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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의 부인 정희왕후의 리더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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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2.28  13: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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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여인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윤씨는 윤번(尹璠)의 딸로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던 1483년에 지은 <정희왕후 광릉지>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태어나면서 맑고 고왔으며 타고난 자질이 범상치 아니하였는데 세종 10년 1428년에 세조대왕이 비로소 공궐을 나설 때 세종대왕께서 그 어진 베필을 오묘히 고르시는데 태후(정희왕후)가 그 덕용과 가문의 성망으로 뽑힘을 입어 왕실에 시집을 왔다.”

정희왕후는 자신이 왕비의 자리에 오를 줄 모르고 결혼했다. 당시 나라에서 간택령(왕가의 혼사)이 선포되면 민가의 혼사가 일체 중단되고 왕의 가족으로 간택을 먼져 하게 된다. 이때 높은 벼슬을 한 집안보다는 몰락한 양반가 중간 정도가 좋은 데 처가의 득세를 막고자 하는 것이다. 집안에 언니를 보러온 자리에 함께 하였다가 궁의 상궁의 눈에 띄여 언니대신 간택을 받게 된 것이다. 글을 모르는 여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위치까지 간 것은 특이한 케이스다.  

이후 남편이 왕위에 올라 왕비가 되었지만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얻은 자리는 아니었다. 1453년 세조가 계유정난이라는 정변을 일으킬 때에 정희왕후는 몸소 나서서 망설이는 남편을 독려했다. 협력자 정도가 아니라 주도자라 할만큼 나섰던 것이었다. 여장부란 별명이 생긴 건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남편이 등극한 뒤로는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 세조의 강력함에 기가 눌렸던 것이겠다. 정희왕후는 무척 검소하고 부지런한 여성이었다.

   
 

정치에 나선 여인 

그러나 남편 세조가 승하하자 지체없이 둘째 아들 예종을 즉위시키는 데 이 때부터 정치가의 자질을 발휘한 것으로 기록된다. 왕의 후사를 놓고 논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예종도 일찍 승하한다. 이 때 왕통을 이을 사람을 고를 지위에 올라 있던 정희왕후는 첫째 세상을 떠난 의경세자가 낳아둔 두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인 자신의 둘째 손자를 왕위에 올렸다.

순서에 맞지 않는 선택이었지만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손자가 바로 성종인데 겨우 열 세 살짜리였다. 정리하자면 살아 생전에 정희왕후는 세 명의 남자를 왕으로 탄생시킨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66년의 생애가 결코 행복하기만 한 일생은 아니었다. 첫째 아들 의경세자가 겨우 20살에 요절했고 또 왕위에 오른 둘째 아들 예종도 의경세자와 같은 20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두 아들 모두 자신보다 먼저 저세상에 보내는 불행을 맛보았던 것이다.

국정 일선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정희왕후가 태후의 수렴청정을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다. 열 세 살 짜리 성종은 당시 권세를 누리던 세조의 신하 한명회의 사위였고 이를 의식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또 자신이 무려 7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한 까닭도 아직 미약한 성종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의 수렴청정에 대하여 <정희왕후 광릉지>에서는 사람에게 죄와 허물이 있으면 은혜로써 용서해 주려는데 힘썼고 또 자신이 법에 어두어 다스리고자 하지 않았고, 나아가 지극히 공평하여 친척이라고 해서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결단력 넘치는 과감한 정치인의 자질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평화로운 시절을 누리도록 했으며 1476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는 철렴(撤簾)을 한 뒤에는 그야말로 정치와는 담을 쌓았다. 정희왕후 광릉지에 기록된 업적으로 특별히 성종을 왕위에 세운 일을 꼽았다. 바로 그 어린 손자가 무려 20살이 될 때까지 성장시켜 놓은 뒤에 철렴을 하고 보니 세월이 무척 많이 흘러갔고 자신은 쇠약해져 있었다. 병 든 몸이었으나 성종의 지극한 배려로 거의 약물을 물리칠 수 있을만큼 병세가 호전되었다. 그후 1483년 봄 온양온천(溫陽溫泉)으로 행행했지만 효험도 없이 악화됨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나이 66살이었다. 정희왕후는 이 때를 당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국가에 공이 없으니 내가 죽거든 후한 장례를 행하지 말라” 그러면서 정희왕후는 자신의 수의를 만들어 두었는데 “모두 면포를 사용하고 무늬 비단이나 화려한 물건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6) 정희왕후는 불심이 깊었다. 세조가 광릉에 묻히자 근처의 봉선사(奉先寺)를 광릉의 원찰(願刹)로 지목하고 돈을 내어 크게 확장했다. 고려시대 광종 때인 969년 법인국사가 창건한 절집이 세조 덕분에 중창의 계기를 맞이한 것이다. 봉선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고 말았는데 그 뒤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왕비이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둘째 며느리. 덕종, 예종의 어머니이자, 월산대군과 성종, 제안대군의 할머니, 소혜왕후, 장순왕후, 안순왕후의 시어머니다. 또한 연산군과 중종은 정희왕후의 증손자이다. 성종의 정통성에 신경을 써서 아들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증하고(덕종), 의경세자의 비(소혜왕후)를 예종의 비(안순왕후)보다 지위를 더 높게 올려줬는데 그 정도는 해 둬야 성종의 정통성에 문제가 없다고 여긴 듯 하다.

