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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인수대비 仁粹大妃(1437-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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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2.22  13: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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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인수대비 仁粹大妃(1437-1504)

소혜왕후(昭惠王后,1437-1504)라는 시호 보다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유명한 한씨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 여성이며, 여성 지식인이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유명한 인수대비는 시부 수양인 세조가 조카를 밀어내고 왕권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남편의 이른 죽음으로 왕비가 아닌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낸 입지전적인 여성이다. 특히 그녀가 [내훈(內訓)]이라는 여성 교육서를 만든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한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韓確, 1403~1456)의 6째 막내딸로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홍씨는 그녀가 13살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녀가 왕실과 혼인하게 된 가정적 배경은 이렇다. 고모 2명이 명나라 황실의 후궁이었고 부친 한확은 순창군수 한영정의 아들로 그의 누이는 명나라 공녀로 갔다가 명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여비(麗妃)고 한씨의 큰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인 된 셈이다. 한영정의 맏딸이었던 여비가 사대부가의 딸이었음에도 불행히 공녀가 되었으나, 명 성조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된 여성이다.

   
 

수양대군의 며느리가 되다
한확은 젊은 시절 누이의 후광을 업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명 황실과 인척이 된 한확은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을 도맡아 담당하는 비중있는 인물로 성장하였고, 실제로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 황제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때에는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 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했다.

조선 정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한확의 위치로 볼 때,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437년(세종 19)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1455년(단종 3)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이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桃源君, 성종의 부친으로 덕종으로 추존됨)과 혼인하였다.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한씨는 1455년(단종 3)에 19살의 나이로 수양대군의 맏아들인 도원군 장(暲, 1438-1457)과 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된다. 수양대군은 한확의 힘과 위상을 잘 이용했는 데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왕위찬탈이 성공하자 그를 비롯한 청주 한씨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되었다. 도원군 또한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한씨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수빈 한씨가 된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부친인 한확이 세자 책봉의 고명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한 것은 세자빈이 된 이듬해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한확이었지만, 객사(客死)라는 불운을 피하지는 못했다. 수빈 한씨는 부친이자 막강한 정치적 후견인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 일을 무사히 성공시킬 인물은 중국통인 한확밖에 없었다.

남편이 20세에 요절하자 수빈도 왕비가 될 꿈을 접고 사가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었다. 불과 2년 3개월 밖에 안된 세자빈 생활이었다. 남편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부친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졌을 지도 모른다.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晄,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세조는 며느리 한씨가 불쌍하여 궁에서 살도록 허락을 했으나 끝내 사가로 돌아가려고 하자 이를 가엽게 여진 세조가 지어준 집이 현재의 덕수궁이다.

   
 

수양이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탈취
1457년, 친정아버지 한확의 객사와 함께 남편인 의경세자(懿敬世子) 마져 요절한 일에 대한 연이은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세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궁궐에서 살도록 허용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였다.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을유년인 1465년에 세조가 교지를 통해 원경왕후가 세자빈이 되었을 때 정빈으로 책봉하였으므로 한씨의 작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한씨의 죽은 남편 의경세자 사당 옆에 건설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고위 사대부나 왕족이 살던 사저보다는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여 훗날 선조가 임진왜란중에 임시 거처로 사용하기에 이른다. 후에 한씨의 작은 아들 자산군이 보위에 올라 그녀도 모후(임금의 어머니)로서 다시 궁궐에 들어가자 그녀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사저를 물려받았다.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중전의 꿈을 접어야만 했지만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당대의 권신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훗날 공혜왕후)와 자신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혼인시켜 사돈 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궁궐을 나왔지만 세조와 정희왕후를 정성껏 봉양했고, 특히 왕위 결정권자인 정희왕후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또한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이 승하한 후에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 대군 대신 자산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여성의 몸으로 지엄한 왕가의 남성중심의 권력쟁탈에서 지혜와 기치로 자신의 아들을 끝내 왕위를 계승하게 한 요즘으로 치면 강남불패 신회의 주인고 어머니들 못지 않은 여성이다.

