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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제일교회와 기독교회 역사(한국의 100년 교회)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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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8.17  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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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지역의 기독교회 역사 

대구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하는 요충지였으며 고려시대 들어 그 지리적 가치가 높이 인정받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후에 관찰사영이 설치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9년 대구시가 된 이후,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인접한 경산군, 달성군, 칠곡군의 일부 읍면을 편입했다. 대구분지는 북쪽으로 팔공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지와 남쪽으로 청룡산으로 이어지는 산지, 동쪽으로 용지봉과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이 일대는 내륙분지지역이어서 연중 기온의 차가 크며 강우량은 상대적으로 낮다. 1942년 이래 대한민국 기상청 관측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인 40도를 여러번 기록한 지역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인구도 계속 증가했다. 1981년 직할시로 개편될 때에 183만 명이었던 인구는 1990년대 들어 200만 명을 넘었고 2018년에는 248만 명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화학섬유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1970년대에는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도시가 발전했으나, 1990년대 후반 IMF로 인해 침체기를 겪었다. 2000년대에 들어 최첨단 소재산업의 중심지로 재도약했다.

행정구역은 중구·동구·서구·남구·북구·수성구·달서구, 달성군 등 7개구 1개군 6개읍 3개면 130개 행정동 195개 법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청소재지는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88이다. 면적 883.54㎢, 인구 2,432,883 (2020)이다. 

   
 

대구는 경상도의 도청이 있던 곳으로 경상도란 경주와 상주의 앞 자를 합쳐 만들었는 데 봉건시대에는 두 도시가 농업과 토산물, 종교적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고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도시로 발전한다. 그후 경부고속도로와 88(호남과 강원을 잇는 고속도)가 개설되고 더 크게 발전한다. 경상도 밑의 지방에서 중부권이나 서울로 가기 위한 경유지로 인구가 늘어가면서 상업, 산업도시로 이행하고 신흥 상업 재벌들이 늘게 된다.

서문시장이나 칠성시장은 이런 근대화된 시장의 전형으로 많은 지역의 토산물과 공산물이 거래되는 대표시장이다. 또 이후 현대화된 쇼핑몰인 대구백화점이나 동화백화점에 이어 최근 들어서는 신세계와 롯데에 이어 현대백화점이 들어서는 등 고급 쇼핑중심지가 된다. 섬유중심의 공단이 사양임에도 여전히 대구시민의 구매력이나 씀씀이는 줄지 않았는 데 KTX가 서는 동대구의 신세계역사는 포항, 울산등의 인접도시들에게도 크게 인기가 있다는 평이다. 

이는 유신이후 경상도 군인들의 중앙정치 등장으로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도시로의 오명도 벗을 수 없었는 데 이후 전두환, 노태우전 대통령이 모두 대구를 배경으로 한 인물들이고 그의 측근들 모두 대구에 근거를 두웠기 때문이다. 이어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도 경상도 이었기에 전국적으로 가장 특혜를 입은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양산업이 된 섬유에서 최근 첨단 IT산업으로 개편이 되지만 이제 부자는 부동산과 건물소유자들로 이미 좋은 시절에 서울과 부산에 부동산, 건물에 투자한 사회기득권층 다수가 사는 곳으로 정치적으로는 보수를 대변하는 도시다.  

   
 * 역대 대통령 11인중 경상도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8인)

