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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선교 역사 다시 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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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8.10  21:5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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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영등포산선 총무 진방주 목사 기고 

지난 8월 9일(화)자 한국기독공보에 게재된 진방주 목사의 산업선교에 대한 자료는 그동안 영등포산선에만 국한된 우리교단의 산선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다. 그 글은 공보의 "연중기획ESG" 새롭게 이롭게(8)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인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진방주목사(전 영등포산선 총무 2회, 국내선교부 총무역임)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목회를 기도하며 실천한 교회의 시작은 전남 광주의 서림교회(현 송재식목사)다. 일제의 패전으로 적산공장을 인수 운영하며 관리책임자였던 김형남 장로는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던 1700명의 노동자들을 위해 야간 공민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신앙생활을 통해 정서와 박애를 넓히고자 10여 명의 노동자들과 1946년 2월 10일 둘째 주일 여자기숙사 2층 강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공장교회의 시작이었다. 1948년 6월부터 백리언 목사가 부임하여 6월9일에 전방교회라 칭하고 ,12월에 55평의 예배당을 헌당했다. 또 1949년 10월에 김형남 장로 등 3명이 장로로 장립함으로써 조직교회가 됐다.

이후 우상필목사, 박봉윤 목사등이 목회하며 1962년 3월 첫 주일 제직회에서 전방교회를 서림교회로 개명하여,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두 회사 노동자들뿐만 아니고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로 발전했다. 1967년 2월 증경 총회장이었던 장동진 목사가 부임해 목회했고, 매주 월요일이면 3000여 명의 종업원들이 예배했고, 1500여 명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1974년에는 등록교인이 1669명이 됐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구성된 서림교회는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의 사원 사택, 여자기숙사, 남자 기숙사가 심방 장소였고, 전임여전도사가 상주하며 기숙사 예배를 인도했다. 김형남 장로는 총회가 산업전도를 하기로 결정한 1957년에 총회산업전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에 숭전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기독교의 발전에 공헌했다.

1977년 1월 29일자 한국기독공보. 조지송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기사

   
 

전방교회와 같이 노동자와 함께하는 교회는 서울 영등포지역에서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확산 됐다. 1958년 4월 19일 영등포산업전도위원회(위원장:계효언, 부위원장:방지일)가 조직 되는데, 이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에서 파송한 강경구 전도사가 전임 실무자로 일을 하고, 양남동 일대는 영은교회 박조준 목사, 문래동 일대는 영문교회 정영삼 목사, 당산동 일대는 김하정 목사가 각각 구역을 분담해 공장 개척전도에 힘쓰고 한영방직공장 구내에 한영교회를 설립했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동아염직과 대한모직및 대동모방에서 예배를 드리던 3개의 공장교회가 모여 영은교회를 개척할 때 박조준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는데 도왔고, 영등포산업전도회 전임 목사로 조지송 목사를 영등포지구에 파송했다.

이 때 영등포지역의 공장내 예배와 성경공부는, 지역 목회자들이 각각 맡아 지도했다. 더 나아가 영등포와 시흥지역에서는 시흥교회(차관영 목사), 양평동교회(이정학 목사), 도림교회(유병관 목사)등이, 서울역 인근에서는 용산교회(유호준 목사)가 청계천 주변에서는 연동교회(김형태 목사)와 무학교회(홍성현 목사)가 야학과 교회학교인 산업전도부를 통해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로서 자리매김을 했다. 이와 같이 노동청소년들과 함께 호흡하고 복음의 기쁨을 나누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교회학교의 새로운 접근 방법을 창출 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영등포 노동교회에서 성문밖교회로, 1980년대에는 전국 공장지역의 공부방과 어린이집, 노동상담소등을 개설하는 민중교회로 발전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품고, 함께 나누고 섬기는 외국인 노동자 교회와 상담소 및 다문화교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다가간 교회들의 노력이었다.

