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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frica 방문기(Madacas,South Africa,Kenya)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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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5.27  13: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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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rica 방문기(Madacas,South Africa,Kenya)

1.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 침탈과 고난의 역사
2. 아프리카 교회와 신학(저항과 동화)
3. 아프리카 기독교(선교)   
4. 아프리카의 희망과 미래  
 
   
 

을 올리면서
지난 5월 11일  2주간 남아프리카를 다녀왔다. 내 형편으로는 다소 호사스러운 여행일 수도 있지만 오랜  꿈이었고 오랜 친구 허목사와 후배 윤신영과 장기훈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허 목사는 1991년 한국에서 열린 CWM 총회(처음으로 PCK  가입)를 준비하면서 당시 참석차 온 마다카스카에서 총대 두 여성 란토외  1명(현 미국 일리노이즈 대학 교수)를 만난다. 그런 인연으로 1994년 당시 장청 총무 변창배 목사(현 총회 기획국장)와 장기훈(평청 회장)이 말라위와 마다카스카를 방문하게 된다.

그 후 허 목사는 WCC 보세이 훈련에 참가하면서 다시 마다카스카에서 온 50대의 나자레슈아 목사(은퇴한 신학교 교수, 이번에 만났음)를 만나게 된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섬나라 그러나 거기서도 장로교회의 신실한 신앙으로 하나님과 민족을 섬기는 이들에 대한 처지에 기도와 연민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귀국후 마다카스카에 대한 추억에 젖어 있던 중 기독공보의 한 기사에서 다시 마다카스에 대하여 리마인드를 하게 되는 데 김정임 이라는 평신도 여성이 마다카스에서 선교를 하다가 귀국을 했다는 소식이었다.

수소문 끝에 김정임 선교사를 만났는 데 그는 방갈라데시에서 사역중 영국 버밍햄 대학의 셀리옥에서 훈련하는 과정에서 마다카스에서 온 사람을 만났고 거기서 선교지 방향을 바꾸워 영락교회의 후원으로 마다카스카에서 의료선교를 하게 된다. 그렇게 마가카스카와의 인연을 이어가던중 김정임 선교사는 몇년후 안타깝게 질병으로 사망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렇게 마다카스에 대한 깊은 추억과 복음의 진 빚에 대한 상념에 젖어 기도하는 중  기장측 김창주 선교사가 FJKM 교단과 협력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2015년 귀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교단 소속의 평신도 의사인 이재훈 선교사가 주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연락이 되지를 못하여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번에 허 목사는 틈틈이 모아온 사재를 털어 마다카스카를 방문하면서 기관들에게 후원도 하고 인근 도시들인 남아공과 케냐를 경유하면서 프레토리아의 김승범 선교사와 나이로비의 이원재 선교사도 만나게 된 것이다.  https://m.blog.naver.com/arirang0516/221190761725

특히 마다카스카에서는 FJKM(통합교단) 본부와 마므래 수녀원, 토파즈 고아원. 미혼모 보육원과 총화 신학교를 방문하고 부총회장과 사무총장 학장과 각 실무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나이로비에서는 유서깊은 AACC(아프리카 교회연합) 본부를 방문하여서는 부 총무인 Maudor를 만났다. 케냐에서는 동부장로교회(PCEA)의 가장 오래돤 교회와 대학도 이원재 선교사의 주선으로 방문하였다. 
   
 
나와 아프리카의 개인적 인연은 청년 시절 쥬리어스 니에레레(탄자니아 대통령 역임)의 유엔총회 연설 내용에 대한 감동에서 부터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 아프리카를 직접 방문을 준비하면서 공부하고 정리를 하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니에레레는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공부한 최초의 원주민(탕가니카인)이었다. 유학 당시 페이비언사회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이후 사회주의와 아프리카의 전통적 공동체주의를 접목하고자 했던 그의 정치적 열망이 형성되는 데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쥬리어스 니에레네

니에레레는 에딘버러대학교에서 3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탕가니카 아프리카협회 의장을 지냈다. 1954년에는 오스카 캄보나(Oscar Kambona)와 함께 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연맹(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 TANU)을 조직했다. TANU는 초기에는 사회적 평등, 인종 간의 화합이라는 목표를 갖고 출범했지만 이후에는 탕가니카의 완전한 자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진력했다. 이 시기부터 1957년까지 TANU가 실질적으로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존재했으며 니에레레는 식민 통치 시기와 탈식민 이후 탄자니아 정치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 좌측 젊은 날의 쥬리어스 니에레네 

니에레레는 탕가니카 전역을 돌며 대중의 지지를 호소했고 탕가니카가 독립을 얻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1960년 영국 통치하에서 수상에 올라, 독립 이후인 1961년부터 1962년까지도 수상으로서 신생 독립국인 탕가니카를 이끌었다. 그리고 TANU를 재조직하기 위해 수상직을 사임했다가 1962년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탕가니카는 공화국이 되었다.

