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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농촌, 변화되어야하는 농촌교회한경호의 농부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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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5  1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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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하는 농촌, 변화되어야하는 농촌교회

   
 

 한경호(목사, 한국기독교생명농업포럼 대표)

 1. 들어가는 말
농촌사회에 큰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쳐오고 있다. 사실 이미 시작된 지 오래이다. 8‧15 해방 후 서구 자본주의 체제와 농학체계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된 서구농법으로의 전환과 유통구조의 자본주의화는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에 일대 변화를 초래하였다. 특히, IMF사태이후 더욱 심화되어온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는 농업의 비(非)교역적 성격, 지역의 고유성, 그리고 오랜 역사적 전통에 기반한 자급자족적인 공동체적 삶의 토대를 모두 허물어버리고 농산물을 오로지 국내 및 세계시장에서의 교환적 상품가치로만 평가하고 농민들을 임노동자로 전락시키면서 ‘농(農)’ 과 관련된 모든 가치를 물질로 환원시키고 있다.

한국농촌사회는 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짧은 기간 동안 진행된 산업화, 도시화로 급격한 변화의 충격 속에 빠져 있다. 절반에 달하던 농업인구는 5-6%로 감소하였고 농업이 경제적인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미미한 형편이 되었다. 정부는 이제 농업을 애물단지 비슷하게 여기는 분위기이다. 외국의 값싼 농산물을 사다 먹으면 되는데, 그렇다고 국내농사 기반을 무시할 수도 없고-국내농사기반이 무너지면 농업 관련 정부 기관들도 설 자리가 없어질 테니까-진퇴양난이다. 1960-70년대나 지금이나 경제성장을 명분으로 하는 농업의 희생은 다름이 없다. 최근 광우병위험 미국 쇠고기 수입이 한미FTA의 조속한 비준을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명분에서 비롯된 것도 그 흐름이다. 쌀과 쇠고기 수입은 금기시되어 왔지만 이제는 앞장서서 수입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 농촌은 이제 별종(別種)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세대 공동체로 살아야할 농촌사회에 새로 태어나는 아이나 청소년들은 없고 노인들만 모여 사니 별종이요, 장가못 간 노총각들이 많이 있으니 별종이다. 농촌은 한마디로 기형적이며 병든 사회가 되었다. 그것도 중병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농촌교회가 처해 있다. 농촌사회의 병은 점차 심해질텐데 교회는 무슨 전망과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가? 농촌사회의 몰락과 함께 아무 대책없이 스러져갈 것인가?

 2. 무엇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 것인가?

 1) 사람이 바뀌고 있다.

 (1) 귀농(촌)인들의 증가 

① 귀농촌인
1990년대 후반이후 농촌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주변을 보면 눈에 띠게 늘어나고 있다. 우선, 농촌의 자연생태적 환경을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삼는 귀농촌인들이 늘고 있다. 사회활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은(명)퇴한 분들이거나, 수도권의 경우 직장이나 사업체를 갖고 있으면서도 차량으로 출퇴근 하면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다. 또한 서울 등 도시에 집을 갖고 있으면서 주말이나 시간 날 때 별장으로 이용하려고 농촌에 집을 짓거나 매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기존의 농민들과는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이다.1) 경제생활에 걱정이 없고, 농사도 짓지 않고, 도시적 생활 습성이 몸에 배어 있으며, 농민들의 삶에 다가가려는 마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자연환경을 즐기며 사는 것이 주(主) 목적이다.

② 귀농인
최근 공업중심의 도시문명에 회의를 품고 귀농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있다. 귀농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그들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각 종교의 종단 내에도 귀농학교가 수시로 열리고 있다. 이들은 가치관의 전환으로 삶의 양식을 바꾸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다. 더 이상 도시문명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이 사회의 주류가 지향하는 정책이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정착까지 성공하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은 형편이다. 옛날과 달리 귀농은 신중한 판단과 치밀한 준비, 그리고 물질적인 뒷받침이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동산 투기로 인해 발생한 농지가격의 비정상적인 수준은 농사의 중요한 토대인 농토의 구입을 어렵게 하여 귀농의 안정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2)

이들은 농촌과 농사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애정을 갖고 있으며 농민들과도 가능하면 가깝게 지내려고 한다. 공동체적 삶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농촌적인 삶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신념이 지나쳐서 ‘함께’ 살아가는 일에 서투름을 보일 때가 많다.

