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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위그노의 신앙에서 배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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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6.02  1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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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위그노의 신앙에서 배울 점

위그노란 프랑스에서 16세기부터 400년 넘게 왕정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받은 개신굗들을 지칭한다. 카토릭이 대세였던 시대에 개혁교회의 원류인 이른바 칼뱅주의를 추종했던 그들이 숱한 박해에도 믿음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교회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분들이나 프랑스에서 직접 선교사로 목회를 하는 분들이 주는 교훈을 돌아보자

공통적으로 위그노들에게 배워야 할 교훈으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재산 몰수, 고문, 학살속에서도 지녔던 정신은 저항이라기보다 고난의 수용 이라 볼 수 있다. 위그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숨을 바칠 정도로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경건과 지식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따랐다.

주일예배를 지키기 위해 주중에 맡은 일은 모두 끝냈다.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의식을 가지면서 근면한 삶을 살았다. 1517년 독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의 프랑스어 신약성경(1524), 위그노의 중요한 신앙적 토대가 된 장 칼뱅의 시편 찬송(1539) 등이 출간됐다.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창조한 존재이며 직업은 소명이란 것을 알게 됐다.

각성한 그들은 신앙에 불이 붙었다. 왕과 가톨릭 사제를 위해 존재하는 일꾼이자 노예로만 알았던 백성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위그노운동은 지도자 몇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민중의 자각으로 이뤄진 평신도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깊다.조 교수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위그노의 믿음을 본받아, 한국교회도 소수의 지도자에 의한 수동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개교회 위주의 한국교회에 통일된 예배 모범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앙리 2세 치하였던 1559년, 위그노 파리 총회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는 믿음 생활에 관한 전반적인 지침이었다. 공통된 예배 모범이 있으니 핍박의 시대에도 신앙을 지켜나갈 힘이 됐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부흥의 퇴조에서 역사에서 배울 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온 교회와 신도들의 경험을 배울 것을 주져하지 말아야 한다. 

위그노’(Huguenots)라는 어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 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uenots)가 되었다. 이것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한 프라이부르크와 베른의 동맹에서 유래 되었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캘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가르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위그노라는 말이 프랑스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60년부터이다.프랑스 개신교 위그노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프랑스인들의 정신속에 흐르는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광야교회시대’, ‘위그노’, ‘위그노 십자가’, ‘레지스터’(저항하라), ‘톨레랑스’, 망치와 모루, '디아스포라 위그노' , '카미자르 정신'이다.   

이들의 후예들을 보면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포함한 8명의 미국의 대통령들도 언급된다. 그들의 피에는 모두 위그노의 신앙과 정신의 혈통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WCC의 초기 본부와 사무소의 사역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을 지원하는 일이라는 증언도 있다.  

   
 

위그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16세기 후반 발루아-앙굴렘 왕조 프랑스 왕국에서 37년에 걸쳐 진행된 대대적인 종교 내전으로, 프랑스 종교전쟁(guerres de religion/French Wars of Religion)이라고도 불린다. 가톨릭과 개신교(칼뱅파 위그노)의 갈등이 극에 달해 나라 전체가 뒤집혔던 사건이었다. 프랑스 뿐 아니라 유럽 각국이 얽혀들어갔던 이 사건은 백년전쟁 시기 이후 프랑스의 중흥을 이끈 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이를 대체해 훗날 절대왕정을 수립하게 되는 부르봉 왕조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위그노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교도에 대한 멸칭이다. 

위그노 전쟁(1562년 - 1598년)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으로,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세력이 프랑스내 개신교도(위그노)들에게 자행한 학살인 '바시' 학살로 인해 시작되었고, 위그노의 수장이었던 앙리 4세가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국왕에 즉위한후, 1598년에 낭트 칙령을 발표함으로 신구 기독교 간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상공업 계층이 많았다. 이는  직업소명설 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가  프랑스 상공업자들에게는 '복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그노 전쟁은 종교의 자유가 명분이지만, 보통 초기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옛날체제(앙시앵 레짐)에 반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귀족 등의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면서 사회 체제를 경직시키고 있었고, 이러한 보수적인 신분 사회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심각한 제약이었다. 무역으로 성장한 네덜란드도 유사한 경우이며, 독일 북부의 영주들이 신흥 세력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원한 것도 기득권 세력과의 마찰 때문 이었다. 