교육은 1398년에 세워진 대구향교, 1563년에 세워진 연경서원, 그리고 1824년에 세워진 서산서원 등이 있다.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은 1899년 세워진 사립 달성학교, 1906년에는 최초의 중등학교인 계성중학교가 세워졌으며, 1907년에는 신명여자중학교가 건립되었다. 또 1960년 5.16 군사혁명후 대구는 서울 부산에 이어 일약 3대 도시가 된다. 삼성의 모기업인 제일모직이나 삼성물산의 기반이다. 그리고 1970년 이후 강남개벌에 경상도 출신들이 약진하여 강남 개발에 참여하는 등 신흥 부자들이 속출한다. 또 문화적으로도 영화배우 신성일씨나 가수로는 김광석이 청계피복노조로 유명한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일제하와 민족 개화기에는 교육 수준이 높아 문화 지식인들이 많이 나온다. 이은상, 이육사등이었다. 또 교원노조의 핵심이기도 했다. 또 박정희의 형 남로당의 남한 총책 박상희의 활동 거점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도시화 산업화이후 정치적 지도자들이 나오면서 집권 보수층의 기반으로 변모한다.  기독교의 진보적 인사들로는 영락교회 안수도, 김상해목사와 협성재단의 신진욱장로(민주당 의원) 남산교회 진희성목사가  있었다. 고 오남수장로는 장청회장과 민주당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도 했다. 장청 출신으로 노사모 초기 부터 활동하던 권오혁동지도 달서구 민주당 당협위원장을 지내는 등 척박한 대구 땅에서 민주당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삼덕교회는 정영환목사에 이어 김태범목사가 부임하여 교회 내 청년 학생들에 대한 관심을 갖지만 교단 총회장이 되면서 진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청대회를 허락하는 등 교단내 진보 개혁에는 큰 도움이 되신 분이다. 평신도로 신완식장로나 있고 현순호, 곽은득(작은), 안기성목사는 최초로 민중교회인 달구벌 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서울에서 박기백목사가 동로교회로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김홍근목사(장청선배)와 합병하여 목회하시다 소천한 바 있다. 또 마가교회를 은퇴하신 서일웅목사)나 누가교회 정금교목사등이 개혁적 목회를 이어가고 있으며 그외 고 서성훈(효목) 박노택(비산동) 김경태(구민) 박순종목사등이 있다.  

   
                                 * 계산동 성당에서 바라본 대구 제일교회  현 교회당  

기독교 역사 
기독교계 계성학교나 신명학교에서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보수계통의 NAE계열 교회와 지도자들의 중심지였고 장로교 분열시 합동측으로 상당한 숫자교회들이 넘어간다. 서현교회나 서문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통합도 크게 성장하여 현재 경북노회에서 분가한 대구동노회와 대구남노회가 있다. 산하교회들도 크게 성장하였다. 영남신학교도 있어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또 대구 제중원에는 각양각생의 환자들이 몰려왔고, 그 중에는 한센병환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위해서는 별도의 시설이 필요하여 의료선교사 아처볼드 그레이 플레처는 1909년 6월 27일 제중원 인근에 초가 1동을 마련하고 환자 10명을 수용하여 치료를 시작한다.

1914년에는 애락원교회가 설립되고, 한 때 대구 나병원이라 불리던 병원 명칭도 1924년부터 '대구애락원' 으로 정해진다. 설립자인 플레처 선교사는 43년간 한국 선교사로서의 시간 대부분을 애락원 사역에 쏟으며,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 환자들을 위한 병동을 짓는 헌신을 보여주었다. 2013년에는 애락원 설립 100주년을 맞아 플래처 선교사의 후손들을 초청한 가운데 기념행사를 열었으며, 지난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전시관을 개관한 바 있다. 그러나 원생들은 줄어드는 데 자산을 놓고 애락원 이사들과 실무자들과 총회와 갈등중이다.  

   
 

고종 32년(1895) 부산에 있었던 북장로교 선교본부가 대구로 옮겨지고, 광무 2년(1898)에 기와집 4동을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계속해서 신도가 늘어 1908년에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시킨 새로운 교회당을 지었다. 1933년 신도들의 헌금과 중앙교회의 성금으로 교회당을 새로 짓고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937년에 이주열 권사가 높이 33m의 종탑을 헌정했고 1969년에 내부공사를 하고 1981년에 건물 뒤에 515.7m²(156평)의 성전을 늘렸다. 

