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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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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3.04  15: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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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과 서북 기독교 세력과의 갈등 

(김지방(서평자). "서북청년회와 한국개신교." 황해문화 90.- (2016): 370-379.)

   
 

▰ 6.25 전쟁 중 북진통일과 휴전을 둘러싼 미국과 이승만의 대립..미국은 휴전, 이승만은 북진 통일. 거기에 더해 이승만과 미 행정부에 한국전쟁 휴전을 압박하고 있던 당시 미국 교회협의회(NCC)와 연결된 한경직을 중심으로 한 서북 기독교의 대립이라. 이승만은 평양탈환 이후 벌어진 사건을 통해 서북 기독교 세력의 정치적 야욕을 파악하고 강하게 견제에 들어갔고,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고신파와 협조하여 KNCC를 압박하였다는 것이다. - 참고: 부산 피난시절 이승만 대통령은 고신측 한상동 목사의 초량교회에서 예배드렸다.

▰ 그리고 서북 기독교인들은 KNCC와 WCC가입의 중심세력이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WCC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예장 통합과 합동측의 분열과 깊이 관련 있다 이승만은 결국 고신과 합동측 편이었다는 것이네...

▰ 그렇다면 1950년대 후반부터 노골적으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고 4.19에 대해 민주혁명이라고 추켜세우던 한경직의 태도가 잘 이해된다. 이승만을 독재라고 비판하였으면 왜 박정희와 전두환은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하였는지 의아하였는데 그 이유가 이승만이 서북 기독교세력을 견제하였던 것에 반발한 것이었구나...이승만의 실각과 박정희의 5.16이후 서북 기독교인들이 다시 교계와 정계의 중핵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 1950년대 말 정치권의 부패상을 비판하던 한경직은 4.19가 일어나자 이를 ‘혁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4.19를 ‘민주혁명’으로 명명하며 해방 후 교육 받은 새 세대의 공헌으로 치하하였다. (윤은순 ( Yoon Eun-soon ).

"1950년대 월남 기독교인의 국가윤리와 사회인식." 기독교사회윤리 41.- (2018): 155.)"
다음은 윤정란의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책에 대한 김지방의 서평 중 

▰ 월남한 서북 개신교인들은 정착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을 활용했다. 이승만 정권도 미국이라는 강력한 배경과 강한 반공 성향을 가진 서북 개신교인들을 적극 활용했다. 이승만과 서북 개신교는 권력자와 추종세력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가 맞아 손잡은 동맹세력이었다고 윤정란은 묘사한다.

▰ 서북청년회와 서북 개신교인들도 이승만을 추종하기만 하지 않았다. 이들은 안창호 계열의 임시정부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찾고 있었다. 서북청년회를 창립한 선우기성은 김구 계열의 이범석이 주도한 민족청년단에 참여했고, 한경직은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에 반대해 독자적인 정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과는 개신교라는 신앙으로 연결돼 있었다.

▰ 이승만은 서북 개신교인들이 언제든 자신과 경쟁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결국 서북청년단을 해체한 것이다. 윤정란은 서북청년회라는 이름이 ‘백색테러단’이라는 악명 높은 집단으로만 기억에 남게 된 이유도 이승만에 의해 권력의 전위부대로 활용당한 뒤 한국전쟁 이후 완전히 배제돼버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 윤정란은 서북 출신 개신교인과 이승만 정권의 이런 갈등이 한국 개신교회 역사에 중요한 기점이 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용공 논쟁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분열의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한다.당시 WCC는 휴전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서북 개신교인이 중심이 된KNCC는 WCC에 가입돼 있었다.

