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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44차 총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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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17  11: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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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에 대한 자료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해방후 전쟁 전후로 3번의 분열을 겪는 다. 1차는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로 출옥성도들인 경남 부산의 고려파로인데 1951년에 완전 분립을 해 나가는 데 학자들은 이를 경건문제로 본다. 2차는 신학방법론인데 소위 보수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으로 1953년 기독교장로회로로의 분열이다. 그리고 3차는 오늘 다루게 될 것인데 당시나 주류는 신학방법론 혹은 WCC나 에큐메니칼문제라고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얘기는 꾸준히 나왔었다.

이후 1960대 소위 합동측으로 불리우는 이들은 이미 탈퇴한 고려파와 합동을 위한 노력들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합동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합동' 이라고 불리우게 된다. 한편 '통합' 이라고 불리우게 된 영유는 통합측도 다시 합동과 원상회복을 위하여 그들이 문제를 삼은 WCC를 탈퇴하고 준비위로 모이지만 불발된다. 그렇게 해서 양대 장로교회는 합동과 통합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이 책의 저자 이승갑교수는 장신대 미국 프린스턴, 드류와 예일대학에서 교회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펴낸 곳: 서로북스(www.seoro2.com/book) 주문메일:pfpub2naver.com(민대홍목사)

이에 대한 전해 오는 이야기는 많았치만 공개적이거나 학술적인 접근은 드물었다. 그런 가운데 작년에 한일 장신대 이승갑교수가 "한국장로교회 분열사와 일치 추구" 라는 책자의 첫째 마당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사 만이 아니라 이후 재결합을 위한 시도들도 다루고 있다. 그러던중 올들어 서울장신대 정병준교수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기증된 당시 한국 선교사를 지낸 마포삼열목사등 우리교단과 장신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들의 자료들과 그중에 ‘한국에서의 스캔들(Scandal in Korea)’ 소 책자를 찾아 낸다.

