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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2)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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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3  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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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신학자의 선구자들(2)

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1968년 메데인 주교 회의 뒤 본격 등장하기 시작한 해방신학은 많은 선구자의 적극적인 헌신을 통하여 점차 라틴아메리카에서 신앙과 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게 된다. 본 글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서 해방신학의 선구자들, 특히 제1세대 신학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선구자들의 신학은 학문의 세계를 넘어서서 삶의 고난의 현장과 직접 연결됨으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더욱 더 큰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글에서는 이 선구자들의 신학 사상에 대하여 간결하게 소개할 것이다.

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errez)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28년 페루에서 태어났다. 그는 1971년 '해방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해방신학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의 문제는 가난의 현실을 조장하고 있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장악하고 있는 데서 발생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러한 구티에레스의 사회적 분석적 생각이 가톨릭교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해방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박해하게 된 것은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하자"는 주장이다. 성서의 해석권은 오직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해방신학자들의 이 같은 주장은 용납될 수 없었다.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은 유럽의 진보신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유럽의 전통적인 진보신학과 해방신학의 차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차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 신학사이의 정치적 결별을 의미한다. 이것 없이 온전하게 해방신학을 이해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은 지금까지 역사의 부재자로 살아갔던 가난한 사람들의 전망에서 신학을 하자는 주장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학적 질문은 "지금까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또 그 사랑이 우리 모두를 형제자매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선포할 수 있느냐" 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오늘 신학의 문제는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주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역사의 주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적 해방의 주체로 인식하며 신학을 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정체성임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2. 후벵 아우베스(Ruben Alves)
후벵 아우베스는 브라질 장로교 소속 목사다. 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하여 당시의 주류 신학의 신학적 언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신학방법론을 제시했였다. 그는 1970년 출간된 “종교, 아편 혹은 해방의 도구인가?”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한 저서와 같은 해 발표한 “신학의 재건 프로그램을 위한 단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학언어에 대한 비평을 출발점으로 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새로운 경험을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이 지역이 경험하고 있는 저개발과 종속의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으로 출발하여 후벵 아우베스는 새롭게 등장하는 신학의 언어를 정치적 인간주의적 언어(Political Humanism)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까지의 신학언어는 초월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역사와 반대되거나 혹은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짐으로서 오직 초월의 세계만을 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이기에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적 초월성은 '미래창조'를 향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변혁을 위한 부름은 "저 너머 세계의 성격"이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초월성은 역사적 성격을 지녀야 하며 신학은 최종적으로 인간을 향하여 존재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변혁 안에서 그의 미래를 형성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같은 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개신교 특히 장로교 내에서 매우 급진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급기야 장로교 목사직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브라질 장로교 내에서 설교를 금지 당했다. 해방신학자로서 그에게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는 이 땅위에서의 정의 실현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하느님, 영혼, 구원, 그리고 영원의 세계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브라질 장로교 목사로서 해방적 새로운 신학 언어를 전파하던 그는 2014년 7월 81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레오나르두 보프(Leonardo Boff)
   
▲ 레오나르두 보프.(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보프는 1928년 브라질 콩코르지아에서 태어난다. 그는 1959년 박사학위 취득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간다. 그는 60권 이상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미국과 유럽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립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4년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저서를 출간한 이후 그 내용으로 인하여 바티칸에 불려간다. 그리고 그는 신앙교리성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 당시 보프는 수백 년 전 갈릴레이가 재판 받을 당시 앉았던 의자에 앉아서 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재판에서 일 년간의 저서 출간 금지와 교수 금지라는 침묵의 징계를 받는다. 국제여론에 밀려 침묵의 징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 한다. 그럼에도 교황청은 지속적으로 보프를 탄압하고, 이에 그는 1992년 사제직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제직을 던지면서 세계의 모든 친구들에게 보낸 공개서한 "해방여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쟁을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참호만을 바꾸는 것이다. 투쟁은 계속된다"라고 말한다. 현재 보프는 생태신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리우데자네이루 시 근교에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해방신학과 생태신학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4. 호세 콤블린(Jose Comblin)
콤블린은 1923년 벨기에서 태어난다. 그는 1947년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950년 로바이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1958년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목의 현장을 옮긴다. 그는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칠레와 브라질에서 사목을 이어간다. 그는 1970년대 해방신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 스스로가 해방신학자로서 라틴아메리카 신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콤블린은 1958년 사제가 부족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사목활동을 할 것을 당부하는 당시 교종 비오 12세의 요청에 따라 브라질로 간다.

   
▲ 호세 콤블린.(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는 처음에 캄피나스 지역에서 교수로서 그의 사목을 시작하는데 곧 바로 가톨릭 청년노동 사목에 참여한다. 그는 칠레로 이동하는 1962년까지 그곳에서 머물며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중에 후일 해방신학자로 활동하게 되는 프레이 베토와 프레이 티토가 당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을 칠레에 머문 뒤 1965년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헤시피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하여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다. 그의 해방신학적 생각은 당시 브라질 군사정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했으며 결국 그는 1971년 체포되어 추방당한다.

브라질 군사정권에 의해 추방당한 그는 그 뒤 7년을 칠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다시 칠레의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서 칠레에서도 추방당하는 탄압을 당한다. 1979년 브라질로 다시 돌아온 그가 체류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입국하였기 때문에 매번 3개월마다 인접국가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하면서 활동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헤시피의 동 에우데르 카마라 주교의 협력자로서 활동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평생의 삶을 바친 철저하며 진정한 해방신학자였다.

평상시 심장병을 앓고 있던 그는 2011년 88살의 나이로 브라질 북부지방의 기초공동체를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바로 그 순간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콤블린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산 해방신학자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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