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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과 기독교 혹은 한경직 목사큰 걸음으로 멀리보고 가자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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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5  14:5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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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과 기독교 혹은 한경직 목사

큰 걸음으로 멀리보고 가자

   

제주 4.3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의 추모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역사로 당당히 기록이 되었다.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제주지역의 피해자들의 한숨을 덜어내게 된 듯하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좀 더 많은 부분에서 규명되고 밝혀져야 할 과제들이 도리어 늘어났다고나 할까?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기독교(교회)쪽의 이야기가 정리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공개된 자료들에 의하면 기독교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고 보인다. 그리고 오늘의 잣대로 당대의 시간과 인식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도 가당찮다.

그들은 모두 한 시대의 시대적 한계 상황들을 살아낸 피해자들이었다. 문제는 우리의 시대가 좋아졌다고 일방적으로 과거의 전철들을 되밟는다면 극복해야 할 역사의 어두운 일들을 되풀이 하는 것이 될 것이다. 70년의 시간과 진보한 역사인식 그리고 민주주의적 사고로 화해와 치유가 목표인 것이라면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들로서는 여러 가지 우려가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아픔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4.3 평화재단의 전, 현직 이사장들이 모두 과거의 상처를 들추어내고 누가 죄인인지를 밝히려 한다기 보다는 진실의 규명과 상처의 치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워딩으로는 “서북청년단(서청)에 대하여 너무 감정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다. 물론 이제라도 거론되고 있는 것은 퍽 다행이다. 그런데 이런 논쟁과 분노는 비기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 전개 되는 양상이다. 벌써 진상이 밝혀져야 할 부분인데 최근에는 한경직 목사 외에도 안병무 박사까지 막무가내로 거론되니 감정이 앞서면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이 분들이 서청과 관련하여 무엇을 했다는 것은 아직 명확하게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없다. 누구도 이 분야에 증언이나 연구, 조사를 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냥 누가 뭐라고 했다는 풍문 정도다. 한경직 목사에 관한 기록도 영락교회의 역사 기록에는 없을 것이고 관련하여 언급을 하였다는 본인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많이 아는 사람도 누가 증언을 해줄 수도 없을 것이다.

   
* 영락교회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석조 건축물

기독교와 서북청년단 연구 시작돼야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자는 말은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좀 천천히 가자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집과 가족을 잃고 월남한 이들은 자연히 남한의 반공 분위기를 주도하였다. 혈기와 호기가 넘치는 청년들 중에는 완장을 찬 이들의 만용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제지하기 보다 격려하고 이용한 이들이 더 문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이 배우고 알만한 한경직 목사의 역할론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정당 활동도 하고 미국의 진보적인 신학과 사상도 접했을 그가 왜 그런 역할을 자처하였을까? 소견으로는 당시 미국의 대 아시아 반공벨트 정책을 위해 한경직을 이용한 미국의 전략일 것이다.

인도네시아도 그렇고 미얀마 등 신생 독립국가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노력한 미국은 대만과 한국, 일본에서 확고한 친미 반공주의 정권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이후 북한은 독재와 3대 세습 등으로 국제적으로 고립화의 길을 걸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밥 피어스 목사 등이 앞장선 선교기관들을 통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선명회(World Vision International)와 합창단의 활동으로 '공산주의 만행으로 인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신생 개도국의 희망과 꿈을 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 한국 선명회(World Vision)를 창립하도록 도와준 밥 피얼슨 선교사

군사정권과 보수정권이 주로 집권했던 2000년도 이전의 시기에 서북청년회는 공산당을 토벌한 그야말로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진상 조사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서북청년회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이들의 만행에 대하여 놀라운 증언들이 나왔다. 군복과 경찰복을 입고 제주도에 등장한 서북청년들은 월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 약탈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잔인한 테러와 방화, 강도, 강간, 절도, 고문, 폭행, 살인 등 학살의 중심에 섰다는 증언이고 더구나 안타까운 일은 구성원 중 상당수가 개신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 현수막 하단에 영문으로 NORTH-SOUTH ASSOCIATION(서북청년단)이라고 썼다.