산업선교는 노동자선교만이 아니라 우리교단 진보적 신학과 운동의 진원지였다.  

산선의 활동은 노동자선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로 노동 3권이 유보되고 경제성장을 위한 수출전략으로 노동자들의 무한 희생을 요구하는 정치세력이 누구인지 규명하고 이에 조직적이고 저항적 성격을 갖게 된다. 따라서 초기 산업전도에서는 복음만 전하던 방식에서 노동자들의 생활과 노동환경에 대하여 관심갖고 연대하게 된다. 때 마침 미국장로교단의 렘지 장로(미국철강노조 위원장)와 장로교 선교부 화이트 목사의 방한을 산업사회에 대하여 눈뜨게 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노동훈련과 세계교회의 초청을 받아 미국 독일등의 노조와 산업선교 기관을 방문하고 공부한 조목사를 중심으로 변화된 산업사회의 도시화 문제로 인한 노동자들의 삶과 주거 건강 복지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게 해서 소구룹에서 각기 다양한 주제들을 갖고 토론하는 의식화 작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농한 청년노동자들이 공장외에는 갈곳이 없어 산선의 각종 활동에 오게 된다. 

이에 산선의 초대 총무였던 조지송 목사는 기성교회를 목회하던 정진동과 신학을 막졸업한 인명진에게 산업선교 훈련시킨다. 그후 정진동은 고향인 청주에서 산선과 노동교회를 하던중 자연히 노회와 마찰로 기독교장로회로 이적한다. 그러나 거기서도 탈퇴하여 독립적 활동을 한다. 한편 인명진 목사는 이 훈련후 지방으로 배치가 되지만 거기서 정착하지 못하고 영등포로 복귀한다.

이들은 동년배 누구보다고 신심있고 의식화된 이들로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사역했고 고생도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도 어떤 식으로든 받았다는 게 정론이다. 인명진 목사는 한신대 학부 졸업후 장신대 65기로 졸업한다. 이광선, 황승룡, 임신영, 홍길복목사가 동기다. 그러나 한영섬유 김진수 노동자 살인사건에 대한 대책위 활동을 계기로 산선에 정착한 것이다.  

   
                             * 1974년 긴조 1호에 가장 처음으로 저항한 이들은 신학생들로 당시 인목사는 약관 27세였다. 학중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인목사는 군목 입대가 좌절되 영등포산선에서 조지송 목사 밑에서 1975년 전후 시작한다. 인목사는 이미 한신 재학중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서명자로 김진홍,임신영,박창빈, 이규상목사등 기장 교단 목회자들과 구속되 군사법원에서 실형을 받기도 하지만 석방된다. 그 후 인목사의 구속은 청주산선, YH사건에서의 강연이나 설교로 인 한 것이다. 따라서 영등포 산선의 문제나 현장 노동운동은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대표하여 고생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한 때 자신의 동기들 조차도 인목사를 외면하는 등 외롭게 사역했다고 후술한 바 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지친 심신을 달개기 위하여 호주교회로 부터 초청을 받는 다(조지송목사나 산선 위원회는 인목사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영어 공부도 할 겸 휴가를 준 것이다. 어디선가 인목사가 반체제 인사로 정부로 부터 강제출국 당했다고 한 것을  사실이 아니다. 

당시 호주정부는 서울대 운동권 심재권 씨(훗날 강동구서 민주당 지역구 의원 지냄)도 망명 비슷하게 초청하여 공부를 하게 한 적은 있었다. 인목사가 호주를 방문한지 약속대로 1년후 귀국한다. 그러나 이미 맛본 서구생활에 대한 동경인지 산선을 사임하고 호주로 이민로 가기 위하여 자신이 살던 집을 팔고 간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 부부도 호주로 초청한다. 산선은 장신대를 막 졸업한 이근복 손은하 목사에게 맡긴다.

