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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교수의 교회사 발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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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3.02  08: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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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이제는 말해야 한다,

이 자료는 서울장신대 정병준교수가 올해 년초부터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재한 한국교회사 자료들 가운데 합동과 통합의 분열전후 상황에 대한 당시 내한 선교사들과 국내 관련자들의 동향에 대한 3번째 소개다. 당시 내한 선교사들의 편지와 신문보도등을 입수하여 초고로 정리한 것이다. 

교회사학자로 그동안 미공개된 자료들을 입수하여 번역하고 약간의 컨맨트를 달고 있지만 앞으로 시대별, 인물별, 사건별로 더 정리를 해 주실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우선은 처음 나오는 이야기들이고 중요한 자료이니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귀한 작업을 해주시는 정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사건별 정병준교수의 교회사 발굴자료

이참에 할 말은 하고 넘어가자. 과거에 박태선 장로(전도관, 천부교)를 키워서 한국 사회와 교회에 큰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이 보수를 자처했던 NAE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박태선 남산 집회에 목사들 데리고 가서 박태선에게 머리 숙여 안수 받았던 인사들도 그들이었다.

지금 전광훈 현상의 뿌리도 그 한줄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교신앙부흥협회를 만들어서 박태선 선전하고 후원하고 신문에 광고 냈던 사람들이 이 분들이었다. 근본주의 보수의 영적 안목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데는 발달했는데, 이단을 분별하는 영안은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에서의 스캔들”에 대한 당시 신문 자료
반 하우스의 "한국에서의 스캔달"에 대해서 NAE 측에서 전혀 응답을 안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영문으로 되어 있어서 한국의 자신들 지지자에게 영향을 주기 못한 것이기 때문에 대응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NAE측은 신학생들을 통해 이 부분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대광 학교와 남산에 남아 있던 학생들은 서로 모여 정보를 교환하며 교회 분열에 대처하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학생들이 비난하는 대부분은 선교사들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목사들이고, NAE 측에 대해 정말 분열의 핵심 인사는 빼고 김상권 총무(마산) 만을 비판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스캔달"에 정보를 제공한 '6명의 선교사'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NAE 측이 학생들 배후에서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100% 에큐메니칼 진영을 비난하면 속보이니까 중립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김상권 총무가 총대를 맨 느낌이다. 반박은 그 내용이 맞는가 틀리는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하는 것이다. 신문자료: 크리스챤 1960.7.9.

   
 

한국 NAE 교권-에큐메니칼 돈은 원했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미워했다.

미연합장로교회 선교부 동아시아 총무 헨리 리틀 박사(Dr. Henry Little Jr.)는 1959년 대전 총회에 참석해서 총회 파행을 지켜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총회의 무질서는 이미 신중하게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었다. 총회 장소를 대전으로 변경한 것도 그 계획의 하나였다. (총회 임원을 장악하고 있었던 NAE 교권은 총회 20일 전까지도 총회 장소를 발표하지 않았다)

총회 당시에는 교회 안에 무뢰한들을 동원했고, 총회를 정회 하고 연기 시킨 후 총대들을 물리적으로 추방할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 NAE 총대들의 자리는 중앙에 배치했고 에큐메니칼 측 총대의 자리를 주변으로 배치했다.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측 총대가 다수표가 되었을 때 총회를 파행시키는 전략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미연합장로교회 선교부는 1959년 대전 총회에서 2가지 목표가 있었다.

1. 한국장로교회의 노회들이 투표를 통해 승인한 북장로교회에서 연합장로교회로의 명칭 변경을 확인하는 것과, 2. 미연합장로교회 선교부의 사업과 재정을 한국장로교회 총회 협동사업부로 이관하는 것이었다. 선교 이양의 건은 1956년부터 논의가 시작되어 1959년 총회에서 마무리 할 계획이었다.. 선교사업의 현지 이양은 에큐메니칼 선교방침이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 NAE 집단은 정치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미국연합장로교회 명칭 변경에 대해 정통신학을 변경하고 이단화 될 수 있다고 정치적으로 공격하면서,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는 자신들이 교권을 유지하면 협동사업부로 넘어온 선교부 재정을 분배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총대 표를 확보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전총회에서 연합장로교회 명칭 승인의 건에 대해 지연 작전을 쓰고 선교 이양식을 추진하려 했다.

