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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이단아 허균의 생애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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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0.10  16: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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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천재 허균의 짧은 생애  

형조정랑,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호는 교산(蛟山)·성수, 본관은 양천.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광해군 때 권신 이이첨 막후에서 종사하던 중 반역 혐의를 쓰게 되어 거열형을 당했다.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싫어하여 몇 차례에 걸쳐 암살을 기도한 것이 유명하다. 실록에 따르면 정치쪽으로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내며 망상하는 것에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동인의 실세인 허엽의 아들로 형제로는 형인 허성, 허봉과 누나인 허난설헌이 있다. 동서 분당을 일으켰던 김효원이 후처인 김씨의 아버지이고 장인이었다. 아버지 허엽의 호는 '초당'으로 오늘날 강릉의 명물인 데 '초당 두부' 의 원조라고도 알려져 있다. 허엽은 널리 알고 박식했지만 정작 학문의 깊이는 얕다는 비웃음을 주변 유학자들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온화한 인물이었던 퇴계 이황마저도 허엽을 가리켜 "만약 그 친구가 학문을 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참 거짓없는 사람이라 할텐데''라고 비꼰 적이 있을 정도다.

   
 

허엽은 율곡 이이와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에 서로 크게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 였을 정도. 허균의 가족들은 모두 문장에 재능이 있어 당대에 허균 가족을 가리켜 '허씨 5문장'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집안에 마가 꼈는지 하나같이 최후가 좋지 못하였는데 허봉은 종성까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나 방랑하다가 38세가 되던 해에 요절했다. 허엽은 말년에 경상 감사로 나갔다가 지나치게 호색하였고 건강이 좋지 않아지게 되어 약을 복용한 뒤 행정을 괴이하게 하여 결국 관직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상주에서 객사했다.

누이 허난설헌은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고생 끝에 요절하였으며 허균은 반역죄로 오체분시를 당하였다. 그나마 장남인 이복형 허성이 좀 낫지만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도 다녀왔고 전란 중에 고생했는데 훈명(공있는 신하에게 주던 칭호)도 받지 못한채 죽었다. 아무래도 그는 집안의 막내였던터라 귀여움을 받아 방종하게 자랐는데, 이런 성향은 그의 성격의 근간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마이페이스 속성 보유자였던 셈인데, 이러한 사실은 생전 본인도 시인했다.

집안에선 여성이었던 허난설헌에게도 오라비들이 따로 스승을 붙여 주어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서자 출신의 유명한 학자였던 손곡 이달이다. 그런 탓인지 허균은 기존 사회의 적서(嫡庶) 차별과 신분제에 강한 회의와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데, 후에 당시 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서얼과 접촉하여 역성 혁명을 일으키고 적서와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모의를 했다는 설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허균의 제자인 기준격이 허균이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보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서 체포되었다. 원래 기준격은 전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로 불교에 심취한 기자헌이 역시나 불경을 섭렵하여 인연을 쌓게 된 허균에게 보내 글을 배우게 했는데 허균은 기준격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지 않았고, 때문에 기준격은 허균의 위험한 사상과 행보를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허균은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맹렬히 공격하여 유배를 가게 했고 기준격이 격노하여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 논의 끝에 이이첨의 강력한 주장으로 조사도 하지 않고 반역죄로 단정지어 그는 사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적서 차별을 혁파하고 역성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실록에 남겨진 기록을 보면 그다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여겨진다. 허균은 광해군 때 권신인 이이첨의 수족으로 영창대군 제거 이후 소성대비의 폐서인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유언비어를 살포하고 사람들을 모아 불궤를 도모했다가 일이 커지고 발각이 나자 이이첨에게 버림받은 것 같다.

수감 중에도 부하들에게만 심문이 이루어졌으며 본인에게는 제대로 된 심문이 없었으며 곧 이이첨이 의금부에 드나들며 허균을 안심시키다가 창졸간에 끌어내 처형해버렸다. 허균은 심문 받는 줄 알고 나왔다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자 경악하여 광해군에게 "잠깐만! 아뢰올 말이 있습니다!" 라고 외쳤지만 신하들이 "닥쳐라 역적 놈아!" 라고 욕을 퍼부었고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끌려나가야 했다. 자신이 역적이라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하자 동의 못한다고 버텼지만 억지로 서명하곤 사지가 찢어졌다.