호주에 가서도 자유로운 정치적 분위기속에서 반정부 운동을 하는 분들과 국내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운동을 했다. 그런 결과로 시드니에 갈릴리교회를 창립하고 그후 박기복, 임동규 목사등이 후임자로 가기도 했다. 호주에도 민주화운동의 교두보를 놓은 것이다. 그러나 오랜 절친 홍길복 목사와는 헤어지는 등 파란도 있었다. 

한편 조지송 목사는 1983년 전후로 건강문제로 사임하지만 노회는 휴직 처리된다. 치료를 위하여 청주 옥화대로 낙향을 한다. 그후 1986년경 인목사가 호주서 귀국해 구로동에 산선의 활동과 정신을 잇는 갈릴리교회를 개척한다. 그러면서 87년 국민운동 본부 대변인으로 재야 정치에 등장한다. 이후 영등포노회장이 되 당시 양천구서 꼬마 민주당으로 출마한 서경석 목사와 휴직 상태인 조지송 목사를 노회록에서 면직 처리한다.

   
               * 해외교회와 동포들에게도 알리는 당시 인명진등 구속자 배너

그러나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안 고 방지일 목사가 대노하여 조지송 목사를 다시 휴직으로 원상회복하여 지난 2017년 별세 할 때 까지 영등포산선의 휴직중인 실무자로 평생을 산업선교를 위하여 사역한 산증인이 된 것이다. 인명진 목사가 호주로 이민가기 위하여 사직한 것과는 비교된다. 사실 인목사가 영등포에서 근무한 햇수는 10년도 안된다.    

영등포노회나 총회와 관련하여 인명진목사에게 불미스러운 일은 당시 은성교회(정봉규목사) 은퇴시 당회장의 역할이다. 무리한 건축을 한 정목사가 은퇴을 앞둔 가운데 거액의 교회 돈을 해외로 빼돈린 혐의를 받는 데 그를 두둔했는 데 같이 외국도 다녔다. 그후 은성교회는 정목사가 자산을 빼돌린 결과 금융부채로 유치권을 행사하는 이들이 소속된 서울노회 유지재단에 소속된 교회들에게 재산을 가압류하는 소송을 내는 등 교단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당시 영등포노회나 당회장 인명진 목사가 당시 은퇴하는 정봉규 목사에게 면죄부를 준 결과라는 비판이다. 이런 내용을 아는 영등포노회원들은 차마 말을 못하지만 노회를 지역 구도화하여 출신지역을 근거로 파벌이 조성된 것도 모두 인명진 목사의 정치적 사욕과 교권욕 때문이라고 말들을 하는 분들이 많다. 

세속적 출세를 위해 동지들을 배신 

인목사는 한 때 자신이 노동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노동자들을 돕는 역할일 것이다. 그럼에도 종종 자신을 노동운동을 한 사람으로 소개를 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노동운동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현장운동이 아닌 지원과 배후 운동이라고 해야 정직하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양김의 분열과정에서 기독교측의 지지가 필요한 김영삼 편에 섰고 그 보응도 받았다.

그리고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의 지원으로 갈릴리교회도 건축하게 되는 데 이것도 부자들의 교회인 소망교회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은 것인데 그들의 판단에 이제 인목사가 부자와 권력자들의 친구가 된 것을 확인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보수정치와 권력자들의 친구가 되여 통합과 중도를 표방했지만 그들의 논리를 편들어 주어 과거 자신을 있게한 운동과 노동자들을 버린 것이라는 비판이다. 

