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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두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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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9.29  19: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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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을 대표하는 두 여성

조선도 초기엔 고려말의 사상적 기초였던 성리학이 지배한다. 이 분야 최고인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사상가인 율곡 이이를 키워낸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와 ‘예술가’로 이름을 남겼다. 강릉 오죽헌은 율곡이 태어났다는 몽룡실이 있는 건물로 잘 남아 있다. 여기를 성역화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1976년 문성사(文成祠)라는 사당을 거창하게 짓게 하고 직접 현판을 썼는 데 정치적 의도가 있다.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1504년-1551)
그녀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로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외할아버지 이사온과, 기묘사화로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은거한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성리학을 교육받았으며, 아버지가 아들 없이 죽자 경기도 파주의 시댁과 강원도 강릉의 친정집을 오가면서 친정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린 자녀들을 두고 일찍 병사하였지만 아들 이이를 대학자, 정치인으로, 딸 이매창과 아들 이우 등은 문인 화가로 명성을 날리는 큰 인물로 키워냈다. 동시대의 여성인 문정왕후, 정난정, 황진이 등과 비교된다.

그림, 서예, 시 재주가 탁월하였고, 성리학적 소양도 있었으며, 십자수와 옷감 제작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지식과 도학, 문장, 고전, 역사 지식 등에 해박하였다. 태교에서부터 정성을 기울여 아들 주나라 주 문왕을 얻은 현숙한 부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으로 아호를 정하였다. 후대에서 여성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별채를 의미하는 당(堂)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별호는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이다.

   
 

신사임당의 부친 신명화는 사임당 13살 때인 1516년(중종 11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공부에 매달려 사임당과는 16년간 떨어져 살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자 사림파에 가까웠던 신명화는 벼슬을 포기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처가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이때 신명화는 딸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사임당은 자매들 가운데 유난히 영특했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李氏)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하였다. 신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1541년(중종 36)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종로구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1551년(명종 6) 봄에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는 어머니를 기리는 글인 <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또한 바느질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썼다. 또한 ‘자당은 평소 묵적(墨跡)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한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고,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썼다. 사임당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대개 아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다.

2007년 한국 진보 여성계는 신권인 5만원의 신사임당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반대했는 데 이는 신사임당에 대한 현모양처의 굳어진 이미지가 과연 신사임당의 것이냐는 원초적인 문제 제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관순과 함께 거론되었지만 결국 이들의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의해 지폐의 주인공으로 전격 결정된다.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이 그의 9촌 조카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해공 신익희는 14대 방손으로 알려졌다.

   
 

사친(思親) - 친정을 그리워함>
천리가산만첩봉(天里家山萬疊峯) - 산첩첩 내고향 천리이언만
귀심장재몽혼중(歸心長在夢魂中) -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돌아가고파
한송정반쌍륜월(寒松亭畔雙輪月) - 한송정가에는 두 개의 둥근 달
경포대전일진풍(鏡浦臺前一陣風) -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사상백로항취산(沙上白鷺恒聚散) - 백로는 모래 위에 모였다 흩어지고
파두어정각서동(波頭漁艇各西東) -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하시중답임영로(何時重踏臨瀛路) -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채복반의슬하봉(綵服斑衣膝下縫) -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까?

   
 

허난설헌(1563~89)
허난설헌도 강릉태생으로 부친의 호인 초당으로 불리우는 경포호 인근에 그의 생가가 있는 데 기념관은 크기나 규모로는 오죽헌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하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 작품 소개, 가족 이력 등의 가치는 높다. 시비와 생가터가 있는 공원도 소박한데 조선시대 여인으로서 가부장적 인습에 괴로워했던 허난설헌의 모습이 회상된다는 평이다.

