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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경직 목사의 업적은 여러각도에서 조명해야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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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16  20: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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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경직 목사의 업적은 여러각도에서 조명해야
   
 

한경직 목사 기념사업회가 지난 9일 한 목사의 모교인 숭실대학교 한경직 목사 기념관에서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 한경직 목사’ 를 주제로 기념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또 영락교회(이철신 목사)도 고 한경직 목사(1903-2000) 14주기를 맞아 이번 주간을 ‘한경직 목사 기념주간’을 정하여 추모행사들을 하고 4월 16일(수)에는 김장환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다.

한편 숭실대학교에서 열린 기념강연회 주강사인 손봉호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고신대 석좌교수)는 ‘탐심이 없는 지도자’ 라는 제목으로 발제하고 박경조 주교(전 대한성공회 주교원 의장), 김홍진 신부(쑥고개성당 주임), 송월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 법정 스님(평화재단 이사장), 이성택 원로교무(전 원불교 교정원 원장), 그리고 박남수 선도(한국종교연합 상임대표, 천도교 교령) 등의 응답이 있었다.

주발제자인 손 교수는 요즘 한국교회가 활발하게 사회봉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과 행동의 불일치와 내부의 극심한 부패로 세상 속에서 그 신뢰도가 추락 할대로 추락한 지금, ‘겸손한 지도자’였던 한경직 목사가 살아있었더라면 한국교회가 이렇게까지 처참한 상황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손 교수는 한국교회 신뢰 상실의 이유로 기독교적 가치보다는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더 추구하기 때문”이라며 “아직도 순수성을 유지하는 교회와 지도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 개인적인 경건에만 집착할 뿐 교계 전체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되어 있어 사회의 신뢰를 회복시키기에는 턱없이 수가 적다”고 지적했다.

한경직 목사가 유학시절 폐결핵을 앓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이후 치유를 받고 남은 생을 덤이라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고 전해진다. 유학중에는 신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고 선진국이 이룩한 모든 학문과 문물을 익혔고 일제하 종살이 하던 이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많은 것을 생각했던 지도자였다. 그렇기에 한 목사는 한국교회의 위대한 증인들인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김용기와 더불어 한국 교계와 사회를 위한 더없이 귀중한 보배요 중요한 자원”이다.

이 말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천주교회에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면 개신교에는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한경직 목사만큼 폭넓게 존경을 받는 원로가 없다. 그 분만큼 위대한 생을 사신 분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매년 명사들을 초청하여 한경직 목사의 삶을 조망하고 그 분의 자취를 배우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인생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순풍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목사에게도 많은 어려움과 시련, 그리고 도전들이 있었을 것이다. 건강의 문제도 있었고, 한 때 젊은 시절엔 이 민족의 독립과 개화, 그리고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윤하응 목사처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기독교 사회당에도 직접 관여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것들이 한 목사가 겪었던 시련들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 외에도 한 인간이었기에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다 해도 많은 고민과 약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매년 한경직 목사 추모행사는 그를 지나치게 완벽한 신앙인으로 묘사하여 자칫 숭앙하는 인상을 주었기에, 우상화로 흐를 수 있는 위험적 요소가 있다는 염려와 걱정의 목소리들이 있다. 하여 이제는 그 어른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인생은 시간과 환경의 지배를 받는데 한경직 목사에 대한 조명도 그러한 역사 속의 한 인간으로서의 번민, 유혹, 실패, 좌절, 인내, 그리고 마침내 극복과 승리 등의 다양한 각도에서 일어나야한다는 것이다.