당시 97년 대선에선 양김과 분열하여 낙선하고 김대중은 영국으로 김영삼은 민주당을 이끌고 김종필은 국민당을 갖고 집권당인 민자당과 3당 합당을 하고 주류가 된다. 말로는 범을 잡으려면 범 굴에 들어간다는 것이지만 더 이상 야당생활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절박함의 결단이었다. 이 때 합당에서 소외된 이기택이나 노무현등은 저항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당대표가 되고 대선 후보가 되고 집권한 김영삼 정부가 탄생하자 인목사는 날개를 단다. 그러나 인목사의 그간 이력은 정치인도 투쟁가도 아닌 노동자들을 돕는 종교적 사역으로 얻은 명망이었다. 그것이 바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재야에서 다시 권력자로 변신을 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명예를 안겨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보수정당인 기득권층에 부역하게 된 것이다.

김영삼을 지지한 것은 인목사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후 이들은 다시 민주화세력으로 자리매김하지만 인목사는 끝까지 권력의 편에 선다. 당시 기장의 박형규목사와 오재식 원장, 김동완목사등과 김영삼의 사람이 되고 그가 집권후 행정위원회와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과 KBS 이사를 지낸다. 

본인의 말로는 노동부 장관 국회의원등의 요청이 있었지만 목회를 포기할 수 없어 거절했다고 한 바 있다. 실제로 당시 영산의 실무자를 지낸 방용석(원풍노조 위원장 출신)은 김대중정부서 노동부장관과 평화민주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고 실무자 송진섭도 평화민주당으로 안산에서 의회에 출마했다가 실패하였고 이후  안산 초대 민선시장이 된 것으로 보아 본인 결심만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라고 본다.

   
 * 한영방직 김진수 노동자 죽음으로 인명진은 장례식 위원장을 하기도 하고 회사대표가 한철하 목사의 형이었는 데 학생들과 찾아가 보상등 해결을 하여 지도력을 발휘한다. 이를 계기로 군목입대을 못하게 되었고 내친 김에 산업선교를 지원한다. 

그렇게 기성 정치인들과 인맥을 다지게 되니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던 동지들을 배신했다고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인목사의 권력유착에 실망하여 이탈한 교인들 이야기로는 노동자의 친구로 자처한 인목사의 언행에 실망이 컸다고 한다. 이후 부산 일신기독병원 노조의 파업으로 적자인 병원이 망하기 직전 부산 민노총의 추천으로 비대위원장이 되여 노사관계를 화해로 이끌어 낸다. 그런 덕으로 이사장을 오래 지냈지만 호주교회가 세운 교단에 준 일신병원은 교단서도 일탈하여 지금은 이사도 파송못하는 병원이 된다.  

이후 인목사는 한나라당 절친들 추천으로 당의 윤리위원장이 되기도 한다. 당시 사무총장의 삼고초려로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 수락한 직위지만 시무 목사가 정당의 이런 자리를 할 수 있느 냐 하는 파란이 있었다. 그러나 인목사의 요구대로 입당하지 않고 부임하여 일정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사회의 민주화을 위하여 노력하고 희생해온 그의 행보가 보수세력의 권력투쟁에 선 것 자체가 비판받았다. 그러나 냉혹한 정치판에서 서청원 의원과 논쟁에서 챙피만 당하게 되고 이후 정당들은 외부인을 경계하게 된다.  인명진목사, 내가 윤석열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 - YouTube(영상) 

   
 

