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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신학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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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11.08  20: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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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신학 

   
 

 

고신 제70회 총회(2020년)에 “반려동물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 정리”를 요청하는 상정안이 올라왔었다고 한다. 당시 충청서부노회장 오병욱 목사는 “오늘날 교회 내에도 반려동물 성도 수가 상당히 많다. 그로 인해 신앙 교육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간 교회 안에서의 반려동물에 관한 신앙 교육은 목회자 개인에게 있었지만 이제 늘어가는 반려동물 인구(성도)를 생각할 때 교회 안에서도 반려동물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과 문화로 인해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사이에 갈등이 예견된다. 자칫 교회의 영적 성장에도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상정 이유를 설명했다. 

2021년 9월에 열린 제71회 총회에도 “애완동물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 정리” 안건이 다시 올라왔다. 71회 총회 신학위원회는 “애완동물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 정리-직전 총회에서 기각된 건과 유사한 건으로 기각”이라고 결정했다. 최근에 일선 목회자가 본사로 전화를 했다. 애완 동물 때문에 교인들이 싸운다고 전했다. 교회 마당에서 떠돌이 애완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냐 마냐?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다고 한다. 애완동물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 아주 실제적인 문제인데 총회의 결정이 어떻게 되었냐는 문의였다.  

애완동물 이제는 인간이상의 대우를 받는 중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1년 기준 대한민국에서 애완동물을 양육하고 있는 인구는 약 1,448만 명이다. 가구 수로 환산하면 604만 가구이다. 대한민국 인구 10명 중 3명 꼴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애완동물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이는 원인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회가 급격히 원자화 됨에 따라 외로움의 경제가 폭발한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는 친구도 돈을 주고 사는 시대라고 하니 ‘외로움 경제’라는 용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은 이웃과 대면할 때라야 외로움이 해소된다. 타인의 얼굴에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대면의 욕망을 억압했다. 대신 인간의 얼굴을 동물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애완동물도 사람과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반려동물’로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하게 되었다. 애완동물의 가치가 얼마나 사람과 같은지, 우스갯 소리로 서구사회에서는 백인이 흑인을 적어도 자기의 애완견에게 하듯이 대하면 흑인 인권문제는 해결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백인 집의 개가 흑인보다 잘 산다는 오래 전 농담도 오늘날 부분적으로 유효하다. 소수자가 애완동물만큼만 살아도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는데 동물권은 더욱 신장되고 있으니 소수자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난감한 상황으로 다가와야 자연스럽다. 실제로 미국도 그렇고 대통령이 애완동물과 함께 하는 이들의 표를 받기 위하여 취임식이나 선거운동 과정에서 애완동물과 함께 하는 모습이 낮설지 않다.

한국의 현 윤석열 대통령은 자녀가 없는 데 부인 김건희여사와 애완 동물 토리등을 키우며 애정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함께 침대에서 숙소에서 집무실에서 개와 함께 하는 사진을 공개할 정도다. 이렇게 되면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친근감을 갖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동물이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세련된 일일까? 그것이 윤리적일까? 과거에는 동물을 신의 형상으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여전하다. 적잖은 한국인들에게는 돼지가 아직도 지복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하게 여겨진다. 고대 히브리인은 하나님을 송아지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동물과 인격적(?) 사랑을 나누는 동물성애자도 존재한다. 이처럼 동물의 내재적 가치가 인간처럼 높아질 때 그 종착지는 선명하다. 

