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4. 3 치유자, 화해자 돼야 - 예장뉴스
예장뉴스
Voice모임/알림/행사
기독교, 4. 3 치유자, 화해자 돼야
예장뉴스 보도부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4.04  20:23:21
트위터 페이스북

기독교, 4. 3 치유자, 화해자 돼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이홍정 목사)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주관한 “4.3 70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 가 4월 4일(수) 정오 광화문에서 열렸다. 인권센터 소장인 박승렬 목사의 인도로 시작된 예배는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도는 고일호 목사(영은교회)와 인금한 목사(기장 여신도회전국연합회 총무)드렸다.

설교는 남재영 목사(정의.평화위원장) 가 행전2:23-24를 본문으로 “구원의 역사 ‘제주 4.3’ ” 이라는 제목으로 하였는 데  "70주년이 되도록 자기 이름을 가지지 못한 제주4.3은 이제사 폭도요 빨갱이라는 야만적이고, 불의한 국가권력이 붙여준 이름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가지는 구원의 역사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권력 빌라도와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에 의해서 십자가의 중형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무덤에 장사를 지냈으나 끝내 그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처럼 제주4.3도 정의로운 자신의 이름으로 부활" 을 소망했다.

이어 한국기독청년협의회 청년들의 성명서 낭독과 이형기 목사(장신대 명예 교수)의 축도로 마쳤다. 이어 총무 이홍정 목사의 인사가 있었는데  교회협과 제주NCC의 대표단은 지난 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실에서 양조훈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과 양윤경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을 4.3사건의 해결과 평화 구축을 위해 힘을 모을 것을 약속했다.

이홍정 교회협 총무는 아직 한국교회 안에는 4.3사건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 부족하며 가해사실에 대한 고백이 발표된 적이 없음을 아쉬워하면서 “이른 시일 안에 참회와 사죄의 뜻을 담은 죄책고백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양윤경 유족회장은 “그동안 교회의 무관심과 일부 보수적인 교회의 발언으로 인해 유족들의 상처가 적지 않았고 기독교계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있었으나 오늘을 계기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 한다”며 교회협의 재방문을 환영했다.

양조훈 이사장 역시 그동안 기독교와의 거리가 있어온 것이 사실이라며 이렇게 기독교계에서 4.3사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에 대한 반가운 마음을 전했다. 이들은 제주4,3평화재단과 교회협은 화해와 상생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①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이해의 심화‧확산, ② 분단과 냉전을 넘어 화해와 상생을 추구하는 평화교육, ③ 국가 차원의 법적‧인도적 조치의 강구, ④ 집단적‧정신적 외상증후군 치유를 위한 노력, ⑤ 국내외 평화기행 프로그램의 운영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협약체결 이후 교회협과 제주NCC 대표단은 4.3위령제단을 찾아 참배했다. 오상열 대한예수교장로회 사회봉사부 총무의 기도로 참배를 마친 대표단은 평화공원을 둘러보는 것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후 4월 4일 한교협이 주관한 이 기도회는 개신교 차원에서는 외지(서울)에서 처음으로 드려진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보인다.

 

기도회 후 일부는 광화문의 대한민국역사발물관으로 이동하여 주진오 관장의 안내로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지난 3월 30일부터 3층 기획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를 관람했다.

   
*역사 박물관 옥상에서 청와대쪽으로 주진오 관장과 함께 

주진오 관장은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로 지난 정권의 중고등학교 역사 국정교과서 를 반대한 학자 중 한 분이었고 작년에 제주도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4.3에 대하여 현지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새 정부들어 그의 전공이나 연구에 걸맞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장이 된 것이다.

이 역사 박물관 자리는 본래 조선시대에는 이조(吏曹)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경제기획원, 다시 보건복지부 등을 거쳐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 개관된 것이다. 이곳에서 김인주 목사가 그동안 현지에서 연구하고 정리한 "4.3 기독교" 에 대한 발제와 토론회를 하였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경  

(다음은 이 날 기도한 제주 출신 고일호 목사의 기도문을 소개한다.)

   
* 기도하는 고일호 목사

제주 4.3 70 주년 추념식 기도문

인간의 입으로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던 예수님! 그러나 그 불의한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진리를 증거케 하신 예수님!

70년 전 조국의 최남단 제주에서 일어난 피와 눈물과 통곡의 날을 기억하며 이곳에 저희들이 모였습니다.

