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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 목회 영성홍인식 목사(현대교회)
홍인식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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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0.13  22:4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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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기독교 목회 영성

-목회적 측면에서-      호남신학대학교 농어촌연구소       강의/ 홍인식 목사(현대교회)

I.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 무엇이 문제인가?
2008년 미국 발 서브프라임 부실로 시작된 국제 금융 경제 위기는 극복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금융 위기를 당하면서 우리는 이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측면의 분석을 내 놓고 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내 놓은 원인분석의 내용 중에서 목회 현장의 한 복판에 있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번 금융위기의 배후에는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유종일 교수는 Terry Burnam의 Mean Markets and the Lizard Brain을 인용하면서 “탐욕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충동적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원초적 감정 중의 하나로서 탐욕이 지배하는 금융 시장에서의 실제행동을 연구한 결과 지극히 비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 밝혀졌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탐욕과 공포에 입각한 충동적 선택이 금융시장의 ‘광기, 패닉, 붕괴’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라고 전제하면서 결국 시장경제의 체제적 위기는 양극화와 탐욕의 합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사회봉사부 주최 2009 총회 교회와 사회포럼 자료집 6쪽, 2009. 2.26)

다른 한편으로 금융위기를 맞이해서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통계가 하나 있다. 통계에 의하면 2008년 8월 말 개인 보유 국내외 주식형 펀드 계좌 수는 무려 2430여만 개(8월말 기준, 한국 가구 수 1588만)로 이미 “1가구 1펀드”시대를 훌쩍 뛰어넘었다고 한다. 이 통계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온통 fund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몇몇 재테크에 능하고 재주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온 국민이 재주가 있건 없건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통계가 아닐 수 없다.

수년전 새해 벽두부터 한 신용카드사의 “부자 되세요”의 대박광고와 “가난한 아빠, 부자 아빠”의 비교 등은 삶의 모든 관심사가 “돈 벌고 부자 되는 일”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슬픈 통계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슬픈 통계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들은 유 교수의 지적대로 오늘의 금융 위기의 배후에 탐욕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 오늘의 경제위기가 욕망으로부터 출발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성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제문제는 신앙의 문제, 다시 말하면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메시지
정말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경제 정치 사회적 분석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학적인 시각으로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의 위기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목회 현장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목회자로서 목회적인 관점에서 우리를 향하여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요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려고 하는 것일까. 이러한 전제에서 본 소고는 경제와 신앙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좀 더 목회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신자유주의 정책의 종교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할 것이다. 뒤이어 이에 대항하는 기독교의 해방적 영성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 상황에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목회실천적인 대안과 모델에 대하여 논하게 될 것이다.

II. 경제적 종교로서의 신자유주의
브라질의 한국계 해방신학자인 성정모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국제경제 질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신학(endogenous theology)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그는 비록 전통적인 종교적 용어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에는 “낙원에 대한 약속, 원죄, 필연적 희생, 구원”이라는 종교적 주제들이 산재해 있으며 일종의 “경제적 종교”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본 소고에서는 이렇듯 경제적 종교로서의 신자유주의의 내재적 신학의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1. 시장(market)의 우상화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시장은 유일신 종교의 신 개념을 대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장은 유일신에게 적용되었던- 전지, 전능, 섭리, 무소부재- 모든 신적인 특성을 소유한다. 시장은 유일한 신, 다른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는 질투하는 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자신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선포한다. 유일한 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장을 위협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용납될 수 없는 불순하고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시장의 우상화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신적인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게 됨에 따라 먼저는 태연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행하는 악행이 악이 아니라 신의 명령으로서의 구원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신의 악의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2. 구원의 약속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통한 구원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그것은 곧 끝없는 경제적 번영으로 표현된다. 시장 안에 있다는 것은 구원을 보증 받는 것과 같다. 시장을 거부하거나 시장 밖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의 신자유주의적 번역이다. 신자유주의의 구원은 “번영과 승리”이다. 인류에게 유일한 구원은 물질적인 번영이며 인류의 최후의 승리는 오직 시장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물질적 번영은 시장의 신을 통하여 인간에 베풀어지는 신적인 축복이다. 따라서 물질적 번영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며 구원의 약속에서 저주 받은 사람으로 평가 받게 된다.

