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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열교수의 한독협의회 개회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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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2.17  18: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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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독교회협력 반세기를 돌아보며

이삼열박사(1941년, 평안북도 철산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대학원졸, 철학석사, 독일 괴팅겐대학교 정치학 전공, 사회과학 박사, 크리스챤아카데미 간사(1967-1968) 보쿰 사회선교부 한인노동자 상담소장(1977-1979) 유럽 산업선교협회 총무(1979-1982) 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1982-2005), 기독교사회연구소장,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 실행위원(1998-2005) 유네스코아태국제이해교육원 원장(2000-2004)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무총장(2004-2008) 한국철학회장(2007-2008) 에코피스아시아 이사장(2009-2012) 한국기독교사회발전협회 이사장(2011-2020) 유네스코아태무형유산센터 사무총장(2012-2015) 동아시아평화를위한역사NGO포럼 상임대표(2012-2016)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2017-현)

   
 

이 원고는 지난 2월 16일-20일 한국에서 열린 한독교회협의회 10차 모임에서 한 강연내용이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사역하시고 이 모임 초기 부터 참여하신 유일한 인사로 귀한 모임의 증인들이 모두 세상을 뜨신 가운데 귀한 역사적 자료를 남겨주신 것이 너무 귀하다. 독일교회를 통하여 공부하고 사역한 한국기독교지도자들에게도 꼭 기억해야 할 내용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공개한다. 이박사 부친은 이성찬목사(장성중앙교회, 풍기 성내교회,하동교회)이고 모친 김세옥권사의 조부는 김영준 장로는 영락교회 설립에 기여한 김성준 장로의 부친 김영례 성도의 막내 동생이다. 김성준 장로 손자 김두형 장로는 영락교회 시무장로로 3대가 장로집이다.  특히 외증조부 장관선목사(평양신학교 2회)는 평북 철산읍교회 출신으로 이후 목회자가 된 독립군들의 산실 신흥무관학교를 돕는 다. 이 박사는 서울사대부고 시절 미국장로교회가 아시아의 청년들을 초청한 캐러번캠프에 참가한 이래 에큐메니칼신학과 운동을 눈 뜬 1세대다. 부인 손덕수교수(효성여대)도 보툼대학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우리사회에 소개한 분이다. 작고한 이단열교수는 서울음대, 독일 유학을 마치고 성신여대교수를 지냈다. 막내 이승열목사도 독일 괴팅엔과 하이델베르크에서 디아코니아 박사가 된 후 숭실대, 장신대 겸임교수를 지내고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를 지냈다.    

   
 

한독교회협의회 1차 회의가 1974년 6월 24-28일 독일 Düsseldorf에서 모였을 때 독일 교회 동아시아 위원회(Ostasien Kommission) 상임고문(Ständige Berater) 자격으로 참석해 전 과정 통역을 맡았던 내가 49년 뒤인(2023년) 오늘 서울에서 모인 10차 회의에서 회고담을 나누게 되니 깊은 감회를 금치 못한다.
76년 수원에서 모인 2차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78년 다시 Düsseldorf에서 모인 3차 회의와 81년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모인 4차 회의에는 역시 독일 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해 박종화 목사와 통역을 나누어 맡게 되었다.

1982년에 귀국해 숭실대 교수로 있으면서도 독일 교회 선교부와의 인연 때문에 개신교개발원조처(EZE)나 에큐메니칼 장학회(ÖSW), 사회봉사국(DW), 크리스챤아카데미(Evangelische Akademie)일로 한독교회 관계의 일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독일의 통일 직후, 93년 5월 2-7일 Berlin-Bad Saarow)에서 열린 7차 한독교회 협의회에는 KNCC 대표로 참석하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한독교회관계 역사나 협력사업들을 살펴보자면 내가 보관한 문서철이나 기억에 남는 일만 해도 엄청난 양이며,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까지 조사해 열거한다면 수백 쪽의 책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독일 교회가 미친 영향과 업적은 대단히 의미가 큰 것이기에 앞으로 체계적, 역사적 연구와 정리가 있어야할 것이다. 여기에 필자의 체험담이 참고가 되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기억되는 것을 서술해 보려고 한다.