그 이후 광해군의 반교문을 발표하기를, 성품이 짐승 같은 역적 허균을 잡았으니 대사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과정이 억지스럽고 의혹이 많기는 하나 어쨌든 역적행위로 잡힌 것이었기에 아들들은 연좌되어 처형당했고 허균의 아버지 허엽의 묘 또한 파헤쳐졌다. 그와 관련된 인물들 역시 대거 체포당하였는데, 다만 사위 이사성과 조카들은 의금부에서 허균과 평소 친하지 않았음을 강조해 처벌받지 않았다. 보다 온건한 중북에 속했던 기자헌은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훗날 류희분도 이이첨이 허균을 심문도 안하고 죽인 것을 깠고 이에 이이첨이 주위에 “허균의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데 내가 평생 역적을 잡은 몸이 아니더냐?”라고 항변하니 다시 "이이첨이 평생동안 역적을 잡아 나라에 충성했다고 자랑하던데 그런 사람이 역적 처리를 그따위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허균의 죽음에 대해 까댔다.

허균이 평생을 친밀하게 지내며 벗처럼, 혹은 누이처럼 지내던 기생이 있었는데 바로 부안의 명기 이매창. 그러나 남녀관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매창은 공공연하게 유희경에 대한 연모의 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허균도 매창에게 보내는 편지에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지적 교류를 한 소울 메이트로 남은 것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

   
 

시대의 이단아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전형적인 말이 실제를 못 따라간 인물이다. 문장가로선 뛰어났으나, 정치가와 관료로선 하찮았다. 처세로 논하자면, 입으로는 급진적인 말을 하지만 막상 위험해지니 권신에게 영합하다 그 권신의 희생양으로 죽은 인물. 아버지 허엽이 문장만 뛰어나지 학문은 보잘것 없다고 이황과 이이에게 지적받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현대 한국의 대중매체들은 허균의 실제는 보지 않고 허균의 말에만 주목해 과대평가한다.

현대적 관점으로 허균의 업적을 평가하자면 저자가 허균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홍길동전이나 대다수가 날조, 표절 의혹이 있는 허난설헌의 시보다는 허균이 최초로 천주교를 국내에 들여온 인물이라는 점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천주교 12단(端)이라는 책을 들여옴으로써 천주교 전파의 기초를 마련한 것. 하지만 정작 허균 본인이 천주교 신자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평소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허균이 중국에서 책을 수천여 권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천주교 책도 같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크게 심취했던 건 불교로, 유정대사와도 친분이 있었고, 그가 탄핵된 주된 이유가 불자였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율곡 이이나 김시습이 직간접적으로 불교와 인연이 있어 반대파에 공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점도 당대 인사들에게 허균이 공격당하는 이유가 되었는데, 선조는 "원래 글쟁이들이 불경을 두루 섭렵한다는데 그러다 그렇게 된거겠지. 뭘 괜히 그러냐?"며 두둔했다.

미디어에선 시대의 이단아라는 과분한 평가를 받기도 하나, 실상 허균은 자신과 친했던 서얼들이 반역에 연루되자 당대의 권신 이이첨의 밑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했다. 그리고 반역이라는 것도 정황상, 그가 반역을 일으킬 만한 사정도, 그릇은 아니어서 최근에는 그가 이이첨에게 토사구팽당해 죽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광해군의 며느리이자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원손을 출산하지 못하자 이를 대신하기 위해 허균의 딸이 왕세자 이지의 후궁이 될 터라 허균이 반역을 일으킬 만한 동기는 전혀 없었다.