한 목사의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한 예는 일제하에서의 그의 행적이다. 이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극적 친일은 아니라고 하여도 기독교 지도자로서는 의연하게 하지 않은 점도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놀랍게도 한경직 목사 자신이 미국의 탬플턴상 수상자로 결정되였을 때 직접 고백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으로 한경직 목사의 명예가 감소되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존경스럽게 된 측면도 있다. 또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혁명과 5.18 신군부의 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를 짓밟고 정권탈취을 하려고 만든 국가보위상임위원회 위원장 전두환 장군이 사회 각계각층의 지지가 필요할 때 그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주관한 적도 있다.교회를 지키고 국가적 혼란을 막기 위하여 했든, 아니면 두려워서 했든,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당시 국민적 정서와도 반대가 되는 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매년 이런 용비어천가와 같은 칭송의 시간만을 갖는 것은 평생을 겸손하게 살려고 애쓰셨던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한 목사가 한국교회의 더 위대한 유산으로 남기 위해서는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운 것들 까지도 과감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한경직 목사의 위대한 업적과 존경심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니다. 

긍정적인 것도 더 많이 발굴되야 한다. 한예로 한 목사가 미국 유학시절 한 지인의 소회에 의하면 한목사님 댁에 자주방문 하였는데 그때마다 보시던 책들은 당시 미국의 신학계에서 논의 되고 있는 매우 진보적인 주제들로 매우 폭넓은 세계관으로 신학을 섭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63년 wcc 재가입 청원을 수송교회 당회가 서울노회에 낼 때에 김형태 목사는 이미 서울노회의 원로인 한경직 목사님에게 말씀을 드려놓고 내락을 받았다고 후술한바 있다. WCC신학이 자유주의니 어저구 저쩌구 말들이 많은 데 이미 한경직 목사님이 다 연구분석하고 정리한 문제다.

또 한국교회의 모든 연합사업과 기관이나 학교 방송등 어느 곳 하나 한목사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영락교회의 독지가들 최창근 장로나 김동수 장로등 사업가들이 물신양면으로 교회와는 별도로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또 유신헌법을 반대하던 시위로 구속된 김진홍, 인명진 목사등 젊은 신학생들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두말없이 석방되도록 하시고 위로와 권면을 주었다는 후담도 있다.  80년 극심한 도시산업선교 탄압시기에도 영등포산업선교를 오랜동안 돕고 지원한 곳도 영락교회였다.

후임인 박조준 목사 이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존경받는 김인국 목사의 청빙과 은혜롭게 이임되지 못한 원인도 일정부분 책임이 없다고 보지 않는다. 그 후유증으로 영락교회는 안정화되지 못하였는데 원로로서의 부적절한 처신은 없었는지도 연구될 필요가 있다. 박조준 목사 말년과 이후 후임자들과 가깝게 지내지 못한 당회원들이 일만 생기면 영락교회 본 당회를 하고도 한 목사가 거주하시던 남한산성으로 찾아가서 못다 한 심정을 토로하면 2부 당회를 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런 과거들을 언급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유익도 없는 것으로 비췰 수 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부정적 이야기들이 한경직 목사의 전체적인 업적과 삶을 결코 짓누르지 못할 것이다. 별 영향력이 없는 범인과는 달리 한경직 목사님의 생애와 신앙은 한국 기독교가 존재하는 계속 회자될 것이기에, 그 분의 생애를 보다 정직하고 사실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중요할 필요가 있다.

한 목사의 부정적인 과거들을 언급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분의 겸손한 인격과 지혜가 가득한 목회관를 배워야하지만, 그의 실패와 부끄러운 선택들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있어야 하고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한경직 목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계속적으로 추모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그 어른을 신격화시켜 그 분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는 일은 옳지 못한 방법이다. 세상의 영웅과는 달리 기독교 신앙의 위인들에게는 더욱 그리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그 분을 하나님의 자리나 왕의 자리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그 분이 세상을 뜬지 벌써 14년이 되는데도 계속해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식의 모임을 갖는 것은 지양되어야한다. 이것은 결코 고인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전공자들로 하여금 한경직 목사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도록 해야 한다.

