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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대는 예언자 고영근 목사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군사 독재에 저항한 시대의 예언자 고영근 목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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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1.18  18:4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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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 시대는 예언자 고영근 목사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고영근 목사님은 자신의 상고이유서에서 목회자의 예언자적 사명을 스스로 이렇게 세가지로 정의 한다,

 

첫째로, 민중의 죄를 경고하는 파수꾼의 사명

둘째, 민중의 대변자로서의 사명

셋째, 정의의 선도자로서의 사명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예언의 음성이 사라진 시대이다,

오늘 우리는 왜 예언자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들어야 하는가?

그것은 죽어가는 우리의 감각을 살리기위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이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풍요의 경제 억압의 정치 침묵의 종교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언자적 대안 의식이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이고 그것은 감각의 회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언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을때 감각이 없는 자가 되고 만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이며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영적 위기가 치열한 싸움 끝에 포로로 잡힌 탓이 아니라,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사실상 오늘 우리들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교회는 영적으로 ‘혼수상태’에 있는 것이다.

 

공동체가 이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에, 시대의 예언자들은 영적 불감증에 걸린 이들을 향해 열정적으로 크게 소리쳐야 한다.

 

“우리는 우리시대의 불확실성에 무감각하고, 세계적인 위험에 둔감하고,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모르고, 현재 누리는 풍요로운 삶이 언젠가는 깨질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에 둔감하고, 우리의 공동체에 속한 소수적 약자들의 고통과 압제당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계속 무감각한 상태로 있고 싶어한다. 현재의 문화적 질병에 교회가 무관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이다.”

 

예언이란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나 “교회는 별 문제가 없으니 들쑤셔놓지 말라”라고 말하는 자들이 ‘만사가 순조롭고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꿈같은 세상’이 제공하는 영원한 무감각 속에 우리를 계속 가두어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세상을 뒤집는 그리스도인: 한상봉 기자)

 

그러나 예언자는 예레미야처럼 이 꿈같은 세상을 깨부수기 위해 ‘분노하면서 저주를 퍼붓는’ 방식이 아니라 ‘고뇌하고 눈물을 흘리며 더불어 애통하는’ 사람들이며

예언자는 영적 불감증에 가려져 있는 공동체의 고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고 바로 고영근 목사님이 그의 시대에 이러한 예언자적 역할을 훌륭히 감당한 시대의 예언자이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특별히 우리는 고영근 목사님의 시대를 에언자 예레미야 시대와 비교해 볼수 있겠다,

예언자 예레미아의 시대는 유대가 멸망할 당시 예언한 예언자이다,

예언자 예레미아가 백성한데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자 궁정의 거짓 예언자들은 이러한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를 핍박하고 옥에 가두기 까지 한다.

이처럼 예레미야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분노와 재앙을 선포하며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로써 이 파국을 막아보자고 외쳤다.

그러나 당시 누구도 예레미아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언자의 예레미야의 일생 자체야 말로 세상으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는

고난과 왕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예수님은 바로 예언자 예레미아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갔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상으로부터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셨고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셨다는 것이다,

오늘의 에언자들에게 성서의 신구약 시대와 오늘의 우리 시대의 공통점은 성서의 시대나 오늘이나 세상은 오히려 예언자를 억압하고 박해하고 예언자를 돌로 칠려고 일어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수님도 예루살렘을 보며 너희가 얼마나 많은 예언자를 돌로쳐 죽였는지 모른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우리는 고영근 목사님의 말년에 그가 군사독재 시절 온몸으로 저항 헌신하여 세웠던 민주 정권 시절 오히려 민주정권과 당시 시대와 대중으로부터의 외면당하고 몰이해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고목사님이 겪는 이러한 상황이야 말로 오히려 성서와 시대의 예언자들이 겪는 전형으로서 고목사님의 예언자적 신앙의 정직성과 시대와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 초월성과 계시성을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서의 예언자들이나 예수님이 시대를 향하여 외치다가 어떠한 일을 당했고 어떻게 세상의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 왕따가 되었는 가를 는가를 충분히 상상하면서

우리는 또한 고목사님이 예언 사역을 통해 그가 시대를 향해 예레미야와 세례 요한처럼 외치야 할것을 잘 외치는 예언자적 기능을 잘 감당하다가 어떤일을 당하였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고 성결된 신앙은 당연히 인간의 관행을 교정하고 심판하기 위해 예언자를 불러 그 입술을 정결케하고 세상에 외치게 하지만 그 사명자의 사역은 결코 순탄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고영근 목사님의 예언적 사역으로부터