성종이 20세가 될 때까지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성종은 15세를 넘겨가면서 대다수의 직무를 스스로 처리했다고 하는 걸 보면, 형식적으로 수렴만 하고 실제로는 성종이 거의 다 처리했을 듯 하다. 정말 중요한 일만 정희왕후와 의논해서 결정한 듯하다. 조기에 넘겨주지 못한 것은, 성종이 15세쯤 되던 시기에 한명회의 딸이었던 공혜왕후 한씨가 죽어서, 국상 중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 지 몰라서였던 듯 하다. 한마디로 안정된 상태에서 넘겨주기 위해서 미룬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기다린 덕분에 그 시기에 높은 권력을 누리던 인물은 하나하나 사라져갔고 때가 돼서야 성종에게 넘겨준다. 처음 수렴청정을 거두는 거라서 그런지 처음 거둘 때 반대도 많았지만 그 이후로는 정사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노후를 보내던 중 1483년 온양행궁에서 온천욕을 한 뒤 독감을 얻어 얼마안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다.

   
 

양쪽으로 갈린 능의 풍경
광릉이 대단한 명당이라 하는데 입구를 걸어 들어가 홍살문을 지나면서 그 장엄함은 끔찍할 정도다. 복판의 정자각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젖가슴이 치솟는데 그 꼭지점에 두 개의 봉분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 양쪽 젖꼭지를 유두혈(乳頭穴)이라 하고 부부가 각자 바로 그 두 개의 꼭지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운 것이다. 이것을 능묘의 양식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한다.

조선 건국이래 처음으로 조성된 이 형식은 조금 기묘한 느낌을 준다. 부부가 저렇게나 멀리 따로 갈라져 있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게다가 젖가슴이 하도 커서 그 언덕이 너무 가파르므로 봉분까지 가려면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정도다. 왜 이런 곳을 골랐는지는 그저 명당이기 때문이라는 말만으로는 공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조의 후손이 마지막까지 배출되었으니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라고 굴복할 밖에.

오늘날까지 이곳 광릉 일대가 잘 보존된 까닭은 자명하다. 조선 440년 동안 풀 한 포기를 뽑는 것조차 금기였던 왕릉이었기 때문이지만 세조 이후 자손들이 고스란히 왕위를 마지막까지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보존되었으므로 일대에는 오늘날 국립수목원이 그 숲을 자랑한다. 어느 왕릉인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유독 이곳 광릉 일대는 숲으로 울창하여 하늘마저 가려진 듯 하다.

서양 못지 않은 여성지도력
여성 지도자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프랑스의 잔 다르크가 대표적이다. 그녀들의 인생과 업적을 이야기할 때 항상 ‘여성임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남성들보다 더한 카리스마로 세상을 바꾸기도 했고, 특유의 섬세함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했다. 남성들과 더불어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 여성들이지만 ‘여성성’이나 ‘외모’가 먼저 부각됐던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조선 최초로 정치에 뛰어든 여성, 『정희왕후』에 대한 이야기는 기존의 역사서와는 다른 신선함이 있지만 시동생인 안평을 제거하고 이룬 정권 탈취는 비극적으로 피를 부른 사건으로 바로 계유정난인데 어린 단정인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남편 세조의 업보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수렴청정은 어린 임금을 대신해 정사를 맡은 것인 만큼 적어도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는 임금을 넘어서는 최고통치자가 된다. 명실상부한 정치인이다. 그녀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통치에 나서 만만치 않은 정치력을 발휘했다. 당대의 세도가인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고개를 숙일 정도로 뚜렷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던 여인으로도 평가된다. 특히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호패법을 폐지하고 백성들에게는 양잠을 장려하는 등 민생 돌보기를 우선하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정희왕후가 글을 모르는 여인이었다는 점이다. 한문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기에 첫째 며느리인 소혜왕후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았다. 사실상의 여왕과 부여왕이 공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정희왕후는 문자도 모르고 정치 교육을 받은 경험도 없지만 그녀의 통치는 조선의 전체 임금들과 비교해도 서툴지 않았다.