   
* 정교수는 장신대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 이후 호주 멜버론대학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책의 영문 원본은 32페지인데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지난 2월15일에 SNS에 지인들에게 공개했다. 이에 예장뉴스가 그것을 요약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 소개한다. 이유는 이미 오래전 일이고 합동과 통합은 이제 당시 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모두 한국장로교회 양 기둥으로 한국기독교를 사이좋게 끌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분열에 직접적 책임이 있는 분들의 흔적과 유산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한교총' 이라는 가장 크고 유력한 연합기관에서 합동과 통합은 예전과는 다르게 보기 좋은 밀월을 하는 중이다. 이는 몇 년째 부터 양교단 총회장과 임원들이 정례 모임을 하는 등 그 어느 때 보다도 화해와 교류의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교 교수들간의 교류는 여전히 막혀있다. 다만 이렇게 좋은 분위기가 된 것은 다행이고 기쁘지만 역사 연구런 그런 것과는 별도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번에 나온 자료가 양측이 아닌 제 3자인 미국장로교회의 지도자자들의 시각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귀중한 것이다. 다만 이런 것들을 들추워 과거가 누구의 책임이 더크 냐하는 것을 공방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역사발전에 필요한 감춰졌던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당시 장로교 분열의 요인을 자유주의 신신학이나 WCC가입 문제와 에큐메니칼 문제로 지목한 것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연구자라면 끊임없이 사료를 찾고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하겠다. 그렇게 되어야만 지금도 우리교단 안에 존재하는 WCC 반대파나 에큐메니칼운동이나 신학,연대를 무지와 잘못된 시각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근거를 갖고 논쟁을 하는 것은 건강한 것이다. 다만 학술적이지 않은  분열적 사고나 행동은 모두 인본주의적인 것으로 우리가 더 이상 시행착오를 겪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저술한 사람은 도널드 반하우스(Donald Grey Barnhouse, 1895-1960)로 1931년에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 월간지 「레벌레이션」(Revelation)을 창간했고 그가 죽을 때까지 편집자로 일했다. 그는 1950년에 이 월간지의 명칭을 「이터니티」로 변경했으며 ‘이터니티’ 는 1988년까지 출판되었는 데 이 책자 원고를 이 집지에 연재한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반하우스는 미국의 기독교 설교가, 목사, 신학자, 라디오 방송가 및 작가였다. 그는 1927년부터 1960년 사망할 때까지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의 제10장로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는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 중 하나로 꼽히는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였다. 반하우스는 1959년 한국장로교 분열과 관련해서 많은 선교사를 만나고 자료를 검토해서 이 책을 기록했다. 이 책은 1959 장로교분열의 원인에 대해 선교사들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분열의 단초는 무엇인가?
1959년 대전제일교회에서 열린 당시 9월 24-29 44차 총회(총회장:노진현목사)가 원래는 새문안교회서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집 공고는 대전중앙교회(담임 양화석목사)로 발표되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그 교회 담임목사 양화석은 총회 부총회장이었기에 장소변경의 목적은 양화석을 총회장으로 선출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었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전에서 열린 당시 총회는 장소로서 부적합한 곳이였다고 한다. 총회 장소는 총대들 전체가 모일 수 있는 공간과 부회가 모일 수 있는 조건이 되야 한다. 하지만 당시 총대들을 위한 의자가 아닌 인근 학교에서 빌려온 접의식 의자가 있었고 좌석 배치고 주최측(저자는 일당)을 중심부에 배열하고 나머지 총대들은 그들 뒤에 앉도록 했다. 내빈과 옵서버의 자리는 발언자의 우측에 있었다. 좌측에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개회 예배 후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가 대두된다. 경기노회는 총대선출 문제로 난항이 일자 총회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것으로 휴전이 된 상태였다. (필자주:경기노회는 현 수도권 노회를 말하는 데 당시나 지금이나 총회의 중요한 교회들이 포함되어 있는 노회다)당시 참석한 경기노회 총대를 제외하고 투표했다. 이에 NAE 측 찬성 119표, 에큐메니칼 측 찬성 124표, 무효 5표로 에큐메니칼 측이 다수인 구룹에게 총대권이 주어졌다.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약자로 미국 LA에 본부를 둔 복음주의 단체로 1942년 4월 7~9일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서 장로교 교회지도자 147명이 모여 논의하면서부터 설립되었다. 1950년대에 크게 성장했으며 2011년 현재 40개가 넘는 종파 4만 5000개 이상의 교회가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이 협회의 설립은 미국 교회 협의회가 자유주의 경향을 띤 것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었다. 협회에는 성서의 무오류성과 영감설 등을 고수하는 보수주의 신앙교리를 따르는 교회들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역대 미국 공화당 정부와 지도자들을 지지해왔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연설하면서 '악의 제국(Evil Empire)'을 처음으로 언급하고 창설 50주년 기념식에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H. W. Bush)가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험(Billy Graham) 목사도 협회의 집회에 자주 참석해 설교를 했다. 한국과는 1951년 8월 유엔을 통해 전쟁 구호물자를 보내옴으로써 관련을 맺기 시작했으나 1960년 이후에는 거의 활동이 없다. 

이 때부터 총회는 혼란이 왔는 데 이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의 사전 조직적인 반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갱단(저자 표현)으로 표현된 이들은 총대 숫자가 역전되자 11월까지 휴회하고 경기노회의 총대를 새로 선출하라고 지시하자는 개의 안을 낸다. 그렇게 주일에는 태국선교사들의 선교보고를 듣고 월요일, 투표직전 NAE측은 고성과 난동으로 폭력사태를 유발한다. 서면 투표을 요청하지만 총회장은 휴회 동의를 수락하고 가부를 묻고, 가를 선포했다.

찬반 계수가 요구되었지만, 총회장은 그것을 거부했고 기도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150명 이상의 총대를 남겨놓고 NAE 측 총대는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나 갱단의 전략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총회장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청년들이 의자를 제거한다. 그리고 사찰이 혼란에 가세해서, 주먹과 고무신을 휘두르며 총대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이에 대하여 “이 분열이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깊은 신학적 신념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권력을 추구하는 소수의 부패하고 비양심적인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국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NAE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무엇인지, NAE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릅니다” 라고 쓰고 있다.

* 제43회 총회(1958년)에서 선출된 임원은 총회장 노진현(경남), 부 총회장 양화석(대전), 총무겸 서기 김상권(마산), 부서기 김삼대(경북), 회 록서기 정규오(전남), 부회록 서기 박찬목(경기), 회계 김형남(장로 전남), 부회계 신태식(장로 경북)으로 회계와 부회계를 제외한 모든 목사 임원은 NAE측 인사였다. 그리고 총회신학교 재정 분실의 책임자도 속해 있었다.