미국에서 시작된 ‘번영의 신학 혹은 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부유함, 명예, 개인적 성공과 육체적 건강을 포함하는 물질적인 번영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조건하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이다. 건강과 부유함은 모든 믿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인 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오직 한 가지 조건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믿음을 시장으로 대치한다. 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이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3. 필연적 희생
낙원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것은 간단하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은 험난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낙원을 약속해 주는 것이기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으로 간주된다. 시장 외에 다른 대안이 없고 시장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진리와 길”로 여겨질 때 우리는 그것을 지켜내고 실현하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도 치룰 각오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자유주의에서 “필연적 희생”의 생각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성정모는 이렇게 말한다. “희생의 논리가 세계전체가 아니라 주로 서구의 사회적 정신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의 대다수의 종교에서 우리는 희생의 신학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그리스도교전통은 <<희생 없이는 구원은 없다>>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신학은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의미를 주는 장점이 있음과 동시에 억압체제를 정당화 시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정신의 기초에 끼친 희생의 논리의 영향에 대한 출현이 미칠 영향에 대한 인식은 우리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자본주의 논리에 저항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장체제의 <<소비의 꿈>>을 나누어 가지는 것 이외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낙원을 얻기 위함이나, 속죄함을 받기위해(무능력, 패배, 가난한 자가 되는 죄) 희생의 요구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무능력한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은 보다 더 큰 번영을 이룩하는 거룩한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일 뿐이다. 이러한 필연적 희생 제물에 대한 생각은 기독교적 희생의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고 기독교 교회 내에서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4. 새로운 인간(homo oeconomicus)
신자유주의 경제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출해 낸다.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의 자격을 규정하고 있다. 구원 받을 자격이 있는 새로운 인간은 시장이 제공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시장 종교의 복음은 다름 아닌 경쟁이다. 경쟁의 신학과 영성을 받아들이고 이에 순종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간으로서 시장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된다. 시장 종교에서 유일하게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것은 경쟁을 통한 경쟁력 강화이다. 경쟁은 모든 기업과 국가의 존재 기반이 되며 경쟁력 강화는 모두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이다.

초중고등 학교, 대학교, 병원, 가족, 기업, 병원, 심지어는 종교기관을 망라한 사회의 모든 기구와 기관은 경쟁력 강화를 향하고 있다. 교육의 목표는 온전한 인간 형성이 아니라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인간 배출이다. 경쟁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복음으로 받아들여진다. 경쟁복음 외에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이름은 없다. 인간적, 경제적 발전도 사회복지도, 정치적 발전과 독립도 경쟁복음으로 인하지 않고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들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인간 생산을 제시함으로서 오늘의 소비 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로 떠오르고 있다.

III.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목회의 영성
이러한 경제적 종교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기독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삶 그리고 성서로부터 유추되어지는 윤리적 영성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몇 가지로 요약해 보자.