문제는 하나님보다, 동역자보다 동물에게서 더 많은 위로를 느끼는 교인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목사님께 자기의 애완동물이 천국에 있는지 상담을 요청하는 사례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동물신학은 내가 키우는 그 동물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을 위한 축복식이나 세례를 주는 교회도 있다. 성경에 입각한 건강한 신학적 관점으로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동물신학의 이론적 구조 

현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잔혹함을 지적하는 것이 대개 인간의 의와 윤리 안에서만 다루어졌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비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였다. 칸트에게 동물에 대한 잔혹함은 오로지 인간에게 나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었다. 즉 동물에 대한 잔혹함은 다른 인간과 관련하여 윤리학에 매우 유용한 자연적 경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 비인간에 대한 의무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때는 1900년대 후반이다. 그 중심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있다. 싱어는 육식이 다른 종에 대한 억압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75년에 출간 된 그의 대표적인 저서 “동물해방”에 의하면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어지는 행동이 옳다는 공리주의의 원칙에 기반하여, 인간의 기본적인 이익, 가령 고통받지 않는 것에 대한 이익의 파괴가 비인간의 기본적 이익의 파괴와 다르다고 가정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힘입어 1978년 10월 15일에 파리 유네스코에서 “세계 동물권 선언문”이 공포되었다. 선언문의 핵심은 모든 동물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비인간 동물들도 생명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윤리적 판단에서 동물들의 내재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의무라는 칸트적 관점을 기반하지만 동물에게는 도덕적 의무가 적용되지 않고, 그러나 동물의 기본권을 고려하여 윤리적 판단해야 하는 의무가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공리주의적 관점이 합성된 기형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 동물권에 대한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동물신학의 중심에는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가 있다. 린지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복음과 관련시킨다. 그는 동물을 도구로 보는 전통적인 동물 윤리에 반대하며 동물권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를 요청한다. 린지의 주장은 기존의 “세계 동물권 선언”의 형태에서 복음만 얹은 형태이다. 즉 윤리적 측면 안에서만 다루어진다. 그러나 최근 이슈는 여기에서 신론과 구원론으로까지 확장되어 동물의 구원까지 논하고 있다. 여기에는 과정신학의 영향이 크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에 의해 발전된 과정신학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존재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는 세계를 위해 할 일이 없는 신이라는 관념을 부정하고 항상 이 세계의 창조에 관여하고 있는 신이라는 관념을 채택한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따라서 과정신학 안에서는 하나님이 시간과 관계들과 상관 없이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전통적인 신학적 사고가 성립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는 크지만 피조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 형체화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한다. 

과정신학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은 동등한 신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도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도 목적으로 한다. 과정신학과 접목된 동물신학은 하나님은 전적으로 인간에만 전념하신다는 것과 피조물은 단지 인간의 구원 시나리오의 배경에 불과하다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적 신관에 특히 저항하고자 한다. 

동물신학은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데 요 3:16에 등장하는 “세상”은 온 우주 만물을 뜻하기 때문에 이 만물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주장한다. 또한 창세기 1장에서 피조물을 만들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 노아의 언약에는 동물들도 포함되는 것(창 9:9-10), 니느웨 왕이 회개를 공포하며 짐승들에게도 굵은 베 옷을 입힐 것을 지시한 것(욘 3:8) 등도 동물신학의 근거로 포함시킨다. 

이화여자대학교 조직신학을 가르치며 교목실장이기도 한 장윤재 교수(미국장로교 안수)는 인간중심적인 “영혼 구원”이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와 관련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영지주의는 요일 4:3에서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른다고 덧붙이면서 전통적인 신관을 적그리스도의 영에 빗대어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이 정당한 성경적 비판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동물신학 검토의 필요성(장기용 원장 에스라 성서연구원)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역자보다 동물에게서 더 큰 위로를 얻는 현상, 동물과 인간의 권리를 거의 동등하게 주장하는 행위, 이런 모습 속에 동물신학적 관점이 부분적으로나마 내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물을 향한 사랑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이것이 심화되어 신학과 세계관으로 고양될 때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이번 기획기사를 통해 동물신학을 검토하는 이유이다. 

사람이 동물에게서 위로를 느끼는 대표적인 이유는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인간은 자본의 역학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물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천성 그대로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를 인간과 가장 비슷한 피조물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동물권 옹호론자들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 동물들을 학대하는 잔혹함을 촉발한다고 주장한다. 동물신학 또한 전통적 신학이 인간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동물을 학대한 기독교인들이라고 알려진 분파 중 하나로는 네덜란드의 "검은 스타킹 교회"(zwarte-kousenkerken, "black stockings churches")라고 불렸던 일부 보수파 교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철저한 정통주의로 자부하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이는 이원론적 생각에서 발생한 오류이다. 