다만 이이첨 휘하에 들어가 영합하면서 충실하게 수족 노릇을 하지 않고 돌발행동을 저질렀다. 하인준 등 심복을 시켜서 "여진족이 압록강을 넘어온다, 하남대장군이 죄인을 벌하러 온다" 등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한양 도성의 백성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이첨도 인목대비 처리 건에 관련해서는 허균을 지지했으나 유언비어를 퍼트려서 한양 도성 백성을 대피하게 하는 건 분명 이이첨에게 전혀 도움이 될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박승종 등 이이첨 반대파가 조정 내에서 즐비한 상황인데 무리수를 두면 비판의 화살은 허균이 아니라 허균을 중용한 이이첨에게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특히 옥에 갇혔다가 제대로 심문 한번 받지 못하고 바로 처형되었다는 점이 이이첨이 이미 허균과 척을 진 정황 증거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죽기 직전에 한 말(유언)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였다고 한다. 오늘날 혁명가, 이단아 과한 대접을 받는 허균은 문장을 제외하곤 두각을 드러낸 바가 전혀 없다. 다소 적나라하게 말하면 정치가로서 관료로서도 심지어 힘있는 이의 수족으로서도 쓸모가 없었고 그렇게 능력 없는 주제에 배포만 쓸데없이 컸다.

   
 허균의 호민론 일부. 허균은 ‘호민론’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경고하면서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런 그의 사고가 결국 [홍길동전]을 통해서 보다 구체화되었다고 하겠다

"호민론"에서 볼 수 있듯이 사상가로서는 재능이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데는 분명한 한계를 보였다. 애초에 딸을 광해군의 후궁으로 간택하게 하면 광해군의 세자의 장인이 되니 허균 입장에서는 가만히만 있어도 부귀영화는 따 놓은 당상인데 굳이 하인준 등 심복을 시켜서 스스로 논란거리를 자초해서 죽은 건 처세가 뛰어나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왕세자의 장인어른 아니면 왕조의 반란자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분명 전자를 고르는 것이 허균에게 현실적으로 얻을 것이 많았을텐데, 굳이 후자를 고른 건 현실과 타협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반란을 할 거면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아니라서 제자 기준격이 상소를 올리고 난 후 무리수만 두다 가문도 풍비박산나고 하나뿐인 목숨도 날아가고 말았다. 허균의 사상이 굉장히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것으로 하는데, 세간에서 흔히들 말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사상이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진 못했다. 허균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글은 그의 "호민론"이라는 글이다. 여기서 그는 백성의 종류를 항민, 원민, 호민으로 나누고, 항민은 불합리한 현실에 순응하지만, 원민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호민은 한술 더 떠서 반란을 기획한다고 썼다. 허균은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폭정을 일삼는데도 호민의 수가 적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 높은 사람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그 시절 호민론 자체는 춘추 전국 시대 맹자가 주장한 역성 혁명론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지만, 맹자의 역성 혁명론은 천명을 받은 자가 하늘을 대리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천명을 잃고 새롭게 천명을 받은 자가 나타난다는 수준이었다면, 허균의 호민론은 그 골조는 같으나 그 어떤 평범한 백성이라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맹자의 역성혁명론보다 서술의 정도가 다소 과격하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허균은 호민론에서 단순히 관직에 있는 사람을 까는 정도가 아니라 고려의 조세제도와 조선의 조세제도를 비교하며 현재의 조정이 고려보다도 못하다며 직접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인격적으로도 썩 훌륭치 않은 사람이었다는 기록도 여럿 있는데, 삼사의 탄핵도 6번이나 받았으며, 중앙 요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할 일을 내팽개치고 탱자탱자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성대중의 수필집인 <청성잡기>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면서 이런저런 궤변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허균의 '욕망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 준 것이고 도덕은 사람이 나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옳다'라는 발언을 같은 것으로 보아 비난했다.

