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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소록도한센병원 개원 1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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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5.17  22: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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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년에 세워진 국립소록도한센병원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소록도병원은 5월 17일 병원 개원 제108주년을 맞아 전남 고흥 국립소록도병원 복합문화센터에서 ‘제21회 한센인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행사에는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 유철환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문금주 국회의원 당선자, 김춘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 명창환 전라남도 부지사, 공영민 고흥군수 등 주요 인사들과 전국 각지의 한센인 3200여명이 참석했다.

한센인의 날은 한센인이 마음의 고향인 소록도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화합을 다지기 위한 날로, 2004년부터 병원 개원일인 5월 17일에 맞춰 소록도에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기념식에서는 한센인 권익과 복지 증진에 기여한 유공자에 대해 대통령표창 2명, 국무총리표창 2명 등 정부포상과 보건복지부장관표창 18명 등 장관표창이 수여됐다.

   
 

대통령표창을 수상한 김우영 (사)들꽃훼밀리 대표는 50년 가까이 한센인 정착마을을 방문해 국악 공연, 인연잇기 행사 등을 전개해왔고, 박형석 소록도병원 원생자치회 회장은 본인보다 더 어려운 중증·고령의 한센인을 위해 봉사하고, 입원 한센인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해왔다.

박혜경 국립소록도병원 원장은 기념사에서 “전국에서 소록도를 찾아온 한센인이 행사에 참여해 즐거운 하루를 보내시길 바란다”며 “유일한 국립 한센병 전문 진료기관인 국립소록도병원은 한센인 고령화에 맞춰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날 기념식의 부대행사로 한센인의 화합을 위한 우리마을 행복사진관, 배구대회와 한센가족 노래자랑이 진행됐다. 그 외에도 소록도 한센병박물관에서는 개원 기념을 맞아 기획전 및 특별전이 열렸다. 기획전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란 주제로 국외 한센병요양소인 대만 낙생원 거주 한센인(이첨배, Lee Tien Pei)과 소록도병원 입원 한센인(남재권)의 생애를 시간대별로 함께 전시해 한센병 역사를 전했다.

   
 

소록도의 역사
자혜의원(慈惠醫院)으로 세워진 근대의료기관으로 제중원(濟衆院, 1885),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국립 근대의료기관으로 기록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사실상의 식민지 통치를 시작하는 데 조선의 군사 및 경찰행정을 먼저 장악하고, 이어 의료와 보건부문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의료 부문에서 통감부는 1907년 대한의원을 설립하였고, 이를 정점으로 1909년부터 각 도의 중심지에 당시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 주도하에 자혜의원을 설립하여 식민지 의료를 구축해 나갔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초기, 조선에는 광주, 부산, 대구 등 세 곳에 각각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 한센병 요양원이 있었으나 규모가 작아 수용인원이 아주 적었다.

   
 

따라서 당시 대부분의 환자들은 가정과 마을 떠나 다리 밑이나 움막에서 살거나 유랑, 걸식하는 실정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이러한 환자들이 국가 위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들을 일정한 장소에 격리 수용할 방침을 세우고 전국 각지를 답사하여, '섬'이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격리되면서, 기후가 온화하고, 생활에 필요한 물이 많으며, 육지와 가까워 물자를 나르기가 쉽다는 점을 들어 소록도를 적지로 선정하였다.

이런 결정에 따라 원주민들을 이주하려고 하자 그들은 강렬하게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섬의 약 1/5에 해당하는 30여만 평에 대해 집과 땅을 강제 매수해 이주시킨다. 그리고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관제를 공포하여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하였다. 자혜의원이란 이름의 일반 병원은 당시에 전국에 18개가 있었는데, 19번째로 개설된 소록도 자혜의원은 한센병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병원이었다.

   
 

초대 원장은 일본인
1916년 7월, 자혜의원 초대원장에 부임한 아리카와는 부임과 동시에 기존 마을의 가옥들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설들의 건축공사에 착수하였다. ​​소록도 자혜의원 병원건물은 1917년 2월 준공되었고 1917년 초에 본관 1동을 비롯하여 진료소, 예배당, 병사, 목욕장 각 1동과 주임관사, 간호초소, 취사장 등 50여동이 건평 477평으로 건축되었다.