1. 해방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영성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한 사회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무런 사회적 보호 장치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얽매임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으며 이에 따라서 그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삶을 살아왔다. 여기서 예수의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단순한 비유로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던 근본적인 논리와 동력이다.  해방의 영성에서 양심은 단순한 특정 상황에 대한 도덕적 원리의 적용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표정에 대한 응시와 아픔을 함께 하는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해방의 영성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의 자선 행위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정의와 평화의 영성
불의와 부정은 어느덧 우리 인류의 삶에서 일상적인 현상이 된 것 같다. 불의는 조직화 되어 있고 더욱이 메델린에서 개최되었던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문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미 제도화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인간 존재는 이러한 폭력과 불의에 영원히 매여 사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있다. 인간은 정의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의 정의를 향한 열망은 성서와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영성과 일치한다. 정의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마태 6:33)
Rene Padilla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순을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단순화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는 오히려 사회정의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의 현실과 사회윤리의 측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모든 경제관계에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정부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실이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현 경제시스템의 악마적인 성격을 고발하는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인 그리고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의 가진 것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청지기적인 책임을 회피하도록 만들어 줄 수는 없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 는 복음을 통하여 다른 사회구조를 변혁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조라는 것”(John H. Yoder)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 폭력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간의 역사를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폭력은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선교사역이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와 분리되어 질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성서적 혹은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신약적 전망으로부터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함과, 그리고 그러한 삶이 필연적으로 평화의 실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조화, 평안함, 번영 그리고 생의 풍요로움이 함께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 뿐만 아니라 평화는 정의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이사야의 말을 빌리자면, 정의의 열매는 평화이며, 정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 아니겠는가.(이사야 32:17)

3. 은혜의 영성(값을 치루지 않음)
오늘의 세계는 “계산의 문화”의 세계이다. 값을 치루지 않고서는 어떠한 혜택도 누릴 수 없는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계산의 문화”는 최소한의 경비와 시간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사회이다. “계산의 문화”는 휴식을 용인하지 않는다. “공짜”가 사라진 사회이며 오직 “이윤추구”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이는 유토피아적 전통에서 “은혜”라는 개념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영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언자 이사야는 상업적인 논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값을 치루지 않고도 삶이 영위되는 “은혜”에 의존하는 사회를 제안하고 있다. (이사야 55:1~2)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거저 주었으니 거저 주라는 은혜(값을 치루지 않음)의 삶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마태 10:8) 삶 자체에 값을 매기면서 값을 치루기를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영성을 선포할 것인가? 오늘 한국교회 목회 구조 속에서도 “계산의 문화”, ‘값을 치름’(필연적인 희생) 없이는 구원 없음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산의 문화에 의해 지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한국 교회가 회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은혜의 영성일 것이다.

4. 동정과 자비의 영성(고난의 동참과 나눔의 영성)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인류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제안하였지만 우리는 곧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세계화는 인류의 빈부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계화 과정 내부에 태생적으로 자비의 영성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자비의 부재는 세계화 과정 자체가 ‘나와 다른 인간’, 동물, 그리고 자연세계의 필연적인 희생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 지탱되어 진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를 행한 기독교 목회의 영성은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 것인가? 기독교 목회는 동정적인 행동, 다시 말하면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동참과 나눔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신학적 그리고 인간론적 원리인 자비의 영성으로부터 출발되어져 한다. 동정과 자비의 영성에 기초한 목회만이 끊임없이 피해자들을 양산해 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정당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오늘의 세계와는 다른 대안적인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자비와 동정의 영성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전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사야는 희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당시의 유대교를 비판하면서 (이사야 1:10-15) 믿음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정의의 추구, 억압받는 자의 인권 보호, 고아와 과부에 대한 돌봄을 제안하고 있다.(이사야 1:17) 더 나아가서 호세아는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6)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에게서도 이러한 동정과 자비의 영성은 손쉽게 발견된다. (마태 9:13, 12:7) 하나님에게 유일하게 유효한 희생은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진정한 회개와 변화이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동정과 자비의 영성을 강조한다.(누가 10:29~37) 그리고 말한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5. 이웃의 영성
보프는 그의 최근의 저서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위한 덕목 II”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를 대치하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가능케 하기 위한 덕목으로 친절함(베풂), 더불어 삶(상생), 존중 그리고 관용을 지목하고 있다. 그는 존중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서 “이웃”을 강조한다. 이웃의 존재에 대한 인정 없이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은 세상”은 이웃에 대한 인정, 각 인간 존재의 내재된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인정과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으로부터 출발된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이웃을 배제한다. 이웃에 대한 존중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문화를 지향한다. 나 자신만의 행복과 세계에 전념하며 모든 것은 “나의 세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영성의 목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교회의 목회가 “더 나은 세상”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영성의 모습은 Boff가 지적하는 “이웃의 영성”이다. 이웃의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인정, ‘섞어짐’(mestizage)의 실천, 받아들임, 인종간의 교제와 소통, 문화 간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잊혀 있던 억눌린 이웃, 소외 받고 있는 이웃, 침묵을 강요당한 이웃, 모욕당하고 억압당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 것이다.