1. 예언자들의 파수꾼의 사명과 대변인으로서의 사명

2. 그리고 정의의 선도자로서의 사명과 더불어

3.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오는 예언의 초춸성과 계시성을 배우고 이러한 초월적이고 계시적 신앙을 신앙의 후배들에게 전해야 하는데

이 부분은 19세기 독일에서 나치즘이 등장할 시기에 이에 저항하였던 개신교의 목회자 바르트와 본회퍼 목사와 고영근 목사님을 비교할수 있는 대목이고 이렇게 나치즘 시대와 유신시대의 에언자들의 예언활동과 저항 운동을 비교해 볼때 각 시대의 하나님의 예언운동과 저항정신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19세기와 20세기의 초 서구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기초로한 과학 기술의 발달과 진화와 진보에 관한 낙관론으로 인류는 이 지구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넓게 퍼졌다,

그런데 그 낙관론의 결론은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의 등장이고 1.2차 세계전쟁으로 끝난다.

이때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자펜빌이라는 스위스의 자그마한 탄광촌에서 로마서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는 당시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진보를 찬양하고 그것을 숭배 한것의 최종결론이 결국은 나치를 찬양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자 인간의 경험과 체험의 한계를 본다,

20세기초 바르트가 로마서를 쓸데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가 세상을 지배하였다. 최고의 지식인부터 민중까지 결국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바르트는로마서를 강해하기 시작하는데 그 로마서 강해에서 20세기의 최고의 신학이 탄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 하나님의 초월성과 계시의 하나님에 대한 주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고목사님의 예언사상에서 바로 20세기 초 칼 바르트와 같은 초월적이고 계시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바르트가 이러한 초월적이고 계시적 하나님의 신앙으로 나치즘에 저항했듯이 고영근 목사님도 이러한 초월적이고 계시적인 하나님 신앙으로 유신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예언자적 신앙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나찌즘하에서 바르트와 함께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예언자적 목회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히틀러 암살모의에 직접 가담했다가 1943년 체포돼 나치 패망직전인 45년 4월 9일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된 예언자적 신앙을 가진 목회자 이었다.

본회퍼 목사는 죄에 대한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나,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설교는 철저히 배격한다.

고난 없는 신앙, 고백 없는 신앙,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신앙, 성육신의 실천이 없는 신앙, 삶이 없는 신앙은 모두 싸구려 신앙이라고 한다. 당시 독일 크리스챤들이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자가 될지 그리스도인이 될지 당장 결단해야 한다는 게 본회퍼의 생각이었던 것이다.(에릭 메택시스의 ‘디트리히 본회퍼’) 그러나 당시 루터교 기득권자들의 집단인 제국교회는 나치의 돈과 권력에 눈이 멀었다. 그들은 기어이 히틀러와 함께하기로 한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쿠데타에 성공했을 때, 전두환 정권이 그랬을 때 악수하며 잘해 보자고 하던 우리나라 교권주의자들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결국 본회퍼 목사는 고백교회라는 참교회를 탄생시킨다.

(이 고백교회의 탄생은 고영근 목사님의 목민 선교회의 탄생과도 비교해 볼수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그리고 동조하는 목사들과 함께 히틀러를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교회가 극악한 불의에 침묵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려 한것이다. 고백을 넘어 악을 제거하는 적극적 행동가로 활동한 것이다.

이처럼 본회퍼 목사는 당시 히틀러에 현혹되어 나찌즘을 옹호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어리석은 독일 국민들과 크리스챤들을 회개 시키기위해 나치즘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백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도를 가르치고 자신은 직접 나치즘에 저항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와 그리스도교 역사의 예언자적 저항 신앙과 순교 정신을 20세기초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에게서 볼뿐 아니라 1970-80년대 폭압적인 유신독재정권과 싸우다가 여러차례 옥중에 갇히고 급기야는 지병으로 돌아가신 한국의 목회자 고영근목사에게도서 볼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는 예언적 신앙의 진수임을 고백하는 바이다,

 

   
 

우리는 시대의 예언자 고영근 목사님을 통하여

시대에 무감각하여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던 시대에

과감히 일어나 시대를 깨우고

첫째로, 민중의 죄를 경고하는 파수꾼의 사명

둘째, 민중의 대변자로서의 사명

셋째, 정의의 선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성서의 예언자 모습과 같은

고영근 목사님의 모습을 발견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고목사님의 예언 신앙으로부터 성서의 예언적 전통뿐 아니라

19세기 나찌즘에 저항하여 오직 하나님 중심의 초월적 예언자의 신앙을 발전시킨

개신교의 가장 위대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전통을 발견 계승하여

지금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잠자고 사람들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고 무디어 가는

이때에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 정신을 부활시켜 시대의 신앙 정신을 다시한번

깨우며 일어서는 이 시대의 예언자들로 우뚝 일어서야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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