농촌교회는 위의 귀농촌인과 귀농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귀농촌인들 중에는 교인들도 있고 그들 중에는 자신의 사회적 경력이 농촌지역을 위해 활용되기를 원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귀농인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있다. 저들의 의식과 의지 그리고 창조적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안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지역 목회자와 교회가 어떤 지향을 갖느냐와 관련이 있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신앙적 토대와 가치지향을 가지게 되면 농촌지역에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 귀향인
이들은 애초에 농촌 출신인데 도시에 나가 살다가 살기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IMF사태가 터졌을 때 대거 농촌으로 귀향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는 뜻을 가지고 귀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부모들이 자식들의 귀향을 반대하고 있어서 실제적인 숫자는 많지 않은 형편이다. 오히려 도시에 살면서 가정이 파괴된 경우, 아이를 고향의 부모에게 맡기고 자신은 계속 도시에 사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지역아동쎈터’에는 이렇게 맡겨진 아이들이 많이 있다.

④ 땅투기(보유)인
농토를 부동산투기 목적으로 혹은 앞으로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구입하여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요즘 웬만한 농토는, 특히 경관이 좋은 곳의 농지는 대부분 도시인들의 소유이다. 원래의 땅 주인인 농민은 땅을 도시인에게 팔고, 자신은 그 땅에 농사를 짓는 소작인인 경우도 종종 있다. 이 땅 주인들은 농촌 및 농업의 발전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농지값을 올려놓아 귀농인들의 앞길을 막는 수가 많다.

 (2) 결혼이민여성들의 증가
농촌의 노총각들이 장가를 가지 못하게 되면서 외국의 처녀들이 결혼이민으로 농촌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내국인으로서 외국인과 결혼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농촌사람들이다. 면 단위마다 10-20가정 정도로 추산된다. 1990년대부터 진행되어온 결혼 이만은 처음에는 중국의 동포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위장결혼, 생활문화의 차이 등으로 인해 감소하였고, 최근에는 베트남 여성들이 크게 증가하여 2007년 봄 전라남도에서는 도차원에서 베트남 축제를 열기도 하였다. 결혼하는 총각들은 농사노동력을 가진 농민들이 대부분이다.

결혼이민여성들의 증가는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며 농촌사회는 이를 소화할 역량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특히, 2세들의 출산과 성장은 해결해야할 과제들은 많이 안겨 주고 있다. 병든 농촌사회에 부과되고 있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제는 외부의 따뜻한 시선과 뒷받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앞으로 영농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3) 고령자의 증가와 사망
농촌사회의 고령화 현상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대체로 각 마을마다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20-30년 후이면 농사노동을 이어갈 사람의 대가 끊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령화되면서 점차 사망률도 높아지고 농촌인구는 자연 감소되고 있다. 이에 홀로 외롭게 노년을 보내는 독거노인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농사도 사람이 짓는 것이다. 농토만 있어야 소용이 없다. 정부는 농촌인구의 감소에 대한 대비로 기업적 전업농가의 육성을 기하고 있으나 그 또한 전망이 밝지 않은 편이다. 농지 소유 및 임대의 증가는 농산물의 1인당 생산량은 증가시키겠지만, 농산물 가격과 유통이 생산비를 보장하지 못하게 되면 오래 지속되기 어려우며, 그 보상은 대개 농지값의 상승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 가구당 경지면적이 늘어난다고 해도 미국, 브라질, 호주 등 대규모의 조방(粗放)농업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경쟁력을 뒷받침할 만한 규모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식량자급율 26%에 불과한 우리나라, 그리하여 머지않아 달칠 것으로 예견되는 식량위기를 생각하면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렇듯 농촌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세습해오던 농사인력은 이제 대가 끊기고 새로운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기계화, 규모화를 통해 극복하려하겠지만 농업이 지닌 자연생태적 성격을 인위적 방법으로 대체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중산간지대가 절반 이상인 우리나라의 농지, 가구당 평균 1.5ha에 불과한 경지면적, 노동력의 대폭적인 감소 등을 생각하면 종래의 화학농법 중심-구조적으로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다-의 정책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2) 정책이 바뀌고 있다 - 정책의 이중성
지난 세기 특히 1960-70년대의 농업정책은 생산력 중심이었다. 쌀 3,000만석을 생산하기 위해 통일벼인 ‘노풍’을 보급하다가 발생한 문제는 그 상징이다. 식량자급 달성이 최고의 목표였다.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농약과 화학비료의 생산을 증대시켜 농가에 보급하였고, 농법은 그에 맞는 화학농법이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농과대학에서 가르치는 농학은 생산력 중심의 서구농학으로써 자연과 생명을 인간 중심적인 입장에서 대상과 수단으로 보는 이원론적, 실용주의적 가치관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경제생활의 수준이 향상되고, 수입농산물의 종류와 양이 계속 증가되며, 화학농법이 지닌 문제와 한계가 실증적으로 논의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전개된 생명운동과 관련을 갖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와 각종 환경오염에 의한 피해를 경험하게 되자,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생명’이 시대의 화두(話頭)로 등장하였다. 1990년대 이후 이 운동은 대중화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최근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 결정에 대한 전 국민적인 저항은 이런 의식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정부는 농업정책을 기존의 관행농법을 중심에 두면서 생명농법에 대해서도 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용어로는 친환경농업이다. 김대중 정권하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낸 김성훈 현 상지대 총장은 친환경농업을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와 정책을 수립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친환경농업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아직 농가 수와 농업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5% 정도 작지만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건강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은 이중적이다. 농정의 철학이 없다. 관행농법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친환경농업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시행하는 형국이다. 친환경농업으로 모두 전환하면 생산량이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앞날을 내다보며 친환경농업이 갈 길이면 그 길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해결할 방도를 세우며 가야하는데 전혀 그런 의지는 보이지 않고 있다. 친환경농업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뒷받침하는 정책, 생산 및 유통 정책이 함께 수립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농정에는 기대할 것이 없으며 농민들은 각자 자기가 알아서 살길을 찾아 나가야하는 실정이다.