6. 연대와 공동체의 영성
신자유주의의 결과의 하나로서 빈부격차의 벌어짐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경제적인 차이에 근거한 사회적 계급을 만들어 내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신 부족사회”를 형성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인하여 형성된 새로운 부족(사회계급)들은 각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한다. 교육, 문화, 예술, 취미생활 심지어는 식생활에서도 급격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부족 간의 관계는 단절된다. 새로운 부족시대의 등장이다.

유대교의 이방인에 대한 소외와 차별의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1~12)라고 외치면서 부족을 넘어서는 서로 다름이 어울려 살아가는 연대와 공동체의 사회를 가르쳤다. 오늘 한국 교회는 어떤 영성을 외치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은 그의 영성이 연대와 공동체를 지향하는 “포함의 영성”(inclusive spirituality)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함의 영성”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형성되어지는 신 부족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마련을 위한 한국 교회의 목회 모델을 형성하도록 기본적인 틀을 제공해줄 것이다.

7. 생명의 영성
성서로부터 유출해낼 수 있는 선교에 대한 다양한 개념 중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은 예수의 선교의 현장의 한 가운데에서 생명의 개념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이다. 예수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b)고 말씀하셨다. 풍성한 생명, 생명의 풍요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정과 믿음 없이-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없이-풍요로운 생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풍요로운 삶과 관련된 유일하고 참된 신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정이 요즘과 같은 시대, 다시 말하자면 맘몬 신에 의해 지배됨으로서 삶의 질이 유보되고 생명의 가치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의 양과 값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신주유주의적 현실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강조하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신자유주의의 산물인 ‘번영의 신학’(현 소비사회가 생산해 낸 또 다른 소재이다)의 옹호자들을 대항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풍요로운 생명은 물질이 풍성한 생명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가치와 생명의 보존을 발견하는 생명임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 우리는 사랑의 결핍, 그리고 그의 결과로서의 빵의 결핍이 발생하는 곳에서 생명의 풍요로움을 말할 수 없음을 보아야 한다. 정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부재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물질의 충족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서 생명의 풍요로움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8. 약함의 영성(독재적 권력을 향한 비판과 대안으로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강력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유혹은 없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을 향하여 손짓하는 유혹들 가운데서 권력에 대한 유혹만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유혹도 드물 것이다. 기독교적 삶의 분야에 있어서도, 권력(그 권력이 자신의 직분에서 올 수도 있고 또한 어떠한 영적인 카리스마에서 오는 권력일 수도 있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될 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성서구절과 신학적 뒷받침을 동반하는 ‘경건’이라는 옷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권력,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악마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려고 하였던 아담과 하와의 시도를 계속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권력 남용에 대하여 예수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부패한 권력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예수는 독점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의 대안으로서 섬김과 약함의 신학을 소개한다. 예수는 승리적인 메시아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윗의 전통에 의한 메시야 칭호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메시야 됨’을 고난 받는 종의 모습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출애굽, 예언자, 지혜서 그리고 시편의 영성적 전통 등과 같은 종교적 전통의 선상에 두고 있다.