▰ 이승만은 WCC와 KNCC를 갈라놓기위해 WCC를 용공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실제로 미국 개신교 내에서도근본주의 세력은 WCC가 공산주의 국가 교회들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WCC 비판에 앞장서고있던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자 칼 매킨타이어와 한국 개신교계 내 소수파인 고신파를 연결해 서북 개신교인을 압박했다. 고신파는 일제 식민통치시절 신사참배에 반대해 탄압을 당한 영남 중심의 개신교 세력이다. 해방 이후 서북 개신교인이 교회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고신파는 소수가 되었으며 KNCC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 “사건은 1951년 4월 맥아더가 사임한 직후에 발생했다. 이승만은 부산의 피난지에서 국회의원 황성수와 고신파 송상석을 만나 한국 교회 내에 용공주의가 침투해오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목사들이 각 교회에 경고해 이에 대처해줄 것을 요구했다. (...) 부산에 머물던 이승만은 휴전회담이 논의될 때마다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미8군 교회가 아니라 고신파 목사 한상동이 재직하던 부산 초량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 고신파는 KNCC를 공산주의에 동조하는세력으로 몰아붙이려 했다.”(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경기도: 한울아카데미, 2015. 142-143)

▰ 송상석 목사는 1951년‘기독교와 용공 정책’이라는 소책자를 펴내 교계에 퍼뜨렸다. WCC는 용공단체이고, 이와 연결된 KNCC에 소속된 교회는 반성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매킨타이어가 미국에서 발행한 매체『크리스천 비컨』에 실린 반공적인 색채의 WCC 비판기사였는데, 이 기사를 송 목사에게 건네준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윤정란. 앞의 책. 144-145)

▰ 이승만은 자신의 북진 통일론에 동의하지 않는 서북 개신교인들까지 불신하게 되었다.(윤정란. 앞의 책. 156.) 급기야 스스로 기독교 반공 단체를 만들어 한경직을 비롯한 서북 출신의 개신교인들까지 용공주의자라고 공격했다.(윤정란. 앞의 책. 277.) 서북 개신교인들은 이승만 정권에 굴복하기보다 각을 세우는 길을 택했다. 한경직 목사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로 치닫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 윤정란이 밝혀낸 이승만과 서북 개신교 사이의 갈등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시기가 당시 개신교계 내에서 벌어진 교단 분열의 과정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개신교계에서는 1952년 고신파의 분립, 1959년 WCC파와 반대파의 분열이 진행됐는데, 지금까지 개신교 역사학계에서는 이 분열의 원인을 신학 노선의 갈등과 교권·재산권 분쟁 등 교회 안에서 찾아왔다.... 윤정란은 한국 개신교의 분열에 이승만 정권이라는 강력한 원인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매우 설득력 있고, 의미심장하다.

윤정란 박사(숭실대학교 역사학 박사)

"한국전쟁과 기독교" 라는 주제로 한울 출판사에서 내면서 일약 진보 학자로 알려진다. 현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으로 20년전에는 기독교 사회주의 여성에 대한 논문을 구상하다가 기독교인인 관계로 이런 주제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한국전쟁연구국제사업단 연구원으로 주요 저서: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역사』, 『19세기말 서양선교사와 한국사회』(공저), 『전쟁과 기억』(공저),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서북을 호령한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 『혁명과 여성』(공저),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

책 소개

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한국 기독교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다시 읽는다

과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형 교회의 상당수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은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시작해, 박정희 정권과 긴밀하게 결합하는 과정까지를 실증적이면서도 역동적인 필치로 그려낸다. 또한 휴전회담을 둘러싼 논란, 승공 담론의 확산, 전쟁고아 사업과 가족계획 사업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이슈에서 한국 기독교가 남긴 자취를 재발견함으로써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역사를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불러내고,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만든 이념과 가치관의 근원에 한국 기독교가 있음을 밝힌다.
 