가해자는 말을 하지 않고, 피해자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세월이 흘러 70년이 되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라 주장하지만, 피해자는 피해자라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진실과 실체조차 드러내기 힘든 긴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떳떳하게 “십자가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돌리라” 는 만용이라도 있었지만,  그날의 사람들은, 아니 현재의 우리들은 비겁하고 소심하여 뒤로 감추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일 때, 에덴의 동쪽 땅에도 붉디붉은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졌겠지요. 영문도 모른 채 형의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아벨의 피가 땅을 적실 때, 하늘조차 햇빛을 가리웠겠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자기 동생을 광기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며 웃음 짓던  가인의 얼굴을 볼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졌겠죠. 가인의 피를 타고 흘러내리는 살육의 본성은 70년 전 봄바람 따뜻하게 불던 제주의 땅에도 덮쳤습니다.

주여 저희들을 이 극악한 죄성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가인이었고, 누가 아벨이었는지조차 말할 수 없는 그날이 있은 지 70년 긴 세월동안 동백꽃처럼 붉은 아벨의 피가 제주의 땅에서 울부짖었습니다. 주여, 이제는 그 땅의 울부짖음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눈감지 못하고 매장당해야 했던 그 아벨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옵소서. 아벨의 죽음은 의롭게 여겨 주시고, 완악한 가인은 용서하였던 하나님 아버지의 넓은 사랑 안에서, 그 때의 아벨과 가인들이 치유함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공의를 정오의 빛처럼 나타내시는 하나님.

이제 이 민족 이 백성이 지나간 역사의 과오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 땅을 억울한 피로 물들이는 일이 없게 도와주시옵소서. 자신의 이념과 신념이 타인을 죽여도 된다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해방은 되었으나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외세에 끌려 다니다 보니 결국 같은 민족의 가슴에 총을 쏘고, 죽창을 찌르고, 불을 질러야 했습니다. 교회의 분열이 죄악이듯이, 민족의 분열 또한 이토록 가혹한 죄악이 되었습니다. 분열의 자식인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이제는 이 나라 이 민족이 한라에서 백두까지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스스로 자강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헌신하는 일꾼들이 더욱 많아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어머니의 품처럼 온 백성이 편안히 안길 수 있는 따뜻한 조국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새 하늘 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제는 제주의 땅에 피다만 동백꽃들이 다시 활짝 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해마다 4월이 되면 척박한 제주의 땅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유채 밭의 평화로움이 사라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제주를 영원히 아름답게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4370 행사 제주에서 열려

제주 4·3 70년을 맞는 금년은 의미있는 해로 지난 3일에는 그 아픔의 상징적인 장소인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는 데 행정안전부와 제주특별자치도 주관으로 열렸다. 이번 추념일이 특별한 것은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처음으로 참석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4.3 이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로 시작이 된 것은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과잉진압에 대하여 사과한지 12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요즘 여러 언론과 방송에서 특집으로 제주 4.3에 대한 소개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잊혀졌고 눌렸던 아픔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런 의견은 피해자인 제주도의 의식있는 이들의 주장이다. 과거사를 꺼내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바램들이 이번에 문재인 대통형의 추념사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4.3 은 이제 더 이상 뒤로 물릴 수 없는 역사로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 아픔의 섬 제주도가 이런 아픔을 딛고 화해와 상행의 섬이 되는 것은 모든 이들의 바램일 것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가 주목하는 것은 당시 교회와 신자들 지도자들의 피해와 희생도 중요하지만 진상을 규명하는 것 못지 않게 그 아픔과 희생의 과정을 역사정의 차원에서 발굴하고 기록하여 역사적인 교훈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국가권력이나 비호아래 양민학살은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 

언론들이 앞다투어 갑짜기 너무 많은 내용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충격적인 이야기들도 많고 선정적인 것들도 없지 않다면에서 그렇다. 아픔과 고통을 당한이들의 피해자중심의 우위보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가 피해자라는 의식으로 치유와 화해을 목표로한 것이어야지 폭로와 적대감을 키우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과는 맞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NCCK가 주관한 예배의 주제대로 역사의 정의를 바로세우는 화해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4.3 은 한국교회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데 당시 한국를 대표하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직접 언급했다는 내용에서 이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주사건에서 서북청년회의 특별한 역할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으로 직접 겪은 이들의 증언이 나와야 할 것이다.  더 정확한 자료나 증언들이 필요한 대목이다. 신앙인들이라면 이제 오래전 일이니 양심선언을 하는 분들이 나온다면 큰 의미가 있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 상황