신축된 건물은 북쪽 해안 쪽에 관사, 그 아래쪽으로 사무실, 진료소, 부속시설, 병사(病舍)가 순차적으로 위치하였다. 사무실과 진료소 사이에, 그리고 외부 마을과 자혜병원 사이에는 철조망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내부에는 원장실, 사무실, 건강인진료실 (健康者診療室), 약국제제실 (藥局製劑室)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진료소의 설계도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이후 소록도 자혜의원 건물은 현재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혜의원 환자수용시설은 부부병사, 남녀 병사, 전염병사로 구분되었고, 직원거주공간을 무독지대, 환자거주공간을 유독지대로 나누어 불렀으며, 그 사이를 차단하였다. 초기 병사생활은 다다미방에서 한복은 입을 수 없었고 일본식 생활양식이 강제되었다.

1917년 5월 17일 개원식을 거행을 시작한 이래  최초 수용환자는 ‘노상이나 시장 등에서 배회하는 병독전파의 우려가 있는 자’들이었고, 수용방식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제적인 것이었다. 당시 소록도자혜의원은 규모의 측면에서 선교 나요양소들에 비하여 훨씬 작고, 환자에 대한 치료보다는 부랑환자의 단속과 수용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더구나 중증환자들이 수용되었으므로,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 소록도에서의 면회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요양소에서 갱생원으로
소록도 자혜의원은 조선의 한센병환자의 구제보다는 식민지의료와 문명국 일본을 자랑하고 국외적인 체면유지와 식민지배 정당성 확보를 위한 형식적 한센병요양소 개설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부터 한센환자들은 전염병이라는 이유로 통제와 구금형식으로 수용되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몰로카이라는 섬에 강제 이주 수용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의료정보에 미개한 국민들은 나병환자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에 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 들어 소록도가 국민들에게 크게 알려진 것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이라는 소설을 통해서다. 그것은 역사적인 인근 오마도 간척사업등으로 인권이 유린당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李淸俊(1939~2008) 전남 장흥 生. 광주제일고 졸업. 서울대 독문과 졸업. 2008.7.31. 卒.

이 책은 일간 조선일보에 연작으로 시작된 60%가 논픽션인 이청준의 작품이다. 그는 1966.10. "사상계"에 실린 조선일보 기자 이규태의 논픽션 "소록도의 반란-땅에서 못사는 恨"을 읽고 영감이 떠올라, 이규태 기자의 도움으로 당시 소록도 원장인 조창원을 만나 자료를 구하고 원생들을 인터뷰 하는 등 실사실을 바탕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원장 "조백헌"의 모델은 14대 원장인 "조창원" 인데 그는 육군대령으로 박정희의 5.16 군사 쿠테타로 소록도에 파견된 현역 대령이었지만 이후 군복을 벗고 정식 원장으로 부임한다. 이 책에서 이상욱은 작가 이청준으로 또 다른 기자 "이정태"는 조선일보 "이규태"다. 이규태는 전북 장수 사람으로 "한국인의 의식구조", "이규태 코너"를 쓴 해박한 지성인이다.

책의 1부는 이상욱이 보는 소록도 섬과 조백헌의 모습으로,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에 부임하여 오마도 간척 매립공사를 시작하며 원생들과 갈등을 빚는 과정을 그린다. 2부는 주로 조백헌의 시점에서 그려지며, 오마도 간척사업 공사기간 동안 조백헌 원장이 겪는 갈등과 고뇌를 표현했다. 3부는 신문기자 이정태의 시각으로 그리고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를 떠난 후 7년 뒤에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원장으로 복귀해 원생과 함께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백헌 원장에 대한 원생들의 신뢰가 깊어지자 보건 과장 이상욱은또 다시 누군가 우상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 조백헌 원장에게 떠나기를 권한다. 조백헌 원장은 간척사업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섬을 떠나지만, 7년 뒤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 직원인 서미연과 수용인 윤해원의 결혼을 성사시킨다.

조백헌 원장은 다시 섬을 찾아온 이정태 기자에게 말한다. "운명을 같이하지 않는 한에서의 어떤 힘의 질서는 무서운 힘의 우상을 낳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운명을 같이하려는 작정이 있은 다음엔 내게 그 원장의 권능이 필요했어요." 라고 말한다. 