시동생(예종) 의 즉위
수빈 한씨의 시아버지 세조가 한씨에게는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예종)에게 양위하고 곧 승하한다. 왕의 맏며느리에서, 왕의 형수로 처지가 바뀐다. 예종은 병조에 “수빈(粹嬪)에게 대군(大君)의 예(例)에 의하여 반인(수행원)을 지급하라."고 명하였고 엽관운동(獵官運動), 즉 분경(奔競)이 심했었던 1469년에는 교지를 통해 "대비(정희왕후)와 중궁(안순왕후), 수빈 이외에 벼슬을 자청(自請)하는 자는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수빈의 위세와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또한 수빈의 동생 한치의(韓致義)는 그녀의 아우라는 이유만으로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공신의 호를 받고 청성군(淸城君)에 올랐으며, 현재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에까지 오른다. 시 동생 예종이 재위 기간 14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죽자 조정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논의가 있었다. 마땅히 예종의 맏아들이 되는 원자(제안대군)이 보위에 올랐어야 했으나 원자의 나이가 겨우 3살밖에 되질 않았을 뿐더러,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의 장인이 바로 권신 한명회였던 점이 강력하게 작용하여 조정은 자을산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게 된다.

왕실의 어른 대비 윤씨(정희왕후)와 원상 신숙주, 한명회 등의 결정으로 의경세자와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된다. 수빈 한씨의 아들 자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녀는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하였다. 임금의 어머니(모후)가 되므로 마땅히 인사를 받아야 했지만, 성종은 생부인 의경세자가 아닌 작은 아버지가 되는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王位)의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성종의 법적 어머니가 되었다. 따라서 수빈 한씨는 국왕의 모후(母后)가 되는 왕대비의 자격이 아니라 그저 왕세자의 부인으로서 지위가 세자빈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신관계(君臣關係)상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한 것이다. 다만 국왕의 생모가 되므로, 궁궐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녀의 호(呼)를 붙여 수빈궁(粹嬪宮)이라 했다.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저(덕수궁)는 그녀의 장남인 월산군이 물려받았다.

결국 조정의 논의 끝에 수빈 한씨가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어 아들 성종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왕비라 함은 왕(王)의 부인을 일컫는 것인데, 한씨는 왕(王)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대비가 되어야 마땅했다. 바로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와의 서열 문제가 화두가 되었다.  인수왕비 한씨가 왕실 서열 2위로 올라섰지만, 그녀에게는 왕대비에 오르는 것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었다. 1474년, 마침내 성종의 의지로 생부인 의경왕(懿敬王)을 추봉(追封)하였고, 그 결과 의경왕이 덕종(德宗)의 묘호를 받았다. 왕의 생모가 되는 인수왕비 또한 왕대비로 진봉되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되었다.

   
 

대왕대비(大王大妃) 시절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왕세자 융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이다. 인수대비 한씨는 연산군의 할머니가 되므로 대왕대비로 진봉되었으며, 휘호가 자숙(慈淑)으로 새로이 올려졌다. 다만 실록에는 자숙대왕대비(慈淑大王大妃)라는 명칭이 휘호를 올린 당시에만 등장할 뿐,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로 계속 일컬어 진다.

왕세자 시절 자신이 정현왕후의 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즉위 이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고 그 뒤에도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강제로 대왕 대비전으로 끌고가 인수대비에게 술잔을 강제로 따르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인수대비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있던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었으나 화가 치밀어오른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의 가슴을 밀쳤다고 한다. 이에 인수대왕대비는 얼마 후 그 충격으로 갑자년인 1504년 4월 27일, 68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연산군은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 미리 상제(喪制)를 의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치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孝)이므로,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동은 패륜으로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의 명분을 제공하였는 데 이 때 반정의 주도 세력은 이미 연산군을 폐위하라는 여인수대비의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 온다.

   
 

여성 교육서 ‘내훈’ 편찬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인수대비는 불교에 심취하였고, 성종이 도첩제를 폐지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녀가 왕실 여성으로 그치지 않고 여성 지식인으로 각인되는 일을 실천한 것도 이 무렵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유교적인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일종의 교재가 필요했다.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 6)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내훈’의 서문을 보면 왜 인수대비가 이 책을 편찬하려 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홀어미인지라 옥같은 마음의 며느리를 보고 싶구나. 이 때문에 ‘소학’ ‘열녀’ ‘여교’ ‘명감’ 등 지극히 적절하고 명백한 책이 있으나 복잡하고 권수가 많아 쉽게 알아 볼 수가 없다. 이에 이 책 가운데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뽑아 일곱장으로 만들어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폐비 윤씨와의 악연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비(尹妃)와의 관계는 불행 중의 불행이었다. 높은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비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연산군을 잉태한 후궁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인수대비 한씨와 왕비 윤씨는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지닌 여성이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비는 그렇지 못했다. 가난한 대간(臺諫) 집안 출신의 딸로서 그를 후원해 줄 부친도 없는 신세였다. 또한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했던 인수대비와 달리 윤비는 자유 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했다.