성경이 이와 같은 동물학대를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명령,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피조물들을 무절제하게 처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피조물들이 질서를 유지하며 평화롭게 살도록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물들의 지배권을 부여하셨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물보다 명백한 존재론적 우월성을 갖는다. 

여기서 기독교윤리학적인 갈등이 발생한다. 동물을 사람이 아닌 동물로 대우하면서, 동물학대를 낳는 왜곡된 인간중심주의를 피하는 윤리적 대안은 무엇인가? 이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하지만 동물신학의 대표 권위자인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의 이론은 그 균형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동물신학을 간략히 검토함으로써 동물들을 대하는 성도들의 건전한 태도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다.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 / 동물과 기독교 문제에 관해 광범위하게 글을 써 거의 200편의 논문과 [기독교와 동물의 권리](Christianity and the Rights of Animals)및 [동물신학](Animal Theology) 등을 저술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강연했으며, '옥스포드 동물윤리센터'(Oxford Centre for Animal Ethics)를 설립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특별히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각이 있는(sentient) 피조물들의 권리와 복지와 관련된 창조 신학의 분야에서 독창적이고도 많은 개척자적 연구"를 수행한 공로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의 동물신학 개요 

정직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다음으로 인간에 대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동물신학자 린지도 동의하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지는 동물권에 대한 “성경의 긍정적인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한다면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동물에 대한 끊임없는 착취를 묵인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기존의 인간중심적인 동물윤리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 린지의 동물신학은 모두 여기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린지는 동물을 수단으로 여기는 전통적 윤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동물 또한 인간과 다름 없는 동일한 신적 권리를 갖는 피조물이다. 그래야 인간은 동물을 무절제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린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적인 동물 윤리, 즉 동물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여긴 아퀴나스의 생각에 내재한 소위 도구론적 이해를 반대한다. 

린지는 아퀴나스 때보다 오늘날 동물에 대한 지식들이 풍성해진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린지에 의하면 포유류는 최소한의 자의식을 갖고 있으며 최소한 합리성의 초기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또한 동물들도 공포와 스트레스, 근심, 두려움과 같은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들도 나오고 있다. 린지는 이러한 근거로 동물들도 최소한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동물도 "하나님이 주신 지각이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동물은 “같은 하나님의 동료 피조물”이다. 동물은 갓난 아기처럼 자의식을 주장할 수 없는 “작은 자”이므로 인간이 적극적으로 동물을 섬겨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과 상응한다. 이렇게 되면 동물에게도 도덕률이 - 적어도 고통에서만큼은 - 작용되기 때문에 신정론은 새로운 도전을 맞는다. 하지만 린지는 여기에 대해 구체적인 신학적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이처럼 린지가 인권과 동물권을 거의 동등하게 상정하는 데에는 진화론적 메커니즘이 작용되고 있다. 린지는 신학자들이 진화론적 생물학을 무시하는 행위를 강하게 비판한다.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동물은 하등의 근원적 차이가 없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을 당위성이 없다. 다시 말하면 동물들이 인간의 양식이 되어야 할 도덕적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연유로 린지는 육식을 거부한다. 그는 구약의 구절들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주셨지만 채식을 명령하셨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에게는 채식주의가 절대적인 해법은 아니더라도 상징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에서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다. 

한편, 그는 동물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복음과 관련하여 보고 있다. 그는 현대철학의 동물권 옹호는 성경적 통찰에 결정적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린지에 의하면 레 22:28, 신 22:1, 22절 등을 근거로 최소한 인간이 동물에 대해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 린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지 인간의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은 동물들에게도 해당된다. 물론 동물들은 도덕적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래서 동물의 구속은 인간의 구속과 다르다. 동물의 구속은 자연의 ‘잔인함’으로부터의 구속이다. 린지는 이러한 구원론을 롬 8:18-24에 근거하여 피력한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명확하게 “동물이 개별적으로 구원받는다”는 확신에 차 있다고 고백한다.