   
    * 소록도 출신으로 칼빈신학대와 총신대을 니온 합동측 최초 목사 유덕용의 간증수기(소록도교회서 부목사로 사역) 

유덕용 목사(1943-1994)
내 고향은 서울이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축구를 하다가 넘어져 다쳤다. 그런데 상처가 난 곳이 오랫동안 낫지 않고 묵은 헌데가 되었는데 그 자리에 이상한 반점이 생겼다. 그러면서 온 몸이 근질 근질하며 개미새끼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 할머니는 손자인 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 금이야 옥이야 불면 날세라 만지면 끼질세라 하며 나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그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할머니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아시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던지 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지 모른다.
조상탓이라며 묘지까지 이장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집안의 귀신을 쫓아낸다며 여러 무당들을 불러다가 날마다 굿을 했다. 그러는 중에 내 몸의 반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얼굴에도 반점이 생기고 눈썹은 하나 둘씩 빠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구 저 애 문둥이가 되었네!”어느 노파가 나에게 던져준 소리였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온 몸에 차거운 소름이 끼쳤다. 걱정이 되어 중앙의료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분명히 몸에서 한센균(나균)이 나왔다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야단법석을 하며 금방 무슨 큰 전염이라도 될 것처럼 소동을 부렸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문둥이란 말인가?’ 눈 앞이 캄캄했다. 문둥이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쥐약을 사가지고 청계천 냇가로 갔다. 쥐약봉지를 꺼내놓고 냇물을 바라보니 너무나 더러워서 먹을 수가 없었다. 죽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내가 나환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는 커다란 충격을 받으셨다. 나를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시던 할머니, 세상에 둘도 없는 손자라며 나를 금이야 옥이야 길렀던 할머니, 그 할머니는 손자가 문둥이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끝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손자가 문둥이가 되어 온 세상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니며 돌세례를 받고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기거하며 비참하게 살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워 병이 들어 앓다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집에서 살 수가 없었다. 한센병인 줄 몰랐을 때에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지만 한센병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전염될 수도 있으므로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고 집을 나서자 어머니는 “네가 사람이지 왜 문둥이냐?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어디로 간단 말이냐?”고 목을 놓아 우시며 가지 말라고 부여 잡으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을 뿌리치고 나왔다. 어머니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울부짖으며 뒤따라 오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집을 떠났다.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저는 가야만 하고 죽어야 합니다.’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는 가로수에 기대어 목을 놓아 울고 계셨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제 문둥이 거지가 되어 공동묘지같은 곳에 기거하며 세상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조롱을 받고 돌세례를 받으며 살 것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했겠는가? 가로수에 기대어 목을 놓아 우시는 그 어머님을 뒤로하고 떠나는 나의 심정도 처절했다.
내가 찾아간 곳은 어느 후미진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사방은 적막하고 석양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7세의 청소년 문둥이였던 나는 공동묘지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공동묘지에 앉아 있으니 너무나 무섭고 종일 굶어서 배는 고프고 신세가 처량하여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공동묘지에서 눈물로 밤을 새고 날이 밝자 내려왔다. 도저히 살고 싶지 않아서 어느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부근에서 일하던 농부의 도움으로 구조되고 말았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가서 소나무에 끈을 묶어 목을 매달고 몸을 공중으로 던졌다. 목이 메여서 고통이 극심하고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을 느끼는 순간 전에 동네사람들이 개를 잡을 때 목을 메어 죽이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자 ‘병든 것도 원통한데 내가 왜 개처럼 죽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노끈을 힘껏 잡아당기니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동네로 내려왔다. 동네개들이 몰려와서 냄새나는 나의 상처를 핥고 물어 뜯기도 했다. 물어뜯어도 아프지 않고 아무 감각이 없었다. 동네의 아이들은 무슨 더러운 짐승이나 본 것처럼 가래침과 돌팔매질을 하고 막대기로 찌르기도 하여 나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느 할머니의 헛간에서 쉬고 있는데 동네사람들이 몰려와서 “이 동네에 아이가 없어졌는데 네가 잡아먹지 않았느냐?” 며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몽둥이로 개패듯이 나를 때렸다.