내훈의 저자 인수대비는 자신의 책에서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유학적 소양을 갖춘 엄격한 성격의 인수대비는 윤비의 행동이 자신이 강조하는 ‘내훈’의 내용에 저촉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였다. 인수대비는 윤비의 폐출과 사사에 깊이 관여했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노후를 예고한 것이었다.

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비는 이를 참지 못했다. 성종이 엄귀인과 정귀인을 총애하자 윤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했다. 왕실 여성들 사이에는 이른바 압승(壓勝)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가 되었다. 윤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는 의도라 생각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결국 윤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대신들은 윤비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인수대비 또한 폐비 윤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폐비 윤씨를 대신하여 윤호의 딸 파평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파평 윤씨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기뻐했다.

그러나 며느리를 죽이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윤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와 함께 온양을 갔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공론화 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위치한 인수대비의 무덤 경릉(敬陵). 남편인 덕종과 같은 곳에 묻혔으나, 덕종의 무덤보다 훨씬 화려하다. 왕릉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에 따라 축조되는데, 인수대비의 경우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 신분이었던 남편의 능보다 크고 격식 있는 것이다.

   
                                       * 서오릉내의 경릉(인수대비)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재평가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아들을 통해 대비 자리로 보상받은 인수대비 한씨는 시부모인 세조 내외로부터 '효부(孝婦)'라는 글귀가 새겨진도장을 받을 정도로 부덕을 갖춘 여성이었다. 21살에 청상과부가 된 이후로 자식 교육과 아랫사람을 경계함에 추호의 빈틈도 없어 ‘폭빈(暴嬪)’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다. 그녀의 강한 집념은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리는 동력이 되었으나, 한편으로 폐비 윤씨를 부덕한 여성으로 몰아 사사에 이르게 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연산조의 폭정을 잉태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그녀의 업적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틈틈이 부녀자의 교양을 위해 [열녀전(烈女傳)]ㆍ[여교명감(女敎明鑑)]ㆍ[소학(小學)] 등 서적 중에서 귀감이 될만한 부분을 뽑아 [내훈]을 편찬한 것은 그녀의 대표적인 업적이었다. 아울러 불교 경전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교서적을 읽고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간 인수대비는 우여곡절 끝에 왕비를 거치지 않고 대비에 오른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여성으로, 며느리를 쫓아낸 비정의 시어머니로 묘사되어 왔다. 그런 극단의 이미지 탓에 사극 속의 주인공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 여성 지식인의 대표격으로 그녀의 삶과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세계는 남자가 지배하고 그 남자는 여자가 지배한다는 옛말이 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군대도 그렇고 인맥인 시대가 있었다. 정치인의 부인은 전두환,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하여 이화여대 출신이었고 그후 정부관료 부인들이나 요직에 이화여대 출신들이 많아 나온 것은 사실이다 또 한 때 육사의 별은 경북여고에서 달아준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이라고 해서 인맥이 좋다고 해서 모두 출세를 하고 이름을 내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공부가 필요하다.

고종의 부인 민비(명성황후)도 결혼 직후 왕이 어려서 돌보는 김상궁과 가까이 하여 독수공방하자 공부에 전념한다. 그러는 동안 당시 국제정세등을 섭렵하였고 시부 대원군과 맞선 것도 권력욕만이 아닌 남편의 보위를 지키고 세계정세와 흐름을 보는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모(대원군의 부인)는 민씨로 명성황후의 집안사람 어른으로 그를 며느리로 삼은 장본인이었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뜨고 집안에 형제 자매가 많치 않아 왕가에 득세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은 빗나간 것이었다.

여성의 역할 어디나 중요하다. 
자고로 여성은 지혜로워야 집안이나 남편이 하는 일을 편하고 순조롭게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가정 교육이지만 최근에는 남편의 욕망과 세속적 권력욕을 자제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부인이 참다 못해서 나서서 공적으로 남편 흠을 발설하여 절단이 난 사례도 있다. 특히 한국 목회자의 경우 아직은 양성평등이라는 가치보다는 가부장적이고 성직자라는 권위의식에 그져 집안 돌봄이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다고 만사를 논의하라는 것은 아니나 남편의 모난 성격과 야망을 잘 절제하도록 이끌고 스트레스도 풀게 잘놀아주고 맞춰주는 것도 일인데 남자들은 밖으로 걷돈다.