Scharf 감독 방한과 한독교회 관계의 시작

한독교회관계의 공식적 출범은 1965년 10월 독일개신교연합(EKD)의 총회장 Scharf 감독이 외무국 총장 Wischmann, 봉사국 원로 Schlingensiepen 과함께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방문의 목적은 강원용 목사를 중심으로 추진된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독일개신교 아카데미 (Evangelische Akademie)의 지원을 받게 되므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아카데미운동과 한국교회의 사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1965년에 창립된 한국 크리스챤아카데미는 독일개신교 개발원조처(EZE)에서 일백만 불의 원조를 받아 수유리에 아카데미하우스를 67년에 완공했고, 교회갱신과 사회발전을 목표로 사회 여러 분야의 대화(Tagung)와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한국교회협의회(KNCC)는 독일 교회와의 친선과 에큐메니칼 선교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7년 초에 한독위원회(Deutschland Kommission)를 조직하고 교단별 1인씩 대표들로 위원회를 구성한 뒤 강원용 목사를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독일 교회 세계선교협의회(EAGWM)는 1967년 7월에 동아시아 위원회를 조직하고 지역선교단체 대표들과 외무국 대표 등으로 구성해서 KNCC 한독위원회의 파트너로 연락과 사무처리를 하도록 결정했다. 초기엔 한국 교회를 대표해 제네바 WCC에 직원으로 근무하는 박상증 씨가 참여했고 73년부터는 KNCC가 파송한 장성환 목사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당시 괴팅겐 대학 유학생이던 나는 한독교회협의회가 시작된 74년부터 상임고문의 자격으로 3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동아시아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동아시아위원회의 사무장 책임을 맡은 Hamburg의 Gerhard Fritz 목사는 위원회 회의록을 살펴본 결과 68년부터 71년까지는 한국 교회들이 신청한 원조사업을 주로 논의했고, 72년부터는 독일에 파견된 한국 간호원과 광부들의 사회적 문제, 재독한인교회와 목회자들의 문제가 더 많이 논의되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여러 교회와 기독교기관들이 동아시아위원회로 개발원조사업 신청서를 보내며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동아시아 위원회는 한국과의 선교 협력을 담당할 뿐 원조사업을 담당하지 않았지만 선교적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에 대하여 추천하거나 의견서를 만들어 원조기관(Doner Agency)에 보내는 일을 했다.

1963년부터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이 수천 명씩 독일에 오면서 70년대 초에는 재독 한인들이 1만여 명에 달했다. 루르(Ruhr)광산지역과 전국의 병원에 산재한 파독 광부, 간호원들 중 기독교 신자들이 독일 교회당을 빌려 예배하며 수백 명, 수십 명이 모이는 한인교회들이 여러 곳에 형성되게 되었다. 자연히 독일에서 유학중인 목사나 신학생들이 설교를 했지만, 전담 목회자가 아니므로 임시적 목회를 했고, 들쑥날쑥 교회는 안정되지 못했다.

전담 목회자를 요청하는 한인교회들의 청원을 받은 독일교회 동아시아 위원회는 한국교회협의회에 재독한인교회 목회를 책임질 목사 한분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다. KNCC 한독위원회는 복음교회 장성환 목사를 선택해 72년에 독일로 파송했다.

장성환 목사는 73년부터 광부, 간호원 3-4천 명이 일하는 루르지방의 여러 교회들을 맡아 Duisburg에 거주하며 Nord-Rhein-Westfalen 주교회에 소속된 한인 교회들 대여섯 곳의 목회를 전담했다. 다른 지역의 한인교회들은 이때 개별적으로 교섭하여 Hamburg에는 이재형 목사를, Berlin에는 정하은 박사를, Frankfurt에는 이화선 목사를 임명했고, Stuttgart에는 75년경에 KNCC의 추천을 받아 김종열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

주별로 독립된 독일 교회가 한인교회들을 어떻게 지원하고 목회자를 임명해야할지 일치된 법칙이나 규범이 없어서 한동안 혼란스러웠고 재독한인교회들을 연합해 조정하는(Coordinate) 문제가 복잡했는데, EKD동아시아위원회는 한독위원회(KNCC)와 여러 차레 협의를 해서 합의문을 만들었고 한독교회협의회 때마다 논의하고 개선했다.

