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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복 박사를 추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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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4.08  14: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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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여년간의 우정을 회고하며
이만열 장로(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판위원장) 

   
 

이만열 교수는 한국의 보수교단인 고신측 장로로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오시고 교파 신학교라는 틀속에 안주한 한국교회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하신 분이다. 유신시대 해직되시고 미국 프린스턴으로 유학도 다녀오셨다. 그후 NCCK 계열의 진보 신학계와 교류하시면서도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와 연구에 마중물이 되신 분이다. 재야 연구단체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을 설립하시고 미국장로교단 서고인 필라델피아의 선교자료들을 집대성하여 후학들에게 한국 교회사 연구의 지평을 여신 분이다. 미국 UCLA 옥성득 교수등도 한국교회사 학자로 서는 데 이끄셨다. 노령임에도 SNS를 통하여 신앙적인 견지에서 사회적 발언도 하시는 등 이 시대 평신도 신학자이며 활동가라고 할 수 있다. 상지대 이사장을 지내셨으며 같은 고신교단의 손봉호 교수와 대담한 책도 내신 바 있다.    

   
 

요즘 주변에서 귀천(歸天)행을 알리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조금 전에도 김용복 박사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다. 비보를 듣으면서 내게 투영된 그에 대한 이미지는, 그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미래를 예견하고 우리가 염두에 두지 못한 세계의 도래를 상상하면서 준비해 나갔던 선구자적인 모습이다. 그는 눈 앞에 전개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전망하고 상상해 나갔던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그는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 늘 미래를 살아갔던 분이었다. 그의 귀천길을 주님이 인도하셨을 줄 믿고 감사하면서 이 글을 초한다.

김 박사와 처음 안면을 튼 것은 1979년, 아마도 그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다. 그 때 한국 교회 진보진영에서는 NCCK를 중심으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을 만들었는데, 이는 장기간의 박정희 유신치하에서 한국 교회가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문제를 제대로 다뤄보자는 취지에서 설립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교파 간의 연대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기사연은 원장에 감리회의 조승혁 목사, 부원장에 장로회의 김용복 박사를 임명했고 김 박사는 주로 연구분야를 맡아 진두지휘한 것으로 안다.

어느날, 그 때만 해도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김용복 박사가 청파동의 내 연구실을 찾았다. 까만 양복에 머리에 기름도 바르고 그 때까지 그에게 유지되고 있던 서양식 예의를 갖추어 내방하였다. 아마도 그가 미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가 아닌가 한다.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그 말끔한 모습은, 그 뒤 늘 수수하게 보였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루었으며, 좀처럼 다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자기 소개를 끝낸 후 그는 몇 년 전부터 한국기독교사와 관련된 내 논문을 읽어왔으며 자신이 부원장으로 있는 기사연이 내가 논문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그런 연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사연이 한국기독교사 혹은 한국 사회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김 박사가 보았다는 내 논문은 1973년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간행한 『한국사론(韓國史論)』제 1집에 수록된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었다. 이는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사회의식이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항일민족운동으로 전개되어갔는가, 말하자면 기독교사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살피려고 한 내용이었다. 그 논문은 당시 한국 진보 기독교계에 자그마한 파장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그에 앞서 나는 1970년 가을학기부터 대학 전임으로 갔다. 그 때까지 나는 한국기독교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다. 당시 대학에서 종교사를 연구, 강의하는 스승 중에는 호교론(護敎論)적인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이도 있었다. ‘손이 안으로 굽는’ 식의 그런 연구요 강의였다. 때문에 나도 한국의 기독교사를 연구하게 된다면 그런 관점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아예 선을 그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72년 ‘7.4공동성명’에 이어 그 해 10월에는 소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이 때 사회는 기독교 지성을 향해 이 사태에 무언가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요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의 그 논문은 ‘10월 유신’에 대한 기독신자, 역사학도로서의 응답이었던 셈이다. 용기가 없어 해방 후의 역사를 다루면서 말하지 못하고 시간적으로 한참 떨어진 한말 격동기의 사실을 들어 유신시대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김 박사는 프린스턴에서 학위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나의 그 논문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알았지만 이 때 그가 프린스턴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테마는 한국의 ‘동학혁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뒤 내가 김 박사의 도움을 받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 방문교수로 가게 되었는데 그 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김 박사의 학위논문을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논문은 저자의 허락없이는 열람되지 않도록 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신말기’의 상황에서 그 논문이 공개되었을 때의 파장을 고려하여 김 박사는 아예 그런 조치를 취해 놓았던 것이다.