38년간 감옥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마리 뒤랑이야기 - YouTube

칼빈주의의 성장
프랑수아 1세는 해를 거듭할수록 퍼져가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신중함을 보였다.개신교는 마르틴 루터의 가르침인 루터주의의 형태로 프랑수아 1세 (1515-47) 때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프랑수아는 원래 이단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가톨릭교리와 정통 신앙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이단인지를 규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루터의 글은 파리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루터의 주장보다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희망했다. 1535년 1월에 프랑스의 모든 "루터교도"들은  '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을 따르게 되었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16세기에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음에도 계속 확산되었으며 귀족들 가운데서도 지지자가 생겨났다.1562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598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 위그노의 주요인물이 거의 목숨을 잃었으며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선포하여 위그노의 종교적·정치적 자유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탄압으로 25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영국·프로이센·네덜란드, 아메리카로 피난길에 올랐다. 1787년 칙령을 통해 위그노의 공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민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명확히 인정했으며 프로테스탄트에게 모든 관직과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6세기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동안에 성장했으며 여러 해 동안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다.위그노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16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킬 때 분명히 쓰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마르틴 루터의 저작물들이 유럽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프랑스에서도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시작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최초의 순교자가 1523년 화형에 처해졌다.

1534년 10월 가톨릭 미사의식을 맹렬히 공격하는 플래카드가 거리와 왕궁에서 발견되자 가톨릭 세력은 큰 충격과 함께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장 칼뱅을 포함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피신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곧 귀족들 가운데서도 지지자가 생겨났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도 계속되었으며 1명씩 처형되던 관행이 대량학살로 비화했다. 앙리 2세 치하에서는 대개의 감옥이 위그노들로 가득 찼다.

1559년 흩어졌던 위그노들이 파리에서 모임을 갖고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이들은 칼뱅의 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루터파 교회가 아니라 칼뱅파에 속하게 되었다. 1562년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시작되었으며 1598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위그노 전쟁). 이 시기에 일어났던 유명한 사건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1572년 8월 23일 파리에서 불이 붙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위그노의 주요인물 거의 모두가 파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도 수천 명이 학살당했다. 이 학살사건 이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1574년 샤를 9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앙리 3세 치세기에는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 전쟁의 연속이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된 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앙리 4세는 프로테스탄트였으나 1593년 7월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비로소 왕국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선포했으며 이로써 위그노에게 종교적·정치적 자유가 인정되었다.

102년동안 박해받은 개신교들? 위그노- YouTube

앙리 4세(Henri IV)

그러나 1620년대 루이 13세 치하에서 내란이 다시 벌어졌다. 결국 위그노가 패배했으며 1629년 6월 28일 알레스 평화조약을 통해 위그노는 종교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모든 군사적 우위를 상실했다. 더이상 정치적 실체로 존재할 수 없게 된 위그노는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

낭트 칙령으로 유지되었던 모든 권리들은 1643년 어린왕  루이 14세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으로 효력을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위그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위그노의 권리를 박탈하고자 노력했다. 여러 해 동안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으며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강제로 개종해야 했다. 마침내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의 철회를 선언했으며 그결과 여러 해에 걸쳐 프랑스에서는 25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영국·프로이센·네덜란드 또는 신대륙 아메리카로 피난길에 올랐다.

18세기 전반에는 위그노가 완전히 사라진 듯이 보였다. 루이 14세는 1715년 프랑스에서는 이제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종교의식이 종식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같은 해 님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재건을 위한 프로테스탄트 회의가 개최되었다. 비록 그 수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745~54년에는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여론은 박해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7년에 한 칙령을 통해 위그노의 공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기간중 국민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명확히 인정했으며 프로테스탄트에게 모든 관직과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30년간 종교전쟁 (1562-1598)의 종말은 1598년 4월 낭트칙령으로 종식되지만 이전 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핍박을 받았고 순교했는지 모른다. 이 종교전쟁을 다른 말로는 위그노 전쟁 이라 한다. 개혁파(위그노)와 로마가톨릭과의 전쟁의 발단은 1572년 8월 24일 바르톨로뮤 날의 대학살로부터 시작된다. ‘여왕 마고’(사실은 마고는 여왕이 아니라 공주다)라는 영화도 나왔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결혼식날 밤에 죽임을 당한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루터가 이신칭의를 발견하기 전부터  위그노들은 자크 르페브르(1455-1536)등에 의해  이신칭의를 가르침 받고 있었으며 , 루터의 성경 번역 이전에  이미 프랑스 성경을 가지고 읽고 있었다 . 지금의 프랑스는 너무나 미약한 개혁파 신앙인이 있지만, 종교개혁 당시에는 최초로 종교개혁자로서 모오(Meaux)에서 화형당한 ‘장 르클레르’( -1525.07.29)를 비록해서 너무나 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피를 흘리며 바른 신앙을 지키려 했다.

