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목민심서(牧民心書)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칼럼/기고/강연
정약용과 목민심서(牧民心書)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1.02.13  23:42:04
트위터 페이스북

              위대한 사상가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중기 권문해, 한백겸, 이수광 등은 조선 실학사상의 문을 열었다. 유형원, 이익, 안정복 등이 실학의 싹을 틔우기(맹아기萌芽期) 시작했으며,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담헌 홍대용, 다산 정약용 등에 이르러 실학이 발전되었다.

실학(實學)이라는 말은 그대로 실용적인 학문이다. 유학이 관념, 명분, 이론 등에 치우쳤다면, 실학은 사회개혁을 실천하여 백성의 삶을 변화시키고 국가를 부흥하는 한 마디로 현실에 사용하는 학문이다. 혹자는 실학이 근대사상의 맹아(萌芽, 싹이 트기 시작), 자본주의의 맹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덕목과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목민심서(목민심서)』를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조선 후기 위대한 사상가다. 그의 친가와 외가 집안 모두 정치적으로 남인(南人) 계열에 속한다. 남인의 영수 고산 윤선도(1587~1671)는 다산 정약용의 6대 외조부, 공재 윤두서는 외증조부다.

   
 

가계도
762년(영조 38) 경기도 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증조부 윤두서의 집을 드나들며 공부하였고, 화순, 예천, 진주 등 아버지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녔다. 매형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고,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 역시 천주교 신자다.

다산 정약용은 이승훈과 이벽을 통해 이가환을 만났는데, 이가환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이다. 다산 정약용이 위대한 사상가로 발돋움하는 만남이었다. 1783년(정조 7) 증광시(생원시) 합격하고 1789년(정조 13) 식년시(대과=문과) 급제하였다. 1784년(정조 8) 23세의 다산 정약용은 사돈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 신앙을 한다.

정조대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中庸)』에 관해 질문을 내렸는데, 정약용의 중용 강의를 들은 임금에게 칭찬을 받는다.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 유능한 인재로서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된 다산 정약용은 정조대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1790년(정조 14)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업무상 실수로 충청도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대왕은 열흘 만에 풀어준다. 당시 전라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교도가 되고 조상 신주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을 계기로 1791년(정조 15) 정조는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자 다산도 천주교 신앙을 포기한다.

1792년(정조 16) 정조대왕은 다산 장약용에게 수원 화성의 축성과 설계, 공사 등에 관한 것을 작성하여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아버지 상(喪) 중임에도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었다. 수원 화성은 1794년(정조 18)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10월에 공사를 끝내 34개월 만에 완공됐다.

정조의 사랑을 받지만 
정조대왕은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날씨가 좋지 않자 백성을 위해 공사를 약 6개월간 중지시켰고, 이 기간을 빼면 불과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본래 10년 예상으로 시작한 수원화성 축조공사는 유형거, 녹로, 거중기 등의 기구를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했다. 이에 그 공로로 홍문관수찬,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지 등의 관직을 내린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그만두었지만, 일가친척 상당수가 천주교 신앙을 하여 주위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795년(정조 19) 최초의 외국인(중국인) 신부 주문모 입국에 형 정약전이 연루되어 정3품 동부승지에서 정6품 금정찰방으로 좌천된다. 그러나 다시(정조 21) 황해도 곡산군수로 제수되었고, 백성과 함께 하는 훌륭한 목민관이 된다.

1799년(정조 23) 형조참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노론 벽파의 탄핵을 받자 사직한다. 1800년(정조 24) 위대한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1801년(순조 1)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박해한다. 이른바 신유박해다. 다산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됐고, 천주교 신앙을 하지 않은 정약용과 가담 정도가 작은 둘째 형 정약전은 유배된다. 다산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포항)로 유배된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산 정약용은 다시 한양 의금부로 끌려간다. 역모죄로 잡힌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 장약현의 사위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왕의 부름을 다시 기다리며 『목민심서』를 썼는 데 형식은 자녀들 사교육용으로 국가에 부름 받은 목민관의 계율에 대하여 시작한 글이다.

그의 가족은 모두 초기 천주교 신자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집필했고 1818년(순조 18) 18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이 제수됐으나 반대세력의 공격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1836년(헌종 2) 15세에 결혼한 다산 정약용은 풍산 홍씨와 혼인 60년이 되는 회혼(回婚) 잔칫날 아침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부인 풍산 홍씨는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홍국영은 먼 친척 관계가 된다.