하지만 늘 공과는 공존하는 법. 그녀의 통치가 완벽하지는 않았다.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공신의 권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키워준 부분은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레임덕을 가져왔다. 무리한 잣대로 성종의 계비 윤씨를 사사하도록 해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등장시키게 한 것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종 6년 정희왕후의 인척들을 거론하며 욕설을 적어놓은 익명서가 발견되자 정희왕후는 스스로 수렴청정을 거두고 권력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존재는 사실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다. 역사를 주제로 한 사극이나 영화에서도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보다는 내훈을 쓴 인수대비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인수대비의 기구한 삶이 이유일 수도 있지만 여성을 정치인의 영역보다는 흥미의 대상으로만 여겼기에 관심을 멀리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여성을 정치 주체로 보지 못하고 권력자의 보조인물로 인식해왔다. 그런 이유로 여성 지도자들의 업적은 평가절하돼왔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지금. 정희왕후의 리더십이 새삼스레 재조명 받고 있다. 권력 앞에 의연했던 정희왕후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이미 여성 대통령 시대을 열러봤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세계는 이미 여성 지도력이 검증된 시대를 살고 있다.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과거의 과오를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어리석음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 조선시대 정희왕후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정희왕후 정치가 현대 정치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작가의 책 『정희왕후』 는 이를 암시하고 있다.

   
 

정희왕후 윤씨와 한명회
정희왕후의 이런 정치에는 힘있는 조력자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바로 한명회라는 팔삭동이로 불리된 인물이다.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 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로 1415년에 대어난 그는 일찍 부모가 돌아가시어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해해서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벼슬을 얻었다.

​한명회는 과감한 결단성과 일을 벌이는 것에 능하고, 책략이 뛰어났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친구 권람을 시켜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의논하게 하였다. 그는 항상 수양대군 옆에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김종서를 살해하게 했고 이른바 ‘살생부’를 작성하여 조정 신하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그는 1등 공신에서부터 좌부승지,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최고자리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에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 평안, 함경, 강원 4도의 병권을 가진 4도의 체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 손에 거머쥔 뒤 조정에서 가장 높은 자리라고 하는 영의정까지 올랐는데, 이로써 일개 하찮은 자리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의 권력에 대한 기반은 여러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 해서 더욱 탄탄해졌고, 특히 세조와 사돈을 맺어 그의 딸을 예종의 비로 만들었다. 나중에는 다른 딸도 성종의 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비가 되게 하였다. 그의 권력 기반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집현전 학사 출신인 신숙주와도 인척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구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 신숙주와 함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집권기의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시애의 모함으로 신숙주와 한명회는 심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져 풀려났다.

한명회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정사에 관련된 결정을 내렸으며, 예종 때 다시 영의정에 복귀했다. 그리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했다. 이후에도 계속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했다. 그는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독점 하다시피 했는데, 세조는 그를 두고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총애를 했다.

그는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얻기도 했다. 또한 그는 노년이 되어서는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 하여 정자를 지었으며,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 하지만 백성들은 압구정을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노년에도 계속 정사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좌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대단한 권세를 누린 그는 1487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수렵청정(垂簾聽政) 이란 ​
나이 어린 왕이 즉위했을 때 성인(20세)이 될 때 까지 왕대비(모친) 대왕대비(조모)가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일을 말한다. 기록상으로 한국에서 제일 먼저 수렴청정을 한 것은 53년 고구려 제6대 왕, 태조왕이 7세로 즉위하자 태후(太后)가 수렴청정을 한 경우이다. 이보다 앞서 제3대 왕 대무신왕도 11세로 즉위하여 어느 누가 대리정치를 하였을 듯하나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 신라에서는 540년 법흥왕이 죽고, 그의 조카 진흥왕이 7세로 제24대 왕으로 즉위하여 법흥왕의 비(妃)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765년 경덕왕이 죽고, 태자가 8세로 제36대 왕 혜공왕으로 즉위하자 역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백제의 경우 섭정(攝政)의 기록은 있으나 수렴청정의 기록은 없다.