니에레레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정책들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며 1985년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왔다. 당시 혁명당 전당대회에서 “나는 이제 물러납니다(Ninang'atuka)”라고 말하며 정치 일선에서 퇴진했다. 스와힐리어에서 ‘공직이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물러나다’를 의미하는 동사 ‘응아투카(ng'atuka)’는 니에레레의 강직한 면모를 드러내는 상징적 어휘가 되었을 정도로 니에레레는 권력에 집착하지 않았다.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난 니에레레는 고향 부티아마로 돌아갔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탄자니아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가 권력을 떠난 뒤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패한 세력에 대한 거침없는 그의 비판과 직설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정치의 전면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부룬디 등 역내 국가들의 지역 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으며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빈곤의 완화 및 타파,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해 설립된 남반구 위원회(the South Commission)의 초대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 노력들을 높이 평가해 2009년 유엔총회에서는 니에레네를 ‘사회정의의 영웅’으로 지명했을 정도로 그는 한평생을 사회정의와 평등의 구현을 위해 헌신했다. 1999년 10월 14일 77세를 일기로 런던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고향인 부티아마에 안장되었다.

기록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나는 이번 방문일정에 포함된 세 나라에 대하여 기왕에 나와 있는 자료를 정리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그러나 워낙 짧은 기간이었고 주마간산격으로 본 것이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대한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과 빚진 자의 의무감으로 다소 거칠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아프리카는 고난과 아픔의 땅이지만 탄자니아의 니에레네와 같은 이들은 엘리트로 권력을 잡은 후에도 마치 성직자와 같은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다. 또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 가나의 초대 대통령 크암 은구루마와 보츠와나의 페스투스 모가에도 집권후 개인과 혁명동지들의 부가 아닌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데 노력한 존경받는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디아민이나 무가베같은 이는 하급군인 출신들로 거의가 장기집귄과 허세, 사치와 외세의존, 부족이기주의와 제국들의 이해에 자주적이지 못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만든 집귄당 ANC 조차도 후임인 음베키에 와서는 고급관리들의 부정과 비리로 만신창이가 되어 차기 대선은 흑인 후보를 내세운 백인정당에게 내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는 서구로 부터 완전하게 독립했다고는 볼 수 없는 나라들이 많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특히 경제와 문화적으로는 서구가 무력을 앞세운 자원착취에서 정치 군사 문화 언어 종교 지배로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NEO COLONISM과 COLONIAL MENTALITY (노예근성) GLOBALIZATION에 대하여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샤르트르와 노엄 촘스키는 분석한다. 그러나 서서히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하게 되고 특히 신학자들중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프리카가 지도상에 등장하기 까지
1488년 2월 3일, 포르투갈 항해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모셀베이의 해변에서 중세의 격발식 화살로 코이코이족 남자 한 명을 쏘아 죽였다. 최초로 아프리카 땅에 발을 내디딘 하얀 피부 유럽인과 검은 피부 아프리카인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계사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아프리카는 그렇게 좋은 대접을 받고 있지는 않고 있다. 세계 제2의 대륙임에도 사람들은 아프리카에 대해 관심도 애정도 없으며 미개하고 가난한 대륙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인류 최초의 직립 원인들이 생겨난 곳으로 이때부터 인간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도구의 사용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 600여 년 동안 아프리카는 숱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 세계사의 극히 일부분만 차지해 왔다. 그것도 서구 열강들이 점령하고 지배한 식민지 역사가 대부분이다. 중세부터 시작된 유럽의 약탈은 결국 아프리카 전체를 식민지로 만들고서야 끝이 난다. 굴욕스런 과거와 현재의 가난은 우리에게 아프리카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심어 주었다. 드넓은 초원과 인류의 원시적 삶이 보존되어 있는 마지막 남은 자연의 아프리카는 아직도 잘못된 이해속에 남아 있다.

네덜란드계 독일인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분리정책 반대활동을 했던 루츠 판 다이크는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라는 책에서 서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가 우리들이 아프리카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검은 대륙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아프리카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들의 역사를 조금 더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너무 먼 대륙이지만 아프리카는 우리들의 근원을 살펴볼 수 있는 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1. 마다카스카
말라카시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아프리카답지 않는 이 나라의 수도는 안타나나리보로 언어는 불어와 말라가시어를 쓴다. 이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종족과는 다른 인도네시아계와 아시아계통의 피부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아프리카의 동질성 보다 아시아나 인도네시안에 가깝다. 인구 2천만에 GDP는 500불 미만으로 국민 평균 지위는 세계의 10%대의 빈국에 속하는 데 북한보다도 못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교는 개신교가 35%, 천주교를 합쳐서 7-80%가 기독교지만 전통종교도 많다.