   
                                   * 이주열 권사가 헌납한 교회 종탑 기념석

현재 신축된 제일교회 자리는 영남신학교 자리로 이은상의 시에 언급된 청라언덕으로 옛 선교사들의 가옥이 여전히 남아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인 스윗즈 선교사 주택은 선교박물관으로, 제25호 챔니스 선교사 주택은 의료박물관으로, 제26호 블레어 선교사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건물 주변에는 선교사들의 묘소인 은혜정원, 선교사들이 세운 대구 최초의 여학교인 신명학교, 기독교인들 주도로 만세행렬이 벌어진 삼일운동길, 존슨 선교사가 심은 사과나무 보호수 등이 있다.

제일교회의 본당은 평면이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의 건물로, 정면 중앙에 현관을 두고 우측에 종탑을 둔 벽돌조 2층의 간결한 고딕양식이다. 1969년 내부 중수공사를 하였고, 1981년 6월 본당 뒤편으로 156평을 증축하였다. 건물 외관에 고딕양식이 잘 나타나 있어 대구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또한, 제일교회는 경북지방에 처음 생긴 기독교회로, 선교사들이 이 지방을 개화시키기 위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던 곳으로 선교사들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하였던 거점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곳이다.

   
   
                                               * 경북노회가 기증한 기념비석

대구의 모교회 대구 제일교회 
대구제일은 경북노회 소속으로 영남과 대구의 모교회로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의 대구 선교 시작과 시작된 것이다. 1907년 단층 140평의 예배당을 건축에 이어 1933년 2층 448평을 건축한다. 또 의료 선교 사업과 교육 선교 사업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해 왔는 데 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구·경북 지방 최초의 서양의료기관인 제중원(濟衆院)이 설립되었다. 제중원은 1899년 10월동산동(현재 위치)으로 옮겨지면서 계명대학 동산병원(東山病院)으로 개칭하였으나 이후 신후식 일가에 의하여 사유화가 된다.  

   
 

대구제일교회는 또한 희도(喜道)·신명(信明)·계성 등 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척하거나 분립하여 나간 교회는 20여 개에 달할 정도로 대구지역모교회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역대 위임목사만 12대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2012년 현재 13대 박창운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옛 예배당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고 역대 목회자중에 이상근목사는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영남신학교에서 교수로 학장으로도 사역하시는 동안 신구약 주석서를 집필했는 데 한국인 최초의 주석서다.

   
 

현 성전은 동산동 234번(전 영남신학대학교 부지)일대에 새 성전을 건축하여 1994년 6월에 이전하고 2002년 4월 헌당하였으며 교육문화관(전 영남신학교 강당 3층)은 2007년 1월 7층 연건평 약 1,330평으로 완공하여 명칭을 100주년 기념관으로 개칭하여 교육 및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근의 교회터를 약령시 박물관에 매도하여 지역사회에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공헌을 한 셈이지만 교회나 기독교역사 측면에서는 안타깝다. 영신대도 전체 이사를 갈 것이 아니라 대구제일교회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으니 제일교회 어딘가에 영신대 역사 흔적을 남겨놓았어야 한다고 본다.  

제일교회에서는 과거도 그렇고 대경의 기독교 연합집회등이 많이 열렸다. 그중 1976년 장로교 청년연합대회가 구 교회당에서 열렸는 데 이 때가 중요한 것은 당시 박정희 유신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신정권의 핵심은 군인들이고 대구 경북출신들이 다수였음에도 그 심장부에서 반 정부 성격을 갖는 기독청년 대회가 열린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장청의 역사는 대구제일교회를 대회를 분기점으로 하여 역사와 참여 의식의 큰 전환점이 된다. 이후 학생운동과 함께 군사독재 반대와 민주화요구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일교회 대로편 건너 편은 유서깊은 대구 계산동 성당인데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사치가 놓다.  옆은 대구교구가 운영하는 매일신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뒤가 과거 한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1번 국도인 성안길이었으며 양쪽에는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 주변이 모두 대구의 문화재다. 이육사의 생가나 그의 형 이상정장군의 생가(바보주막)등이 있어 대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그 뒤로는 현대백화점이 있고 대로 건너가 바로 대구의 그 유명한 남산교회다. 또 계명대설립자인 신후식목사가 설립한 동로교회도 모두 약전 골목에 있다.