한 자료에 의하면 1948년 당시 제주도 인구가 약 22만으로 추정하는 데 해방후 일본으로 이주했던 동포들이 6만 정도가 귀국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난리통에 다시 1만명 정도가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현지인과 외지인들의 융합으로 인한 문명적인 발전은 본토보다는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제주도는 2차 대전을 지나면서 군사적인 요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대다수 주민들의 항일의지가 높은 곳이었다. 육지보다는 계급의 분화도 적어 반상이 크게 구별되지 않은 것도 특징으로 기록된다. 가난했지만 함께 사는 평화로운 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귀국한 청년들의 선진문명 경험으로 제주도에서는 사상적으로는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는 어업과 산간 생활로 인하여 무속신앙이 팽배였는 데 기독교회의 전래로 중요한 마을에는 교회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4.3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에 제주영락교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청년들의 폭력적 활동이 두고두고 거론되는 대목인데 당시 사상 검사 오제도 장로의 동생이 서청의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서울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도 고백한 것이 기에 사실로 보이는 데 제주에 거주하는 재야 교회사 학자인 김인주 목사(봉성교회)는 실제 보다는 많이 와전되거나 부풀려서 한말로 추정하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의 일반적인 허풍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락교회가 한 때 서북청년단의 근거지가 된적은 있었다는 것은 몰라도 서북청년단을 주도하는 은신처 혹은 본부라고는 할 수 없다는 증언도 있다.

이북에서 공산당의 집권으로 토지와 재산을 잃은 이들이 대거 월남한 젊은 청년들의 반공의식은 감정적이었고 남한에서의 자유당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반공전략에 크게 고무되어 있어 우쭐되는 건달풍도 없잖아 있었다는 말이다.

최근 한 기독 청년들은 당시 서북청년회가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하여 당시로는 공산주의자를 토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하지만 분명히 억울한 희생이 있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누군가가 회개와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데 착안하고 있다.  당시 방어권이 없는 어린이와 부녀자 노인들에 대한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교회든 영락교회든 고통과 아픈을 외면하고 동조한 교회나 지도자들의 회개와 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서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바라기는 이 아픔이 우리교단 교회나 지도자들의 관여에 대하여 좀 더 밝혀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노회가 이런 문제로 작년 가을노회에서 처음으로 거론한바 있지만 구제척인 결론을 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삼이야기 1 – 교회가 입은 피해 (김인주 목사, 제공)

제주노회장(예장) 강문호 목사는 1949년 4월 총회보고에서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제주도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민족 항쟁의 처참한 사태에 빠져 사상자가 양민 1,512명, 반도가 수만 명, 가옥 소실은 34,611동, 이재자는 86,757명, 학교 소실은 초등학교 175학교, 중등학교 11개교, 교회 관계 피해는 피살자가 15명인데, 이도종 목사는 작년 6월 16일 교회로 가던 도중에 납치된 후 종적이 없사오며, 허성재 장로는 중학생에게 살해를 당하였고, 서귀포교회 임 씨는 예배당 소재를 하던 중 폭도에게 피해를 당하였고, 교회 건물 피해는 서귀포, 협재, 삼양, 조수 등 4처 예배당이 소실되고, 서귀포, 세화 등 2처의 목사 댁이 소실되었고, 교인 가옥 소실은 서귀포 1, 중문 1, 금성 3, 협재 6, 삼양 15, 제주읍 1, 외도 3, 남원 3동 이상 33호이고, 농작물 형편은 전 경작지의 5분의 1에 불과하오며, 총성이 그칠 사이가 없으므로 민중은 공포에 싸여 실로 생지옥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문호 목사의 청원에 따라 총회는 위문단을 보내었고, 희생자의 유족들과 교인들을 위로하였다. 이후 피해자는 17명으로 집계되었다. 희생의 유형별로는 산사람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사람이 4명(이도종, 진시규, 진학인, 오대호), 자택에서 피살된 사람이 6명(허성재, 부양은, 오병필 형제, 권찰, 학생), 국군에게 피살된 사람이 4명(허영국, 고창선, 지성익 형제), 차량으로 이동 중 산사람의 습격으로 피살된 사람이 2명(최순임, 김승은), 교회당과 함께 불에 탄 사망자 1명(임명선)이다.