나는 한센병자인 것을 확인한 후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한 적이 있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우니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이 아픔을 아시겠지요?”
집을 나올 때 입고 나온 까만 중학생 교복은 개에 뜯기고 산가시에 찔리고 매에 찢겨 나가서 거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집을 나온 뒤 세수도 못하고 손톱도 못깎고 목욕도 못하고 산과 공동묘지와 거리를 방황했으니 내 행색은 상거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람들에 의해 한센환우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청주에 있는 무심천 한센환우 수용소였다. 거기에는 많은 한센환우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한센환우들을 간호하는 간호사 한 명이 있었다. ‘나영’이라는 이름의 그 간호사는 서울에서 간호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백의의 천사인 나영 간호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의 교훈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청주의 무심천 천막수용소에서 환센환우들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방학을 이용하여 그의 어머니와 같이 한센환우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나영이 한센 환우들을 돌보는 그 사랑과 정성과 숭고한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멸시하고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한센환우들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지 않고 헌신하는 나영의 삶은 보면서 나도 한센환우들을 위해서 일생을 봉사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했다. 몸이 성한 나영 어머니와 나영 간호사같은 사람이 자기의 몸도 아끼지 않고 한센환우를 위해서 희생하는데 하물며 이미 한센병이 든 내가 한센환우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나날을 보내던 중 6.25 동란이 터졌다. 인민군들은 우리를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고 전쟁에 짐이 된다며 무심천 뚝방에서 한센환우들을 마구 죽여댔다. 그런데 나영 간호사는 그 곳 천막수용소에 머물면서 한센환우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하는 한센환우들을 본 나영간호사는 피난을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센환우들이 비록 인민군에게 죽음을 당하더라도 목숨만은 천국에 가야 된다며 최후까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자며 복음을 전했다. 목숨을 건 전도였다.
많은 사람이 피난길에 올랐지만 나영은 한센환우들의 외모는 병자지만 그들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최후까지 남아서 천국복음을 전했다. 많은 한센환우들이 나영이 전하는 천국복음을 믿은 후 한센환우들을 개처럼 취급하는 북한 인민군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일부는 피난을 떠나버려 한센환우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자 나영 간호사는 비로소 그 곳을 떠났다.
나는 그 때까지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았지만 나영이 전해주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가는 천벌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고 계시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그녀의 말대로 나같은 것도 멸시하지 않으시고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다시 청주에 모인 한센환우들은 청애원이라는 한센환우촌을 만들어서 살게 되었다. 나영 간호사도 돌아왔다. 어느 날 서울에서 검은 세단을 탄 청년이 나영에게 결혼하자며 찾아왔다. 그 청년은 결혼을 하면 곧바로 미국에 가서 살게 될 것이라면서 나영에게 서울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나영은 “우리는 갈 길이 다르다.”며 그 청년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청년이 가고 난 후에 나영은 원장님에게 “저는 한센환우들과 함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이 결심은 변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한센환우들을 그처럼 사랑하는 마음과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한센환우들을 깊이 사랑하는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그녀에게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나영 간호사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영의 어머니는 실로 믿음이 깊고 사랑이 많은 훌륭하고 참된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병인 한센환자인 나와 건강한 정상인인 자기 딸 나영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청애원에서 사는 동안에 여러가지 시련과 고통도 많이 겪었다. 그때마나 나는 “주여 당신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고통은 얼마나 무겁고 혹독하였나이까?”라고 기도하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고통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다. “약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주님이시여. 나의 겉사람은 질병과 죄악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도 내 영혼은 날마다 주님을 향해 가까이 갑니다.”라고 고백하며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 후 나는 소록도에 내려와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비록 병 중에 가장 악질을 가진 문둥이였지만 나의 심령은 자유를 얻었고 감사와 기쁨의 찬송은 내 입에서 멈출 날이 없었다.