서북(당시 평안북도 신의주 부군의 지역) 계통의 청년들이 월남하여 집단화 조직화된 것은 사실 이북의 공산정권에게 몰수 당한 토지와 심리적 박탈감으로 인해 반공주의로 무장하게 된 데 있었다. 그리고 남한에서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자유당의 강력한 반공정권 수립을 위하여 복무했을 것이다. 같은 서북(신의주) 출신으로서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세운 영락교회가 이런 일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영락교회는 역사적 책임을 다하고 왜곡된 부분의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이 연구를 하는 이들의 기금을 지원함으로써 '진실과 화해'를 위한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상 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장로나 제주 토벌대 장교출신 채명신, 이세호 등이 영락교회의 장로로 봉직했고 그 외에도 다수가 영락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경직 목사 스스로 말한 바도 있다. 김병희가 펴낸 『한경직 목사』(규장문화사, 1982. 55-56쪽)에 보면 다음과 같은 한 목사 자신의 증언이 나온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그동안 간간히 나왔던 한경직과 서북청년단의 모습이 이제는 대중 앞에 직면해 있다. 영락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청렴하고 모범적인 성직자로 존경받는 한경직 목사가 4.3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와 어떤 관계였는지 사과든 변명이든 나와야 할 때다. 실은 어제 '페이스 북'에서 큰 논쟁이 일었다. 아무래도 [예장뉴스]가 좀 균형잡힌 시각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들을 정리해 본다. 거기다가 최근 서북청년단이 부활했다는 소식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http://v.media.daum.net/v/20170311154910126(기사 자료) 

한 자료에 의하면 한경직 목사는 4.3사건의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있다. 한 개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다 기록할 때 비로소 입체적인 평가가 가능하게 된다. 그런 것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방 이후 한국 개신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반공주의와 친미 친정권적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도 그렇고 조병옥 등이 모두 미국 유학파였고 기독교의 장로 또는 교인들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이들을 정치의 전면에 세우기 위하여 미군정은 상해 임시정부의 귀국을 늦추었고 국내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다.

해방정국과 기독교

남한의 단독 정부를 반대한 민족주의 계열에 비하여 천도교는 친사회주의나 중도파 영향이 강했고 천주교도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단독정부 노선으로 선회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 볼때, 해방 정국에서 한국 개신교회(이하 한국교회)의 절대적 친미 우편향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제1공화국(1948-1960) 시기 동안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은 이러한 해방정국 시기로부터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극우반공체제의 성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대표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에 큰 도전이었던 제주도와 여수·순천 및 지리산 일대의 무력 충돌 사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제주4·3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경찰과 협력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 현수막 하단에 영문으로 Su -book Youth Association(사북청년단) 이라는 썼다. 

한편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역사적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보수 개신교인들은 미국에 대항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선봉장이 됐다고 강조하며 제주 4.3사건, 신천 학살 등을 언급했다. 한 교수는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은 제주 주민들을 빨갱이라며 사람들을 죽였다”며 “안타까운 게 민간인 학살에서는 반드시 선별 절차가 있었는데, 그냥 손가락질을 해서 죽이는 쪽 살리는 쪽을 선별했다. 그 역할을 목사님들이 직접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해 충격을 줬다.

그런가 하면 초기 서북청년회의 테러를 주도했다가 목사가 된 인물도 있었다. 『한국기독교흑역사』(강성호 저)에 따르면 초기 서북청년회가 조직한 남선파견대 대장을 맡으며 백색테러를 주도했던 ‘임 일’은 훗날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되었다. 한성일보와 중앙경제통신 등에서 기자로 활동을 했던 임 일은 이북의 실정을 폭로하는 글을 써서 마치 서북청년회가 ‘진실의 전파자’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는 목사가 된 이후에도 반공 활동에 앞장섰다. 저자 강성호는 그에 대해 “자신이 저지른 폭력과 테러에 대한 죄책 고백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알려진대로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와 이북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모여 만든 교회이다. 서북이란 북한의 서북 지역을 통칭하는 말로 이들의 기질은 검소하고 생활력이 강하며 조선조에서도 보여준 대로 남성다운 배포와 자력갱생의 정신이 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북에 세워진 김일성 정권의 토지개혁으로 재산 몰수 등을 당한 피해의식으로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문제는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군경과 함께 제주 4·3사건 때 제주도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립 당시 회원수가 229명에 달했던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대회장 습격, 제주4·3의 진압 등 “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만도 제주 4·3사건은 ‘공산 폭동’이었고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도 극심한 검열을 거쳤고 작가는 불이익을 받았다. 이후 4.3이 처음으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누명을 벗기 시작한 일에 한나라당 출신 제주도 국회의원들이 앞장섰다는 증언이 나왔다.

보수정치권도 합의한 해원(解寃)

이번에 제주 4.3항쟁 70주년 행사에 다녀온 이부영 전 의원(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이적)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2000년 봄 원내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원내 총무로 있으면서 당시 한나라당의 제주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양정규, 현경대, 변정일 의원 등과 함께 4.3의 규명을 공모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부영 의원이 "해원(解寃)- (원한을 푸는 것)을 하지 않으면 어쩌겠느냐, 이제 특별법을 여야가 합의하여 입법하자"고 하여 당시 이회창 총재를 이어 설득했고 소수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의 한화갑 원내총무를 설득하여 여야 합의로 입법되었다는 것이다.