동아시아 총무 리틀 박사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미국의 선교부 사무총장 스미스에게 급하게 전보를 보냈다. “총회는 혼란 속에 휴회, 선교사업 합동은 무기한 연기.” 그리고 그는 이 편지(1959.10.9)로 다음의 사항을 보고했다.
1. 미연합장로교회 명칭 승인을 숨기고 선교 이양식을 하는 것은 협동사업부의 의미와 존엄성을 손상하는 것이다.
2. 그러나 선교사업은 이미 협동사업부로 넘어갔다. 남은 것은 적절한 때에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이양식을 하는 것이다.
3. 일부 NAE 지도자들은 상호협력의 최종 이양식을 오해했다. 그들은 선교부 재정이 완전히 총회로 넘어가는 것으로 지지자들에게 선전했다. 선교 이양식은 아무리 잘해도 의미가 없다. 최악의 경우에 NAE 정치꾼들이 자신들의 지지자를 이용해서 협동사업부를 비난하는 기회를 주게 된다.

에큐메니칼 돈은 사랑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공격하는 NAE 정치전략으로 인해 결국 선교 이양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총회 산하 협동사업부에서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은 함께 선교사업을 논의했다. 그리고 1964년에 남장로교회와 호주장로교회가 함께 참여해서 완전한 협동사업부가 구성되고 선교 이양이 완결되었다.

   
 

NAE 측의 남장로교선교본부 습격과 선교사 폭행사건

1960년 6월 9-16일 전주 남장로회 선교본부에서 연례회의가 있었다. 남장로회 해외선교부 지역총무 휴 브래들리(Dr Hugh Bradley)가 내한하여 함께 참여했다. 이때 NAE 측은 순천, 광주, 목포에서 60-70여명의 데모대를 조직했다. 고등학생과 성경학교에 속한 어린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십자가 군병들아" 찬송을 부르면서 회의 장소를 습격해서 WCC와 에큐메니칼을 반대한다고 시위했다.

군목 윌리엄 플로이드(William Floyd)의 보고서에 보면 그는 미군 장교제복을 입고 있어서 통역을 통해 미국인 재산을 습격하고 위해 하면 안된다고 경고했다. 어린 고등학생 하나는 "마귀와 싸울 때는 죽든 살든 개의치 않는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린 학생들에게 못된 거짓사상을 주입한 NAE 지도자들의 비도덕성을 짐작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서울의 선교사들은 전주의 선교사들의 안전을 위해 철야기도 모임을 가졌다.

6월 13일(금요일) 선교사들이 회의를 하는 도중 고등학생 하나가 창문을 깨고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인돈 등 선교사들은 교회 장의자로 문을 막았다. 젊은 선교사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편은 퇴로를 만들고 한편은 보디 가드를 하면서 데모대의 공격 대상인 브래들리 총무와 인돈 등 나이 든 선교사 그리고 여성과 아이를 피신시켰다. 선교 본부 병원에서 사복 형사가 경찰을 불러 현장을 수습했다. 그러나 그날 밤에도 데모대가 들어왔다.

6월 14일 (토) 아침에도 데모대의 공격이 있었다. 그들은 "브래들리는 거짓말쟁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승동 측 지역 노회장은 지역 경찰서장에게 브래들리와 만나게 해주면 무슨 말을 하던지 평화롭게 해산하겠다고 약속했다. 브래들리 총무는 어쩔 수 없이 그날 오후 NAE측 지도자 4명과 선교 병원 간호실에서 면담을 했다. 그들은 데모대와 자신들은 관계가 없다고 말하며 남장로교 선교부는 통합 측과 함께 활동하지 말고 독립 선교를 하라고 요구했다. 브래들리는 남장로교는 위협과 협박 속에서 강요받으며 입장을 택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때 통역은 원로 선교사 인돈(Dr. Linton)이 했다. 그러나 이들은 해산하지 않고 더 사나워졌다. 일부는 드라이버를 들고 선교사들의 지프차 바퀴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경찰이 이들을 해산시켰다.