따라서 지금이라고 대구의 기독교 혹은 우리교단으로는 그 지역을 좀더 관심을 갖고 기독교인들의 역사방문 여행을 위한 연결이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숙박업이나 식당등도 그렇고 성도들의 참여와 볼거리 먹거리로 더욱 풍성해 질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대구제일교회 이런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방 도시면서 그 흔적이 적지 않게 남은 곳인데 광주의 호신대 주변의 거리처럼 역사화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기독교 역사 유물
현재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이고 각광받는 것이 바로 역사다, 역사나 유물은 후대에 아무리 돈이 있고 기술이 뛰어나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하찮은 것이라도 시간이 가면 거기에 이야기가 담기니 유물이 되어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대구제일교회만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역사나 자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우리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산업화와 발전 문명이라는 개발에 밀려 과거를 초라한 것으로 낙후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특히 과거엔 왕이나 장군등 지배층의 보물과 유물만을 귀한 것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아니다. 민초들의 자료도 귀한 평가를 받는 시대다. 오히려 각색되거나 조작되지 않은 생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손때 묻은 성경이나 교회주보, 개인 일기나 서신등이 아주 귀한 자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개인사를 공인사 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을 하는 것은 시대나 특정 기관의 입김이나 원칙이 아닌 한 개인의 시각으로 기록된 것이 더 객관적 자료로 중요시 되고 있다. 그런면에서 대구제일교회 기독교 박물관도 교회의 공적인 자료만이 아니라 지난 120년간 신앙을 갖고 교회를 지켜온 교인들의 생생한 자료들을 더 수집하면 더 풍성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인적 자원에 대한 조사를 더 하여 채워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 이육사와 대구 제일교회를 배경으로 한 벽화 

대구제일교회가 초창기에는 3.1 운동등 민족운동과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교회지만 1061년에 부임한 이상근목사 퇴임후 역사와 비중에 비하면 한국교회나 우리교단에서 크게 주목받기 보다는 근심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991년 후임인 정영환목사도 길게 목회하지 못하셨다. 당시 이상근목사는 원로로 추대가 되셨다. 그리고 2001년 나요섭목사가 부임하지만 2006년 일부 교인들이 나요섭목사의 설교를 걸어 노회에 고발하여 시무해임을 당하는 등 오욕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2007년에 장신대를 은퇴한 고용수목사가 잠시 시무하다가 현재 박창운 목사가 2010년에 부임하여 2017년 재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박목사는 계명대를 나와 이곳에서 부목사를 지냈고 분당 가나안교회 부목사와 영락교회를 거쳐 춘천동부교회서 목회하다가 부임한지 10년이 되었으니 교단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로 당회나 지역의 노회가 배려를 해야 한다. 인물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갑짜기 튀어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교권정치를 해서 나서는 것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지역을 대표하고 의미있는 곳은 전체 기독교 차원에서 배려가 필요하다. 너무 정치적이거나 교권적이어서는 안되지만 지역를 대표하는 지도자를 한 교회에만 가두워 두는 것은 아쉽다.  영남신학대학교 MOU을 맺고 공간도 공유하고 역사보존에 협력을 하면 좋을 듯 하다. 