프랑스도 종교개혁 후 대부분의 다른 나라가 그러했듯이 처음 시작은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 . 그러다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칼빈과 개혁파 신학의 영향을 받아 루터에게서 개혁파로 돌아선다 . 사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왈도파를 비롯해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그 나라 자체에 개혁신학이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 다만  로마가톨릭에 의해 그것이 핍박과 추방으로 프랑스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다 는 것이다.

허나  이들이 스위스는 물론이고 독일, 영국, 네덜란드,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로 이주해 그곳에서 신앙을 꽃피운다 . 사실 모오 지방의 감독이었던 기욤 브리소넷(1445-1514)을 비롯해 프랑소와 1세의 자문 위원이었던 루이 드 베르끼, 르페브르의 제자인 쟈크 파방, 르페브르의 또 다른 제자인 기욤 파렐에 이르기까지, 아니 칼빈에 이르기까지 위그노는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위그노에 대한 책자

사실 프랑스의 위그노 이야기는 개신교도들로써는 듣는 이 마다 영적인 흠모의 대상으로 그들의 역사와 자취에 대하여 알고 싶다는 것이 솔찍한 심정이다. 오늘 날 세계 선진국인 프랑스에 이런 아픈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그노의 신학이나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 그들의 신앙이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관한 것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위그노의 정신을 잇고 이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연구서는 찾기 어렵다. 이에 이에 ‘그리심’에서 나온 ‘프랑스 종교개혁사’(강남수 저)를 추천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 파리에 선한장로교회를 목회하는 우리교단 파송 성원용선교사가 최근 내논 위그노에 관한 책이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중요한 챕터를 직접 유투브로도 공개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위그노’(Huguenots)라는 이름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위그노가 종교개혁자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장로교가 지배적인 한국교회와 위그노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그노들이 주기철, 손양원 목사와 같은 끔찍한 박해를 겪었던 사람들이라면 그 거리는 더 좁혀진다.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교훈’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프랑스 파리선한장로교회 성원용 목사가 지난 25년간 현지에 살면서 추적한 위그노의 삶과 신앙을 다룬다. 책은 위그노가 누구이며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소개한다. 또 이를 통해 다양한 교훈을 뽑아내 오늘의 한국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한다.

위그노 역사는 바시학살(1562)과 위그노전쟁(1562~1598), 성바톨로매 대학살 사건(1572)을 겪으면서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들어가게 되고 이후 앙리 4세에 의한 낭트칙령(1598)으로 잠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1685년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면서 87년간의 자유를 마감하고 이후 102년간의 잔혹한 박해를 겪는다.

이 기간에 위그노들은 예배 처소가 파괴되거나 불탔고 외국으로 도피하지 못한 목사와 설교가들은 잡혀 죽거나 노예가 되어 평생 배 밑창에서 노를 젓다가 죽어갔다. 나머지 위그노들은 강제 개종을 당하거나 개종을 거부할 경우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파리 에펠탑이 세워진 곳이 순교한 위그노를 묻었던 곳이라는 설명은 충격적이다.

위그노의 상징적 인물인 마리 뒤랑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면서 38년간 감옥에서 살았다. 그녀는 프랑스 남부 콩스탕스 감옥 속에서 저항하라는 뜻의 ‘레지스테’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생활했다. 저항정신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속에 흐른다. 탈출한 이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지면서 산업혁명(영국)과 무역업(네덜란드), 정밀 시계산업(스위스) 등을 일으켰다. 조지 워싱턴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7명의 미국 대통령은 위그노의 후손이다.

위그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 중 망치와 모루처럼 그들의 삶과 신앙을 잘 나타내는 것도 없다. 망치와 모루 사이에 놓였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무리 망치로 두들기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성도의 인내를 담고 있다. 저자가 정리한 10가지 교훈은 코로나19로 약해진 예배의식과 신앙을 향해서도 날카로운 예언자적 외침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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