그날 밤 50-60여 명의 폭도들이 여자 선교사 마라게트 프리챠드(전주 간호사)의 숙소에 투석을 하며 습격했다. 그들을 막는 3-4명의 남자 선교사들을 장작, 대나무, 주먹으로 구타했다. Joe Hopper 와 John Moore 선교사가 그들에게 납치되어 구타당했다. 방문자인 미연합장로회 소속 Otto Camp 선교사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John Folta는 귀가 찢어졌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서 폭도들 중 13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이 흩어졌다.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프리챠드 현관에서의 전투(The Battle of Pritchard's Poarch)라고 불렀다.

모든 회의가 끝나고 6월 17일(화요일)에도 데모대는 "남장로교는 WCC를 탈퇴하라" "선교사는 돌아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타났다. 이 사건을 목격한 군목 플로이드는 이 사실을 미국 대사관에 보고했고 여러 선교사들에게 증언했다.

미연합장로회 선교사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부 NAE 지도자의 속성을 일찍 깨달았다. 반면 남장로회 선교사들 중 시니어들은 근본주의 보수신학과 반에큐메니칼 정서 때문에 NAE 측에 우호적이었으나, 1959년 대전총회에서 총회를 파행시키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들과 멀어졌고, 이 선교사 폭행 사건으로 완전히 NAE 측과 관계를 정리했다.

1960년 6월 16일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배포했다. (사진참조) 1959년 장로교 분열이 신학적인 이유라고 하는 말은 상황을 자세히 목격한 선교사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배민수 목사가 베어드(미연합장로교 선교부 대표)에게 보낸 대외비 서신 (1959년 12월 3일)

대전에서 활동했던 배민수는 1959년 9월 한국 장로교회 분열 이후 남장로회의 고참 선교사 인돈(Linton)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인돈은 자신이 갈라진 두 그룹을 화해시키려고 하는데 미연합장로회가 협조적이지 않다고 불만을 표했다. 인돈은 ICCC의 매킨타이어와 성경장로교의 허대전(Holdcroft) 선교사가 1959년 11월에 전국을 순회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공격한 것에 대해서 "과장은 있지만 진리를 말했다"라고 표현했다. 인돈은 “재정 문제를 제외하고는 친 박형룡” 노선이었다. 그럼에도 인돈 선교사가 박형룡 박사와 한국 NAE를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은 재정상의 부정직 문제였다. 남장로회는 양쪽의 화해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미연합장로교회, 호주선교회와 함께 통합 교단과 협력하게 된다.

배민수는 또한 남장로회의 김기수 선교사(Keith R. Crim)와 나눈 대화를 전한다. 김기수는 3개의 장로회 선교회가 양쪽의 총대를 초청해서 1960년 봄에 45회 장로교 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순천의 김형모 목사(한국 NAE)를 장로회신학교 이사장으로 선출해서 갈라진 연동과 승동을 화해시키자고 제안했다. 선교사들은 장로회신학교 교장을 선출하는 이사장 직을 NAE 측에 내어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매킨타이어 그룹”(박병훈, 김윤찬 등)이 갈라진 한국교회의 일치에 협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NAE가 협력에 거부하더라도 기회를 줄 필요성은 있다고 언급한다. 그들이 거부하면 3개의 장로회선교부와 나머지 한국 장로교회가 함께 연합하자는 제안을 내어 놓았다. 실제로 1960년 2월 17일 3개 장로회선교회, 연동 총회 그룹, 중립 측, 승동 이탈 측이 모여 통합 총회를 하게 된다.

남장로회의 인돈과 일부 선교사들은 근본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선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연합장로교 선교사들은 남장로회 선교사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했다. 배민수는 또한 서울에서 한경직, 안광국, 마삼락(Samuel Moffett)이 모여 매킨타이어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강력한 설교자를 미국에서 초대할지 여부를 논의했다고 전하면서, 반하우스(Barnhouse)를 초청하자고 제안한다. 반하우스가 "한국에서의 스캔달"을 작성하는 것을 선교사들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59년 한국장로교회 분열 이후 미연합장로교 선교부와 남장로교 선교부는 겉으로는 통일된 입장을 보였지만 상당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남장로회 고참 선교사들이 신학적으로 ICCC와 박형룡 박사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는 서로의 언동에 불편함을 드러내는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나중에 설명할 것임) 그러나 남장로회의 젊은 선교사들은 한국 NAE의 부정직을 문제로 봤고, 결국 3개 선교부는 통일된 입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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