동물신학에 대한 성경적 비판 

린지의 동물신학은 현대사회가 요청한 신학적 담론을 상기시켰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동물신학은 인간의 호화로운 식문화 이면에 있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잔혹함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잠 12:10절 말씀을 진지하게 여길 필요도 일깨워준다. 특히 애완동물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지침이 필요한 때에 린지의 사유는 재고될 가치가 있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동물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적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헌이 무색하게 동물신학은 숱한 한계에 부딪힌다. 

① '하나님 형상'에 대한 이해 

린지가 동물신학의 근거로 제시한 대부분의 구약 구절들은 동물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구절들이 아니다. 다만 동물착취를 긍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린지도 이 점을 인정한다. 진영을 막론하고 동물착취에 긍정하는 기독교 분파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린지는 더 나아가서 동물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신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채식주의를 옹호하려고 시도한다. 다른 동물들에게도 신적 권리가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도 ‘혼’(네페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 다음 편에서 네페쉬에 대해 살펴보겠지만 - 인간만의 수혜인 “하나님 형상”을 깊게 이해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린지는 동물신학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반론하는 것을 놓고 마치 카드놀이의 ‘조커’처럼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조소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배권의 행사 및 창조세계의 평화 유지를 위한 것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개혁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크게 두 측면으로 이해하는데, 하나는 ‘구조적 측면'과 다른 하나는 '기능적 측면’이다. 전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에게만 부여된 속성으로써 도덕, 양심, 책임감, 예술, 이성, 종교적 경배의 능력 등을 의미한다. 반면 후자는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뜻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하고 하나님, 이웃, 창조세계와 바른 관계 가운데 사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구조적 측면은 본래 기능적 측면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면서 기능적 측면을 잃어버렸다. 반면 구조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에로의 접붙임이 없으면 창조세계를 경작할 능력이 없다. 린지의 야망을 실현하려면 복음이 더 강조되어도 부족함이 없을텐데, 린지의 주장에서는 복음을 동물에 대한 태도로 축소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아마 ‘인간중심적’인 신학에 반동적인 결과로 복음이 동물구원의 배경 정도로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② 성경해석에 대한 우선 순위 문제  

사실 이처럼 성경은 삼위 하나님을 제외하면 ‘인간중심’적이다. 성경이 중점으로 두는 것과 곁가지를 서로 전위시킨 것은 린지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과거에 애완견을 장사지낸 경험을 밝혔다. 그리고는 교회가 “반려동물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목회적 배려도 해주지 않는다”며 상심을 감추지 않았다. 

어느 신학자든 그의 신학에서 경험을 완전히 벗겨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린지의 경우 그의 개인적 경험이 성경해석의 가장 중요한 정초가 된 결과를 보여준다. 그는 동물에 대한 성경의 사소한 언급을 극대화시켜 성경이 통전적으로 증거하는 메시지를 동물구원의 배경으로 전락시킨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여전히 동물에 관해 말하는 것이 마치 인간을 제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나 되는 것처럼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것은 정작 그에게 필요한 조언이다. 린지는 전통적 신학이 마치 인간의 동물착취를 독려하는 것 마냥 되는 것처럼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린지가 성경을 인용하는 데 있어서 두드러진 해석학적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사실상 기독교 색채를 입힌 동물권 옹호론이다.  