어느 날 한센환우라는 것이 큰 열등감이 되어 마음에 고통을 느꼈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성경 신약 고린도후서 12장9절)말씀이 나를 붙들어 주셨다.
나는 “오 주님 감사합니다. 나같은 것을 버리지 않고 붙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며 감격하여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하루하루 내 입술에서는 찬송이 늘 흘러나왔고 내 가슴은 마치 천사의 심장이라도 소유한 것처럼 사랑과 감사가 솟구치곤 했다. 그러자 소록도의 동료 환우들은 나를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심지어 어떤 한센환우성도는 나를 성경에 나오는 “참 감사의 문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록도에는 교회가 여러개 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센환우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는데 손가락이 다 떨어지고 하나도 없는 환우들도 열심히 손뼉을 치고 찬송을 부른다. 그래서 손뼉을 치는 소리가 아니라 막대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예배당을 울려 퍼지기도 한다. 나는 손가락은 떨어져 나가지 않아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다. 찬송을 부르는 순간 내 가슴 깊은 데로부터 솟구쳐오르는 그 기쁨! 그 평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리가 점점 더 아파와서 한쪽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가 되고 말았다. 나는 얼굴과 전신에 문둥이의 형적이 새겨진 것만도 서럽고 괴로운데 거기에 다리 하나마저 없는 모습을 연상해 보았다.
‘병신!’ 내가 문둥이에다 병신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모습이 될 것 같았다. 또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그 순간 주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이 괴로운 모든 것을 능히 이기고 남는 것이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붙드시는 것이었다.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목발을 짚고 병원문을 나섰다. 내 마음 속에는 불평도 원망도 이미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감격적인 은총만이 용솟음칠 뿐이었다.
나는 새로운 감격과 감사를 되찾은 채 남은 신학공부를 마치었다. 많은 졸업생 가운데서도 나 혼자만이 축복을 받은 듯 나는 마냥 기쁘기만했고 감사하기만 했다.
썩어질 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깨끗하게 하시고 천금보다 귀한 믿음을 주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천국의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한센병에 걸리지 않았던들 오늘 이같이 우주보다 귀한 주님의 생명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한 것 뿐이었다.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살과 피를 아낌없이 바쳐 주신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얼마든지 내 목숨을 주님께 바치고 싶을 따름이었다.
절단했던 다리를 다시 수술하기 위해 국립의료원에 다시 입원한 적이 있었다. 나는 수술의 고통 속에서도 얻어지는 감격적인 기쁨과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병실에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 나는 병실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아침과 때를 따라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예배를 드렸다. 나는 병실의 환자들에게 ‘독실한 예수쟁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 후 나는 목사가 되어 소록도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소록도 교회에는 8개 교회 3천여 성도가 있었는데 8 개처 교회 전체를 지도하시는 담임목사는 한센병자가 아닌 정상인이신 김두영 목사님이셨다. 그 분은 한센환우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오랜 기간동안 목회를 하셨는데 나는 김목사님을 도와 열심히 목회를 하면서 한편 전국적으로 부흥회를 다니며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했다.
17세에 한센병을 얻어서 집을 나와 밤이면 무서운 공동묘지를 집으로 삼고 낮이면 거지가 되어 밥을 얻어 먹기 위해 어린이들의 돌팔매를 받으며 떠돌아 다니던 내가 목사가 되어 전국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성직자가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이므로 감사와 감격 속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주님의 은혜에 억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일 것이다.
(이 글은 [골고다 섬의 십자가](유덕용 목사 저, 청음사)] 내용 중에서 발췌)