경기노회 1959년 4월 총대권 문제란
1959년 4월,경기노회의 정기 모임에서 정치인(저자 표현)은 투개표자로 NAE계 인사로 한다. 그리고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거의 완벽하게 갱단(저자 표현) 사람들이 총대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석에서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명한 NAE 인사가 정치인에게 왜 자신이 선출되지 않았는지 항의했다. 이에 정치인은 노회장 직권으로 노회 임원들을 소집해서 보관했던 투표용지를 재검표 했다. 그리고 이전 명단에서 가장 낮은 표를 받는 사람 대신에 불만을 제기한 사람을 넣어 발표했다. 이로 인해 경기노회는 크게 분열되었다.

노회의 특별 임시 모임이 소집되었다. 비록 노회장, 정치인이 의장직에 있었으나, 중립측을 계수자로 한 새로운 투표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투표 결과 오직 1명의 NAE 인사가 선출되었고 중도적인 인사 27명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책임을 물러 임시노회는 노회장의 사임을 요구하고 그를 불신임(퇴임)을 확정했다. 그러나 NAE 그룹은 총대는 노회의 규칙에 따라 춘계 정기노회에서 선출되어야 하므로, 첫 번째 총대 명단이 합법적이고, 두 번째 모임에서 선출된 총대 명단은 불법적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런 주장으로 총대가 2중으로 선출되어 노회 안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우니 어떤 총대 명단이 합법적인가 하는 문제는 1959년 9월 총회에서 결정하기로 하게 된다. 이에 이런 일을 도모한 배경을 갖은 이들에게는 당시 44회 총회에서 처리하거나 막으려는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길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이 책자는 그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안건들이 제기된다면 총대들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한 자기들에게 어려움이 될 것이라는 것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 당시 노회장은 NAE 측 이환수 목사였다. 역시 NAE 측이며 총회 전도부 총무였던 황금천 목사는 자기가 탈락된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재검표 결과 황금찬은 당선 숫자가 훨씬 넘는 80표를 상회하는 표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선출된 28명이 획득한 투표 숫자는 2명을 제외하고 전부 잘못된 집계였다. 노회장 이환수, 부노회장 강신명 등 임원은 6월 29일에 임시노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했고, 이것은 NAE 측도 합의했다.

1. 선교비의 유용

이 조종자 집단 중 한 명은, 총회 총무이며 한국교회 선교 프로그램(현재 태국에 두 명의 선교사 가족이 있다)을 위해 재정을 모금하는 해외 선교사회의 회계인 김상권이었다. 그가 책임을 지고 모금해서 그 선교사들에게 송금했다고 추정되는 선교비의 상당액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람은 이전에 호주교회가 한국 군목의 아내와 자녀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자금을 잘못 처리한 적이 있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약 300명의 군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문제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그는 전반적 관리 실수라는 이유로 간과되었다.

이후의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정직하지 못한 경영 방식이 한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수년간의 긴박한 시기에, 일부 총회 의사록이 인쇄되지 않았다. 이것을 위해 미화 1800불이 할당되었다. 업무 책임자 김상권은 회의록이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1800불을 받아갔다. 그러나 1959년총회가 개회되었을 때 의사록은 인쇄되지 않았고 그 돈은 사라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총회는 1959년 교단 총회에서 이 사람의 청지기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에큐메니칼 측은 27표를 얻었다. NAE 측은 처음 부터 부정선거 혐의가 있었던 정기노회 측 선거 결과를 밀어붙일 의도가 있었다.

* 경북노회는 가장 한국에서 가장 큰 노회였고 경북노회 교권은 전국을 주도하려고 했다. 경북노회 안에서 특정 정치세력이 10년간 노회 정치를 주도한 세력으로부터 야간 신학교와 계명대학교의 관리권을 빼앗기 위해 서울의 박형룡 박사 지지 NAE 세력과 손잡고, 감부열 선교사의 사인을 두차례 위조해서 시청에 제출한 사건이다. 이 당시 경북노회 서기는 황규석이다. Edward Adams, “Observations on Church Situation in
Korea (Personal Report of 1959-1960),” 3. Richard Baird’s Letter to the Members of the Korear Mission, 4 May 1959.