조선 후기 위대한 사상가 이자 조선 전체를 통 털어서도 대표적인 유학자인 정약용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학문적 지평이 넓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이에 고전 평론가 고미숙박사는 당시 같은 시대에 살았던 연암 박지원과 비교한 연구서를 낸 바있는 데 성향이나 추구하는 바는 다르나 이 둘을 조선시대 가장 걸출한 유학자로 뽑는 다.

한 가지 예을 들면 연암의 경우는 수려한 문체로 어 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하여 세세하고 심층적인 접근을 하고 실상을 드려다 보는 시각이라면 다산은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보고 제도 개선에 치중한다. 그렇다보니 현실에 대한 감정적 서술을 하는 반면에 박지원은 자유하는 영혼으로 해학과 노마드적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출신 성분도 연함 박지원도 다산 못지 않은 가문 출신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만 이를 거부하고 밖으로 나가서 주변부에 머무는 것을 추구했다면 다산은 힘있는 권력의 중심부로 나가 천사를 다스리려는 군신의 길을 추구하다 보니 중심을 향한 사고를 하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개혁가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맹자요의』, 『주역사전』, 『중용강의』, 『대학강의』, 『흠흠신서』, 『의례문답』, 『아언비각』, 『경세유표』, 『대한강역고』, 『마가회통』 등 500권이 넘는 많은 양을 저술했다.  다산 정약용의 대부분 저서는 유배지에서 쓴 것이다. 정치가로서 유배는 불행한 일이지만, 유배지에서 후학을 기르고 당대 석학과 교류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유교 경전(경학), 천문학, 지리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역사학, 의학, 과학, 예학, 문학, 언어학, 농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위대한 사상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책을 썼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와 순조가 위독할 때 어의(御醫)가 있는 궁에서 다산 정약용을 부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산 정약용이 부름을 받고 입궐 전후(前後)에 미처 손을 써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효명세자와 순조가 세상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이 의술 분야에서도 어의(御醫) 못지않은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910년(대한제국 순종 4) 8월 20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26명에게 무더기로 시호가 내려졌다. 다산 정약용에게 내려진 시호는 연암 박지원과 같은 문도(文度)다. 1910년 8월 22일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됐고, 8월 29일(경술국치일) 공표됐다.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서문 中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司徒)가 백성을 가르쳐 각각 수신(修身)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가(國子)를 가르쳐 각각 몸을 닦고(수신修身) 백성을 다스리도록(치민治民) 하는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牧民)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문학에서의 위치
애절양이라는 노래도 기록했다. 이는 백성들이 군역의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이렇게 아이를 낳은 내 물건이 죄다'라는 의미에서 고자되기를 선택해버린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시의 형식은 지키면서도 그 내용은 민중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 시의 내용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며, 시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는 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비판하였다.

<애절양>은 한국 역사에 남은 사회 비판 시가 중에서도 손가락 내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명시라서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시다. 또한 경기도 암행어사 직을 수행하다가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지은 한시 '적성촌에서'[28] 역시 오늘날까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는 데에 자주 언급되는 한시 중 하나다. 안빈낙도를 노래한 타맥행(打麥行, 보리타작이라는 뜻) 도 있다.

당시 폐단이 심했던 풍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풍수집의>를 통해 풍수 자체를 학문적으로 분석한 적도 있지만, <풍수론>에서 '말라 비틀어진 뼈가 어떻게 산 사람에게 복을 내릴 수 있는가'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 자신이 죽을 때도 유언으로 '괜히 명당 찾으려고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고 그냥 고향 뒷산에 묻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유언대로 다산은 광주 마현의 고향집 뒷편 언덕에 묻혔다. 재미있는게, 현대의 풍수 전문가들 중에는 정작 정약용의 묘소가 훌륭한 명당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행정 구역이 변한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속한다.