식량자급율 26%에 불과한 우리의 형편에서 만일 식량위기가 갑자기 닥쳐오면 어찌할 것인가? 정부는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고 있는가?3) 자동차 수출을 위해 여전히 농산물 수입을 계속할 것인가? 자동차 타는 즐거움보다 배부른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를 살리는 양식(糧食)의 생산보다 모두를 죽이는 자동차(대기오염, 도로 증설로 인한 생태계 파괴, 차량사고로 인한 사상자의 증가 등)생산이 더 중요하다고 확고하게 믿는 이 시대의 바알 숭배자들을 어찌할 것인가! 농정의 일대전환이 요청되고 있다.

3) 농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최근 들어 농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예전에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생각과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는 말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고 농민들의 고생과 희생을 인정하여 농민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었으나, 도시화가 더욱 진전되어 농업을 모르는 세대들이 늘어나고, 자본주의적 가치가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농업도 그 역사와 가치의 입장에서 보다는 자본(이해관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제 농민들도 과거와 달리 도시인의 동정심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상품으로써의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농업을 산업의 한 분야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고, 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할 산업 정도로 격하하고 있으며, 생산력 중심의 입장은 농업의 역할과 비중을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농산물과 농민의 삶이 지니고 있는 경제외적인 요소들 즉, 공동체적, 자연생태적인 요소들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있으며, 농업이 지니고 있는 삶의 양식은 경제논리에 의해 폄하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광우병, 조류독감 등의 질병들은 생명을 물질로 보는 도착(倒錯)된 가치관으로 이윤추구를 최대의 목표로 하면서 발생한 사건들이다.

반면 의식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농업이 매우 소중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해 농업을 올바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귀농하는 사람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농업이 중심이 되는 생태적 삶의 양식을 동경하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농업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바람직한 인간적인 삶의 토대로 생각한다. 고무적인 일이다. 이제 농업의 본래 위치를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결국 땅의 존재이다. 땅을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다. “양식이 없으면 죽는다”, “농업이 없이는 문화도 없다”(Without culture, no culture), “의로운 사람과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다”는 신앙고백이 필요하다.

4) 땅이 죽어가고 있다
땅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였다. 땅은 모든 생명을 기르고 품는 어머니이다. 하늘 기운(天氣)과 땅기운(地氣)이 합쳐지면 모든 생명이 자라고 번성한다. 그런데 그 땅이 화학농법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땅투기로 물질화되고 있으며, 산성비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지으신 땅이 아니다.

농업에 필수적인 생산수단은 땅이다. 땅이 있어야 노동력이 제 값을 한다. 땅없는 농사는 생각할 수 없다. 농업은 땅을 생명으로 본다. 이것이 다른 산업과의 차이이다. 세상은 땅을 ‘돈’으로 보라고 한다. 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적 존재가 아니라 돈으로 평가되는 부동산이다. 땅을 생산수단으로 삼는 농업을 멸시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인간은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빼앗아오는 만용을 부리고 있다. 교회 역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투기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땅의 물리화학적 성격이 또한 바뀌고 있다. 점차 늘어나는 산성비에 의해, 농사용으로 사용하는 화학농약과 화학비료에 의해 땅의 생명력이 죽어가고 있다.4) 또한 도로의 건설이나 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인해 땅은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있다. 생존의 토대인 땅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편리와 욕구 충족을 위해 마음대로 위해(危害)를 가해도 되는 것인가?