   
 

소록도을 나온 한센인들

소록도에서 나온들 한센인들으 가족이나 고향으로 복귀할 수 없었는 데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고 가족중에 한센인이 있는 경우도 모두 비밀로 하였다. 이렇게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넘은 혐오의 눈길들 때문이었다. 그들 자녀들도 일반학교에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변두리 버려진 곳에서 무리지어 살게된다.

비록 주거는 해결을 했는 지 몰라도 마땅히 써주는곳도 없어 처음에는 구걸로 연명하면서도 열심히 땅을 일구고 이후 국민소득이 오르면서 양계와 돈사 축산 붐으로 비록 냄새나는 일이었지만 열심히 일해 부를 축척한다.

그리고 인근의 토지도 매입하였으나 이후 인구증가와 도시화로 공업지대가 되여 임대업을 하거나 직접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생한 선대들은 나이가 먹어 은퇴들을 하지만  미감아였던 자녀손들은 한쎈병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와 차별로 인하여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취임이나 혼사등에서 늘 차별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경기도 인근에 현인능 인근에 현인농장은 가장 흥황하였으나 폐쇠되었고 마석과 포천 양주등에도 농장이나 축사는 모두 가구공장이나 도시에서 밀려난 공해업소들이 들어와 있거나 이 마져도 다시 밀려나는 시대다. 한편 전국의 한센인들은 병원 창립일인 5월 17일 전국에 소록도로 모이는 데 1년에 한번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회포를 푸는 날이다. 이런 행사를 국가에서 지원하고 있으며 지금도 환자 개인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록도의 종교  

소록도에는 수용된 이들은 개신교인과 천주교도로 구성되어있는 데 개신교는 장로교 중앙교회당(김선호목사)과 각 동네에 작은 예배처가 있어 매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일과를 시작한다. 주일과 수요일 등에는 중앙교회당에서 모인다. 대표적인 목회자는 순교자인 김정복 목사로 초대 목사이고 당회장이셨으나 한국전쟁시 순교를 당한 것이다. 

또 김두영목사는 소록도교회가 가장 왕성할 때에 부임한 분으로 합동측의 거물이다. 월남한 분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소록도 중아교회등을 건축하고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크게 자존감을 높히는 등 36년간 목회후 은퇴했다. 지금도 중앙교회당 앞에는 두분의 공덕비가 있다.

   
 

한편  한 연구자의  "1950년대 소록도 종교차별 사례" 에 대한 초고를 소개한다.  

1950년대 소록도에서 자행된 종교차별 사례로 천주교에 대한 개신교의 탄압인데 집단수용소에서 발생한 것이다. 당시 소록도 갱생원은 5천여 명의 나병환자들을 격리 수용한 국립 나환자 요양원이었다. 1948년 4월 15일 갱생원의 제8대 원장으로 부임한 김상태는 환자 자치위원회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원장의 권한을 강화시켰다(김재수, 『천주교 구라사』, 천주교구라사 편찬위원회, 2002, 103쪽).

또한, 5천여 명의 환자들에 대한 통제를 원활히 하기 위해 김상태 원장은 장로교의 포교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목사를 초청하여 교리를 배우고 갱생원 간부직원의 결원도 모두 장로교인으로 대치하였다(「소록도분규의 진상 (上)」, 『경향신문』1954.1.28.). 심지어 김상태 원장은 전임목사를 초청하여 목사관을 제공하여 상주시키고 목사로 하여금 갱생원 간부직원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고 간부회의에 참석시키기까지 하였다.

원장의 개신교 우대정책으로 인해 많은 환자들이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 당시 환자들의 종교별 교인 수는 장로교 4,610명(78%), 천주교 925명(16%), 성공회 15명(0.2%), 천도교 1명 등 총 5,551명으로 전체 환자(5,882)의 94%가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데, 장로교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소록도 80년사』, 국립소록도병원, 1996, 134쪽). 이러한 영향으로 환자들만으로 구성된 환자 자치위원회의 간부들도 대부분 장로교인으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갱생원 내 장로교인이 많아짐에 따라 목사와 환자 자치위원회가 힘을 합쳐 원 행정에 관여하게 되면서 행정관리자인 김상태 원장과 대립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갈등은 식량절감으로 인한 식생활의 곤란과 강제노동의 강요 등의 문제와 만나면서 원장배척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장로교인 환자들은 원장배척운동에 가담했지만, 천주교인 환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환자 자치위원회 위원장 김민옥은 1953년 10월 23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공개장」을 게재하여 원장이 800여 가마의 양곡을 부정 유용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국회, 보건부, 심계원, 중앙감찰위원회 등을 찾아가 원장의 비리를 진정하였다. 그러자 1953년 10월 25일 원 당국은 환자 자치위원회회의 간부 5명을 원규위반으로 감금실에 수감하였다.

이튿날인 10월 26일 갱생원의 환자들은 원장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앞세우며 데모를 전개하였지만, 원장배척운동은 중앙감찰위원회가 내려와 조사를 한 결과 원장에 대한 진정을 무혐의로 처리하면서 실패하였다. 원 행정에 간섭하여 원장과 대립하였던 ○○○ 목사는 장로교 총회에 김상태 원장이 종교탄압을 한다는 보고를 제출하여 장로교가 보건부과 교섭하여 김상태 원장을 견제하도록 하였다(『대한예수교장로회 제39회총회록』, 1954, 296쪽).