2. 미국교회 보수 인사의 개입
그 외에도 장로교 분열 이전 한국 NAE 교권에 의해 저질러졌던 여러 차례의 대규모 재정 비리(박형룡 박사가 미국에서 수표로 받은 모금 20,000불의 증발, 경북노회 안에서 계명대학 운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구시에 제출한 문서에 감부열 선교사의 사인 위조, 총회 총무의 선교비와 군목 자녀 지원비 착복 등)로 인해 1958년 총회에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결과는 1959년 제44회 대전총회에서 발표될 계획이었는데, 모리배들이 이를 무산시키기 위해 총회를 장악하려 했고, 실패하자 총회를 파행시켰다는 주장이다.

한국 NAE 측이 윤리적 위기를 넘기기 위해 매킨타이어를 끌어들여 에큐메니칼에 대해 거짓된 공격을 하였으며, 교권의 이익을 위해 부당하게 복음주의협회(NAE) 이름을 이용했다는 비판이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설교가의 눈에도 한국 NAE의 행동은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반하우스는 박형룡 박사가 미국에 왔을 때 자기 집에서 극진히 대접했고, 모금한 돈 10만불은 한국 선교부 계좌로 입급 했고, 20,000불은 직접 수표로 박형룡에게 준 것을 증언했다. 당시 미국 복음주의 협회(NAE)는 한국 NAE와의 유기적 관계를 부인했고, 한국 NAE 인사를 모임에 초대하지 않겠다고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 약속했다. 한국 NAE가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배경이다(역자 씀)

* 한국 NAE의 총무 출신 조동진은 ICCC의 위험을 경고한 사람이다. 그는 정제(正齊)라는 가명으로 「크리스찬」에 세 차례에 걸쳐 “同役者 諸位께 呼訴한다: ICC에 對한 바른 理解를 促求하면서”라는 글을 썼다.(1961년 8월 28일, 9월 4일, 9월 11일). 반하우스가 밀렵자로 부르는 박병훈은 대표적인 친 ICCC계 인물이다. 박병훈은 에큐메니칼 장학금으로 한 해 동안 일본 유학을 했다. 그는 북장로선교 본부 동아시아총무 존 스미스 박사를 만났을 때 “내가 한 해 동안에 에큐메니칼에 대하여 많이 배왔읍니다. 또 은혜도 많이 받았읍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 해 동안만 더 공부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는 고아원 아이들의 급식비를 착복해서 대구 언론에 추문을 남겼다. 그는 합동 교단을 ICCC에 가입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61년 9월 8일 합동 측 경북노회 제69회 정기노회에서는 친 ICCC계 박병훈파가 퇴장했고 그는 호헌장로교단을 설립했고, ICCC의 한국지부인 한국예수교협의회(KCC)에 가입했다.

3.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신학 논쟁
당시 장로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어 지도자들을 기릊 못했고 한국전쟁으로 북한의 공산당에 의하여 300여명의 지도자들이 희생을 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루 빨리 신학교를 재건하여 지도자들을 훈련해야 한다는 데 공감을 한다. 그 결과 조선신학교가 설립된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에 특정 교수들이 신앙적으로 건전하지 않다고 부산에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한 새로운 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박 박사는 그 신학교의 지도자들이 분열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달 만에 교장직을 사임했다.

그 후 박 박사는 서울에 신학교를 총회 신학교라고 다시 설립하게 된다. 당시 총회는 이러한 신학교 난립을 전혀 통제할 수 없지만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 세 학교를 모두 해체하고, 총회의 직권으로 교수와 시설을 준비하여 총회 직영 교단 신학교를 설립한다.여기 박형룡학장이 참여하게 되고 부산 그룹은 한국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던 미국 분리주의자들의 격려와 지원으로 교회의 약 15%를 데리고 ‘성경장로교회’ 라고 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조선신학교을 운영하던 이들은 카나다 장로교회의 지지와 후원을 받기 때문이었다. 물론 학교가 세워지는 데는 한 장로의 큰 기부가 있었지만 이후 기독교장로회라는 교단를 따로 설립하게 되는 데는 카나다장로교회가 큰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9년 9월까지 상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데 한 그룹은 본래 장로교회의 약 15%를 차지하는 근본주의적 분리주의 그룹이고, 한 그룹은 “근대주의자”라고 칭했지만, 실재 대부분이 중생한 신자들인 15%의 교회였고,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70%의 다수 그룹이 있었다.