이런 말이나 하니 역적이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결론. 굳이 역모 사건이 아니더라도, 조선조의 유자들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비판받을 만한 구석이 꽤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저서로는 <홍길동전> <성소부부고> <유재론>이나 <호민론>도 여기서 나왔다. 문장력 하나만큼은 자타 공인의 괴수였던 모양. 허균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실록마저도 허균의 문재에 대해서는 '문장의 화려함이 근래에 견줄 만한 자가 없다', '문재가 뛰어나 붓만 들면 수천 마디의 말을 써내려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상상력도 아주 뛰어나서 '망상이 심하고 허구의 이야기를 잘 꾸며낸다'라는 기록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상당한 미식가였던 모양. 성소부부고에서는 자신에게 미식가 기질이 있는 것에 대한 글이 있으며, 도문대작이란 제목으로 전국의 유명한 토산품과 별미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다.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고기가 먹고 싶어서 도축장의 문이나 바라보다가 입만 씹어본다는 뜻이며, 서문에서는 "죄를 짓고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이전에 먹었던 음식 생각이 난다. 그래서 이에 대해 글을 써보며 대신 즐겨보려고 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대한민국 최초 맛집 블로거.

그리고 허균의 저서라고 해야 할지 애매한 책이 있는데, 바로 누이인 허난설헌의 명의로 발표된 <난설헌집>이다. 허난설헌이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태우면서, 허균이 기억을 바탕으로 복원했다고 알려져서 허난설헌의 현재 평가를 만들어낸 책인데... 문제는 표절 논란이 조선 시대 이래로 꾸준히 일고 있는 책이란 것이다. 그것도 시 전체에서 단어 몇 개만 바꿔놓은 수준인 시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로 문집이 발표된 직후부터 현대까지 한국과 중국에서 끊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난설헌집의 시들은 당나라 시인들의 시들을 거의 대놓고 배낀거 투성이라고 지적해도 이상하게 대중적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 현재 허난설헌의 시 중에서 표절 논란도 없고, 허난설헌 본인이 쓴 것이 분명해보이는 시는 정말 몇 수 안되는 상황이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최유력 후보자가 바로 허균이다. 허균이 평범한 문인이어도 의심쩍은데, 하필이면 허균의 문장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라서 충분히 '창작'을 하고도 남을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허난설헌이 썼다고 알려진 규원가의 경우는 저자가 허균의 첩인 소쌍이라고 홍대용이 기록하고 있다. 홍길동전 때문에 거열형에 처해진 거라거나, 그냥 사약 받고 죽었다는 둥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조의제문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며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도 노모 때문에 마지못해 세조의 조정에서 벼슬한 것처럼 처신한 것은 위선이였다고 비난한다.

대중매체에서 평가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김주영이 연기했다. <임진왜란> 편부터 등장하는데 임진왜란 때 가족을 잃고 방랑하다가 혁명적인 사고를 가지고 이어 <회천문> 편에서 처형되는 역할. 임진왜란이 일어날 즈음해서 "평시에는 누구나 충신이라 자부하지만 전란이 나봐야 누가 충신이고 누가 소인배인지 알 수 있다."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 허균이 나쁜 남편으로 몰아 과장까지 섞어가면서 까대던 매부 김성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여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2000년 KBS 드라마 천둥소리에서는 배우 최재성이 연기했다. 만화 <풍장의 시대>에서 한 선비의 스승으로 능지처참된 선비가 허균이다. 2012년 개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는 배우 류승룡[17]이 연기했다. 살해 위협 때문에 광해군을 보위하고 가짜 광해 배역을 '하선'으로 직접 고르고 그를 도와주는 극 중 중심 인물이 되는 역할을 맡았다. 무게 있는 진중하면서도 엉뚱한 허균의 면모를 살렸다는 평.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배우 안내상이 연기했다. 실제 허균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광해군, 이이첨과의 관계 사이에서 가상의 인물인 강주선과 자신의 오랜 계획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협력을 하게 된다. 실제 허균의 일대기가 최후의 모습까지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반영되어 그려졌다.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 홍길동전이라는 언문 소설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루지 못한 이상사회를 율도국이라는 설정은 U-topia로 어디에도 없는 나라인데 아마도 천주학에서 그런 천국이라는 이상사회를 꿈꾼 것은 아니겠는 가 하는 연구도 있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부조리한 제도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임진왜란의 참화가 전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조선 광해군대에 지배계층이었던 양반사대부들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살피기는커녕 치열한 권력다툼 속에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영속시키는 데 전념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한 허균은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고 역설했다.