원장배척운동이 실패함에 따라 장로교인 중심으로 구성된 자치위원회 간부들은 원장배척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천주교인 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배척운동에 합세 않는 천주교 지도층은 처단할 것이다”라는 벽보가 나붙자 천주교인 환자들의 지도자인 장순업, 송두상, 이계만 등은 김상태 원장을 만나 보호를 요청하였다(『소록도 80년사』, 129쪽).

원장은 이들의 보호 요청을 받아들여 천주교인 환자들을 보육소에 따로 수용하였다. 1954년 1월 12일 성 라자로 마을의 하한주 신부가 진상 조사차 갱생원을 방문하여 사태수습에 나섰다. 하한주 신부는 양 측의 의견을 모두 듣고 개신교(환자 자치위원회) 측은 천주교인의 생명과 재산 및 신앙생활의 보장을, 천주교 측은 자치회에 협조하고 병사지대의 질서를 지키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교환하게 하고 천주교인 환자들을 복귀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갱생원 내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54년 12월 7일 제9대 원장으로 부임한 손수경은 자신이 부임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신구교 대립 감정을 중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소록도 80년사』, 133쪽). 오히려 소록도 내의 종교 갈등은 1958년 10월 31일 제10대 원장으로 차윤근이 부임하면서 원 당국이 천주교인들을 탄압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갱생원의 의무과에 의무사로 있었던 서재근은 1957년부터 갱생원에 배치되어 일해 왔었는데, 진급시험을 치는 과정에서 신원조회가 고흥군 녹동지서로 왔을 때 ‘열렬한 천주교신자’라고 회보되면서 상부의 명령으로 권고사직을 당하였다. 또한, 녹동에서 매주 미사를 보기 위해 소록도로 갔던 2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은 갱생원에서 관할하고 있는 도선장(渡船場)사무원들의 승선 거부로 인해 소록도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도선장 사무원들은 “천주교 신자는 소록도에 상륙시킬 수 없다”는 상부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40여 명의 천주교인 갱생원 직원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해고를 당할 위험에 직면하였다. 심지어, 천주교인 갱생원 직원들은 상부에게 “천주교를 믿는 직원들의 언동은 물론 소록도의 천주교 신자 명단을 제출하라”는 요구와 “민주당인 천주교를 믿지 말고 장로교를 믿으라”는 강요를 받기도 하였다. 이외에 소록도에는 “천주교는 민주당이다”라는 유언비어가 떠돌기도 하였다(소록도에서의 천주교 억압에 관한 것은 「신앙의 자유 없는 소록도」, 『동아일보』1959.9.30. 참조).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록도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된 이유는 소록도가 고흥군의 선거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당시 고흥군은 갑, 을의 2개 선거구가 있었는데, 소록도는 갑구에 속하였다. 그런데 소록도의 유권자 수는 환자가 5천여 명, 직원 및 그 가족이 1천여 명으로, 총 유권자 수가 6천여 명에 달했기 때문에 사실상 고흥군 갑구 국회의원의 당락을 좌우할 수 있었다(『소록도 80년사』, 140쪽).

소록도의 한 간부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소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납세나 병역이라는 국민의 2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환자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소록도분규의 진상 (上)」, 『경향신문』1954.1.28.). 이러한 맥락에서 소록도의 천주교인들이 탄압을 받은 것은 1960년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겨냥한 이승만 정권의 조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엔 역사 박물관을 짓고 과거 병원에서 쓰던 기자재와 역사 문서등을 정리하여 방문자들로 하여금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또 나병의 최초 발견자 한센의사와 한국인으로 의료에 힘쓴 유준박사등 소록도역사에 공이 큰 병원장등 개인 역사도 잔잘 정리되어 있다. 작년에는 대만의 한센환자 수용역사를 다룬 것과 비교하여 전시중이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보건복지부 소속 국립병원 구역으로 한센인의 생활권 보호를 위해 중앙공원과 소록도박물관 등 일부 지역만 개방하고 있다. 통제구역의 국가유산 방문은 공무 등 특정 분야로 제한되어 있다.​​ ​소록도에는 모두 17건의 국가 유산이 있는데 이 중 12건이 통제구역에 위치해 있다. 올해도 그렇고 비공개지역을 포함해 사전 신청하면 25인 이내 구룹으로 방문이나 견학을 신청하면  방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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