세 번째 다수 그룹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충실하게 봉사해 온 저명한 선교사 감부열(Dr. Archibald Campbell)을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고 한국전쟁중이라 대구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박 박사는 교수진 중 한 명이었다. 2년 후 신학교는 서울로 옮겨 도시 중심부 남산에 일본 신사가 있던 곳에 자리를 잡았는 데 후임 교장으로는  1953년 9월 2일 대구서문교회당에서 박형룡 교장의 취임식이 있었다. 「기독공보」(1953.9.7.).

* 1959년 9월 총회 이전에 총회장 겸 신학교 임시 교장 노진현은 대광학교로 신학교를 옮기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총회가 분열된 후 노진현과 NAE 측은 한경직이 이사장으로 있는 대광학교로 신학교를 옮기는 것을 막기 위해 11월 16일 남산동 대한신학교(교장 김치선)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김윤찬의 집에서 “우리의 보수신학의 중심지가 되어온 우리 신학교를 지키자”라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 400장을 인쇄해서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그러나 대한신학교로 이사하는 것이 현실화되지 못했고, 11월 17일 총회신학교 교수 계일승, 김윤국, 김규당, 박창환, 학교 직원 고씨 등은 트럭을 동원하여 집기를 대광학교로 이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NAE 측 학생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4. 박형룡 박사의 사기 연루
그 후 박 박사는 그가 교장으로 있는 신학교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북장로교 선교부 직원들의 지원으로 미국의 교회들을 소개해주었다. 1. 4) 박형룡 박사는 1954년 10월 12일에서 1955년 4월 16일까지 전 세계를 순회했다. (미국, 스코틀랜드와 런던, 스웨덴 스톡호름, 네덜란드 암스텔담, 프랑스 파리, 독일 백림, 스위스 제네바, 로마, 아덴, 레바논, 예루살렘, 파키스탄 파라치, 인도 카타, 태국 방콕, 홍콩, 마닐라, 동경) 「기독공보」(1953.3.7.). 1.

당시 저자는 박형룡박사를 영접했는 데 우리는 그의 신학교를 위해 기금을 지원했으며 우리 집에서 즐겁게 지냈다. 그가 한국에 돌아갈 때, 교회의 공식 이사회를 통해 한국에 거의 10만 불이 송금되어 현재 서울 계좌에 입금되어 있다. 이사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보낸 돈 외에도 박 박사는 교회의 공식 채널을 통해 송금하지 않은 2만 불 이상의 돈을 직접 수표로 받았다.총회 신학교는 한국 장로교회의 여러 노회가 지명하고 총회에서 승인된 한국인 목사, 장로, 선교사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관리했다.

박형룡 박사는 교장으로서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신학교 부지의 소유권을 얻는 문제 때문에, 박 박사는 자기 책임하에 부지(敷地)위원회를 임명했다. 그것은 신학교가 운영되고 있는 토지를 정부 관료를 통해 구입하기 위해 협상을 하는 위원회였다. 갑자기, 정부는 그 부지 위에 국회 건물을 짓는다고 발표했고, 신학교를 이전하라고 지시했다. 따라서 그동안 부지위원회의 작업 내용과 박 박사가 미국에서 가져온 2만 불의 행방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감사가 이루어졌을 때 그 돈이 완전히 사라졌고, 지출에 대한 영수증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 졌다.

부지위원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돈의 지출을 승인하는 박 박사가 서명한 메모 종이 21장이 전부였다. 이 메모에는 돈의 사용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박 박사는 부지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전혀몰랐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렇다면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는 극도로 고지식한 사람이다. 여하튼, 그 돈은 그의 서명으로 사라졌고, 안타 미연합장로교 선교부의 직전 대표 안두화(Richard Baird)는 25,000-30,000불의 돈이 그의 손을 통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Edward Adamsn, “Observations on Church Situation in Korea (Personal Report of 1959-1960),” 

아깝게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돈이었다. 조종자와 밀렵자 그 자금을 남용한 부지위원회의 위원장은 김삼대였다. 이러한 한국 이름에 낯선 미국인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 이 사람을 조종자라고 부를 것이다. 이 명칭을 사용하는 정당성은 충분하다. 그는 권력에 굶주렸고 그의 굶주림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것을 했다. 미국인 선교사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신실한 한국인 목사들과 미국 선교사들의 이름을 말하면서, “나는 〇〇〇가 싫다. 나는 〇〇〇가 싫다. 나는 〇〇〇가 싫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이 대화에서 그는 “돈을 분실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돈을 분실했다.”라고 말했다.

