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체제와 한국기독교 - 예장뉴스
예장뉴스
뉴스와 보도정치/사회/문화
1987 체제와 한국기독교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1.06.11  13:49:39
트위터 페이스북

               1987년 6·29 선언의 의미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의 정권 내 실세인 경호실장과 정보부장과의 권력다툼이 끝내 대통령 저격으로 막을 올린다. 이를 계기로 이를 수사를 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그 보좌관인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라는 3허씨들의 권력욕과 하나회 군인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면서 정권을 잡는 다.

이들은 민정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전두환을 간선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5년간 한국정치를 퇴보시켰다. 그동안 숨죽이며 집권의 열망을 갖은 민주 정치권과 민주화운동권은 전두환의 5년 단임이 끝나기를 기다라지만 군부의 정권연장을 위해 군출신 노태우를 다시 세우려는 간선제를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이에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 민주주의체제 수립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이 봇물처럼 커진다. 

   
 

그러던중 1987년 1월 당시 서울대 학생이었던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덮으려는 권력에 저항하는 학생들과 언론 야당의 끊질 긴 노력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던 치안본부 대공처는 결국 제한적이나마 사건을 인정하고 고문경찰 몇명을 구속하고 덮으려고 했으나 당시 공안부 검사와 부검 황적준박사, 언론 기자들의 노력으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영화 1987로 제작)

마침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이었던 이부영 동아투위 기자가 교도관과 내통하면서 고문경찰관이 구속된 것을 꼬리자르기로 윗선이 있다는 것을 밀서로 전달하게 되고 숨어있던 김정남선생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사제단의 함세웅신부등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의 희생과 헌신속에서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유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에 대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다.

여기에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정치적 반대세력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세력과 지식인인 학계·문화계·종교계 등 각계각층에서 '군사정권 유지를 위한 호헌조치 반대성명' 등 민주시국선언을 내놓았고, 민주화투쟁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이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세력과 정권장악이 목표인 정당인들과의 결합이 성공한 케이스다. 

   
                                                  *  기도회를 격려하시는 김형태목사(연동교회 원로)

정치권과 민주 시민운동의 연대 
그리고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5공 정권을 끝장내려는 정당들과 민주화운동세력들이 결합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불법화된 학생, 노동계, 종교계만의 외로운 투쟁에서 중간층인 소위 택타이 부대가 참여하게 되고 전국민적 저항에 직면한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은 6월 10일 김영삼·김대중·박형규·김성수·금영균·계훈제·이돈명·송월주·고은·인명진·오충일 등이 주도했다. 동시에 '박종철고문살인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해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어진 연세대생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거스릴 수 없는 민주화운동이 된다. 그리고 해외통신사들을 상대해야 했기에 마침 호주에서 귀국한 인명진목사가 대변인으로 활동한다.

6월 15일까지 전개된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 간 전국에서 연인원 500여 만 명이 참여해 '직선제 개헌 민주화 촉구'를 위한 거리집회·시위·농성 등이 이어졌다. 특히 6월 26일 시위에는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에서 100여만 명이 참가,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를 기록하기도 했다.

   
 

서울만 아니라 부산, 광주등 지방서도 
국민저항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돼자 전두환 정권은 시국수습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이른 바 '6·29선언'이라는 직선체 개헌 시국수습특별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은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의 실현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그러나 기록으로 보면 마치 이 운동이 천주교에서 한 것처럼 보여지는 데 그렇치만은 않다. 조직의 결성은 기독교장로회인 향린교회에서 전체 국민대회는 시청앞의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렸다. 그러나 당시 야당의 지도자 김대중선생이 천주교인 이었으며 함세웅신부나 김승훈신 이부영선생등이 천주교이였기에 천주교신부와 수녀들의 참여는 조직적이었다. 

   
                       * 당시 총회 임원회 총회장 김형태목사, 임옥목사, 김기현목사(마산 문창교회) 맨 우측에 주계명 총무

또 시민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도망을 가게되고 자연스럽게 농성으로 변화고 이게 언론에 크게 보도가 된다. 종교단체의 특성상 천주교나 명동성당은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 있어 경찰력이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에 학생등 시위대가 성당으로 들어갔고 김수환추기경도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사속에서도 각 국가의 천주교회는 그 나라의 민주화시기에 일정하게 역할들을 해온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개신교 지도자들이 더 많았고 적극적이었다. 기독교장로회의 박형규목사나 문익환, 문동환목사, 오재식선생등과 감리교의 조승혁, 김준영, 김동완, 최완택목사등과 성공회의 이재정, 이대용, 김근상, 윤정현, 김경일신부등과 예장 통합에는 조남기, 금영균, 홍성현, 김용복, 윤두호목사와 장청, 현대신학연구회가 참여했다. 