③ 인간구원과 동물구원을 같은 선상으로 볼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인용한 것들 중에서 동물신학을 가장 견고히 지탱하는 구절은 롬 8:18-24절이다. 린지는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해방되는 것을 근거로 동물구원을 주장한다. 과연 이것이 지상의 동물들이 구속을 받고 그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인지 재고해야 한다. 여기서 ‘해방되어’로 번역된 ‘엘류데로오’는 ‘자유하게 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구원 받은 ‘상태’, 즉 죄와 저주로부터 더 이상 속박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고 심판을 면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언약을 내포하고 있다. 언약에는 반드시 율법이 존재한다. 율법을 어김으로써 행위언약을 파기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값없이 구원을 베푸셨다. 그리고 오직 그의 열심으로 모든 세상을 회복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동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전적타락으로 말미암은 저주이다. 동물에는 어떠한 율법도 작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언약을 통해 주어진 구원이 동물구원과 동일할 수 없다. 단지 성경은 모든 피조물이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을 증언할 뿐, 그 이상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존 칼빈(John Calvin)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영리한 그러나 균형을 잃은 주석가들은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불멸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그 여부를 묻는다. 만일 이같은 억측들을 마음대로 구사할 것 같으면, 결국 우리는 오리무중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순전한 교훈으로 만족해야 한다. 즉, 모든 종류의 짐승들의 구조와 그것들의 상태는 아주 완전할 것이므로 아무런 외관상의 흠점이나 단명하는 일이 결코 없게 될 것이라는 교훈으로 만족해 하자." 

린지가 긍정한 것처럼 의를 전가받는 인간구원과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동물구원은 다르다. 따라서 동물구원을 마치 인간처럼 구원을 받는 과정과 똑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다. 따라서 동물의 혼도 죽어서도 불멸하여 하늘에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성경 구절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영혼불멸과 동물구원에 확신에 찬 그의 모습은 성경적 근거보다 개인의 신념에 더 호소하는 듯 보인다. 

④ 공리주의적 윤리의 한계: 애완동물에 대한 애착의 재고 

무엇보다도 린지를 위시한 동물신학자들이 성경에서 채식주의의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비약이 돋보인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전에 채식을 명령하셨다는 것이 성경적 근거이다. 이처럼 만약 타락 전의 상태로의 실천이 더 나은 세상의 첫 걸음이라면, 우리가 타락 전 아담과 하와처럼 벌거벗은 상태로 다니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타락으로 인해 벌거벗음이 수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채식도 마찬가지다. 타락 이후에는 동물이 제물로 쓰였다. 그 중의 일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기도 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육식을 명령하셨다(창 9:3).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짐승을 잡아 먹으라고 명령하셨다(행 11:5-9).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거라사 지방의 돼지 떼 사건, 예수께서 물고기를 잡수신 일 등 동물을 해하신(?) 일들을 행하셨다. 채식이 윤리적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동물을 해하신 것은 비윤리적이다. 동물도 인간과 똑같은 신적 권리를 갖는다. 그렇다면 한 피조물의 신적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비윤리적"인 그리스도의 행실에 어떻게 윤리적 당위성이 마련될 수 있을까? 인간에게 돌아가는 유익의 양이 동물들이 느끼는 고통의 양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공리주의적 윤리 외에는 그 당위를 찾기 어렵다. 

린지는 인간중심적 기독교 신학이 공리주의에 세례를 주었다고 비판하는데, 이러한 관점이라면 그리스도의 사역들이 모두 공리주의적 윤리에 갇히게 된다. 위에 언급한 그리스도의 사례들은 모두 린지가 언급한 것이다. 린지 스스로도 이 비판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모순을 제대로 변명하기를 피하면서,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들이 “도덕적 관대함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린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작은 자에게 베푸신 사역이니 오늘날 우리도 모든 고통당하는 피조물들을 포함해서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즉 동물에게도 보여야 할 관대함의 윤리를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가운데 작은 자인 병든 자, 고아, 과부를 동물과 동등하게 여기는 듯 보인다. 도리어 이것이 공리주의적 윤리관이다. 인간과 동물이 연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동등한 섬김의 대상이 될 경우, 가령 동물 100마리와 과부 한 명 가운데 버려야 하는 대상을 택해야 한다는 사고실험을 진행한다면, 과부 한 명을 버려야 하는 결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애완동물을 향한 애착이 심해질 경우 윤리적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말해준다. 동물을 향한 사랑과 섬김, 그리고 양식과 거처를 제공하는 데에 쏟은 모든 물질과 열심이 가장 먼저 흘러가야 할 곳은 우리 주변의 고아와 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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