제6공화국이 들어서고 1년이 지났을 무렵, 한 신문은 세간에 “비행기를 타려면 ‘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유행한다고 보도했다. 특정 지역 출신들이 핵심 요직을 장악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기사였는데, ‘노스웨스트’는 과거의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서북청년회(서북청년단)는 40년 전에 해체되었지만, 서북 출신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색테러단’, ‘역겨운 단체’, ‘악의 그림자’ 등으로 기억되는 서북청년회의 활동이 짧지만 너무도 강렬했던 탓에 서북 출신들의 다른 활동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서북 출신들은 군과 언론계, 교육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무엇보다도 기독교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저자는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시기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한국에서 ‘기독교’란 예수를 믿는 모든 종교를 지칭하기도 하고, 개신교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책은 후자의 의미로 기독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반도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근대화의 물결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 서북 지역이었다. ‘서북’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선교지 분할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담당했던 황해도 북부와 평안도를 서북 지역으로 본다.

19세기 말의 서북 지역은 중앙의 차별을 받아 소외된 변방이었지만, 다른 지역보다 먼저 신흥 상공인층이 성장했고, 교육 수준이 높아 문맹률이 낮았던 덕택에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실제로 서북 지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평양대부흥운동 등을 거치며 기독교 색채가 가장 강한 곳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등과 같은 기독교 계열의 지도자를 배출해 근대 민족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선도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복과 함께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하고, 그 뒤를 따라 김일성이 들어오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서북 지역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신이 주신 기회, 한국전쟁

기반을 잃고 고향을 떠나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구원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신이 주신 기회’였다.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맺어온 관계를 활용해 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을 분배하는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 벌어진 주도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서북 출신 장로교 목사인 한경직이다. 한경직은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을 영락교회로 결집해 세력화하는 한편,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경험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국 기독교계를 이끄는 인물로 떠올랐다.

한국전쟁은 전쟁고아라는 부산물을 남겼다. 초기에 전쟁고아는 거리의 부랑아나 범죄 용의자 취급을 당하며 환영받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과 미국의 언론은 전쟁고아를 반공과 한미 혈맹의 상징물로 재발견했다. 나아가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대외적으로 선전할 필요를 느낀 미국 정부와 교세 확장을 노린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고아 사업이 탄생했다. 밥 피어스가 월드비전을 창설했고, 뒤이어 홀트 부부도 전쟁고아 입양에 나섰다. 한경직도 월드비전과 손을 잡고 한국 선명회를 통해 전쟁고아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한국 기독교, 시대의 흐름을 읽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탁월한 눈이 있었다. 이승만이 휴전회담을 촉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용공 단체라며 공격하자,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던 한국기독교연합회(KNCC)는 그동안 긴밀한 관계였던 WCC의 뜻에 반해 이승만을 지지하고 휴전에 반대함으로써 반공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또한 전후에는 군사력으로 북한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전투적 반공주의 대신 체제 경쟁을 통해 공산주의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승공 담론을 제시해 국내외 현실의 변화에 맞게 반공을 다시 정의했다.

한국 기독교가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연달아 지지한 배경에도 승공 담론이 있었다. 특히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박정희 정권과 결합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핍박으로 해산당한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중추에 들어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한경직도 자신의 인맥과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승인을 받도록 지원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념과 가치관은 어디에서 왔을까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반공주의는 오늘날까지 한국 기독교를 규정하는 이념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북한이 전후 재건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한국 기독교가 제시한 승공 담론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끌어낸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생명 윤리를 중요시해야 하는 기독교가 천주교와 달리 가족계획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성서를 새롭게 해석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나선 배경에도 반공주의와 승공 담론이 있었다.

몇 년 전 강남에 있는 한 대형 교회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과 장관을 비롯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다닌다고 해서 유명해진 이 교회의 설립자가 유엔군 유격대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는 월남한 서북 출신 목사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 기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규정짓고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념과 가치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고민해보게 될지도 모른다.

책 목차
제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제2장 한국전쟁 구호물자와 선교 자금 그리고 세력화
제3장 이승만의 WCC 공격과 KNCC

제2부 전쟁 이후
제4장 전쟁고아 사업과 한경직
제5장 서북청년회 출신들의 정치적 배제와 부활
제6장 반공의 재정의: ‘전투적 반공주의’에서 ‘승공’으로
사례 박정희 정권과 한국 기독교인들의 연대: 가족계획 사업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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