5) 종자가 바뀌고 독점당하고 있다. 
최근 들어 유전자조작농산물(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GMO임을 반드시 표기하도록 하는가하면 소비자 단체 및 생명운동 단체들은 GMO자유지역을 선포하면서 GMO 관련 식품들에 대한 경각심을 제고하고 있다.

과거에는 동식물의 품종을 개량할 때 같은 종(種)내에서 하였고, 실험적 조건을 갖추어서 세대기간을 짧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기 까지는 시간도 오래 걸렸고 그 변형의 범위와 수준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전공학의 발달과 더불어 그 양상이 질적으로 달라졌다. 종내교배에 머물던 실험은 종간교배로, 나아가 동물과 식물 그리고 미생물의 경계를 넘어서서 식물의 유전인자를 동물에도 넣고 동물의 것을 식물에도 넣으면서 생명계가 이제껏 탄생시키지 못한 새로운 생명체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아직까지 이것들이 인간에게 해로운지에 대한 검증도, 또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거대 농산기업들(agribusiness)의 권력과 물질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생산, 유통되고 있다.5)

또한 세계의 우수한 종자들을 수집하여 각종 실험을 거쳐 생산력이 우수하고 질병에 강한 품종을 만들어서 전 세계의 농민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농민들은 자기 지역에서 수천 년 간 재배해온 종자를 쓰지 않게 되고, 그들이 만들어 파는 종자를 계속 구입해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각국의 종자회사들이 거대 곡물기업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유수한 종묘회사들도 이미 외국기업들에게 넘어간 지 오래이다.

위의 사실들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종자의 독점현상이다. 거대농산기업들에게 종자가 독점되어 전 세계의 농민들이 그에 종속될 우려가 있다. 농민들의 삶이 기업들의 자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농업적인 삶의 기반이 취약해 질 것이다. 둘째, 종자의 독점은 각 나라가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농업의 토대를 허물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종자들은 각 나라에서 수 천년에 걸쳐서 그 나라의 기후와 토양 조건에 맞는 것들로 유전자가 고정되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 종자는 그 지역에서 자랄 때 가장 건강하게 자라고 인간의 건강에도 좋다. 오랜 기간 그 농산물을 섭취하면서 삶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셋째, 유전자 조작농산물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 건강에 대한 위협 및 생태계교란에 대한 우려를 안고 있다. 현재 국내에 수입되는 농산물 중 콩이 대표적이며 옥수수는 사료의 형태로 수입되고 있다. 농민들은 자기가 심는 종자가 어떤 종자인지 분명한 확인을 하지 못한 채 작물을 기르고 있다.

 이상 제기한 농촌사회의 여러 변화들 속에는 부정과 희망의 요소들이 혼재해 있다. 공업중심의 도시문명의 온갖 쓰레기들이 농촌사회로 흘러들어오고 있으며, 정치경제체제의 모순에 의한 찌꺼기들도 쌓이고 있다. 역사의 쓰레기통과 같은 농촌 현장! 여기서 무슨 희망을 발견할 것인가?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과 살림의 역사가 강한 곳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서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의 문제이다. 깨달으면 희망이요, 못 깨달으면 절망이다. 희망을 발견하면 희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농촌목회자와 농촌교회의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3. 농촌교회는 어떻게 바뀌어야할까?

 1) 교회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 교회 - 그 전통적인 이해

 교회란 무엇인가? 농촌교회란 무엇인가? 왜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가? 왜 우리는 ‘지역’과 ‘생명’을 중심 주제로 선교하고 있으며 해야할 것인가? 농촌교회에 대한 자기 정의와 선교적 과제를 분명히 살필 필요가 있다. 

(1) 구약성서적 이해 

① 구원의 방주
전통적으로 교회를 구원의 방주라고 부른다. 이 말은 구약성서 창세기 6장 이하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성(聖)과 속(俗)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인데,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더럽고 속된 곳이요, 따라서 세속을 떠나 교회라는 방주로 들어가서 구원받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 교회관에서는 세상이 망하고 심판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나 책임의식이 없다. 오로지 교회에 나와 구원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구원받은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기독교윤리적인 지침도 매우 허약하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언급이나 책임은 없고 오직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원론적 타계주의로 흐른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노아의 방주는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교회를 그동안 인간만의 구원을 위한 방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피조물 전체의 구원과 살림을 위한 방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길이 300규빗, 넓이 50규빗, 높이 30규빗 크기의 커다란 배에 인간은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의 공간은 다른 생명체들이 차지했었다는 점에서 노아의 방주는 셍명 전체의 구원을 위한 방주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교회는 생명전체의 살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먼 곳으로 탈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열어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가 성서를 새롭게 보도록 만들어준 경우이다.