또 당시 제주도 의회 김영훈 의장과 긴밀히 협의하여 지역출신 세 명의 국회의원들을 지역민들로 하여금 압박하도록 했었다고 한다. 김영훈 씨는 그후 제주시장을 역임하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났는 데 김 의장 자신도 4.3 피해 가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 입법 이후 역사학계나 제주일보 등에 의해서 기록들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제주도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국가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당한 것으로 규명되었다.

이외에도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던 것도 사실이다. 전국에서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직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일례로 1950년 3월 경남 밀양지역의 경찰서가 실시한 합숙훈련에서 ‘지방 특지(特志)교회책임자’가 정신 방면의 강사로 활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연합신문, 1950.3.16)

성결교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윤판석은 마포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 마포지구의 지도 위원이기도 했다(윤판석, 『간증백세』, 신망애출판사, 1970, 63쪽). 이처럼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극우체제의 성립과 밀접한 보도연맹에 교회 지도자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의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폭력의 신학’을 외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1988년 20년 전에 제주4·3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 되었다. 그해 6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참석자들은 “제주4.3을 외면해 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해 9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주지방회와 함께 ‘4.3해결의 과제’를 주제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교회가 그 동안 4.3의 아픔을 외면해 온 데 대한 회개”를 다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70년이 되는 올해 드디어 제주지역교회연합회 차원의 추모예배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제주에서 가장 처음 그리고 많은 교인 수를 갖고 있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예장 통합측 제주노회는 2017년 가을노회에 당시 노회장이었던 심관식 목사(현 제주교회연합 회장)가 노회 대회 석상에서 4.3 추모에 대하여 발언을 했지만 논쟁 끝에 결실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후 1년도 안 되어 교회연합 차원에서라도 이런 예배가 드려졌다는 것은 사실 좀 이른 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더 이상 미룰 일도 아니다. 증언을 할 수 있는 세대가 당시 10세였다면 현재는 80세 전후로 고령이 되었고 언제 그분들이 세상을 뜰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과제

역사적으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과 탄압은 우리민족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의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영국 아일랜드의 종교분쟁, 중국 남경 학살과 일본의 관동대지진 학살, 아르헨티나의 민주인사 실종, 남아공의 아파트헤이트, 코소보에서의 제노사이트, IS에 의한 종교탄압과 미얀마 로힝야족의 말살 등 현재 진행 중인 사건도 부지기수다.

기독교가 역사 정의의 차원에서 진실을 규명하고 손해를 배상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3단계의 조치에 앞장서기 위해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라는 진실 찾기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누가 무슨 일을 했다는 것은 정확한 근거와 증언으로 제기 되어야지 한경직 목사가 다 시켰고 보호했다는 식으로 갈 문제는 아니다.

도의적 책임과 역사적 책임은 다르다. 기독교인으로서 도의적으로는 무한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락교회 당회나 당회장이 가서 그런 일을 하는 것에 직접 재정을 지원하고 고무찬양했을 리는 만무하다고 본다. 적어도 당회록에 없다면 교회 역사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런 것을 막지 못하고 정권에 협력하고 기득권을 어떤 모양으로든 향유하였다는 것은 다른 대목으로 비판할 일이지 4.3과 관련한 서북청년회와 엮어서 비판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중립적인 증언이 나와야 한다. 얼마전 영락교회에서 당시 홍보담당을 하였다는 분의 증언도 들었는 데 신빙성은 없어 보였다.

단 2명의 20대 청년이 파송되었는 데 전도와 설교 등으로 교회봉사와 협력을 했다는 증언이었다. 무엇보다 서청은 무기를 갖지 않았다는 주장에서 학살의 당사자로 회자되는 것에 불만들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증언들은 거의 학술적으로나 사료적 가치가 없는 구술 증언에 불과하다. 좀더 구체적이인 가해자 편의 진술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위대한 걸음은 시작되었고 국가에 의해 되물릴 수 없는 민족사로 기록이 된 것이니 서두르지 말고 우리끼리 상처 내고 물고 뜯기보다 차분하게 연구와 조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총회의 역사 연구회나 교회 사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노회의 발의가 있으면 좋다고 본다.

연구하여 발표를 하고 결론을 내고 총회적으로 헌의를 해서 이미 신사참배 결정을 교단 차원에서 되물리는 결의를 하였듯이 앞으로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총회적으로 제주도민과 역사 앞에 사과할 것은 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지 개인적으로 한경직이 어떠고 아니고 하는 식의 단편적인 논쟁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본다.

언젠가도 말했듯이 한경직 목사에 대하여 앞으로 그런 약점이 발굴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생애에서 보여준 업적과 명성은 손상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의 약점과 판단의 인간적인 면과 교회를 위한 고육지책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검소함과 명예를 탐하지 않은 한국 개신교의 성인 수준의 한경직 목사의 생애는 그처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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