이렇게 신사임당(1504~51)과 허난설헌(1563~89)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이자 예술가였다. 둘은 어려서부터 재능을 키우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당시는 여성이 문필적 교양을 갖추는 것이 가로 막혀 있던 시대였지만 두 가정은 달랐다. 당시 전통으로는 남자가 여자의 집에 장가하는 시대의 말미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중국에서 유래한 처가살이 제도가 여자집에 부담이 크다 하고 시집(남편의 집)혼을 장려한다. 왕족이나 사대부부터 이를 장려하였는 데 신사임당은 다행히도 그의 지적 호기심과 가정의 특수한 환경으로 친정살이를 했기에 자녀교육이나 자신의 능력을 꽃피웠던 것이다.

허난설헌은 1563년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났는 데 부친 허엽은 선조 때 동인의 우두머리에 올랐던 인물로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첫 부인 청주 한씨 슬하에 1남2녀, 후처인 강릉 김씨 슬하에 2남 1녀인데 허난설헌은 강릉 김씨가 낳은 셋째로 동복(同腹)은 오빠 하곡 허봉과 막내 교산 허균이다. 형제들이 모두 명석하여 큰 오빠 악록 허성(1548~1612)은 병조 판서에 올랐고 황윤길과 서장관(書將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침략할 것임을 조정에 고하기도 했다.

작은 오빠 허봉은 열여덟 살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창원부사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과 율곡 이이 선생을 논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됐다. 허봉은 홍문관 동료인 예조판서 유성룡, 그리고 아버지와 동문인 영의정 노수신의 도움으로 3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자 벼슬의 뜻을 버렸다. 그는 백운산과 금강산 대명암 등에 묻혀 살다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병을 얻어 서른여덟 나이로 죽었다.

   
 

허균과 홍길동전

동생 허균은 여섯 살 아래였는데 형제들의 귀여움을 받은 막내로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아 한 번 읽으면 모두 외웠다. 다른 형제들처럼 글 짓기가 매우 뛰어났다. 형식적인 예절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급진적 사상가로 자라, 유교와 도교를 포함한 제자백가뿐 아니라 불교와 천주교까지 익혔다. 문과 장원 후 여러 차례 장원을 거듭,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천대받던 서얼 출신 동지들과 뜻을 모아 혁명을 꾸미다가 당파 싸움에 휩쓸리어 쉰 살에 능지 처참된다.

허균은 사대부로는 흔치 않게 역모에 휘말려 단명하는 데 그의 사상이나 시대와 관계가 있었다. 그의 언문 소설 홍길동은 의적으로 서자로 호형호제하지 못하는 울분을 달래서 동류들과 어울리며 잘못된 사회를 혁파하고 탐관오리와 부자들의 재산들 빼았어 가난한이들에게 나눠 주는 의적을 주인공으로 하고 나중에 율도국(Utopia)이라는 이상사회를 염두에 두웠는 데 대단한 발상이다.

허난설헌은 당시 풍습대로 안동김씨가문에 조혼하지만 27세 요절한다. 그러나 남편의 능력이나 시집에서도 그의 시짓기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여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따라서 그는 꿈과 신선의 세계를 꿈꾸며 마치 신선 세계가 자신의 고향이고, 인간 세계는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묘사하는 시를 썼다.

그리고 죽기 전에 평생 동안 쓴 시를 다 불태워버렸다. 전해지는 시는 동생 허균이 평소 외웠던 누님의 시와 친정에 남은 시를 정리했고 이것이 중국에서 온 사신 주지번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가 출간되었고, 허균은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1608년 4월 고을 재정을 빌어 목판으로 『난설헌집』을 간행했다. 중국에 일찍이 여성의 시가 소개된 것은 허균의 덕이었고 허균은 한글로 된 시가 중국에서 발간되기도 했다.

   
 

불운한 결혼과 몰락하는 친정
허난설헌의 남편은 역설적으로 부인이 예술 활동을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하기도 한다. 허난설헌이 지은 시에는 삶의 고단함이 배어있는데 최대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남편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방에 오지도 않는 님을 혼자서 기다리며 지은 시와 아이 둘을 여의고 절절하게 지은 시에는 그의 외로움과 슬픔이 구절마다 서려 있다.