9. 충돌과 예언적 비판의 영성(경제적 종교 비판, conflictive spirituality)
충돌과 갈등은 예수의 윤리적 영성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가 살던 당시의 사회는 다원화된 사회였으며 또한 여러 분야에서 갈등의 요소를 다분히 소지하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 사회의 갈등에 대하여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하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갈등을 유발함으로서 문제의식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예수의 갈등유발 혹은 충돌은 여러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는 민중의 자유를 위한 정치권력을 향한 도전과 충돌, 정의를 위한 경제 권력과의 충돌, 인간과 믿음 공동체의 자유를 위한 종교권력 및 공식신학과의 대결, 여성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위하여 가부장적 사회와 충돌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포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도전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에 대하여 성찰하도록 한다. 이렇듯 예수는 수많은 질문과 충돌, 그리고 갈등을 유발시키면서 당시의 사회에 도전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장을 우상화하는 신자유주의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시장은 자신을 향한 어떠한 도전과 질문, 혹은 추호의 의문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러한 시도는 모두 불신앙으로 간주되어 정죄된다. 시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는 신적권위를 부여받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예수의 영성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교회는 신자유주의를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대결하며 충돌하고 갈등을 유발시키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시급하게 회복 되어야 할 목회적 기획과 시도는 이 같은 충돌, 예언자적 비판과 갈등유발의 영성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알베르 까뮤의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의 말을 기억하면서 강등과 충돌이 변화와 변혁의 중요한 원천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0. 비양립성의 영성(Incompatibility 하나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서)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과 돈(맘몬)의 비양립성(Incompatibility)은 매우 과격하게(radical)하게 주장되어 왔고 이에 대한 어떠한 예외도 용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원리로만 주창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실천되어졌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아야 했고 필요 이상의 어떠한 물건의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거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늘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비양립성은 후대 교회에 의하여 왜곡되어졌고 “만족의 문화”에 안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그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 대한 성서적 그리고 역사적 교훈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물질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과 신앙의 선배들의 실천적 삶에 대한 역사적 교훈의 빈혈증을 앓고 있다. 우리들은 물질에 관련한 교회의 풍요로운 가르침과 경험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물질과 부가 가져 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한 예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물질적인 번영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의 명백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가난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성실의 대가라고까지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번영의 신학’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오신 ‘예수의 복음’의 가르침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돈-신의 개념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절대적으로 물질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가 물질적인 목적의 실현을 향한 개인의 욕망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someone)’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something)’를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웃의 존재는 쉽게 무시되거나 소홀해진다. 이러한 가치관이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들이 오늘의 경제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시키는 것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물질소유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은 시급하다. 우리는 오늘 인간 존재의 경제적인 면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시도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우리들의 삶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포함한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들과 오늘의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존재하는 비양립성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11. 친절과 받아들임의 영성
친절은 인간존재의 인간화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Leonardo Boff는 “Otro mundo posible”(가능한 다른 세상)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무엇이 세계화 현상으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갖게 만들 것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는 네 가지 덕목을 열거하면서 이 덕목에 기반을 둔 윤리와 영성을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관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적이 되지 못하며 또한 그 어떤 세계화도 인류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Boff는 친절함의 덕목을 실현하기 위하여서 그 기초로서 “다른 사람들”(Others)의 “되찾음”을 언급한다. 경쟁을 복음으로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에서 “다른 사람들”은 설 자리를 갖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을 잃어버린 신자유주의의 극복을 위한 대안적 모델은 “다른 사람들”을 회복하는 친절함고 받아들임의 영성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 구조에서 사라지고 설 자리를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또 그들을 회복하기 위한 목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잃어버린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한 친절과 받아들임의 영성을 위한 Boff의 제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여기에 인용해 본다. “세계화의 현장에서 친절함과 받아들임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많은 장애에 접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무조건적인 실천 의지 배양하기 2. 풍요로움으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3. 다른 사람의 소리에 신중하게 귀 기울이기 4. 솔직하게 대화하기 5. 정직하게 거래하기 6. 공동체를 위하여 이기적인 관심을 포기하기 7. 의식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하기 8. 용감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의 상대성을 인정하기 9. 지혜롭게 상황의 변화를 도모하기.”