허균은 〈호민론〉에서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恒民), 불만이 쌓인 원민(怨民),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豪民)의 세 부류로 구분한 다음,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이 소리만 듣고도 저절로 모여들고 항민들도 살기를 구해 따라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호민의 대표로 홍길동이란 인물을 형상화했다.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 

홍길동은 연산군대에 얼자의 신분으로 도적떼의 두령이 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인조대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그를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조선 시대의 3대 도적으로 꼽기도 했다. 말년에 서얼들과 함께 혁명을 꿈꾸다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허균이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해 보인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홍길동에 대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핍박받는 서민들을 위해 싸운 의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가 의적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민중들은 부정한 체제, 무자비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으로서 치열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에서 연산군으로 이어지던 시기에 조선은 《경국대전》으로 법률체계를 완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았다. 그 무렵 조정에서는 세조대부터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훈구파와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체계를 꿈꾸며 출사한 사림파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와 같은 고관대작들의 정쟁에 편승한 지방의 수령과 이속들이 한통속이 되어 가렴주구를 일삼자 수많은 양민들이 터전을 잃고 고향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도적떼로 변신하여 자신들을 핍박했던 양반가나 관청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그때 가장 강성했던 도적떼의 두령이 바로 충청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홍길동이었는 데 1986년에 발표된 박종현의 논문 〈실존 홍길동 연구〉에 따르면 홍길동은 본관이 남양으로 경성절제사를 지낸 홍상직의 아들이었다. 홍상직은 정처인 남평 문씨로부터 귀동(貴童)과 일동(逸童) 두 아들을 얻은 뒤 관기 출신의 비첩 옥영향으로부터 셋째아들 길동(吉童)을 얻었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도적 홍길동의 한자명은 길동(吉同)이라 양자가 실제로 동일인인지는 분명치 않다.

홍상직은 《홍길동전》에 나오는 홍판서보다는 낮은 벼슬을 지냈지만 고위 관료 출신임에는 분명하다. 실록에는 그의 내력이 소략하나마 전해지고 있다. 그는 1420년(세종 2년) 10월 24일 경성절제사에 제수되었는데, 2년 뒤인 1422년(세종 4년) 12월 1일 직분을 게을리 하고 백성들을 핍박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야인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목책을 보호하라고 명했지만 듣지 않자 부하를 시켜 그들의 집을 불태웠고, 어떤 사람이 남도의 병선이 습격할 것이라는 거짓으로 고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자 백성과 서리들이 소란을 피웠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 끌려온 그는 제조 유정현이 자신에게 뇌물을 요구했는데 거절하여 옥에 갇힌 것이라고 항변했다. 의금부에서는 그의 죄상이 참형에 해당되었지만 무고죄만 적용시켜 경상도 동래로 귀양을 보냈다.

1년 뒤인 1423년(세종 5년) 12월 9일,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홍상직은 향리인 경기도 파주군 적성에서 요양했다. 그러나 국청에서의 가혹한 추국과 유배지에서 얻은 장독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홍길동은 이듬해인 1425년(세종 7년)에 파주가 아니라 전라도 장성현 아곡리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학자 황윤석의 《증보해동이적 해중서생》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옛적에 듣자니 국조 중종 이전에 홍길동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는 상신 일동의 얼제로 장성 아차곡에서 살았다. 재기를 믿고 스스로 뽐내고 있었는데 국법이 벼슬이나 청현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함에 얽매어 하루아침에 갑자기 도망쳤다.’  그렇다면 홍상직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한동안 장성에 머물며 관기 옥영향을 취하여 길동을 얻었고, 실록에 있는 그의 거주지나 사망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겠다.

