포교회는 그 후 1919년 길 건너편의 문창리(추산동의 옛 지명)에 석조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이사했고, 이때 교회 이름을 문창교회로 개칭했다. 1931년 7월 부임하여 1936년 7월 평양산정현교회로 이임할 때까지 문창교회에서 목회한 주기철 목사의 사역 장소는 바로 이곳 문창리였다.
   
 
1970년 9월 내부 갈등으로 고신파가 신축 예배당으로 이전하면서 제일문창교회로 분리되었다. 상남동 87-1번지 구예배당 자리에는 1970년에 지어진 제일문창교회의 예배당 일부와 최근 신축된 주기철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주기철기념관 바로 옆에는 이곳이 옛 창신학교 터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그만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창신대학으로 외형적으로는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만 재정 문제로 문창교회도 손을 떼고 이사만 파송하고 부영건설이 맡아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주교회에는 모범적인 기독교사학으로 소개가 되는 등 알려졌지만 지금은 공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재단소유의 학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세웟거나 민족혼과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교육기관들이 선교부가 있었던 전주나 광주 목포 부산등을 망라하고 학교운영에 깊게 관여한 이들에게 넘어가게 된 것은 조사하여 역사로 남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주기철은 건실한 장로교 목사였고 저명한 설교가였다고 워키백과에 기록되어 있다.  동시에 그는 신사 참배에 대한 투쟁과 이로 인한 희생의 대표적 인물로 신사 참배 반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한국 교회가 신사 참배의 폭풍 아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처음부터 단호한 거부 입장을 표명하여 신앙을 지켰고, 이를 통해 신교의 자유를 고양하였다.

주기철은 민족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했으나, 신사 참배 반대는 민족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참된 믿음이 참된 애국의 길’이라고 믿었고, 바른 신앙의 길이 애국의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신사 참배 거부는 결과적으로 민족 독립과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돼 순교한 진해 출신 주기철 목사의 기념관 건립 및 생가복원 사업이 가시권에 들었다. 지난 2001년 그를 기리기 위한 생가복원운동이 시작된다. 주기철 목사는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가 공동으로 선정한 2007년 11월의 독립운동가이다.

그가 어릴 적 다녔던 진해 웅천교회를 중심으로 지난 2001년 ‘주기철 목사 생가 복원운동’이 시작됐다. 교회에 주 목사 순교기념관을 갖고 있는 웅천교회측은 생가복원에 필요한 기금 10억원을 목표로 활동에 들어간다. 2년 뒤인 2003년 9월 ‘생가복원운동’ 오성한 대표(웅천교회 목사)와 김병로 진해시장이 생가복원사업 후원금 지원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후 사업은 크게 진척되지 못했고, 지난 2006년 4월 ‘생가복원운동’측은 시에 사업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 운동은 진해시 기독교연합회의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거쳐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로 넘어갔다. 경남노회는 지역시찰이 9개 나되는 특이한 노회다. 여러 지자체가 속한 노회로 이 노회로 부터 부산노회, 울산 경주, 진주등이 분가를 해준 노회로 역사가 매우 깊은 노회다.  
   
 
주기철 목사 기념관
경남노회는 ‘주기철 목사 기념재단’을 꾸린 뒤 산하 교회를 통해 모금운동에 들어갔고, 지난해 12월 말 기념관 건립 등에 필요한 부지 2000여㎡를 8억원을 들여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주 목사의 생가터와 인접한 북부동 지역이다.

경남노회가 부지 매입을 완료해 시에 기부채납하는 절차를 거치면 기념관 건립사업은 본격화되었다. 이렇게 진해시 북부동 6 일대 1만여㎡의 부지에 25억원(기부채납 부지 매입대금 10억원 포함)을 들여 생가와 기념관 등을 건립한다는 당초 계획에는 수정이 불가피했지만 기념관 건립 자체는 현실화되었다.

2015년 3월 24일 오후 2시 30분 주기철기념사업회(이사장 지용수 목사, 창원 양곡교회, 전 예장통합 총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개관예배가 통합 경남노회장 관계자들이 주관한 가운데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예장통합 전 총회장)가 ‘씨뿌리는 자의 아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어 열린 개관식은 창원시 안상수 시장이 참석한 가운데 창원시가 주관이 되어 진행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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