허난설헌의 비극은 결혼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의 혼인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안동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나 문과에 합격했을 정도로 유망한 집안이었지만,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과거에 계속 떨어져 난설헌이 죽던 해에 겨우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재주와 학식보다 바람기가 있어 난설헌의 애를 많이 태웠던 것 같다. 고부관계도 좋지 않았다는 허균의 글도 전해진다.

허난설헌의 친정 아버지는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상주 객관에서 객사했고, 오빠 허봉은 객사하는 등 그를 우울감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당시 사회는 철저한 남존여비의 사회로 현모양처를 여성의 모범으로 꼽기도 했고, 바느질 잘하고 베 잘 짜는 여인을 훌륭한 여인상으로 꼽기도 했다.

이런 친정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고, 자신의 시재를 알아주었던 인물이 하나씩 사라지는 데 더욱 가슴이 메어졌다.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그리하여 더욱 감상과 한에 빠졌다. 그러다가 한번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다고 한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이라 한다.

   
 

평가

첫째는 바로 그녀가 시재를 널리 뽐낼 수 없는 좁은 풍토를 안타까워한 것이고, 둘째는 남성으로 태어나 마음껏 삶을 노래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셋째는 그녀의 남편이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더욱 방탕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녀는 스물세 살에 어머니의 초상을 당해 친정에 가 있을 때 꿈을 꾸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저 신선 사는 곳에 올라 노닐면서 온갖 구경을 다 하다가 한 줄기 붉은 꽃이 구름을 따라 날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꿈에서 깨자 곧 “붉은 부용꽃 서른아홉 송이가 차가운 달에 떨어졌네”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자신의 죽음을 두고 읊조린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고, 그 죽음의 형상은 곧 신선의 세계였다. 그녀는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히 안고 스물일곱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은 분명 슬픈 것이었고 한 천재의 한 어린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이에 허균은 이렇게 썼다.

그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허균이었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모아 베껴 세상에 소개했다. 생전에 넓은 중국에 시명을 날리지 못한 것을 한탄한 누이를 위해 허균은 그녀의 시집을 중국 사신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시는 중국에 널리 소개되었고, 중국의 여류시인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시를 애송했다.

한편 국내에서도 그녀의 시는 시화(詩話)나 시평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어떤 시화에서는 격조면에서 허봉이나 허균의 시가 모두 그녀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극찬을 했다. 그녀의 시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자, 허균의 정적들은 허균이 그녀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지은 시를 누이의 시라고 세상을 속였다고 써대기도 했다. 특히 허균이 한글로 《홍길동전》을 써서 미움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죽자, 많은 정적들은 허균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이 말을 그럴듯하게 날조했던 것이다.

<빈녀음(貧女吟) (가난한 여자의 노래)>
개시핍용색(豈是乏容色) - 인물도 남에 비해 그리 빠지지 않고
공침복공직(工鍼復工織) - 바느질 솜씨 길쌈 솜씨도 좋건만
소소장한문(少少長寒門) -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자란 까닭에
양매불상식(良媒不相識) - 좋은 중매자리 나서지 않네.
부대한아색(不帶寒餓色) - 춥고 굶주려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진일당창직(盡日當窓織) - 하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짠다네.
유유부모련(唯有父母憐) - 오직 내 부모님만 가엾다 생각할 뿐
사린하회식(四隣何會識) - 그 어떤 이웃이 이내 속을 알아주리오.
야구직미휴(夜久織未休) - 밤이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알알명한기(戞戞鳴寒機) - 짤깍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기중일필련(機中一匹練) -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
종작하수의(綜作何誰衣) -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수파금전도(手把金剪刀) -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를 제면
야한십지직(夜寒十指直) - 추운 밤에 열 손가락 곱네.
위인작가의(爲人作嫁衣) - 시집갈 옷 삯바느질 쉴 새 없건만
년년환독숙(年年還獨宿) -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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