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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유경재 목사의 10분 설교
유경재 목사  |  yukj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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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03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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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유경재 목사(안동교회 원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8절 이하에서 전도자의 역설적인 삶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기꾼 같고, 고난당하는 자요, 가난한 자로 보이지마는, 실제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진실하고, 기쁨을 간직하였고, 부요한 것이 바로 전도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도자 개인의 성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복음의 성격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복음은 역설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생애가 바로 이런 역설적인 삶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역설적인 삶을 바로 이해하고 받아 드림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이 말씀 중에서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다”는 부분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속임수 같은 복음
이 표현은 아마도 바울에 대하여 떠돌아다니는 소문 즉 속이는 자라는 비난을 그대로 받아서 한 말인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6절에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간교한 속임수로 여러분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간교한 속임수”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비난에 대해서 자기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강하게 반박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롬 9:1
진실을 말하는데도 그것이 간교한 속임수로 보이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진리 곧 복음의 성격 때문입니다. 복음은 영원한 세계에 관한 소식인데, 시간세계의 말로 나타내고자 할 때 자연 속임수 같은 말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영원한 세계로부터 온 진리인데, 이를 인간의 말로 표현하자니 자연 상징적인 말이나 신화적인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의 진리들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우리 자신이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을 갖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2장 13-14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곧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합니다.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요, 그런 사람은 이런 일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오늘날 특별히 강조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 바로 현대인들이 영의 세계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복음을 이해하기 어렵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영성(靈性) 없이는 우리가 진리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속임수 같이 보이는 복음의 내용을 참된 것으로 받고 믿으려면 성령을 통하여 깨어난 영성이 필요합니다.

영성의 깨어남을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 진리를 합리적으로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의 진리를 합리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바꾸어 놓으면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 않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기준해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내 지식을 표준삼아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 드리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여 하늘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상징적이며 신비를 띄게 될 것입니다. 그럴수록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속이는 자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실함이 깃들여 있는 한 우리의 삶은 빛을 발할 것이며,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참된 자와 속이는 자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와 참된 자 같으나 속이는 자의 구별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그는 속이는 자 같이 보였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아버지와 자기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만약 거짓말쟁이며, 속임수를 쓴 자였다면 왜 십자가를 스스로 택하셨을까요? 속임수란 자기의 어떤 이익을 달성하려 할 때에 필요합니다. 죽기 위해, 고난당하고자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편해지고자, 더 높아지려고 속임수를 쓰지, 더 낮은 곳으로, 더 고난당하는 곳으로 내려가려고 속임수를 쓰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가난한 생애요, 고난과 멸시받는 생애였으며, 십자가를 향해 가는 생애였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속임수가 필요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기에 속일 필요가 없고, 오히려 진실을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경건하게 보일 필요가 있고, 백성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기에 속임수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자처럼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의 위선과 가식을 보시고 가차없이 저들의 거짓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을 거짓말쟁이로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될 수 있는 근거는, 이 세상의 명예나 권력이나 부를 구하지 아니하고, 낮아지고 섬기며 자기를 내어 줄 수 있는 자리에까지 내려가는데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철저하게 낮아지셨기에 그는 속이는 자 같았으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노라 하고 겸손과 봉사와 희생과 사랑이 동반되지 않을 때 우리는 참된 자 같으나 속이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바울과 같이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될 때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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