좌익과 교회의 충돌은 이미 1930년 봄 모슬포에서 일어났다. 그해 총회 보고서에 “제주 모실포 지경에서는 반종교운동의 핍박으로 교역자와 직원의 곤난이 있사오며”라고 어려움을 적고 있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모슬포의 청년들이 1929년에 마을의 당을 파괴하였다. 1930년에는 교회에 몰려가 예배를 방해하였다.

주동자는 이운방(1909-2013)과 잠시 고향을 방문한 강문석(1906-1955)이었고 좌익 청년들이 합세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던 강흥주와 허생재 등 젊은 장로들과 충돌이 벌어졌다. 강 장로는 갈비뼈가 두 개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였다. 가해자들은 고소되었고, 벌금을 물거나 징역을 살았다. 강태국 목사(1904-1988)의 자서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강문석, 이운방은 제주의 좌익들의 지도자였지만, 4.3 거사에는 앞장서지 않고 제주를 떠났기에, 다치거나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

서서평 선교사(1880-1934)도 선교보고서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하며 염려하였다. “죽음의 위협에 처하거나, 심하게 얻어맞은 청년과 목사도 있습니다... 일본에 갔다 온 제주인들 중에 볼셰비키의 치명적 사상에 빠져 돌아오는 사람들이 유행처럼 번져갑니다. 교회를 포위하고 지도자들을 때리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대한 좌익의 반감은 잠복하였다가, 4.3사건에서 다시 분출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도종 목사, 허성재 장로 등 그리스도인들이 무장대에 의해 살해당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이도종 목사(1892-1948)는 4.3사건 초기인 6월 18일 금요일 실종되었다. 고산에서 대정교회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무장대에게 잡혔고 죽임당한 것이다. 일 년 지난 다음 잡힌 무장대원이 당시의 일을 실토하였고, 그의 증언에 따라 시신을 찾게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던 비무장 노인을, 더구나 기미년 옥고를 치르며 다리에 장애를 입은 독립투사를 생매장하여 살해한 사건은 무장대의 도덕적 정당성에도 큰 오점이 된다.

1948년 11월에 무장대는 수차례 대정과 모슬포를 습격하였다. 15일 월요일에는 허성재 장로의 집을 포위하였다. 허 장로는 교회 밖에서도 성자와도 같은 품성과 덕망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둘째 아들 허운봉이 청년단장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저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무장대는 “허운봉이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허 장로는 “이 사람들, 운봉이는 여기 살지 않고, 자기 집에 있지 않은가, 거기 가 보게나.”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죽창이 가슴을 찔렀다. 일곱 군데를 찔려 그는 절명하였다.

개신교는 아직껏 제주4.3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를 시도하기보다, 이제껏 드러난 부분만이라도 개신교 입장에서 정리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이를 통하여 개신교의 4.3연구의 주춧돌을 놓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안하고자 한다. 제주 4.3이 낯선 독자들을 위하여, 교회 혹은 신앙인과 관련이 크지 않은 부분도 필요한 만큼 함께 언급하고자 한다. 

제주4.3사건

국회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4.3을 이렇게 규정하였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광복 직후 제주에서는 극심한 실직난, 콜레라 전염, 흉작으로 인한 식량난 등으로 인한 여러 악재들이 이어졌다. 일제 말기에 많은 수의 군대를 배치하고 제주 섬을 군사기지로 삼던 일제가 패망하면서 저들은 철수하였지만, 일본에서 노동에 시달리던 비슷한 수의 제주인들이 귀향하였다. 여러 사회 문제들이 생겨나고 쉽게 해결되지 못하면서, 제주 사회는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일어난 경찰의 총기발사로 인해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전국 중요도시에서 충돌과 인명피해가 있었지만 좌익과 우익의 시위대 간에 일어난 불상사였다. 이에 비해, 제주에서는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살상이 일어났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사망한 6인은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엄마, 국민학생, 노인 등 시위 주동자들이 아닌 구경꾼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등 뒤에서 사격한 총탄에 의해 절명하였다. 다친 사람도 6명이었다.

도민들은 민과 관이 함께 총파업으로 진상규명과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조속히 수습하지 못하면서 긴장은 고조되었다. 경찰력을 증강하고, 소요세력들을 구금하여 주모자를 격리, 처벌하여 해결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만들어 냈다. 유치장에서 가혹 행위로 인한 사망자가 3인 생겨났다.