   
                                                * 이상근, 이성희 목사 부자 

최초의 부자 총회장 이상근, 이성희 목사 
지난 2020년 이성희 목사는 은퇴후 특이한 책을 냈는 데 선친인 고 정류(靜流) 이상근 목사의 설교준비에 대한 책이다. 이상근 목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태어나 1999년 향년 80세로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목회와 신학 연구에 헌신한 목회자 이며 주경학자다. 평양신학대학교와 미국 뉴욕신학대학교, 달라스신학대학교,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와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에서 수학했고 1945년 평양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평양과 경북 칠곡, 대구 등지에서 50여년간 목회를 했다. 총회장을 지냈지만 교권정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으신 선비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분들에 대한 역사 발굴도 조명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해외에서 오랜 시간 공부를 하느라 모국어인 한국어 만큼 영어가 익숙해진 이상근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위한 요약문을 영어로 작성했는데, 이번에 출간한 저서 '이상근 설교'에는 그가 생전에 작성한 2000여개의 설교 원고 중 30여개를 추려 선보였다. 컴퓨터가 세상에 없던 1950년대부터 자신의 서재에서 타자기로 쳐 내려간 부친의 설교 요약문을 아들인 이성희 목사가 한글로 번역하고 각주를 단 형식이다.

특히 ‘이상근 주해서’ 는 한국교회의 기념비적인 책이다. 국내에 구약과 신약 주해를 쓰신 분들이 더러 계시지만 신구약과 더불어 외경까지 모두 주해서를 낸 분은 없고, 세계적으로도 이 목사님이 유일하다. 합동측의 박윤석 주석과 쌍벽을 이룰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주석서라기 보다 주해서라고 하는 데 주경신학을 바탕으로 한 설교자의 관점에서 유익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학자로가 아니라 목회자로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장로교 목사로 장로교의 역사와 신학 정신이 뭍어있는 명저로 평가를 받는 다.

   
                         * 1956년 사경회 기념 사진으로 뒤 오른편에 고 강신명목사의 얼굴이 보인다.  

이상근목사 사제로 운영된 기독교원로원 
지난 2000년에는 故 이상근 원로목사 기념 ‘대구기독교 원로원 설립 기념비 제막식’ 이 열렸다. 대구기독교원로원은 이상근 원로목사가 재산을 헌납해 구입한 땅에 1995년 건립되어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제막식은 말씀을 전한 영남신학대학교 총장 권용근 목사를 비롯해 연동교회 이성희 원로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이런 역사와 공간을 좀 더 발전 시켜 영신대와 연계하여  이상근기념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을 제안해 본다. 

대구에는 이외에도 총회장을 지내신 박맹술목사나 계명대학 병원의 신일희형제나 비산동교회를 목회하신 김치영목사와 김치대목사 형제의 자취도 에사롭지 않다. 후학이나 제자들도 많고 자녀도 영신교수인 김동건, 김동선(호신대 은퇴)가 있는 데 각자 도생할 것이 아니라 대구 기독교의 인물들을 모아 기념하는 강좌등을 시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추천한다.  

이성희 목사는 故 이상근 목사의 2남으로 연세대 철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M. Div.)을 졸업했다. 풀러신학교와 샌프란시스코 신학원에서 목회학과 교회행정학을 전공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현재 모교인 연세대학교 이사로도 재직중이다. 또 예장 통합 제101회 총회장으로 섬겼으며 연동교회 원로목사다. 부친에 이어  총회장이 되어 한국 장로교회의 최초 부자 총회장이 되셨고 이후 103회에 림형석목사가 부친 림인식목사에 이어 부자 총회장이 나왔다.

   
   
 

교육 사회에서의 대구 경북 기독교 연구

정치사회적 보수성 형성과정에서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역할: 대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회역사적 연구 :: 기초학문자료센터 (krm.or.kr)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11696

2005년 정태식교수를 책임자로 하여 경북대학교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귀한 기독교 자료가 있다. ‘정치사회적 보수성 형성과정에서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역할: 대구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회역사적 연구’ 라는 제목인데 의의는 대구 경북지역 특유의 정치사회적 보수성 형성 과정에서 나타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 지도자들의 역할을 역사사회학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추상적 개념인 정치사회적 보수성이 어떻게 구체적인 ‘사회적 사실’로 생산되고 강화되어 오늘날 지역민의 지배적인 정서로 자리하게 되었는가를 밝히기 위하여 다음의 세 가지 중심 연구 과제를 설정하였다고 한다.