②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들어왔을 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불러 십계명 등 여러 명령을 주시면서 계약을 맺으셨다. 이 때 부르심을 받고 모인 모임이 교회의 원형이다.6) 부르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불러서 계약을 맺으셨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계약을 맺으신 선택된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③ 남은 자
구약성서에는 ‘남은 자’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돔 고모라성에 대한 유황불 심판에서 살아남은 롯의 사건, 바알과의 싸움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남은 자 7,000명, 아모스가 말한 심판과 구원, 이사야의 남은 자, 스바냐,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예언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그 가운데서 남은 자가 있어서 미래의 새 세계를 열어갈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남은 자는 믿음의 사람이요, 의인이요, 청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심판에서 살아남는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살리는 역할을 갖고 있다. 이 ‘남은 자’는 오늘날과 같이 심판이 임박한 때에, 종말론적 성격이 강한 시기에 특히 의미가 있다.

‘남은 자’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카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카할’은 에클레시아로 번역되었다. 신약과 구약의 신학적 연결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신약성서적 이해

 ① 그리스도의 몸
사도바울은 교회(에클레시아)를 ‘그리스도의 몸’(엡 1:23, 골 1:24)이요,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엡 1:22, 골 1:18)이며 성도들은 그 지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고 말하고 있다. 교회를 생물적 존재로, 유기체로 말하고 있는데, 이는 머리를 중심으로 하여 온 몸이 신경, 근육, 혈관 등으로 연결되어 있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뜻하며, 모든 기관과 지체들이 유기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도들의 모임이다. 부활 후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사역하시는 현장이다. 성령을 통하여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의 현존을 체험하고 앞으로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을 소망하며 활동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의 기구나 단체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로 끊임없이 생성되고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② 포도나무와 가지
예수께서는 비유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고 하셨다. 이 역시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관계를 유기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포도나무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가지는 뿌리와 줄기로부터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새로운 성장을 이루어 나간다. 포도나무 열매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가기 위하여.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고 자라가는 것이다. 가지는 나무로부터 떨어지면 죽는다. 생명을 갖고 본연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려면 줄기에 붙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을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된다.7)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숨’을 지속적으로 들여 마셔야 생명력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3) 생명의 관점에서 보는 교회 
‘생명’에 대한 이해에는 생물이 주변 환경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생존원리와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와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다. 동시에 생명의 세계는 신앙적으로 말할 때 오묘하고 신비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세계이다. 전자는 과학(생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후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과학적 이해와 신앙적 이해는 상호소통이 이루어질 때 보다 풍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생명’은 두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ϐίο󰐠(비오스), ζωή(조에)가 그것이다. ‘비오스’는 이 땅에서의 삶을 뜻하는 것으로, 주로 육체적 생명을 뜻하고, ‘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속한 초자연적 생명, 신자들이 장차 얻을 것이며 또 지금 여기서도 즐길 수 있는 생명을 뜻한다.8) 또한 ‘조에’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공동체적 생명이기도 하다.

생명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생태적 개념으로서의 ‘생명’과 함께 성서에서 보여주는 신앙적 개념으로서의 ‘생명’을 함께 생각해야한다. 비그리스도인들도 ‘생명’을 말하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생명’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일반 사회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과 ‘기독교신앙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을 구별지어주고 기독교생명운동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주기 때문이다.9) 생명교회론을 말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있는 성서적 토대요 운동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세계적 지평의 에큐메니칼 연대가 가능하고 한국(농촌)교회의 역사적 축적이 세계선교에 기여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될 수 있다.

①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교회
생명은 자기존재의 지속성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한다. 안으로는 대사작용(metabolism)을 하여 에너지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순환시키고, 밖으로는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적응하고 투쟁하며 살아간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 에너지로 자기존재를 지탱한다. 에너지의 원활한 생산과 활용이 그러므로 매우 중요하다. 생명의 기운은 에너지의 생산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생명이 있으려면 에너지가 충만해야한다. 그 에너지(기,氣)는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로부터 나와야하는데 그 지체들의 에너지는 몸의 대사에서 비롯되며 그 대사작용은 머리에 의해 조종, 지배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일으키는 대사작용에 의해 에너지를 공급받고, 에너지의 활용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통할된다.

