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나는 설교다
오늘의 하나님은 누구인가?출 20:1-17
편집위원  |  oikos78@ms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12.14  23:04:49
트위터 페이스북

오늘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출 20:1-17

권진관 목사(새길교회, 성공회대 교수)

   
 권진관 교수

오늘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막상 하나님은 누구인가라고 자문하게 되면 우리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는 하나님을 믿느니 보다는 돈이나 권력이나 과학이나 기술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일 수는 있어도 늘 필요한 존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중대한 사건이나 위기에 놓여 있을 때에나 찾는 존재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평소에는 장롱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가 필요할 때에만 꺼내 쓰는 도구로 하나님이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또 하나님은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쉽게 설명해 낼 수 있는 편리한 개념적 도구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들은 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나님에게로 돌려버릴 수 있습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일들은 모두 신에게 돌리면서 그건 신의 섭리야, 그건 신이 원하신 거야, 그건 신이 예정하신 거야... 이렇게 신에게 모든 것을 돌리게 되는데, 이때 신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편리한 방편일 뿐입니다. 원시시대 사람들은 모든 어려운 현상들을 신의 조화로 보았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 이성이 발전되면서 이러한 신은 점점 더 뒤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서 이러한 신이 아직도 통용된다면, 그건 우리가 정신적으로 덜 진화하고 덜 깨어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은 모르는 영역에 계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분야에는 우리가 자율적으로 다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곳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모르고 있는 영역에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되면 과학과 지식이 발전할수록 모르는 영역은 축소되므로 하나님은 무한히 축소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영역에는 정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인가요? 하나님은 어떤 특수한 때에나, 우리가 잘 모르는 영역에만 존재하며, 나타나는 분인가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가장 관심이 있는 삶의 중심 영역 속에 계시며, 활동하시는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밤에만 출몰하는 귀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대낮에 역사 속에서 움직이시며, 밝은 등불 아래에서 역사(役事)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일찍이 하나님은 죽음과 질병의 두려움과 같은 인간 삶의 가장 변두리에 있는 영역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왕성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가 한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삶의 경계들에서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 계신, 약함에서가 아니라 강함에 계신, 따라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번영에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삶의 경계들에서는 침묵을 지키며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나에게는 여겨진다. 하나님은 삶의 중심에서 찾아져야 한다. 죽음에서만이 아니라 생명에서도, 고통 속에서만이 아니라 건강과 활기 속에서도, 죄에서만이 아니라 활동 속에서도 찾아져야 한다."

오늘의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의 중심과 관련되는 분인데, 이러한 하나님은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모세에 의해서 고백되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십계명을 보면,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한복판 속에서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 고백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십계명의 서론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에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가장 중심된 문제는 바로 노예의 종살이였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종살이로부터의 해방이 가장 중심된 과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이 해방에 관계되신 분이며 그 해방을 일으킨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출애굽기는 항상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홀로 직접 나가서 싸우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앞장서서 이끌어 가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이해하고 믿는 단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외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그 안에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요, 공간이며, 힘의 장(field of force)이며, 영이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일하시는 분이며,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노력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단적인 영, 집단적인 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중심 얼 속에 하나님은 영으로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 속에, 그들의 창조적인 마음 속에, 그들의 불굴의 용기 속에, 그리고 그들의 끈끈한 연대 속에 하나님은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출애굽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출애굽은 모세를 비롯한 히브리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입니다. 그것을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룩한 일이라고 다시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가장 중심된 부분에 하나님을 가져다 놓았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삶의 가장 중요한 일들을 해결한 그 모든 지혜와 용기와 능력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사회 속에 얽히고 설킨 문제들의 최상의 해결을 가져다주시는 궁극적인 근원이며, 마치 에집트에서 고생하던 히브리 사람들에게 해방으로 초대하신 것처럼,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문제들의 해결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주체자는 바로 인간이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의 주체자가 될 수 있도록 초대하며, 기다리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역사는 후퇴할 것이며, 우리가 초대에 응하여 최선을 다할 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앞으로 나가도록 초대하시는 앞에 계신 분이며, 종말적 희망의 원천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와 같은 영웅적인 신앙인의 하나님의 이해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은 삶의 언저리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얽히고 설킨 가장 중심된 영역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용기 있고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능력과 창조의 원천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와 해방의 원천이요, 그 얼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는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다른 종교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힌두교의 다른 신들, 이슬람의 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을 믿는 사람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었던 도시국가들은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불평등한 사회였으며, 그것을 지탱해 주는 신과 종교들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 것을 경고하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이 급진적 유일신론은 신 아래 모든 존재는 평등하며, 따라서 유일신론은 왕이나 지배계급이 없는 사회를 위한 이념이 될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자유를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하면, 그 자유는 이제 평등과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이 첫 계명은 모든 인간은 한 하나님 아래에서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첫 번째 계명은 다른 신과 종교를 차별하고 탄압하라는 말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정된 말입니다. 그리고 구약을 경전으로 믿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한정된 말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하고 탄압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훼 하나님을 섬기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오히려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와 다른 종교의 신을 내가 섬기지는 않는다는 것뿐이며, 그러나 다른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영역 바깥의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자기의 전통과 종교를 가지고 살기도 하였습니다.