파독 근로자 문제와 한독교회 1차 협의회

한국정부는 외화획득을 위해 노동력을 독일로 수출했지만 한국광부, 간호원들의 체류조건과 노동 상황은 독일노동자나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들과 비교해서 매우 열악하고 불리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불리한 조건과 곤경을 독일 교회에 호소해서 개선해보기 위해 장성환 목사는 유학생이던 이삼열 과함께 간호원 광부들의 문제를 조사해 상황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동아시아위원회에 제출했다.

간호원들은 정규노동자가 아닌 저임금 연수생으로 3년간 일하고 돌아가면 다른 간호원들이 와서 로테이션 하는 방식으로 계약되었고, 언어와 음식 생활적응이 안되고 의사소통이 어려워 문제가 많았고 자살자도 여러 명 나왔다.

한국에서 광산 일을 하지 않던 광부들은 지하 1,000m 아래 지열이 높은 땅굴 속에서 무거운 착암기를 들고 석탄을 캐다가 사고 나서 부상 당하기도하고, 연탄가루 먹고 병에 걸리기도 하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한 방에 2-4명이 합숙하며 20여명이 한 부엌을 같이 쓰는 불편한 거주환경이었다. 병가가 많아 해고되면 즉시 추방되어 독일 노동자가 누리는 인권이나 노동자 권리는 전혀 누릴 수가 없는 차별 대우였다. 한국대사관이 임명한 통역이 백여 명이 거주하는 기숙사에 한 명씩 있었으나 광부들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못되고 감시자 역할만 했다.

이러한 문제를 쓴 보고서를 받고나서 독일 교회 동아시아위원회는 재독한인교회문제와 함께 파독 노동자들의 어려운 사회적 문제들을 토의하기위해 한독교회협의회를 개최하자고 KNCC에 제안하였다. 이렇게 첫 한독교회협의회가 1974년 6월 24-28일에 Düsseldorf에서 열리게 되었다. 한국대표로는 김관석 KNCC 총무, 강원용 한독위원장, 김윤식, 김해득, 김창희, 노정현, 이문영 등 6인이 왔고, 독일대표로는 Florin 세계선교부 총무, Miksch 외무국 외국인 담당, Poser EZE 총무, Schober 사회봉사국 총재, 선교부 실무자등 10여명이 참석했다.

회의에 앞서 양국 대표단은 세 팀으로 나누어 6월 25일 하루 종일 1) 간호원들의 병원 근무, 2) 광부들의 지하땅굴 노동현장, 3) Hamburg의 조선공 노동자들의 일터를 탐방하고 노동자들과 대화하며 문제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필자와 함께 광산의 좁은 땅굴 속으로 들어가 허리를 굽히고 숨을 헐떡거리며 뛰면서 현장을 목격한 노정현 교수는 죽을번 한 지옥 체험을 했다고 토론시간에 보고했다.

다음날 26일 사회봉사국(Diakonisches Werk)에서 근무하는 한국간호원 상담자들과 Schober 총재가 동석해 간호원들의 근무조건과 생활환경, 심리적, 인간적 문제 개선을 위한 토론이 있은 뒤 독일 병원협회에다 건의할 내용들을 정리했다.

1) 독일에 오기 전에 몇 개월 독일어 교육을 실시할 것
2) 근무조건과 보수, 보험, 체류연장 문제를 사전에 알리고 계약할 것
3) 결혼한 근로자들의 가족을 동반할 수 있도록 개선할 것
4) 기숙사나 거주시설은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충분한 공간과 시설을 갖추게 할 것
5) 독일 사회와 문화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독일어 교육과정, 여가선용프로그램, 체육건 강시설을 확보할 것 등이었다.