1428년(세종 10년) 10월 28일 예조에서 전국의 효자(孝子)·순손(順孫)·절부(節婦)를 보고하는 그의 정처인 남평 문씨가 남편의 무덤 곁에 여막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치렀고, 이후에도 삭망과 속절에 제사지냈다고 보고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1444년(세종 26년) 7월 22일에는 홍길동의 생모인 기녀 옥영향의 진술을 토대로 함길도 도관찰사에게 재직시 비행에 대해 추문하여 핵실하도록 명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그의 이복형 홍일동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조카 단종을 몰아낸 조의 쿠데타에 참여하여 원종공신 2등훈에 책록되었고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천진하여 겉치레를 하지 않았고 사부(詞賦)에 능했는데 거문고를 잘 탔고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소리를 냈다. 거구에다 대주가에 대식가였던 그는 언젠가 진관사에서 놀 때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그런데, 산 밑에 이르러 대접하는 자가 있자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마셨다. 세조가 그 일을 듣고 감탄하면서 장사(壯士)라고 탄복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 미숫가루와 술을 마셨을 뿐 밥은 먹지 않았는데 훗날 홍주에서 폭음한 다음 갑자기 죽었다.

이런 홍일동의 성정으로 미루어 이복동생 홍길동 역시 호탕하고 대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정통 관료 가문의 후예였지만 조선의 강력한 신분제도에 따라 비천한 얼자로써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자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무리와 유랑민들을 끌어모아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길동의 최후
홍길동의 주요 근거지는 충청도 충주 일대였는데, 일반 도적들처럼 산 속에 근거지를 두지 않고 마음껏 여항을 활보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그는 사욕을 품은 관리와 이속을 포섭하여 각종 정보를 취합한 다음 조직적으로 강도짓을 일삼았다. 그가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 차림으로 무기를 소지한 채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들락거렸지만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 등이 감히 제어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도적 홍길동의 체포 사실을 임금에게 고했다.

‘듣건대,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그달 28일에는 의금부에서는 홍길동을 도와주었던 전 평안도 우후 엄귀손을 추포한 다음 곤장 1백대에 3천리 밖으로 유배하고 고신(告身)을 회수하겠다고 상주했다. 그러나 윤필상, 어세겸, 한치형 등은 홍길동의 문초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그의 처결이 끝난 뒤에 엄귀손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때 당상관이었던 엄귀손은 홍길동으로부터 음식물을 받았고, 가옥을 구입해 주었으며, 산업까지 경영해주었음이 밝혀졌다. 홍길동의 무리가 도적질하여 얻은 재물로 상계에도 진출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엄귀손은 본래 가난하여 노복과 재산이 없었는데, 체포 당시 서울과 지방에 집을 사두고 곡식을 3,4천 석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홍길동에 대한 처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행위를 방조한 권농과 이정, 유향소의 품관들이 모조리 변방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에 비추어 사형을 당했으리라 짐작된다.

홍길동의 전례는 그 후 조정의 조세 정책까지 영향을 끼쳤다. 1513년(중종 8년) 8월 29일 호조에서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양전(量田)을 건의하면서 ‘충청도는 홍길동이 도둑질한 뒤로 유망이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를 거두기가 실로 어렵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 충청도에 홍길동과 같은 도적떼들이 남아있어 유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 기사는 그때까지 현지의 수령들이 민생치안에 전념하고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홍길동
도적 홍길동이 관군에게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 반면 소설 속의 의적 홍길동은 신분의 벽을 무너뜨리고 병조판서가 된 다음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으로 건너가 부귀영화를 누린다. 허균의 신념과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가상인물 홍길동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홍길동은 세종 때 서울에 살고 있던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길동은 천민의 신분인 얼자(孽子)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병법과 도술을 익혀 큰 인물이 되고자 했지만 천한 신분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등 온갖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의 비범한 재주를 시기하던 소실 곡산댁이 자객을 시켜 죽여 없애려 한다.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길동은 부모님께 하직하고 방랑길에 나섰다가 도적떼의 두목이 된다. 그때부터 길동은 기이한 도술과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는 등 본격적인 도적활동에 나선다. 그는 자신의 무리를 활빈당이라 이름 짓고 팔도 수령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 나누어준다. 그로 인해 홍길동은 의적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얼마 후 그에게 감영의 재물을 빼앗긴 함경감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를 고발한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좌·우포청에 명하여 그의 체포하게 했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길동의 활약에 관군은 매번 헛수고만 되풀이한다. 우포장 이흡은 그를 잡으려다 신기막측한 도술에 휘말려 우롱당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아버지 홍판서와 형 인형을 시켜 그를 회유했다.