제1계명은 이스라엘의 좋은 전통을 유지하자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를 짓밟는 것으로 이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들은 십계명의 제 1계명인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계명을 내세워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과 점령도 이러한 십자군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종교 전통을 존중하려고 하는 제1계명과 다른 종교를 힘으로 정복하려고 하는 십자군 정신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1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내부적인 계명이지, 타민족과 타종교를 향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의 계명은 첫 계명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계명은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계명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비판과 부정의 정신에 가장 잘 들어맞는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우상을 타파하고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거짓된 절대주의를 타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에 있어서의 절대주의, 정통주의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이 절대화되거나, 숫자가 절대화되거나, 권력이 절대화되는 것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종교의 절대주의, 교회절대주의도 부정합니다.

종교의 근본주의적 절대주의는 출애굽의 정신인 야훼 하나님의 절대 자유의 정신, 평등의 정신에 완전히 상반됩니다.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이 없이는 설 수 없으며, 첫째 계명은 두 번째 계명이 없으면 공허합니다. 우리는 첫째 계명에서 신을 긍정합니다. 신을 긍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어떤 내용과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두 번째 계명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모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는 우상 타파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우상타파의 정신은 오늘날의 비판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한국 교회는 더욱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절대주의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개교회들은 제각기 자기의 신을 만들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자기 교회만을 생각합니다. 이기적 개교회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말씀이 좋고, 우리 교회의 건물이 크고 좋으며,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 좋고, 우리 교회의 기도가 용하다고 하면서, 사람 끌어들이기 경쟁을 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자기 교회를 우상숭배하는 것이고 자기 교회가 만들어 놓은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절대주의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의 계명은 제1계명의 내용을 더 보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그 이름을 misuse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도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판정신과 상통합니다. 자기의 논리, 자기의 사상, 자기의 주장을 절대화하는 것을 비판하는 정신입니다. 모든 절대주의는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신은 우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떠들거나 사용하는 일은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많이 불려지는 곳이 교회이고 그 중에서 개신교 교회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많이 남용되는 곳도 교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얼 하는 것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안전지대를 만들어 그곳으로 도피하지 말고, 다만 모든 위험부담을 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관련기사]

편집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2)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김종희 목사
(121.XXX.XXX.44)
존경하는 권진관 교수님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 본 교회 읽어보셨나요
(2017-09-07 02:28:26)
김종희 목사
(121.XXX.XXX.44)
존경하는 권진관 교수님 오래간 만입니다. 교수님의 글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2004년도인가요 대광학교 강의석 문제로 김정섭장로등 몇이 TV에 출연해서 대담할때에 뵈웠습니다. 서로 의견이 달랐지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강복이 교수님과 온 가정에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손들과 섬기시는 신학교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2017-09-07 02:24:55)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2)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3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4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5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쓰레기 시멘트 '맞짱' 뜨던 목사, 이렇게 산다
10
국내 대학교수들 년봉 공개되, 신학대학도 만만치 않아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덕정 17길-10   |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aum.net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왕보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