교회의 생명력은 바로 이 머리인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고 몸의 대사작용이 활발할 때 충만하게 된다. 오늘날 그것은 부활하신 후 우리에게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의 기운에 의해 이루어진다.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교회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이다.

② ‘생명’의 영을 기르는 교회
생명은 자란다. 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한다. 성장하면서 동시에 성숙한다. 성장시기에 따라 몸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 환경으로부터 도전받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달성해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생명교회 또한 성장해야한다. 그 성장의 제1은 영적 성장이다. ‘생명의 영’을 기르는 것이다. ‘생명의 영’이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의 깨닫고, 자신과 전체와의 일체성을 통찰하면서 타생명체와의 형제자매관계를 회복하는 ‘살림’의 영이다. 이것은 ‘조에’가 모든 피조물에게 주어진 공동체적 생명이라는 성서적 이해에 바탕하는 것이다.

인간적 지평을 넘어서서 모든 생명은 한 형제요 자매이다. 생명교회는 타 피조물과의 이런 관계를 회복하여 지구생명공동체를 복원해 나가는 생명의 영을 기르는 곳이어야 한다.

③ ‘생명’의 숨을 나누는 교회
생명은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 숨은 삶이다. 들숨과 날숨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때 몸의 대사가 원활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입으로는 먹이가, 코로는 숨이 들어가고 나와야 하는 것이다.

육신의 숨을 통해 물질대사가 이루어져 성장하듯이 영적인 숨을 통해 영성이 자란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숨을 내쉬며 나누어 주시는 숨, 그 숨이 바로 성령이시다. 생명의 숨은 따라서 그리스도의 숨이며 성령이시다. 그 숨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아야하고 서로 나누어야 한다. 성령은 나눔의 영이시다. 나눔을 통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가신다. 생명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영을 받고 그것을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교회이다.

 (5) ‘생명’을 살리는 교회
생명의 영은 생명살림의 실천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자란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생명을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생명의 영을 받은 사람은 죽임의 현장을 무심하게 지나치지 못한다. 생명의 교회는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죽임의 사건들 속에 살림의 영을 불어넣는 교회이다.

동시에 생명교회의 지체들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죽임의 생활습관을 버리고 살림의 생활로 탈바꿈하는 사람들이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우선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생명교회는 그런 분들의 모임이다.

 ⑤ ‘죽임’의 세력과 싸우는 교회
살림의 반대는 죽임이다. 오늘의 문명은 죽임의 문명이다. 인간만의 편리와 풍요를 위해 달려온 결과이다. 이 죽임의 세력은 매우 구조적이며 막강한 자본과 권력을 갖고 있다. 물질을 숭상하는 바알의 세력은 자본과 권력의 힘을 믿고 자기 체제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여기에 대항하는 생명의 세력은 현실적으로 매우 미약하다. 그러나 저들에게 돈과 권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에 대한 믿음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물맷돌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듯이 생명의 세력은 믿음으로 저들을 물리칠 것이다.

생명은 정의에 의해 보전된다. 인간의 불의(不義)는 모든 생명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죄악이다. “생명을 보전케 하라”(창 6:19,20)는 하나님의 명령은 정의의 하나님에 의해,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생명의 교회가 설 자리는 분명하다. 생명을 죽이는 불의한 세력과의 투쟁의 현장에 서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의와 생명은 하나이다. 정의운동과 생명운동은 하나로 합류되어 나가야 한다.10)

 (4) 농촌교회란 무엇인가?
 농촌교회는 위에 언급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면서 지역사회의 생명문화선교공동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교회가 있는 지역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 구원하는 살림의 생명공동체인 것이다. 지역에서 살고 있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벌레 한 마리 등 모든 생명체를 보듬고 돌보면서 인간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생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교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생명의 숨을 나누어 주고 생명의 영을 길러주는 곳이어야 한다. 나아가 주민들 모두를 살림의 일꾼으로 변화시켜 삶 전체를 죽임의 영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온실가스에 의한 지구온난화로 머지않아 닥쳐올 기후대재앙의 심판에 대비하여 종말론적 신앙고백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을 대비해 나가는 신앙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나가야할 것이다.11) 생명농업운동과 그에 기반한 공동체운동은 앞으로 닥칠 고난의 시대상황을 이겨나가는 바탕이 될 것이다.