첫째, 지역특유의 정치사회적 보수성 형성의 역사적 배경과 연원은 무엇인가? 둘째, 정치사회적 보수성의 사회화(내면화)과정에서 나타난 종교(기독교) 지도자들의 역할과 그 기제는 무엇인가? 셋째, 종교(기독교)의 정치사회적 보수성 형성의 동기적 상황과 보수성 확산의 결과로 나타난 지역적 특수성은 무엇인가?
첫 번째 과제는 지역 보수성의 핵심을 친미와 반공이라 할 수 있기에 우선 공산주의 사상이 한국사회에 어떻게 접목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반응하였고, 어떤 과정을 거쳐 반공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친미의식과 연계되었는가를 시기별로 탐구할 것이다. 즉 반공의식이 일제강점기부터 이승만정권기, 장면의 2공화국, 3공과 유신의 박정희 시대, 그리고 5,6공 시절을 거치면서 어떻게 형성 발전하여 친미주의나 호남 Phobia 등과 결합되었는가를 주로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중심축으로 하여 연구할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정치사회적 보수성이 지역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어떻게 사회화 과정을 거쳐 확산되고 지역의 사회적 에토스로 내재화되면서 고착화되었는가를 밝히는 작업으로 이를 위해 성직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설교나, 강론, 또는 저술에 대한 분석과 함께 지역의 종교집단이 운영하고 발행하는 방송(대구기독교방송), 신문(『매일신문』,『가톨릭신문』), 잡지 등의 언론매체를 집중 분석할 것이다.

세 번째 과제는 위의 두 과제의 연구결과에 대한 해석 작업을 통해 도출하고자 한다.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한국의 개신교와 천주교가 일반적으로 표방하는 보수성의 전반적인 틀 안에서 대구 경북지역의 개신교와 천주교가 드러내는 지역적 특수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연구할 것이다.

이을 위해 보수성의 핵심을 이루는 반공주의 사상이 일제강점기부터 이승만정권기, 장면의 2공화국, 3공과 유신의 박정희 시대, 그리고 5,6공 시절을 거치면서 어떻게 형성 발전하여 친미주의나 호남 Phobia 등과 결합되었는가를 주로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중심축으로 하여 연구하였으며, 또한 성직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설교나, 강론, 또는 저술에 대한 분석과 함께 지역의 종교집단이 운영하고 발행하는 방송이나 신문을 집중 분석하였다.

지역특유의 정치사회적 보수성을 요약하면 반공, 반북, 친미, 호남 Phobia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반개혁적이고 배타적인 권력 독점 성향이 강하며, 경제적으로는 반노조 친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분배보다는 성장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영남이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보수의 아성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이 지역의 보수성에 대한 연구는 한국사회에 나타나는 사회정치적 보수성의 실체규명을 위한 하나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하기 위한 선행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1차년도 연구는 일제강점기, 미군정기, 이승만정권시절, 장면정권시절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와 기독교의 관계,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갈등과 대립, 미군정기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미군정과의 관계, 이승만정권시절에서는 천주교와 이승만정권과의 유착과 분열을, 그리고 장면정권시절은 천주교의 정교유착관계를 주로 다루었다.

2차년도의 연구의 주요 주제는 3공화국과 유신정권 시절 그리고 5,6공 시절에 나타난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 지역주의의 심화와 확산,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새롭게 등장한 호남 phobia 등이 대구, 경북지역의 보수적 정서로 자리 잡게 된 과정에서 개신교와 천주교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어떠한 사회적 입장을 보였는지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3차년도의 연구 주제는 첫째,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박정희의 3공화국과 유신정권, 그리고 5,6공 시절에 절정에 오른 지역특유의 정치사회적 보수성, 즉 친미주의와 반공주의, 호남 phobia 중심의 지역패권주의의 지역 종교매체를 통한 내면화와 사회화 과정을 추적하였다.