12. 꿈의 영성(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위한)
윤리, 영성, 희망 그리고 유토피아는 기독교와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특별히 윤리와 영성은 ‘좀 더 나은 세상’의 실현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부추기는 요소들이다. 희망은 윤리와 영성 그리고 유토피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조합을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서 발견한다. 윤리와 영성의 사람, 예수 그는 희망을 가진, 꿈꾸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희망 자체가 되었다. 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늘 ‘하나님의 나라’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 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유토피아적인 희망과 꿈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오늘의 상황은 우리가 원하던 그렇지 않던 현 체제만이 현실에서 가능한 유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치사회 행동을 통해서 변혁시키려는 노력보다는 현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각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상실하게 만든다. 만일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숙명적으로 맘몬 신의 지배 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는 착취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언자적인 상상력’(Walter Brueggemann)을 동원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설정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다. 신자유주의 사상은 구약에서 보여졌던 왕정체제, 지배층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였던 권력과 지식에 바탕을 두었던 포악한 체제의 근대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늘과 땅의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예언자적인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정의를 향한 헌신은 자신의 백성과 연합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는 현실 가장 근본적인 모습임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제적인 의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칼 막스의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질서가 보존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충분하고 오히려 넉넉한 성찰의 도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예언자적인 상상력과 유토피아적 꿈에 대한 포기는 우리로 하여금 맘몬에 의해서 조작된 현 정치 사회경제체제에 대하여 대항하는 의지와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면서 혼란기에 접어들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살려 내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14. 멈춤의 영성
나는 위에서 하나님이 이번의 사태를 통하여 우리의 세 가지 허를 찌르셨다고 말했다. 그러면 위에 지적한 우리가 그렇게 신봉하고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던 세 가지 분야가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미국은 American Dream이 말하듯이 성공과 부의 상징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말할 것도 없이 오직 부의 축적만을 목적으로 무차별적인 경쟁을 바탕으로 개인의 욕망을 한없이 이루고자 하는 제도다. 작년 현 정부를 출범시켰을 당시 우리들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도덕성 보다는 경제”였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을 연결해 보면 이 세 분야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삶”이다.

통계에 의하면 2008년 8월 말 개인 보유 국내외 주식형 펀드 계좌 수는 무려 2430여만 개(8월말 기준, 한국 가구 수 1588만)로 이미 “1가구 1펀드”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상황이라고 한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는가? 이 통계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온통 fund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몇몇 재테크에 능하고 재주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아니라 온 국민이 재주가 있건 없건 여기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통계가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의 삶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슬픈 통계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맹점이 바로 욕망에 기반 한 삶과 제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한없는 발전을 약속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계를 모르고 한 없이 뻗어만 가려하는데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멈출 줄 아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진정한 부자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끝없는 소유에 의해 삶의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멈출 때를 아는 지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기반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이 우리에게 찾아 올 것이다.