2) 농업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1) 구약성서의 이해

 ① 하나님은 농부이시다
구약성서 창세기 1-2장의 이야기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고 있다. 이 창조의 위대한 능력과 신비한 모습을 가장 비슷하게 체험하고 닮을 수 있는 일이 바로 생명농업이다. 생명농업은 하나님이 농부이심을 깨닫고 그 모습을 닮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②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농부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후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좇으면서 “그들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창 3:23)고 하셨다. 농업은 이렇듯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농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최초의, 유일한 직업이다. 물론 이 때의 농업은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생명농업이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농업을 인간존재의 근원과 연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점이다. 땅과 인간은 존재, 노동, 생산 등 여러 영역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③ 노아는 심판 후 새 세계의 농부였다

노아는 홍수 심판 후 새 세계를 열어가면서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창 9:20). 파국 이후 인간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일은 농업이었다. 오늘날 기후대재앙이 조만간 닥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기후재앙은 현대판 홍수심판이 될 것이다. 그동안 인간이 피땀 흘려 이룩한 도시산업문명이 일거에 붕괴되고 새 세계를 열어가야 할 상황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농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생명농업운동은 파국을 대비해나가는 예언자적 실천 운동이다.

 ④ 농업은 의(義)와 화평의 바탕이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시 37:29). 땅을 차지하는 사람 즉 농업으로 생계를 잇는 농민적인 삶은 의로운 삶이요 화평을 누리는 삶이다. 정의와 평화(justice and peace)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합하는(integration of creation) 자연생태적인 농민의 삶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자신의 탐욕과 싸워야 하고, 외부의 시선과도 싸워야 한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2) 신약성서의 이해

 ① 예수는 농부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을 보면 농사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씨뿌리는 비유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농사에 대하여 깊은 관찰력으로 지켜보셨거나 아니면 직접 지어본 경험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12) 당시의 사회가 농경사회였던 점을 고려할 때 어떤 형식으로든 농사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을 하셨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② 온유한 자와 농업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基業)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씀하셨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땅을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농사로 생계를 잇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농사를 짓고 살 것임이요”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온유한 마음과 농업은 매우 중요한 관계에 있다. 따뜻하고(溫) 부드러운(柔) 기(氣)가 생명을 살리는 힘이기 때문이다.

 3) 농촌목회자 및 목회의 내용이 변해야 한다

 (1) 신학적, 목회적 입장의 변화

 농촌교회와 농업에 대한 인식을 위와 같이 바꾸면 목회자들의 과제가 보다 분명해진다. 설교, 교육, 심방, 기도 등 모든 목회활동이 ‘생명살림’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인간구원13), 그것도 개인구원 중심의 사역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생명전체의 구원과 살림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갈 방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① 이원론적 사고에서 일원론적이고 통전적 사고로

② 실체론적 사고에서 관계론적 사고로

③ 교회 중심적 입장에서 지역(세상) 중심의 입장으로

④ 개인구원 중심에서 사회전체의 구원으로

⑤ 인간중심의 구원관에서 피조물 전체의 살림으로

⑥ 경제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

⑦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선후의 관계가 아닌 상호 침투적 관계로

⑧ 인간 주체(휴매니즘)에서 하나님 주체(하나님 중심)로

⑨ 개교회 위주에서 에큐메니칼 입장으로

⑩ 목회자 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⑪ 구속신앙 중심에서 창조신앙으로 추를 이동

⑫ 생명의 영성기르기 

(2) 새로운 과제의 설정

 ① 설교: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내용. 생명농사와 신앙고백, 생명교회론

② 성경공부: 성서에 나타난 생명과 평화사상과 사건들에 대하여

③ 영성훈련: 생명살림의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운영

④ 생명선교 프로그램

ⓐ 생명농법으로 전환시키는 생명농업운동(교육, 견학 등을 통해)

ⓑ 생명농산물을 유통시키는 일(영농조합법인, 생활협동조합, 작목반의 조직과 운영)

ⓒ 지속적인 교육 프로그램(강사 초빙 등을 통해)

ⓓ 개인적 생활에서의 환경보전 프로그램의 실천(합성세제 안 쓰기, 불법소각 방지, 폐기물 무단 매립 방지, 수입농산물 등 유해식재료 사용 안하기, 화학조미료 안 쓰기, 전기, 기름 등 에너지 절약, 생명밥상 빈그릇 운동 등)

ⓔ 지역사회 환경보전운동(유해시설 설치 반대, 쓰레기 줍기, 농약병, 폐비닐 등 폐기물의 올바른 처리, 지역의 하천이나 계곡을 청정하게 유지 관리하기, 계몽활동 등)

ⓕ 생명학교 및 수련회의 운영(초중고생 대상, 도시교회 청소년 및 청년 대상)