27일은 종일 독일 교회의 외국인 정책과 외국인 교회 지원 대책을 외무국 담당관으로부터 듣고 한인 교회와 목회자 파송 문제를 협의했다. 독일 내 다섯 지역의 한인교회 목회자들도 이날 초대되어 현황과 문제들을 보고했으며 한독교회 대표들과 장시간 토론했다.

KNCC에 속하지 않은 보수 교단들의 선교사들이 와서 에큐메니칼 한인교회를 분열시키는 문제, 독재정권과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설교를 한 장성환 목사를 대사관이 빨갱이로 몰아 고립시키려는 작태를 보이는 일, 광산 통역들이 광부들에게 장목사의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협박하고 압력을 행사한 일 등 문제들이 제기 되었으며 독일 교회가 한인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지키도록 보호해줄 것 등을 요청했다.

재독한인노동자문제와 한인교회 문제는 1976년 수원에서 2차 협의회가 열렸을 때나, 1978년 Düsseldorf에서 3차 협의회가 열렸을 때도 주요 의제로 계속 논의되었고 여러 가지 개선책이 제기되었고 독일정부와 고용주 기업체에도 건의문을 전달했다. 그 결과로 3년 임기를 마친 후 계약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고, 기숙사 시설의 개선이나 근무조건 등 개선이 이루어졌다. 루르지방의 광부들의 노동, 사회문제를 돕기 위해 Bochum시 사회선교부에다 <한국노동자 사회상담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최초의 한독교회협의회는 재독한인들의 교회와 사회문제를 협의하고 해결하기 위해 열리게 되었지만 2년마다 한번 씩 오가며 모이기로 한 협의회가 2차, 3차로 계속되면서 독일 교회는 한국교회와 사회문제에 점차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양국 교회 지도자들의 상호 이해와 협력의 정신은 차츰 강화되었다.

인권과 사회선교를 위한 협력과 연대

76년 3월 3-10일 수원에서 열린 2차 협의회는 한국 교회의 역사와 신학적 문제, 교파분열의 과정, 그리고 사회정치적 문제를 심도 있게 토의했으며, 독일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국교회와 정치 사회 현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깊은 인상과 관심을 일으켜주었다.

특히 한국 측 참가 예정자였던 안병무 박사, 이태영 여사가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구국기도회에 참석한 죄로 구속되어 참석치 못함으로, 독일 대표단은 박 대통령에게 석방 탄원서를 보내고 공보부 장관을 방문 신앙의 자유와 인권문제 개선을 촉구했다. 유신 독재 체제 하에서 인권과 사회정의를 와치다 구속된 목회자들과 고난을 무릅쓰고 순교적 정신으로 투쟁하는 기독학생들, 산업선교 실무자들을 현장에서 보게 되면서, 독일 교회 대표들은 형제교회의 수난과 그리스도인들의 용감한 저항에 깊은 관심과 공감을 갖게 되었다.

발표된 결의문 속에는 다음과 같이 깊은 형제애와 연대감이 표현되어 있다.
“한독 양 교회는 선교적 과제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넓히고, 선교협력과 형제적 우애(bruederliche Freundschaft)를 강화하기 위해 교역자와 실무자 청년 학생들의 상호 방문 교류를 증진하고 경험과 배움을 서로 나누어야한다. 협의회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한국과 독일 양 교회는 서로 우정과 연대 속에 매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이런 만남이 계속되어 한독 양 교회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주님이 이끄시는 공동체 의식(Gemeinschaft)을 강화하게 되길 희망한다.“

특히 나치독재 하에서 수난을 당하면서 저항했던 고백교회의 전통을 이은 독일 교회는 같은 탄압과 수난을 당하는 한국 교회를 보며 모른 체할 수 없었고, 또 한국교회 대표들은 독재와 분단이라는 같은 역사를 체험한 독일교회를 향해 정신적, 물질적 지원과 협력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국의 인권문제와 사회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독일 서남독선교부(EMS)는 72년부터 안병무 박사 등을 초청해 한독 신학자와 교회지도자들의 연구모임(Klausur Tagung)을 개최하여 본회퍼나 니묄러 등 고백교회의 신학과 전통을 주제로 신학적 토론의 장을 베풀었다. 