부지위원회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떳떳하지 못한 사람은 김윤찬이었다. 우리는 그를 밀렵자라고 부를 것이다. 한국 전쟁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한 간단한 역사는 그가 왜 이러한 명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북한 출신인 그는 무일푼 난민으로 남한에 왔다. 그는 전쟁 포로수용소에서 선교사와 함께 일했고 그를 속여 상당한 금액을 가로채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그는 전쟁 과부 시설을 돌보는 다른 선교사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다시 한번 그는 사취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들통이 났다. 그런 다음 그는 고아원 사업으로 전환해서, 우리의 미국 고아원 후원 단체들 중 한 단체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남한에 잘 정착했고 그의 아들과 사위를 미국에 보내 좋은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고아원의 소년들은 누구도 한국교회의 후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 있는 지위를통해 사취 된 돈이 그의 놀라운 재정회복과 가족 두 사람을 미국에 보내는 비용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확실하게 여겨진다. 총회신학교 이사회는, 범죄의 근거가 아니라면 적어도 심각한 관리 부실을 이유로 박 박사의 교장직 사임을 요청했고 그것이 이루어졌다. 조종자와 밀렵자는 박 박사의 지지자를(그는 한국에서 목사들 3분의 1의 스승이었다) 모아 그들의 목적을 위해 교회를 파괴할 준비를 했다.

5. 분열은 범죄자들의 사전 공모
이 그룹들이 바로 박 박사를 교장으로 복귀시킨다는 최종 목적을 가지고 1958년 총회에 참석했다. 1959년 총회에서 승인할 새로운 이사들을 지명하도록 노회들에게 지시했다. 1958년 총회는 당시 총회장을 의장으로 하여 신학교의 업무를 관리하는 임시위원회를 임명했다. 그들은 또한 특별위원회에 조사를 지시하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고소를 제기하도록 지시했다. 이 위원회는 보고서를 준비했고, 1959년 총회에서 여러 사람에 대한 고소를 제기하려고 준비했다. 그 고소는 아마도 목사직 박탈과 형사 소송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 1959년 총회를 장악하지 못하게 되면 차라리 그 총회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첫 번째 그룹이 있었다. 위조자와 정치인 이제 잠시 우리는 조종자가 살고 있으며 그가 노회장을 역임했던 노회가 있는 대구시로 향한다. 특정부지의 소유권에 관한 분쟁으로 인해 정부는 그 노회의 서기가 대구시청에 제출한 서류가 위조되었다고 선언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서기 황〇〇을 우리는 위조자라고 칭할 것이다. 위

조자와 몇몇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많은 계략이 있었지만, 이 문제는 마침내 1959년 총회로 가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여기에 1959년 총회를 장악하지 않으면 그 총회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두 번째 그룹이 있었다. 1959년 총회가 험악한 회의가 될 것이 분명해졌다. 조종자와 위조자는 서울에 경기노회의 노회장 이환수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가장 낮은 수위에서 그를 정치인으로 칭할 것이다. 공금을 잃어버린 신학교 부지위원회의 위원인 그는 총회를 장악하려는 갱단의 일원이 되었다.

6. 갱단 전략
이때 그 갱단은 자신들의 운동을 NAE라고 칭했다. 미국 NAE와 유사한 운동이었지만, 그것은 여러 교단의 목사와 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배타적으로 장로교는 아니었다. 그 갱단이 NAE 그룹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비윤리적 전략의 한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들은 수천 명의 목사들 중 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조심스럽게 침입하여 권력의 자리로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가 총회를 장악하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도둑으로 노출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전 슬로건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 슬로건을 채택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쳐부셔라! 세계교회협의회를 쳐부셔라! 단일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쓰러뜨려라! 에큐메니칼 운동은 공산주의에 찬성한다!”