고려시대에는 1094년(선종 11) 선종이 죽고, 태자가 11세로 제14대 왕 헌종으로 즉위하여 사숙태후(思肅太后:선종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344년 충혜왕이 복위한 지 5년 만에 죽고, 태자가 8세로 제29대 왕 충목왕으로 즉위하여 충혜왕의 비가 역시 수렴청정을 하였다. 1349년 충목왕이 4년 만에 죽고, 그의 서제(庶弟)가 13세로 제30대 왕 충정왕으로 즉위하자 생모 희비(禧妃)와 충혜왕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원(元)나라에서는 3년 만인 1351년 제27대 왕 충숙왕의 둘째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을 제31대 왕 공민왕으로 삼았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최만생(崔萬生) 등에게 살해되어 우(禑)가 10세의 나이로 뒤를 잇자 할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충숙왕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68년(세조 14) 세조가 죽고 태자 황(晄)이 19세에 예종으로 즉위하여 그의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예종과 동좌(同坐)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다. 1469년 즉위 1년 만에 예종이 죽고 조카 성종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희왕후가 7년 동안 계속 수렴청정을 하였다. 1545년 인종이 재위 1년 만에 죽고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제13대 왕으로 즉위하니 중종의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가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567년(명종 22) 명종이 죽고 선조가 16세로 즉위하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1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00년(정조 24)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영조의 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4년(순조 34) 순조가 죽고 왕세손 헌종이 즉위하자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의 비) 김씨가 6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순원왕후가 또 수렴청정을 하였고,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익종의 비인 조대비(趙大妃)가 약 2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 역대 왕조의 수렴청정은 고구려에서 1회, 신라에서 2회, 고려시대는 4회, 조선시대는 8회 임금이 즉위 초에 나라의 정사를 모후나 대비에게 맡겨 외척의 정치 참여를 가져왔고, 특히 순조 이후 철종 때까지 60년간의 척신(戚臣)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조정의 문란, 부정부패, 매관매직의 성행 등을 초래하였다. 또한 탐관오리의 득세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민심이 흉흉하여 홍경래(洪景來)의 난(亂)이 일어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웠다.

섭정이란 군주국가에서 국왕이 어려서 즉위하거나 병 또는 그 밖의 사정이 생겼을 때 국왕을 대리해서 국가의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는 사람이다. 왕세자에 의한 섭정은 대리청정(代理聽政), 대비(大妃) 등 여자의 경우는 수렴청정(垂簾聽政), 신하가 하는 경우는 섭정승(攝政丞)이라 하였고, 아무런 명칭도 없이 섭정을 한 경우도 많았다.

수렴청정이란 다시말해서 어린 임금을 대신해 정사를 맡은 것인 만큼 적어도 수렴청정 기간 동안에는 임금을 넘어서는 최고통치자가 된다. 명실상부한 정치인이다. 조선시대 수렴청정은 사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정왕후와 정순황후를 비롯해 7명의 여성에 의해 진행됐다. 정희왕후는 그들에게 롤모델 격이다. 쿠데타로 조카를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남편 세조의 업보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이 늘 그러했듯 살얼음을 걸어야 했지만 나름대로의 판단과 결단력으로 위기를 피해나갔다.

수렴청정이 아니어도 모든 정권은 교두보이다. 권력은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혼자 잡는 정권도 없다. 때문에 정희왕후의 정치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 할 덕목과 재고해야 할 대목을 되새겨보는 일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큰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에는 견제와 균형이 있다. 여성의 정치 참여를 외치는 목소리에는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의 대표성이 형편없이 낮은 상황을 걱정한다.

권력이 흔들리지 않고 백성이라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를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면 긴장과 균형은 기본이다. 여성의 정치참여 주장에는 이런 균형이론이 숨어있다. 남성 독식의 정치는 이제 한계가 있다. 정희왕후를 통해 조선 최초의 여성정치인을 보며 어떤 정치를 펼쳤는지를 분석하는 일은 향후 정치인들의 이정표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조선의 정희왕후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권력을 유지하며 백성의 행복을 찾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정치의 첫 번째 덕목이다.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같은 듯 다르고 그러면서도 소름끼치도록 닮은 역사는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반복된다. 과거의 과오를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어리석음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력을 잡는 일은 늘 쉽지 않고 언제나 반대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가장 많은 드라마로 제작된 가족사