73년 11월 2차 연구모임에서는 40여명의 한독교회 관계자들이 참석해 반독재 민주화에 나선 박형규 목사 등 기독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저항하는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하겠다는 성명서(Beilstein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서남독선교부(EMS)는 한국 교회의 인권운동과 사회선교를 돕는 구체적 사업들은 앞장서 추진했다. 1차 한독교회 협의회를 마친 직후 7월 1-3일 Stuttgart에서 EMS와 한국기독교장로회(PROK)의 교류 협력 사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협의회를 개최했다. 

이 협의회에서 기독교장로회 이영민 총무와 김관석 목사, 안병무 박사 등은 구체적인 선교협력 사업들을 제안했으며 서남독 선교부와 기독교장로회는 앞으로 산업선교와 선교교육사업 등의 과제를 함께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보다 구체적인 협의는 76년 6-9일 서울에서 열린 서남독선교부(EMS)와 베를린선교부(BMW)와 기독교장로회 사이에 열린 2차 협의회에서 이루어졌다.

수원에서 열린 2차 한독교회협의회 직후 모인 후속 모임이었다. 합의문(Agreement)에는 한국 목회자나 선교실무자들을 독일 교회의 선교 동역자( co-worker)로 오게 하여 언어훈련 뒤 수년간 근무하게 하는 계획이 들어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기장의 많은 목회자, 선교 실무자, 신학생 들이 독일에 와서 배우며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이밖에도 선교교육원, 신학연구소가 독일 교회의 지원으로 설립되고 운영 되었다.

분단극복과 평화를 위한 한독교회의 사명

78년 11월 20-23일 Düsseldorf-Kaiserswerth에서 다시 모인 3차 한독교회협의회는 심층적인 신학적 토론과 교회사적 성찰을 통해 한독교회간의 친교와 연대의식을 더욱 긴밀하게 발전시켰다. <한국과 독일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며>(Confessing Christ in Korea and Germany)라는 주제로 모인 협의회에는 양국교회의 거물들이 참석했고, 깊이 있는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독일 측에선 Scharf 감독회장, Held 외무총장, Schober 봉사국 총재, Lehmann-Habeck 선교국 총장, Schlingensiepen 카이저스베르트 사회봉사회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지역 교회와 선교부 대표자들이 27명 참석했고, 한국 측(KNCC)에선 김관석, 강원용, 이천환, 강신명, 정진경, 김해득, 조덕현, 성갑식, 김형태, 안병무, 노정현, 강문규, 김준영, 표용은, 오충일 등 거물급 교계 지도자들 15명이 참석했다. 이번 3차 한독교회협의회에는 미국, 영국, 일본,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CCA에서도 교계지도자들이 여러명 Observer로 참석해 에큐메니칼 협의체의 분위기를 형성했다.

Held 박사와 강원용 박사가 각기 독일과 한국의 분단 상황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해야 할 신앙고백과 실천과제를 발표했고, 장시간의 토론을 거쳐 아래와 같은 요지의 결의문을 만들었다. “분단과 독재의 경험을 공유하는 양국교회가 그리스도의 이웃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전통과 정치 문화적 차이를 보다 깊이 이해하면서 인권과 사회정의, 분단극복과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공동의 연구와 노력을 함께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상호 유대와 협력을 강화해야한다”