김 박사의 내 연구실 방문 후 나는 기사연과 공동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쉬워한 것은 한국기독교사 연구를 제대로 하자면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현지보고서와 자료들을 제대로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한국 학자들은, 선교사들이 한국 현지의 상황을 그들의 본국인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지에 보고했는데 바로 이러한 한국기독교사 관련 1차 자료들을 제대로 열람하지 못한 채 연구하고 있었다.

백락준 박사가 예일대학에서 학위논문(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을 미국에서 쓰면서 선교사들의 자료를 참고한 정도였다. 그 때까지 한국 교회가 선교사 수용 100년을 맞아가는 데도 선교사파송국에 있는 자료를 수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김 박사께 이런 고충을 말하니 김 박사는 날더러 이 교수가 직접 미국과 캐나다에 가서 자료수집을 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그것을 자신이 주선하겠다고 했다. 그는 곧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Dean으로 있는 West 박사에게 연락, 초청장을 받아 주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신군부가 등장, 많은 해직교수를 양산함으로 그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해직된 후 여러 곳에서 노력, 모처로부터 내게 한국교회사 자료 수집을 위해 직접 미국에 가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나는 가족이 함께 간다는 조건으로 해직교수로서는 처음으로 도미수속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도 김용복 박사가 모교인 프린스턴에 연락해서 초청장과 기숙사를 허락받게 해 주었다. 이렇게 내게 한국기독교사 연구의 새 장을 마련해준 이가 바로 김용복 박사이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지를 다니며 한국기독교사 관련 자료를 수집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학도로서 내가 김 박사의 도움을 받은 것은 바로 한국 교회사 연구의 심화, 확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뒤 가끔 김 박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프린스턴 교정에서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귀국해서는 기사연에서 기획한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 박사는 그 뒤 전주의 한일장신대의 총장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아시아생명평화운동의 새로운 구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연보에 나타난 한국기독교학회 회장, 한국민중신학회 회장,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및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개혁교회연맹 등에서 활동한 것과 그의 저술들은 여기에 일일히 적지 않겠다. 김 박사는 민족의 평화통일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88년 NCCK 신학위원 및 통일전문위원으로 그해 2월 29일 선언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의 초안자의 한 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만년에 오로지 생명평화운동에 전념하다시피 하여 여러 세미나를 주최하면서 동학 후배들과 뜻을 같이 했다. 필자에게는 새로운 제목으로 강의를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신학적 및 인문학적인 지향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에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변화를 수용하여 신학 및 인문학적인 과제로 간단 명료하게 정리해 내곤 했다. 그의 육체는 노쇠해 갔으나 학문적인 열정은 식지 않았고, 생명과 평화를 위한 그의 지향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그의 이같은 인문학과 신학적 상상력은 끊임없이 후진들을 자극하고 양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가 이렇게 생명 평화 위주의 신학적 토대를 굳건히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도 큰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고,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 구미 여러 나라 석학들의 새로운 사상을 누구보다 먼저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시아 기독교협의회에 관여하면서 동경대학 출신의 두 엘리트, 사와 마사히코(澤正彦) 목사와 구라다 마사히코(藏田雅彦) 교수를, 일본 지성인의 한국을 향한 기독교적 사랑과 회개의 사도로 만든 것은 그의 넉넉한 인품이 남긴 열매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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