그들은 집회를 열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계교회협의회가 빨갱이 중국을 인정하고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을 돕기 위해 38선을 무너뜨리려 한다고 연설했다. 한국의 장로교회 정신 여기서 나는 한국장로교회의 배경을 소개한다.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을 믿는 교회다. 나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교회가 주었던 인상을 잘 기억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광범위한 교회 훈련제도를 사용했다. 삶과 교리가 모두 성경을 따라야 하고, 지도자들 조차도 예리한 치리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은 큰 긴장을 가져왔고, 인간 영혼의 사적인 영역에서 즉각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전의 연합 장로교회가 우리 북장로교 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사실은 총회를 장악 또는 분열하려는 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1959년 11월 24일에 국제교회협의회(ICCC) 회장이 미국에서 회람시킨 편지에서, 한국 NAE 지도자는 “우리의 운동 그리고 특별히 「크리스찬 비콘」(Christian Beacon)의 페이지들 안에서 정보를 얻었습니다.”라고 진술한다. 이 부정직한 한국 지도자 무리는, 불평과 분노에 가득한 추종자들과 함께, 칼 맥킨타이어 박사에게 한국에 와서 그들을 도와달라고 초대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매킨타이어 박사는 여러 가지 보고서들을 발표했다. 이 보고서들에 기록된 거짓 진리는 다음과 같다. 항목 :“그들은 희생을 계산하지 않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했다. 얼마나 끔찍한 희생인가! 그들은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의 해외선교위원회로부터 받았던 모든 재원에서 재정적으로 단절되었다.”

여기 언급된 해외선교위원회의 고위 직원들의 직접 증언에 의하면, 미국 교회는 여전히 한국교회, 병원, 많은 학교, 총회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직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비양심적인 사람들 장로교회를 만들면서 왜 남장로교회는 가입하지 않았는가? 두 개 장로교회가 연합하면 교리와 신조가 변경되지 않는가 등을 문제 삼았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해 사실을 알려고 하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사실을 왜곡하려고 일으킨 소동이라고 보았다. “Re Meeting of Kyungki Presbytery on May 12, 13, 14, 1915” in Moffett Korea Collection. https://archive.org/stream/generalassemblyh831unse.

7.미국교회의 분열 수출
매킨타이어의 편지에 함께 실린 자료에는 호소력 있는 고아 사진들과 함께 “목사가 WCC를 반대하자, 고아들은 지원을 잃었다”라는 큰 제목의 글씨가 있다. 이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한국 목사 박병훈은 애양고아원을 설립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으로부터 지원이 왔다. 박 목사는 편지에 기록하길 : 그들은 내가 WCC를 탈퇴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내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대한 원조를 중단했다. 이러한 갑작스런 결정 때문에 132개의 고아원과 10명의 직원들이 지난 10월부터 고통스러운 추위와 굶주림에 처해 있다.”

만일 매킨타이어 박사가 그가 받은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는 수고를 했더라면, 내가 발견한 것과 같이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월드 비전(World Vision)의 밥 피어스 박사(Dr. Bob Pierce)와 기독교 어린이 기금(Christian Children’s Fund)의 칼빗 클라크 박사(Dr. J. Calvitt Clarke)에게 전화해서 확인했고, 두 사람은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인 이유로 지원을 철회했다는 어떤 주장도 절대적으로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예외의 한두 건은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위생 기준을 거듭 유지하지 못해서 고아원 지원을 보류하고 있으며, 한 번은 자금 오용 혐의로 조사 중인 경우다. 항목 : 「크리스찬 비콘」은 미국 선교사들이 서울에 있는 신학교 건물로 내려와서 비품을 훔치려 했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폭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선교사들에게 책임을 넘겼다. 그들은 이사하는 과정에서 가구를 실은 다양한 트럭을 찍은 사진을 전체 페이지에 게시했다. 사실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신학교는 한국정부에 의해 이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8. 칼 매킨타이어의 활약
이 원고의 첫 초안이 완성되었을 때, 「이터니티」(Eternity)22)의 편집자 중 한 명이 칼 매킨타이어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공개되기 전에 그와 문제들을 논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인터뷰도 단호히 거절하며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문제가 나오면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비추어 우리는 칼 매킨타이어와 장기적인 논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자료가 많은 목격자와 공식 보고서로부터 확보되었다는 것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나는 이 슬픈 추문을 마지못해 다루었지만, 그것은 양심과 개인적 성실의 문제였다. 나는 일부 배교자들의 거짓 교리를 다루는 기사들을 출판해왔기 때문에, 나는 형제들을 나누고 악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솔직해야 한다.