한국대표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 방법의 남북통일을 희망한 반면, 독일 대표들은 동서독의 평화적 분단체제를 유지해야하며, 일방적 통일은 동서 유럽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에 유럽의 평화를 위해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적대적 분단의 극복과 평화공존이라는 목표는 독일과 한국에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양국교회는 상호경험과 지혜를 교환하고,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그후 3년 뒤, 1981년 6월 8-10일 4차 한독교회협의회가 <분단국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주제로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렸을 때 그 뜻은 더욱 구체적으로, 실천적으로 논의 되었다. 79년 10월에 유신독재가 붕괴되고, 80년 5월에 광주 민중학살과 함께 5공화국 군부 독재가 다시 등장하면서, 북한과의 평화통일에 대한 요구가 교회와 시민사회 속에서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독교회 4차 협의회는 한국교회의 평화통일 운동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중대한 결정을 내 놓았다. 공동결의문 4항에는 이렇게 명시했다. “분단된 우리 국가의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교회의 과제이다. 한국과 독일 양국의 분단은 서로 상이한 역사적인 배경과 세력에 의해 생기게 되었으나 양국의 교회는 자유와 정의와 평화 가운데서 통일을 성취하려는 민족의 의지와 포부를 기독교적 사명과 책임감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제 5항에서는 “우리는 한국교회협의회가 통일 문제를 연구하며 추진하는 위원회나 연구소를 설치할 것을 권장하며, 독일 교회가 재독한인들의 평화통일 논의를 지원하도록 요청 한다”고 했다. 이 결의문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평화통일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계기와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국교회협의회는 이 결의에 따라 82년 2월에 통일문제 연구원을 설치하였고, 오재식 원장과 운영위원, 전문위원들을 임명함으로 교회의 평화통일 연구와 실천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 84년 WCC와 함께 추진한 도산소 동북아평화회의, 86년 글리온 남북교회 지도자회의, 88년 한국기독교평화통일 선언 등, 교회가 민간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는 놀라운 업적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한독교회협의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고 생각된다.

놀랍게도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과 동구 공산권이 해체 되면서 독일은 기적적인 통일을 평화적으로 성취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독일의 통일을 부러워하며 독일에서 지혜를 베워야 하게 되었다. 동서독 통일의 과정과 문제, 화해를 위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정확히 알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한독교회협의회를 다시 열자고 요청했다.

독일 교회는 이러한 요청에 부응해 1993년 5월 2-7일, 동독 땅 Berlin-Bad Sarrow에서 7차 한독교회협의회를 열어주었다. 통일 직후에 생긴 혼란과 불평등, 여러 가지 문제와 후유증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한국 교회와 통일운동 지도자들에게 제공해준 것이다. 급작스런 흡수통일 직후에 붕괴된 동독(DDR)의 주민들이 당한 경제적, 심리적 고통과 인도적 문제들을 직접 들어볼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독일과 같은 급작스런 흡수통일은 기대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겠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토론을 했다. 통일 후 동독인들의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고 정의와 인권, 화해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의 사명과 책임이 막중함을 성찰하며 공감했다.

한독교회 협력의 분야와 특징

한독교회 협력의 역사를 필자가 관여했던 1-4차와 7차 한독교회협의회의 자료와 기억에 의거해 스케치 해보았지만, 반세기에 걸친 다양한 사건과 엄청난 일들을 다 조망하기엔 너무나 부족하고 제한된 관찰이었다. 앞으로 체계적이며 학술적인 조사연구를 통해 전모가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초창기의 경험과 전문을 근거로 서론에 불과한 한 부분을 약술했을 뿐이다.

한독교회의 교류와 협력의 역사를 제대로 조망하자면 협의회의 기록뿐 아니라 교단별 협력사업과 인적교류, 기관별 재정지원과 개발원조, 에큐메니칼 회의와 장학사업을 모두 파악하며 서술해야하지만 이를 위해선 자료조사와 관계자들의 면담 등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교단별 협력사업으로는 기독교장로회와 독일서남독선교부가 74년부터 추진한 수많은 교류와 협력사업들이 파악되어야 할 것이고, 예수교장로회가 독일 팔즈 주교회와 84년부터 맺고 시작한 교류 협력사업들이 전부 종합되어야 할 것이다. 기장과의 협력은 EMS의 동아시아 책임자 Schneiss 목사가, 예장과의 협력은 Pfalz 주 선교부책임자 Fritz 목사가 주도하고 열정적으로 오랫동안 많은 일들을 하였는데 최근에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셔서 인터뷰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남긴 편지와 회의록들을 조사연구 해야 할 것이다.