다만 여성이 너무 물질에 집착하면 남성이 범죄하게 되는 데 부인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 부인들의 경우 경제적으로 늘 어려운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예 생활전선에 나서서 부업 정도가 아닌 주업을 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만 남편의 식생활과 건강 목회적 돌봄에는 착오가 나는 것이다. 여성의 예리한 눈과 판단으로 교회와 목회자를 돕는 자의 자리에서 가야 하는 게 목사의 실패는 곧 가정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목사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이유(설교, 대인관계, 여성, 물질, 교권욕, 취미)가 무엇이든 이를 방치한 사모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 선배가 목회중 사모가 풍이 왔는 데 극진히 돌보는 것 같았다. 목회 스타일은 구수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절도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사모 양에 목사가 안차는 것 같다. 준비 안된 설교가 길어지거나 맞지 않은 소리를 하면 신발을 벗어서 들고 그것도 안되면 교회등 전원을 껏다 컸다 한단 말을 들었다. 그러고도 맞아 죽지 않고 둘이 안쫒겨 난 것도 다행이지만 그런 식으로 내조를 하면 안된다. 다만 그런 사모를 돌보는 목사도 참 대단하다는 든 적이 있었다. 결국은 분에 넘치는 건축을 하고 빚 때문에 목회 꽃을 피우지는 못하고 은퇴를 했는 데 인근의 후배목사 교회와 합병을 해서 노후 예우는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모자리도 배워야 한다. 
가까이서 모신 한 원로목사님이 계신데 사모는 청년 때 승마를 할 정도로 개화되고 똑똑한 여성이었다.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당연히 교회의 대소사가 사모의 눈으로 보면 경우에 맞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나 목회는 사모가 하는 게 아니다. 목사는 남편이니 드러나지 않게 내조를 해야 하는 데 어느 선배 목사는 당회중에도 전화를 해서 사모에게 물어본 분들이 있다고 들었다. 나중에 사모가 알면 번복을 해야 할 판이니 차라리 그게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로 목사님이 가장 강조한 것이 교회 일에 대한 공사석에서의 침묵인데 젊어서는 집문에 입에 손가락으로 가리운 그림을 붙혀놨다고 한다. 

이유는 목사는 목회적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기에 누가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행동을 하는 지가 다 감이 잡힌다. 그러나 드러난 현상만 보는 사람은 그 배경이나 원인에 대하여 전 이해가 없다. 따라서 판단에 착오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새벽 부터 누가 울면 외우는 지 그 분의 기도와 소망 문제와 실패에 대하여 이해가 있는 목사외에는 누구도 그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사모라도 목사를 대신 할 수는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잘나도 못나도 목회는 남편이 하는 것이다. 이 점을 목사나 사모가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요즘 동업이라고 사모가 설교도 하고 가르치는 사역도 하는 데 작은 교회에 인재가 없어서라면 몰라도 아니면 자제해야 한다. 사모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성가대를 그렇게 하는 분도 봤다. 사람이 없어서라면 몰라도 잘못하면 성개대 감시병 소릴 듣는 다. 주방일 너무 좋아해도 탈이고 그져 대접받고 칭찮이나 하는 게 좋다.  

사모라는 말은 타인이 부르는 칭호로 선생님의 부인이라는 뜻이기에 목사나 본인이 할말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역할에서 우러러 나와야지 호칭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독서와 견문을 넓히고 자녀들을 잘돌보고 목사의 건강과 목회의 건강을 돌봐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모의 취미, 친정, 친구는 모두 뒷전인게 그런 걸 좋아하는 교회 문화 때문이다. 교회가 원하면 부목사로 가르치는 사역을 할 수는 있지만 인위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강남의 대형교회 목사가 자가 사모에게 목사 안수 편의를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는 데 안될 말이다. 

목회는 국가 경영보다 기업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영적인 것이고 생명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서 변화는 되지만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게 목회다. 현대화된 기독교나 성직자의 위상이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직 그 자체로의 고유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자로의 직임이라는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사속에 나타난 교회와 관련한 시대상이나 성직상에 대하여 목회자 부부는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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