연구결과 및 활용방안
1차년도의 연구 결과로는 대구YMCA에서 발표한 "일제강점기 기독교 민족사상의 형성과 발전"이 있고 계명대학교에서의 강연회에서 "미선교사의 한국사회에 대한 사회정치적 태도와 기독교 수용 한국인과의 갈등"의 발표논문이 있다. 또한 "基督敎社會主義의 韓國的 受容에 對한 一考察: 崔文植 牧使의 思想과 實踐을 中心으로"의 논문이 『퇴계학과 한국문화』에 게재되었고, ‘10월항쟁 6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미군정기와 대구10월인민항쟁에서의 기독교 종교지도자들의 사회정치적 역할"이 있다.

2차년도에는 위의 논문을 수정 보완하여 『지역사회연구』에 게재한 "미군정기와 대구10월인민항쟁에서의 기독교 종교지도자들의 사회정치적 활동과 역할에 대한 일고찰"과 ‘개화기 외래종교에 대한 전통종교의 대응’ 종교문제 세미나에서 발표된 "기독교 수용에 있어서의 지식인 태도 변화에 관한 일고찰"이, 그리고 한국사회학대회에서 발표한 "전례논쟁과 가톨릭 박해에 대한 사회학적 일고찰"이 있다.

3차년도에는 ‘대구 경북지역 통합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을 주제로 한 경북대 세미나에서 발표한 후 수정 보완하여『사회과학 담론과 정책』에 게재한 "근 현대 대구 ․ 경북지역 기독교의 보수성에 대한 일고찰"이, NGO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 후 수정 보완하여『신학사상』에 게재한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사회적 위치와 공공성"의 논문이 있다. 한편 KNCC에큐메니컬 선교훈련원에서 주최한 종교개혁기념세미나에서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정치참여’에 대한 사회학적 응답"의 제목으로 강연이 있었고 CBS 방송의 초대석에 출현하여 "미국정치와 종교, 그리고 한국의 정치와 종교"에 대한 주제로 대담이 있었다.

결과 활용방안으로 학문적 차원에서는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일반론적인 접근과 함께 지역 특유의 현상이 지니는 독특성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비교할 수 있는 사례로 제시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타 지역과의 비교학적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차원 기대효과는 ‘지역학’ 위상 제고의 계기 마련이라 할 수 있다. 학문의 중앙 편중성은 지역 학문의 기반 약화를 가져왔고, 보수성에 대한 이론 중심의 학문적 기준에 근거한 환원주의적 연구방법이 지역의 특수성이 지니는 결정적 요인을 간과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따라서 지역 실체에 대한 논의 출발점 설정은 현실탐구학문의 새로운 장과 지역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제간적 접근의 심화발전을 들 수 있다. ‘지역’ 연구라는 것이 지역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의 정치사회적 보수성에 바탕을 둔 지역민의 의식에는 정치적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패권주의의 요소도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지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치사회적 의식의 실체에 대하여 자기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면 보다 객관적으로 지역민 개인 혹은 집단의 삶의 유형과 방식을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미 강연회나 방송을 통하여 지역의 정치사회적 보수성의 실체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해결책 제시를 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도 시민강좌나 대학의 교양 강좌를 통해, 그리고 시민 포럼 등을 통해 사회적 차원의 의식 개혁 운동을 지역 전문가와 시민단체들과 함께 전개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지역의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의 실체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정확히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시절에서 지역의 종교가 보였던 정치사회적 행태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한 반성의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지역 종교인들이 종교의 사회정치적 위치와 역할의 실체와 한계에 대하여, 그리고 지역에서의 종교와 정치의 역사적 유착 관계에서 나타난 종교 교리의 왜곡이나 타 지역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배타성 등을 바탕으로 하는 패권주의적 행태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성찰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종교의 사유화 현상의 지배적 결과로 종교행위의 주체가 더 이상 교회나 성당 등의 제도권이 아니라 개인에게 집중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기관이나 정치권력이 지역의 패권주의와 지방색의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지배담론의 허위의식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타당한 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하도록 하는데 본 연구가 활용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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