IV. 결론을 대신하는 목회적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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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급속하게 한국 교회를 장악하게 되었고 대다수 교회의 목회 모델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에서 파생된 소비문화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현재 대다수의 개신교회들의 최대의 관심은 빠른 시일 안에 최대의 수적 성장을 이루는 것에 집중되고 있다. 수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이 시대의 풍조를 반영하는 갖가지 방법론이 동원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종교시장에도 자유시장의 물결이 넘쳐 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 짐에 따라 이제 예배는 ‘show'로 전락하게 되고 설교는 행복을 얻기 위한 쉬운 처방전과 하나님과 육체적 안정과 물질적 번영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향한 초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복음이 소비재로 변질되었으며 믿음은 이제 사회-정치적 삶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아무런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순전한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적 경험(private religious experience)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소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흑암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을 선포하는 복음의 능력의 회복이다. 교회의 사역은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사역은 적그리스도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의 한 복판에서 사랑, 정의, 평화, 진리와 자유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는 대안적인 사회모델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부합되는 유일한 세계화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그리고 평화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시고자 한다. 교회는 “왕 되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수적인 성장에서 비롯되는 권력이나 영향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나라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진정으로 응답하게 되면 될 수록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목적을 반영하는 진정한 세계화를 인간 역사 안에서 이루는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이 소수의 elite 계층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삶을 소유의 관점에서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은,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 채, 현대사회는 ‘각 개인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서’ 대다수의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오늘 세계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화시켜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떻게 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신봉하면서 동시에 성서에 계시된 정의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신실성을 지켜갈 수 있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Michael Novak 과 Amy Sherman 과 같은 미국의 몇몇 신학자들의 신자유주의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옹호시도는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견되어지는 태도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무관심 혹은 암묵적인 동의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제 40년을 구가하던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 교회는 과감히 지난 과오에 대하여 철저히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신자유의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기독교적인 대안 창출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자유주의가 소외시켰던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는 진정한 의미의 “연대의 세계화”를 이루어 내어야 할 것이다. “연대의 세계화”를 현장의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서 나는 본 소고를 통하여 몇 가지 실천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제동기능의 강화
목회의 실천적 현장에서 목회의 기능을 가속이 아니 제동장치의 회복을 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오늘의 험악한 현실은 무엇보다도 멈춤이 없는 가속의 문화에 의한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목회 현장의 기획이나 계획들이 성장목표를 지양해야 할 것이다. 성장이 아닌 멈춤 혹은 가진 것에 만족하고 현재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설교나 목회 계획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 참여와 협력을 창출해 내는 통로기능의 강화
신자유주의 사회는 80대 20 아니 90대 10의 사회를 지향해 나가고 있다. 실질적으로 소수의 능력 있는 elite들에 의해 정책이 수립되고 실행되고 있고 따라서 점차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참여와 협력이 강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더욱 드세어 지고 있다. 우리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사회변혁을 위한 행동에 있어서 동기를 부여하거나 또한 참여를 이끌어내는 통로 기능을 해왔음을 알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서 교회가 이러한 기능을 계속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대안적 사회의 모델을 제안하는데 있어서 교회는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의 목회가 기존 교회간의 협력 체제를 벗어나서 좀 더 지역사회의 시민 단체와 연대하는 행위가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에큐메니칼적 선교와 목회가 요구된다. 이와 더불어서 교회 내의 의사 결정 구조를 비롯한 전체적인 목회구조에서 교우들의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조적 변화도 함께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3. 새로운 삶의 양식 모색의 기능 강화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사회적 대안(social alternative)에 대한 전망이 매우 흐릿한 상황이다. 마치 모든 대안의 가능성의 지평선이 닫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초대 교회가 그러했듯이 교회는 또 다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시험해 보는 훌륭한 현장의 기능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이 일은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현실적 판단과 더불어 실용적인 면과 예언자적인 측면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의 양식의 필요성과 의무에 대한 깨우침을 주는 것과 더불어서 실현 가능성을 제공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삶의 양식은 “계산문화”가 아닌 “은혜의 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올바른 믿음 회복 기능 강화
Viktor Frankl은 현대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근본적인 특성중의 하나를 의미성의 상실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세계에서의 인간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준거의 틀을 상실해 가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탱해야할 만한 종교적 기초(위대한 이야기)를 상실한 후기근대 사회에서는 주관적인 종교 개인주의가 성행하게 되며 개인적인 영성은 ‘작은 종교’들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이러한 후기근대사회적인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내부의 종교적인 경향을 넘어서서 그 자체가 “경제적 종교”로 자리 잡게 됨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다. “경제적 종교”의 등장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었고 오직 그 의미를 현실의 삶의 번영에서 찾도록 만들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나의 잘 됨이다.” 믿음에서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긍정적 사고방식”, “잘 되는 나”, “감성적 하나님” 과 번영의 신학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경제적 종교”의 도전 앞에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의 기능 회복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의 목회는 믿음과 삶이 일치되는 실질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비판적 영성의 배양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의 옹호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신격화”시키는 “종교적 종교”의 배교 행위에 대항하여 믿음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5. 목회의 대 사회정치 기능의 회복과 강화
우리가 좋아하던 그렇지 않던, 우리가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쟈크 엘률이 주장하는 ‘악마적인 정치’가 주고 있는 도전을 받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삶의 스타일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은 삶이 정치적 결정과 선택에 의해서 규정되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완벽하게 정치로부터 무관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정치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오직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스스로 내어 놓으신 종으로 오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새로운 하늘과 땅을 미리 보여 주시며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확신케 해주시는 성령의 함께 하심이다.