오래전 기독교역사 연구회 원로 이만열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숙명여대 명예교수)도 한경직 목사에 대하여 진솔한 마음으로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발표되지도 못했고 배척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영남신학대학교의 젊은 교회사 교수가 연구 주제로 한 목사의 친일문제에 대하여 언급을 했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또 하나 한경직 목사와 땔래야 땔 수 없는 곳이 영락교회이다.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와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주축이 된 교회이지만, 한 목사는 이 교회를 한 때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한 시대 한 교회의 성장은 기독교회 자체만의 독자적인 시간과 사건이 아니다. 모든 역사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요인이 있다. 해방 후 한국정치의 격동기 속에서 한 목사는 주류 정치세력이 되는 자유당 이승만 정권을 세우는데 남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막기 위하여 아시안반공 벨트를 조성하는 데 미국은 유학생 의 한경직 목사를 전적으로 지원한다.  당시 방송국을 방불케 하는 신형 녹음기와 릴 태입을 무한정 공급하고 지원을 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제하에서 해방이 될 때 자력으로 하지 못하여 이북은 소련의 위성정부가 세워진다. 결국 북한의 기독교와 신도들은 박해를 받게 되고 남하를 하게 되나. 남한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정부가 들어선다. 그래서 정적이 될 임정과 독립운동가 세력들인 김구 선생과 김원봉 등은 버림받게 된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을 좌경 용공으로 죽이고 탄압하는 자경단(서북청년단)들의 본거지는 바로 영락교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영락교회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자유롭게 언급되고 심층적으로 연구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사상 검사 오제도 장로의 동생이 서청 회장이었고 숭실대 김치선 교수나 서울대 나학진 교수등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거의가 영락교회였다.   

그런데도 이번 모임도 한국의 여러 종단들을 대표하는 분들을 불러서 또 다시 자화자찬식의 발표를 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그렇고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한경직 목사가 위대한 분이면 연약한 부분도 같이 소개되야 한다. 이것은 결코 불경이 아니며 오히려 한경직 목사님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되는 한경직 목사 우상화 혹 영웅화로 의심받는 추모사업회는 이제 재고되어야 한다. 앞으로 한 목사 기념사업회는 좀 더 진정성 있고 폭넓게 공과를 함께 밝히는 쪽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경직 목사 약력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출신이다. 어린 시절 기독교에 입문하여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기독교 계열 학교인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하였다.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캔자스 주의 장로교 계열 학교인 엠포리아 대학교를 거쳐, 1929년 프린스턴 신학원을 졸업하였다.한경직은 귀국하여 신의주에서 목회를 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기독교가 탄압받으면서 교회 문을 닫아야 했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된 뒤에는 신의주 지역에 소군정이 실시되면서 삼팔선 이남 지역으로 월남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장로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월남민 출신의 반공주의 목사로도 알려졌다.1954년부터 1958년까지 제6대 숭실대학 학장을 지냈다. 서울 영락교회 목사와 숭실대학교, 대광중고등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에 숭실대학교 이사장에 올랐다.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하다 월남한 후 서울 영락교회 목사로 부임했고, 1954년에는 숭실대 학장을 겸직했으며,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일했다. 이외에도 숭실대 이사장, 서울여대 재단이사장, 영락상업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대광중·고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5년 아시아전도협의회 위원장을 거쳐 기독교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 홀트양자회 이사장, 영락여자신학교 이사장, 숭전대 재단이사와 장신대·아신대 이사장,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총재 등도 지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일컫는 템플턴상을 수상했다. 무엇보다 그는 청빈과 겸손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 목회자의 표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1980년대만 해도 한경직 목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1955년 예장 통합 총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한국교회의 굵직한 교회건립이나 구호기관(선명회), 병원, 방송, 신문, 출판 등 기독교 전기관의 태동에 이름을 올렸는데 심지여 한기총까지도 한경직 목사님이 만드셨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거기서 무슨 자리나 탐하고 명예를 구하지 않으셨다. 모두가 자리를 만들고 돈을 만들고 한목사님을 찾아와서 맡아달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한국교회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지금도 논란거리지만 많은 분들이 기금이나 부동산을 기부한 것도 한경직 목사님을 보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경직 목사에 대한 연구와 발굴은 보다 광범위하게 진행이 되어야 하되 학자들에게 자유로운 연구풍토를 만들어 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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