결국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됨으로써 한을 풀어낸 다음 무리를 이끌고 중국의 남경으로 가던 도중 경치가 수려한 율도국에서 요괴를 퇴치하고 두 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얼마 후 홍판서의 부음을 듣고 조선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마친 그는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국왕이 되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다.

혁명가 허균의 메시지
《홍길동전》은 16세기 이후 빈번했던 농민봉기와 함께 그들을 이끌던 주요 인물들의 다양한 설화를 바탕으로 탐관오리들의 수탈, 적서차별의 문제점 등 당대의 부조리한 세태를 솔직하게 묘사하면서 이를 개혁하고자 하는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담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민중들의 시도는 좌절되기 일쑤였지만 사람들은 소설 속에 나오는 홍길동의 성공신화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저자인 허균은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로부터 짐승보다 못한 패륜아요 괴물로 묘사되었던 인물이다. 광해군은 그를 역모 혐의로 죽인 다음에는 아래와 같은 반교문을 내리기도 했다.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군왕에게조차 이처럼 참혹한 평가를 받았던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썼다는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선의 고답적인 분위기를 조소하면서 금기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이단아이자 혁명가 허균의 강렬한 의지가 숨어있다.

허균은 유서 깊은 양반가의 후예로서 뛰어난 학문을 지녔지만 고답적인 유교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지 않았던 자유인이었다. 그는 당대에 수많은 승려들과 교유하며 불교에 심취했고, 중인과 무사들과 어울렸으며 이매창 등 천한 기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또 양반의 비첩 소생인 서얼들을 가까이하면서 그들의 불운한 처지를 동정했고,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는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연구하기도 했다.

평소 조선의 공고한 신분제도를 조소하던 그는 〈유재론〉에서 신분제도 철폐를 주장했다. 서자라고 등용하지 않고, 어미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을 쓰지 않는 것은 실로 부당하다. 하늘이 재주를 낼 때 누구에게나 고르게 냈는데 남녀와 신분을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호민론〉에서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라며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만일 임금과 지배계층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면 궁예나 견훤 같은 호민이 나와 선동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될 것이라고 경고하기에 이른다.

허균은 이처럼 당대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의 개혁 사상을 《홍길동전》을 통해 세상에 드러냈던 것이다. 본래 《홍길동전》의 저자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선 인조 때의 학자 택당 이식이 《택당선생 별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면서 허균의 저작으로 굳어졌다.

‘허균은 《수호전》을 본떠 《홍길동전》을 지었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과 심우영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했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형벌을 받아 죽었으니 이것은 귀머거리보다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기록처럼 허균은 말년에 역모 혐의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조선의 권력자들은 그를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극악한 불온분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홍길동전》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민중들에게 부당한 권력과 부조리한 제도에 감연히 맞서라고 소리치고 있다.
 

참고문헌

  • ・ 『허균의 문학과 혁신사상』(김동욱 편, 새문사, 1981)
  •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의 생각』(이이화, 뿌리깊은 나무, 1980)
  • ・ 「허균(許筠)」(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8)
  • ・ 「교산허균(蛟山許筠)」(김동욱, 『한국의 사상가 12인』, 현암사, 1975)
  • ・ 「허균론(許筠論) 재고(再攷)」(차용주, 『아세아연구』 48, 1972)
  • ・ 「허균(許筠)」(정주동, 『한국의 인간상』 5, 신구문화사, 1972)
  • ・ 「허균론(許筠論)」(이능우, 『숙대논문집』 5, 1965)
  • ・ 「허균연구(許筠硏究)」(김진세, 『국문학연구』 2, 서울대학교,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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