쿠바의 신학자 Ba z-Camargo에 의하면 사회정치 참여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우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는 성서의 기록과 또 한편으로 민중들의 삶의 자리와 그 여건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성찰을 통하여 “혁명적인 부름에 대한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는 “사회적 문제의 본질과 그 필요성을 분석하기 위한 기독교적인 원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이 시기에 교회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잘 되는 나”에 치중하면서 개 교회 혹은 개인의 행복에 집중되었던 관심을 대 사회정치를 향하도록 해야 한다.

6. 예언적 혹은 상징적 충동의 기능의 강화(Symbolic Provocation)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복종하면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인간에 대한 창조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게 현실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대해 볼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교회의 그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상징적 충동의 행동을 기다려야 한다. 교회는 사회로 하여금 변혁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행동을 하도록 충동(provoke)을 받도록 해야 한다.

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 Jose Maria Mardones는 물질적인 외형의 삶과 소비 중심의 후기 현대사회와 신자유주의적인 가치에 점령당한 사회에서 기독교의 기능은 상징적인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가 이 사회에서 순기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충동적 상징 행위(provocative-symbolic attitude)들을 통해서 현 사회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사회는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에 대하여 성찰을 하게 될 것이고 또 교회는 그렇게 하도록 충동해야(provoke)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반문화적 공동체라는 Miguez Bonino의 지적은 옳다. 교회는 이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주는 counter-culture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적인 행위로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에게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그들을 충동(provoke)했다. 안식일에 제자들로 하여금 밀알을 따 먹도록 허용했다. 바리새파 사람들 앞에서 어찌 보면 의도적으로 환자들을 치유했다. 평상시의 모습과는 달리 과격한 행동으로 비쳐졌을지도 모르지만 그 분은 성난 모습으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모두 쫓아버렸다. 이 모든 행위가 상징적이고 충동적인 것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모습을 강하게 지적하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충동하는(provoke) 행위들이었다. 그러한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당시의 사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던지고 그들의 잘못을 질타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였다.

예수의 생애는 이러한 충동적인 상징행위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뿐만이 아니다.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도 많은 경우 상징적인 행위와 행동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에 도전했다. 이사야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로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 갈 것을 3년 동안 맨 발과 발가벗은 몸으로 전하기도 했고(사 20) 예레미야는 질그릇을 예루살렘 서편 성 밖 흰 놈의 골자기에 던져 깨뜨리며 유다 백성의 멸망을 예언하여 회개를 촉구하기도 했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를 통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충동했다.(provoke)

이처럼 상징적인 행위들은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행위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는 상징적인 행위를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회를 향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충동질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새로운 세계,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들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보다 더 못한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면서 자신의 삶을 회개할 수 있도록 충동질하는 그 어떤 행위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있는 혼란한 이 시기에 한국 교회가 이 사회를 향하여 대안적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적인 행위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향하여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상징적인 행위들이 무엇인가를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더 나은’사회에 대한 기대는 기독교 희망의 가장 중요한 모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독교적 희망을 죽음을 넘어서는 단순한 개인적인 구원만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종교적 종교인 신자유주의가 종말을 고하는 이 시기에 이 사회를 향하여 “더 나은 사회”의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Paul Nizan은 “이 세상에 대하여 비판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사역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힘을 의존하여 인종, 사회적 계급과 문화장벽을 넘어서서 화해의 놀라운 경험을 발생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교회는 “세상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분열된 이 사회를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하는 새로운 사회의 대안적인 모델로서 그 위상을 정립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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