1948년 2월 제주도 남로당 대표들은 신촌회의를 통하여 무장저항을 택하였다. 격렬한 토론 끝에, 12:7로 봉기를 결정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5.10 총선거를 거부한다는 명분도 작용하였다. 장년층은 주저하는 사이에, 청년층이 거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총성과 함께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약 300명의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 등을 상대로 탄압을 중지할 것과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였다.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남군에서만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나머지 북군 두 지역에서는 이듬해가 되어서야 선거가 실시되어 의원을 선출하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조병옥은 강경진압을 택하였다. 4월 말에 무장대와 9연대의 평화협상이 시도되었으나, 실효성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쉽게 진압할 수 있다는 생각도 적절한 판단은 아니었다. 안전한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못하는 상황은, 더 많은 입산자를 만들어냈다. 국면은 악화되었으며, 토벌작전은 목표를 쉽게 달성하지 못하였다. 무장대장 이승진(김달삼)을 비롯한 지도부는 섬을 탈출하여 북한으로 향하였고, 해주대회에 참석하였다. 두 번째 무장대장으로 이덕구가 항전의 구심점이 되었다.

1948년 11월 1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무차별 학살이 그 겨울에 진행되어, 20,000명을 넘는 비무장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무자년(1948) 그리고 기축년(1949)에 까닭 없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이다. 그 이전에 전투 혹은 피습으로 인한 사망자는 1,000명 정도였다. 1949년 1월 12일 의귀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무장대 주력부대를 거의 궤멸시켰다.

1949년 6월 7일 무장대장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국면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귀순 혹은 하산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이어가는 소수의 인원들이 있었지만, 조직은 와해되었고 명분을 잃은 생존투쟁에 지나지 않았다. 1954년 9월 21일이 되어서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1957년 4월 2일에 마지막 산사람이 생포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혹은 예비검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제주지역에서는 4.3관련 입산하였던 전력이 있는 사람 2,000여명이 희생되었다. 육지의 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2,500명의 제주인들도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제주 43사건 요약

1. 광복후 제주도는 흉년과 빈곤 등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음
2. 그러던 중 1947년 3.1절 28주기 기념식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의 말에 차여 다침
3. 경찰이 이를 무시하고 행진하자 관중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항의함
4. 경찰은 경찰서습격으로 오인하고 발포하여 6명이 사명하고 수명이 다침.
5. 이 사건이후로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비롯 제주도 전역에서 파업을 개시
- 당시 제주도 직장인(공무원 95% 정도가 파업에 참여했다고 함)
6. 당시 제주도내에서 사태수숩이 안되어 육지에서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계획
7. 경찰의 과오 추궁이 아닌 제주도민을 좌익세력으로 보고 진압하기로 함
8. 3월 말 이후 파업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수천명이 감옥에 투옥됨
9. 이를 계기로 제주도내의 남로당 임원들이 무장투쟁을 결의(수백명 규모의 투쟁대 조직)
10. 남로당 무장투쟁대가 경찰을 대상으로 무장투쟁(경찰 및 가족 살해)
11. 이를 계기로 정부는 육지의 경찰대와 우익청년단(서북청년단 등)을 제주도에 급파
12. 파견된 경찰대와 우익청년단이 남로당 무장투쟁대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양민들 강간, 폭행, 살해(생존자 증언)
13. 남로당 무장투쟁대도 경찰대나 우익청년단에 동조했던 양민들 살해(강간 등의 피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음)
14. 당시 제주 43사건으로 한라산 중산간 마을이 모두 통행금지되고 폐허가됨
15. 경찰대와 우익청년단, 남로당 무장투쟁대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수가 1만4천여명이며, 미신고자를 감안하면 더 많을 것으로 예상 제주도에 숨어있던 남로당 무장투쟁대는 6.25전쟁 휴전 이후인 1957년에 생포됨

당시 제주도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수백명 규모에 활동이 제한되었던 남로당 무장투쟁대에 의한 피해보다, 수만명 규모의 경찰대와 우익청년단에 의한 피해가 훨씬 큰 것으로 증언함. 월남전쟁에 참여했던 한국군인들이 베트콩을 색출한다며 양민한살한 것과 비교될 수 있음.

[관련기사]

예장뉴스 보도부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5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6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7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8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9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10
본 교단 채영남 총회장 행보 언론들 주목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