과대포장으로 오히려 손해  

그러더니 올 2022년 대선과정에서도 가만히 있는 가 했더가 느닷 없이 안철수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 기자회견을 한다. 왠만한 보수도 사실 안철수에게는 가망이 없다고 봤다. 그러나 윤석열에게는 선이 닿지 않차 안철수를 고리고 하여 단일화를 염두에 두고 권력에 기대려는 속셈인지 안철수를 압박하여 윤석열과 단일화를 압박하지만 말을 안듣자 지지철회을 한다는 기자회견을 또 한다. 또 나경원 전 의원의 후원 회장을 하는 등 여전히 정치언저리를 맴도는 비굴한 정치 낭인의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되니 인명진 목사의 후배나 제자등 영향을 받은 이들로써는 정말 난감할 수 밖에 없다. 한 때 서경석 목사와 함께 정당에 입당한 것을 이유로 교단에서 자신이 길러낸 일하는 예수회 회원들로 부터 목사직 제명을 하자는 서명이 일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지난 8월 9일(화) 한 보수 유트브에 출현하여 한 발언의 영상을 보면 지지율이 급락하는 윤석열 현 대통령에 대하여 노골적인 구애성 옹호발언을 한다. 사면초가의 그에게 힘이되고 현 정부에서 한자리 해보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교단적으로나 한국기독교의 숭고한 노동자선교 기관의 사역을 바탕으로 기성 정치권에서 자신의 역할을 과잉 포장하여 그간 권력에 기대여 명예을 향휴해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부성 발언까지 하는 모양세다. 따라서 이제는 영등포산선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노동자들의 비판이 일고 있다. 그러나 인목사의 이런 언행은 철저히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 윤석열 정부에게 자신을 돋보이고 한자리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보는 것 아니냐는 소리다.  

그러나 보수 교회도 그렇고 기독교 내부에서의 인목사의 영향력은 별로 없다. 이미 나이가 80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광훈식의 길거리 투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김대중 정부 이후 호남인사들중 여럿이 화해와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박근혜정부에서 한 이용을 당하고 동지들로는 변절자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을 것이다. 결국은 성직자로써 마지막 까지 지켜야할 지조와 양심, 정의를 버리고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영등포노회 당산동교회 목사였던 이정학목사(영등포산선위원장)

영등포산선 영등포노회 것 아니야 

영등포산선은 원래 경기노회가 선임한 위원회의 지도를 받아서 시작된다. 이후 경기노회에서 여러노회들이 분가를 하는 데 영등포노회 당산동교회 이정학목사와 서울남노회(시흥교회 차관영, 역삼교회 류순하, 남현교회 이정규, 청담교회 조남기 목사)가 위원을 한다. 그후 남노회로 다시 동남노회로 분화해 청담교회  조남기 목사가 동남노회가 되자 영등포, 남노회, 동남노회 3개의 노회에서 파송한 위원회로 구성된다.

그러나 인명진 목사는 이 분들이 은퇴를 하자 더 이상 파송을 받지 않고 영등포노회만으로 위원회를 구성한다. 그렇다고 영등포노회가 잘못하거나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다. 재정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영등포산선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역사의 사실은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필요하기에 이 내용을 언급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등포산선은 총회 산업선교기관이다. 이제는 일개 노회산하에서 총회의 기관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한 때는 총회 전도부 안에 산업선교위원회가 존재했고 울산이나 구미 태백등의 지방노회에서도 산업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여 활동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후 산업선교의 정신과 사역은 노동상담소, 다문화등으로 분화되면서 이름이 바뀐다.

WCC나  CCA에도 URM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NCCK 도 유명무실하게 된다. 세계 다른 교회들에게도 UIM은 약화되고 일본(NCCJ)에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영등포산선을 우리교단의 산업선교 시초이고 역사라는 점에서 전체 교단을 포괄하는 지역의 산업선교를 모두 모아 교단 역사로 통합을 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진방주 목사가 이 분야 전문가로 아주 중요한 자료를 공개한 것은 다행이다. 앞으로 다른 지역이나 뭍혀진 진실과 얘기들이 발굴되야 한다. 그래야 영등포산선으로 국한되고 과대평가된 인명진 목사에 대한 영웅담을 바로잡을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등포산선의 역사나 우리교단에서의 위상은 재 구성될 필요가 있다.   

결론  

진방주 목사의 글은 최근 익산의 한 교회와 거제도에서의 대우조선파업등과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하여 환기했다. 긑으로 산업선교의 신학적 모토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교회가 닫힌 문을 활짝 열고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부둥켜 안고 해결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며 노력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 자매요, 이웃이요, 우리가 평안하게 살수 있도록 땀 흘리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 뿐이다" 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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