드라마에서는 보통 며느리 인수대비(소혜왕후)와 갈등관계인 손자며느리 폐비 윤씨를 옹호하거나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이제이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론 내지까지 내리며 폐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6]를 적극 도왔다[7]. 하지만 인수대비와 다르게 단종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증손자 연산군이 즉위하기 전에 먼저 사망해서, 패륜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친정인 파평 윤씨 가문만을 편들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그 예가 자기 족친이자 손자며느리 정현왕후[8]의 친정아버지인 윤호를 국문한 것. 세조에서부터 성종까지 사극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는 사건들이 즐비한 시기에 살았던 덕에, 사극에 꽤 간간히 나오는 편. 보통 세조의 아내보다는 인수대비의 시어머니자 성종의 할머니, 왕실의 최고 어른의 포지션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 편>에서는 정혜선, KBS에서 방영한 <파천무>에서는 최란, <한명회(드라마)>에서는 홍세미가 열연하였다 KBS에서 방영한 왕과 비에서의 정희왕후. 중견 탤런트 한혜숙이 열연하였다. 손자인 성종의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야심만만한 며느리 인수대비와의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정치적인 모습보다는 단아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나 할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가계도 
조부 : 판도판서 증 영의정 윤승례(版圖判書 贈 領議政 尹承禮)
조모 : 검교 문하시중 창성부원군 문정공 성여완(檢校 門下侍中 昌城府院君 文靖公 成汝完, 1309~1397)의 딸인 경안택주 창녕 성씨(慶安宅主 昌寧 成氏)
아버지 : 판중추 증 영의정 파평부원군 정정공 윤번(判中樞 贈 領議政 坡平府院君 貞靖公 尹璠, 1384~1448)
외가 인천 이씨/외조부 : 참찬의정부사 공도공 이문화(參贊議政府事 恭度公 李文和, 1358∼1414) : 고려 우왕비 근비 이씨의 언니의 아들
외조모 : 문하시중 양정공 최렴(門下侍中 良靖公 崔濂, ?∼1415)의 딸인 충주 최씨(忠州 崔氏)
어머니 : 흥녕부대부인 인천 이씨(興寧府大夫人 仁川 李氏, 1383~1456)
큰언니 : 강녕군 장간공 홍원용(江寧君 章簡公 洪元用, 1401?~1466)과 혼인 - 홍원용은 인수대비의 외숙부 : 남양 홍씨
큰오빠 : 파성군 이정공 윤사분(坡城君 夷靖公 尹士昐, 1401~1471)
올케언니 : 경력 장안지(經歷 張安之)의 딸 정경부인 덕수 장씨(貞敬夫人 德水 張氏)
작은언니 : 정경부인 윤씨(貞敬夫人 尹氏)
작은형부 : 우의정 창성부원군 양정공 성봉조(右議政 昌成府院君 襄靖公 成奉祖, 1401~1474) : 성삼문의 재종숙이자 성녕대군 부인의 사촌 : 창녕 성씨[17]
작은오빠 : 공조판서 영평군 성안공 윤사윤(工曹判書 鈴平君 成公安 尹士昀, 1409?~1461) : 중종비 장경왕후의 증조부
올케언니 : 검교 호조참의 최의검(檢校 戶曹參議 崔義儉)의 딸 부산현부인 수원 최씨(釜山縣夫人 水原 崔氏)
셋째 언니 : 정경부인 윤씨(貞敬夫人 尹氏)
셋째 형부 : 공조참판 이연손(工曹參判 李延孫, ?∼1463)와 혼인
넷째 언니 : 지중추부사 호려공 이염의(知中樞府事 胡戾公 李念義, 1409?~1492)와 혼인
다섯째 언니 : 오덕기(吳慶基)와 혼인
여섯째 언니 : 정경부인 안성군부인 윤씨(貞敬夫人 安城郡夫人 尹氏)
여섯째 형부 : 서원부원군 문양공 한계미(西原府院君 文襄公 韓繼美, 1421~1471)와 혼인 - 한명회의 6촌이자, 성삼문의 고종사촌
남동생 : 영돈녕 파천부원군 양평공 윤사흔(領敦寧 坡川府院君 襄平公 尹士昕, 1422~1485) - 중종비 문정왕후의 고조부
올케 : 병정 김자온(兵正 金自溫)의 딸 계림 김씨(鷄林 金氏)
전주 이씨 시가
시부 :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
시모 :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
남편 :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
장남 : 추존 덕종(德宗, 1438~1457)
맏며느리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1504) : 인수대비(仁粹大妃)
손자 : 월산대군(月山大君,1454~1488)
손부 :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1455~1506)
손녀 : 명숙공주(明淑公主 1455~1482)
부마 : 당양군 소이공 홍상(唐陽君 昭夷公 洪常, 1457~1513)
손자 : 제9대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5)
장녀 : 의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
차남 : 제8대 예종(睿宗, 1450~1469, 재위 1468~1469)
며느리 :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1445~1461)
손자 : 인성대군(仁城大君, 1461~1463)
며느리 :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1498)
손녀 : 현숙공주(顯肅公主, 1464~1502)
손자 :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
손녀 : 혜순공주(惠順公主, 1468~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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