문학적으로도 굉장한 성과를 냈다. 여러 문학론을 전개하는 한편 시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중국의 것을 벗어나서 조선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용과 표현 면에서 독특한 작품들을 여럿 창작했다. 그러나 당대 사대부들의 문자가 한문이었기 때문인지 결국 한시만을 중점적으로 남기는 데 그치고 국문시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소설 문학 쪽에는 비판적이어서 당대에 흥미 위주로 유행하던 소설들을 모두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정조가 이 주장을 좋아합니다. 이는 북학파 쪽의 실학자이며, 호질을 쓴 문학자로 유명한 박지원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박지원 쪽이 더욱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던 반면 정약용은 냉철하고 꼼꼼한 면이 더 강하다. 소설을 배격한 것도 그 내용이 현실의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바로잡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허무맹랑한 쪽으로 흘러가는 데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

법의 학 분야
평소 법의학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고 본인도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이 반영되었다. 흠흠신서에선 조선 시대에 벌어진 살인 사건들에 대하여 상세한 사건 내역과 해결, 범인들에 대한 이야기 및 미지의 사건으로 끝난 살인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까지 싣고 있다.

그런데 그 사건 가운데에선 인체발화 사건까지 들어가있다. 1808년 두 남녀가 타죽었는데 옷은 멀쩡하고 사람만 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방화라고 하기에는 방바닥조차 탄 잿자국 빼곤 깨끗해서 당시 포도청들 사건 기록도 미해결로 끝났는데 정약용도 이 사건을 미해결로 처리한다.

현대 법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약용의 방법론은 상당히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흠흠신서에서 고을 수령이 괜히 자비를 베푼답시고 중범죄자의 처벌을 가벼이 하는 것은 쉽게 재범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니 일벌백계가 옳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법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여러 학문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정약용의 방법론에 대한 현대 법학적 관찰에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당대 인물들과의 관계
정조가 초계 문신제를 통해 직접 키운 대단한 인재이고 그의 정치 활동은 사실상 정조가 죽은 뒤 끝나기 때문에 정조를 묘사할 때는 열에 아홉은 정약용이 언급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록에서 정약용의 기록은 서학(천주교)과 관련하여 나온 게 전부다. 정약용이 활약했다던 화성 건축에서도 그가 언급된 기록은 전무하다. 정확하게는 이익에서 이어지는 남인계열 인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서 안정복은 공서파로 영조 대에 출사해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치던 세자 시강원에도 들어있었는데 정조 이전의 기록이 전무하고 60대 이후인 순조실록부터 기록이 나온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실감나는 부분이다. 이후 순조실록에서는 효명세자와 순조가 죽기 직전에 정약용의 의학 지식을 높이 사 그를 불렀던 기록이 있다. 하지만 둘다 너무 늦어서 미처 정약용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정조 암살설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 사후에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직접 주장했다. 아암 스님에게서 다도를 배워서 다산이라는 호가 생겼다는 설도 있고, 목민심서에서는 자신이 유배당한 장소의 뒷산이 다산이라서 호를 다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초의 스님이나 추사 김정희 등과도 서신 왕래를 하는 등의 교류를 했다. 그리고 이들 중 1811년에 죽은 아암 스님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친교를 유지했다.

실학계의 거두인 연암 박지원과는 동시대의 인물(25살 차이)이지만, 직접적인 접점이 거의 없다. 그런데 박지원이 일원인 백탑파 중 박제가는 정약용과 친분이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정조가 매우 관심을 기울였던 인사라는 공통 분모도 있었다. 덕분에 마과회통 저술 당시 박제가와 함께 천연두에 대한 치료법인 종두법을 연구했다.

대중문화에서
<영원한 제국>, <원행> 등의 정조의 시대를 다룬 소설 등에서는 정적의 행동을 사전에 간파하는 기민한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조선추리활극 정약용>이라는 퓨전사극도 방영된 바 있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명탐정이 정조 시대라 및 나머지 사항(죄다 스포일러다. 해당 문서 참조.)을 미루어볼때 정약용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인 듯하다. 심지어 가제도 조선명탐정-정약용이었다고 한다.

탐정 역할로 나오지 않더라도 영민하고 다재다능하고 실학에 밝았던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이산, 성균관 스캔들 등 사극에서도 지혜롭고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산에서는 극 후반에 등장하여 활약상이 많지는 않으나 홍국영 퇴장 후 그를 대신하는 정조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기존의 정약용 이미지대로 온갖 첨단 과학지식을 활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거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돕는 등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강조된다.

[관련기사]

예장뉴스 보도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3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4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5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10
쓰레기 시멘트 '맞짱' 뜨던 목사, 이렇게 산다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덕정 17길-10   |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aum.net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왕보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