   
 

이 과정을 통하여 1987 체제의 민주화운동 세대들은 결속감이나 의식도 남다르다. 과거 386이나 지금 586으로 불리우는 기성 정치권의 중진이 된 당시 학생운동세력들이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 문화 대학 종교 각 분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지도자들로 성장했지만 김대중, 노무현정부에서 권력화되고 기득권화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우리교단과 관련한 역사는 6월 22-23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나라를 위한 기도회" 가 총회의 묵인아해 전도부 인권위(위원장:조남기목사) 주관으로 새문안교회에서 목회자 기도회가 열린다. 오후9시 30분 기도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총회가 있는 100주년까지 가두행진을 하려고 교회을 나와 광화문으로 진출하려다가 최류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들의 진압으로 연행되거나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가 밤샘 논성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 여전도사가 부상으로 입원하게 되고 1,000여명이 교회 안에서 밤샘농성을 하였다. 다음 날 새벽 총회장 김형태목사(연동교회)가 다시 오셔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고 장신대 이종성학장과 교수들도 격려방문을 하였다. 그 농성 자리에는 전국의 목회자들과 현신 회원들 장청회원 고영근, 홍성현, 이경석, 윤두호, 이경석, 인명진, 이명남, 이종윤, 김영락목사등이 앞장섰다. 

당시 이 기도회 전체 진행은 인명진목사(영등포산선)가 실무는 허춘중목사가 실무 간사로 기획했으며 성명서는 내가 쓴 기억이 난다. 그후  한국에서 WARC(세계개혁교회연맹) 총회가 연세대학교에서 열렸는 데 그 총회 자료집에 한국 민주화운동과정에 한국교회가 참여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그 성명서가 영문으로 번역되여 실리기도 하였다.  

   
 

1987년 체제가 갖는 의미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1987년 이전과 이후로 불리운다. 그리고 30년이 흐른후 ‘1987’ 이라는 영화가 제작되면서 대중화한다. 이 사건의 숨은 두 주인공인 이부영(동아투위) 김정남선생(전 청와대교육문화 수석) 의 '감옥 편지'을 중심으로 하여 박종철고문치사와 이를 둘러싼 일들을 영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87체제라는 말을 하는 데 5년 단임제를 다시 4년 중임제로 하려는 헌법의 골격을 바꾸는 문제나 변화된 사회에 맞는 체제로의 개편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나온지 오래다. 이 정부 들어 나름대로 검경수사권 분리, 검탈개혁과 공수처 설치등 진일보 한 것도 있지만 여전히 재판문제나 검찰, 언론개혁은 과제로 남아 있다.

당시 박종철군의 고문사를 계기로 나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는 이전의 성명서와는 달랐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부영과 김정남 손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정권이 조작하고 은폐했다는 비밀 편지를 이부영이 감옥에서 오랜 친구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인 김정남에게 보냈으며, 김정남은 이를 토대로 성명서 초안을 만들어 정의구현사제단을 움직였다.

   
 

“이부영을 도피시킨 혐의로 김정남은 수배 중이었는 데 당시 역촌동에 있는 고영구(80) 변호사 집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5·18 특별미사에 다녀온 고 변호사의 부인 황숙자 여사(2007년 작고)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오늘 드디어 했다’ 면서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쳐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됐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한다. 

김정남은 한해 전인 1986년 5·3 인천사태의 배후 조종 혐의로 수배 중으로 당시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이부영에게 친구인 김정남의 은신처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김정남은 주요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와 뒷수습 등을 책임지는 민주화운동의 ‘막후 조율사’였다고 한다. 이부영이 최종적으로 머문 곳은 변호사 고영구의 역촌동 집이라고 30년이 지난 후에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다.  

   
                             * 6.10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은 2017년 명성성당에서 재회한 두 분 

이부영/ <동아일보> 기자 시절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1975년 해직된 뒤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1984),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상임위원장과 사무처장(1985)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재야인사로 활동했다. 1986년 5·3 인천 사태 등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5차례 수감됐다. 1991년엔 이른바 ‘꼬마 민주당’ 부총재로 정계에 입문한 뒤 14, 15, 16대 의원을 지냈다. 1997년 대선 직전 합당으로 한나라당에서 의정활동을 하다가 2003년 김부겸, 김영춘 의원과 함께 탈당해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뒤 당의장(2004)을 지내기도 했다. △1942년 서울 출생 △용산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김정남/ 1964년 6·3 사태로 감옥살이를 한 이후 그는 줄곧 재야에서 활동한 민주화운동의 ‘조율사’였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조사,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폭로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도 그가 썼다. 김영삼 정부 초 청와대 교육문화수석(2003)을 역임했다. <진실, 광장에 서다>(2005), <이 사람을 보라>(2012) 등 다수의 민주화운동사 책을 펴냈다. △1942년 대전 출생 △대전고, 서울대 정치학과  * 김정남은 우리교단 사회봉사부 총무를 지낸 김종생목사의 친형이다. 

[관련기사]

유재무 편집인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3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4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5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10
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 성동구 성덕정 17길-10, A동 202호   |   사무소 : 서울 종로구 대학로 3길 29, 100주년 610호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daum.net   |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왕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