ⓖ 도-농교회간의 농산물 유통 및 교류 프로그램의 운영 

⑤ 복지선교사업

ⓐ 지역아동쎈타의 설립 및 운영

ⓑ 지역내 독거노인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

ⓒ 결혼이민자 교육 프로그램의 운영

 3) 선교적 비전을 바꾸어야 한다 

농촌교회의 선교적 비전은 무엇인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많은 목회자들의 목회 목표는 교회성장이다.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는 목회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여기저기서 열리는 교회성장세미나에는 자리가 꽉꽉 찬다. 교회성장의 목적은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인가? 오늘의 기업논리와 다른 차이는 무엇인가? 언어만 교회용어이지 내용은 기업성장논리와 별 다를 게 없다.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성취동기와 탐욕이 빚어낸 결과이다. 명예와 부와 지위를 위한 욕망의 결과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농촌교회를 외면하는 이유가 다 세상적인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농촌교회는 기본적으로 양적인 성장 중심의 목회현장이 아니다. 농촌은 ‘고난의 현장’이다. 앞으로 더 심한 고난이 닥칠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구원은 언제나 고난을 통해 훈련받은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해 왔던 것을 기억하자. 애굽에서의 종살이 400년, 광야에서의 40년, 모세의 미디안광야에서의 40년 생활 등은 고난을 통한 훈련과 교육이 세상구원과 새 세계를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고난의 현장을 기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축복임을 깨닫는 사람은 행복하다. 풀무질을 통해 정금같이 나오는 사람이 미래를 위한 선교적 일꾼으로 택함을 받는다. 농촌 현장은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축복의 현장이다. 예수님은 갈릴리 현장에서 세상구원을 도모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았을 뿐이다.

농촌교회의 선교적 비전은 고난을 통한 세상구원의 막중한 소명이 농촌교회에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사회의 미래는 농촌과 농촌교회에 달려있다. 일부 대형교회들을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맘몬의 포로가 되어 바알의 전당으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너희는 벧엘로도 가지 말고 길갈로도 가지 말라”는 선지자 아모스의 말씀이 오늘의 교회를 향한 말씀은 아닌가? 교회의 참된 본질을 회복하고 그 생명살림의 소명을 감당할 곳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한경호 목사의 살아온 길(기독교사상2003,10월호 참조)

 21세기의 농촌선교(한경호 목사)
한경호 목사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축산 시험장 연구원과 방송통신대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1985년 서른네 살이 되어서 늦깎이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농과대학을 다닌 것이 계기 였을까, 그의 관심은 유난히 농촌을 향했다.장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부터 일을 벌였다.

대학원에서는 첫 농촌목회 동아리였던 ‘농어촌선교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촌목회를 하는 선배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예장농목’이라는 목회자 모임도 만들었다. 강원도 원주시와 가까운 호저읍에서 호저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해 본격적인 농촌목회를 시작한 해가 1987년이었다.

이때부터 12년 간 그는 호저교회를 중심으로 농촌목회에 몰두했다. 1989년에는 호저생협(지금의 원주생협)을 만들었다.농촌교회로선 처음으로 생협활동에 나선 교회가 된 것이다.특히 도시의 생협들이 소비자 공동체인 데 반해 호저생협은 생산자 중심의 생협이었다. 전국에서 충남 홍성의 풀무생협과 함께 두 군데밖에 없는 생산자 중심의 생협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무렵 강원 지역에서 농촌목회를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엮어 강원농목,그러니까 ‘강원지역 농민목회자협의회’를 구성했다. 함께 목회 구상도 나누고,여름에는 학생들의 연합 수련회도 열면서 농촌목회의 지평을 넓혀 갔다.12년 동안의 호저교회 목회에서 그는 많은 경험을 했다.1993년에는 원주환경운동연합을 구성했고, 원주 NCC도 조직했다. 인권문제가 터지면 그는 곧장 대책위원회를 기동성 있게 꾸렸다.특히 온생명농사회라는 교인들의 모임은 생명농업을 보급하는데 기여했다.

원주총선연대와 원주대안학교설립 추진위원회 조직에도 그가 앞장섰다. 작년에는 ‘남한강3도 생협’을 또 탄생시켰다.1999년부터는 교회 목회를 접고 보다 전문적인 농촌목회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귀래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농촌과 목회>라는 계간지를 내면서농촌목회는 이제 농촌운동의 모습으로 보다 깊이를 더해갔다. 현재는 강원도 횡성에 있는 횡성영락교회에서 변함없는 농촌목회의 길을 성도들과 함께하고 있는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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