예수교장로회가 독일 교회와 선교협력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경으로 기장보다 10여년 늦었지만 팔즈 주교회와 밀접하고 충실한 교류협력관계를 유지 발전시켰다. 85년에 박창빈 목사를 에큐메니칼 선교동역자(Oekumenische Mitarbeiter des pfalzischen Landeskirche)로 팔즈 주교회가 초청해 3년간 활동하게 했고, 그 후 여러 예장의 목회자를 선교동역자로 초청했다. 팔즈 주교회 선교방문단이 여러차례 한국을 방문해 한국 교회와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친교를 맺어오다가 2000년부터는 팔즈주 교회가 아프리카 가나교회와 함께하고 있는 선교사업에 예장 영등포 노회(Synod)를 참여시켜 가나의 빈곤 지역에 컴퓨터 기술학교를 세워 운영하는 선교사업을 한국과 독일, 가나 3개국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국 교회가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제 독일 교회와 함께 아프리카 선교를 공동으로 하게 된 것은 교회사나 선교사적으로도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 모델을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독일개신교개발원조처(EZE)가 한국 교회와 사회 여러 기관에 재정지원과 협력사업을 수행한 업적과 성과는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어야 항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연세대, 이화여대, 계명대 등 기독교 대학들, YMCA, YWCA를 비롯한 교회와 사회기관들에게 발전사업으로 30여년간 지원한 원조 액수를 합한다면 필자의 짐작으로도 수천만 불이 넘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90년대 까지 EZE가 개발원조로 한국에 지원한 발전사업들의 성과와 업적은 보다 체계적으로 조사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독교회의 중요한 협력사업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업은 독일 교회의 장학사업이다. 필자 자신이 그 혜택을 본 사람 중 하나이지만 많은 한국의 신학자, 목회자, 평신도들이 독일 교회의 장학금으로 수년간 독일 유학을 했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해 교회와 사회, 대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독일 교회 사회봉사국(DW)이 60년대부터 한국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연수를 위해 지급한 신학쟁 장학금(Theologen Programm)은 한국에 수십명의 신학교수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독일 교회는 70년대부터 후진국의 사회발전 지도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에큐메니칼 장학금(Oekumenisches Studienwerk) 제도를 운영했는데 한국에서 50여명의 인재들이 이 장학금으로 유학한 뒤 돌아와 대학교수, 장차관, 시민사회지도자가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한독교회 협력의 역사를 일일이 다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대략 살펴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미국이나 영국, 호주 교회와는 달리 독일 교회는 한국에 자기 교파(Denomination)를 세우거나 교단의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고, 교회건물을 짓거나 교회성장을 위한 협력사업을 하지 않았다. 50년 전에 시작된 독일 교회와의 선교협력은 150년 전에 시작된 미국, 영국, 호주 교회의 선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선교관계였다.

2. 독일 교회의 선교협력은 초기부터 크리스챤아카데미, 도시산업선교, 사회봉사훈련과 같이 교회가 사회발전과 개혁에 봉사하는 사회선교적 사업과 활동에 집중되었다. 특히 1970-80년대 군부독재시절 구속된 목회자와 학생들, 해직된 교수와 지식인들을 돕는 교회협(KNCC)의 인권운동사업을 적극지원해서 민주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교회성장보다는 사회벌전에 참여하는 기독학생, 청년, 여성과 빈민지역의 민중 선교, 여성선교를 도왔다.

3. 나치독재와 동서독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적 경험을 가진 독일 교회는 군부독재와 남북한 분단의 고통 속에서 저항하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관심과 연대의식을 보였고, 또한 Luther나 Barth 등 독일 신학에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독일 고백교회의 저항이나 동서독의 평화공존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므로 한독교회의 교류협력은 깊은 공감대와 정신적 유대 속에서 신속히 발전할 수 있었다.

4. 앞으로도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을 절실하게 추구해야하는 한국 교회는 민주적 사회발전과 평화적 통일을 모범적으로 달성한 독일의 역사와 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실천해야 하기 때문에, 독일 교회와의 교류협력관계는 폭넓게 강화 되어야 하며, 신학적 대화나 정책적 협의의 수준과 질은 높이 향상되어야 한다.

   
                                                          * 이삼열 박사와 이승열 목사 
   
                                              * 언론에 소개된 철산교회 기사와 장관선목사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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