매킨타이어 박사가 장로교회 안에 머물기 위해 싸웠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가 사우스저지(South Jersey) 노회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뉴저지 시노드에 항소했다. 그리고 그 시노드가 사우스저지 노회를 지지했을 때, 그는 총회에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교단에 머물기 위해 싸운 후 최종적으로 총회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가 실패하자마자 그는 총회에 반대하고, 스스로 의를 위해 싸우는 위대한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원래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라고 칭하는 그룹과 하나가 되었다. 법원은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로 그 명칭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세웠다.

* 1956년 8월 20일 고신 측 총노회 지도자들은 매킨타이어의 ICCC 가입을 요청을 거절했다. 「기독교보」(1956.9.20.). 그러나 합동 교단에서 탈퇴한 김치선은 ICCC의 지원을 받아 실제로 성경장로교회를 세웠고
대신신학교를 운영했다. ICCC는 1965년 5월 11일 종로침례교회당에서 한국예수교협의회(KCC)를 창립했다. 그 회원은 기독교침례회(김용해), 성경장로회(김치선), 예수교감리회(전덕성), 예장호헌장로회(박병훈)였고 예수교성결교회는 가입을 보류했다. 1967년에 ICCC의 압력으로 예수교감리회가 분열되었고, 예장호헌도 분열되었으며, 성경장로회도 ICCC 파와 비 ICCC파로 내부 분열되어 성장과 대신으로 분열되었다.

9. 빌리 그레이엄의 호소
한국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요청하면서 장엄한 호소를 했다. 그의 편지에서 한두 개의 문장은 전체 상황의 핵심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분열이라는 비통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잘 생각하고 오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중 많은 분이 이미 문제가 깊어졌다고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 다 볼 때, 그것은 교만이고, 형제에 대한 잘못된 정보이고, 어떤 경우에는 솔직히 질투심이라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점에 빌리 그레이엄은 이 책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ICCC가 일으키는 분열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한 외부에서 여러분들을 휘젓기 위해, 친구끼리 그리고 형제끼리 싸움을 시키는 노략질하는 늑대로 들어온 자들이 있습니다.”

* 넬슨 벨(Lemuel Nelson Bell, 1894-1973)은 중국 의료선교사 출신으로 빌리 그레이엄의 장인이었다. 그는 정치적,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고 인종 분리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에게 정기간행물을
출판할 것을 제안했고, 그는 「크리스찬투데이」(Christian Today)의 책임편집자였다.

10. 결론:기도 요청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는 모든 독자 여러분은 한국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그곳에 요새를 지탱하고 있는 경건한 선교사들을 위해 매일 중보적 기도를 시작해주기를 바란다. 여러분 모두 각자는 매킨타이어 박사가 그의 영혼을 직시하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에 가한 손상을 보도록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한국의 최근 소식에 따르면 NAE 깃발을 버리고 ICCC에 가입할 준비가 된 NAE 갱들은 온건파들이 매킨타이어 박사와 ICCC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지 않자 그들 자신의 그룹 안에서 큰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24) 그들은 매킨타이어가 이전에 한국에서 맺어놓은 관계를 통해서 그의 활동을 알고 있다. 밀렵자 김윤찬은 맥킨타이어 박사를 이 분열의 문제에 끌어들인 것에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위하여 뜨거운 기도에 동참합니다. 일치, 애정, 형제 사랑의 정신이 하나님이 영광과 교회의 강화를 위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우리의 소망이 그 위에 세워지도록 공동의 신앙과 신앙고백을 기억해 달라고 간절히 간청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유일한 주님이자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하나 됨과 성경에 계시 된 온전한 복음에 대한 충성심을 다시 보여주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직후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6명의 전권위원회를 구성해서 화해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도록 했다. 3개의 장로교선교부는 10월 28-29일, 11월 5~6일 대전에서 회동해서 4가지를 결정했다. ⑴ 선교부의 성명서 발표 ⑵ 화해를 위한 계획 제안 ⑶ 화해 활동을 위해 1500불의 재정 할당 ⑷ 마삼락과 베어드 박사를 연합선교부의 대표로 선정. 그들은 13명의 선교사를 네 개의 조로 편성해서 전국의 노회들을 방문하여 화해를 중재하는 활동을 했다. Letter of Richard H. Baird to the Members of Korea Mission, 9 November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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