그러나 국가면적은 45위로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1896년에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1960년에 말라가시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획득했다. 197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사회주의 정치 체제로 북한의 지원을 받아서 주체사상이 소개되기도 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목함으로 인하여 다시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섰다. 교사와 목사의 1달 월급이 10만원 정도라니 짐작이 갈 것이다.  지금은 마다가스카르는 정부가 1993년에 다당제 선거를 용인하기까지 학생들과 시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폭력적 진압도 했다. 과거 정부는 반 기독교적이었으나, 현재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고도 1500 산악의 고원도시로 인근 도시와의 연결도로가 매우 열악하다. 한국과의 관계는 제 2의 도시인 타마카브 항구에 한국 원양어선들이 정박을 하거나 참치가공 공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나라에는 약 200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 데 그중에 선교사가 40명이고 선교사와 관련된 분들이 약 반으로 알려져 있다. 주재 공관은 없지만 예정에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행정을 보다가 남아공으로 갔다가 현재 공관 개설을 위하여 외교부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넓은 농지와 증가하는 인구는 큰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모든 아프리카가의 잠재력은 바로 인구이며 넓은 대지인 것은 사실이다. 
   
                                        * 마다카스에 서식하는 바호밥 나무  

2. 남아프리카 공화국
세계 25위의 땅(인구 약 5천만)의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 국가이다. 국민소득 2천불에 공용어는 화란어계통의 아프리칸스, 영어와 줄루어와 코사어를 포함한 반투어군 9개 언어다. 주민은 초기 네덜란드에서 이주한 백인계(보어인) 과 영국인이 백인종에 속하고, 코사족과 줄루족을 포함한 반투어족이 흑인종에 속한다. 오랫동안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지배하다가 20여년전 넬슨 만델라의 지도하에 흑인정부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나라이다. 종교는 기독교와 천주교가 80%에 달해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네덜란드인들은 남아프리카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웠다. 아프리카안 이들을 농사를 짓는 농부를 뜻하는 ‘보어(농부)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보어인들도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워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친하게 지내야할 이웃이 아닌 자신들의 것을 빼어갈려는 장애물정도로 생각을 했다. 신의 뜻에 의한 위대한 개척이라는 핑계대면서 보어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그들의 터전을 빼앗아 갔고 원주민들은 보어인들에 대항하여 싸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는 보어인들이 미개한 원시인들이 자신들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보어인과 토착민의 싸움에 1815년 남아프리카에 매장된 광물자원에 눈독을 들인 영국이 개입을 하게 되고 결국 전쟁이 일어나 영국의 압도적인 화력에 보어인들이 항복을 하므로 1815년에 케이프타운을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영국인들과 보어인들과는 앙숙관계가 되었으며 영국은 1834년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지만 보어인들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했기때문에 많은 반발이 일어났다.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금지되자 보어인들은 살던 곳을 떠나 이동을 시작해 '나탈'에 정착했는데 이를 ‘그레이트 트랙(Great Track)’이라부른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프리카 토착민인 줄루족이 살고 있었으며 보어인은 줄루족을 쫓아내어버렸다. 쫒겨난 줄루족은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을 더 좋게 생각해 영국에 협력을 하게되고 영국-줄루족 1843년에 나탈 탈환에 성공해 보어인은 북쪽으로 더 이동을 하게되고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차례로 건설했다. 이 지역은 엄청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이 교묘하게 작전을 써서 '오렌지자유국'만 남기고 모두 점령해 보어인들은 오렌지자유국 안에 갇혀버렸다.

이 후 영국은 자신들에게 협력했던 줄루족 영역을 모두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줄루족의 마지막 왕을 물러나게 했다. 그 뒤에도 계속된 영국과 보어인과전 전쟁등에서 큰 고통을 겪었지만 현재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종족으로 남아있다. 1902년 제2차 보어전쟁에서 보어인의 패배로 끝났고 1910년에 영국에 의해 ‘남아프리카 연방국가’가 되었다. 흑인정권으로의 교체시기에 남아공은 아프리카 각지로부터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무허가 흑인빈민가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이에 따라 구직난과 생활고,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른 혼란 등이 매우 심해졌다.

유럽인들(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위그노)의 이주로 트란스빌 공화국, 오렌지자유국을 건설하였으나 다이아몬드와 금광이 대대적으로 발견되면서 영국의 식민지 정책과 충돌하여 두 차례에 걸친 보어전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자치권을 인정받았다가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을 강압적으로 지배하면서 백인을 위주로 하는 아팔테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을 펼쳤다. 이에 비폭력을 내세우던 흑인의 저항운동이 ANC(African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넬슨 만델라를 중심으로 급진적 투쟁을 선호하게 되었다. 국민당은 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고 UN은 남아공에 대한 고립정책(sanction)을 체결하였다.

흑인정권과 민주정치시대
1989년 인종차별정액을 주장하던 보타 대통령이 물러가고 디 클락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치범을 석방하고 아프리카민족회의와 범아프리카회의의 정치 활동을 허락하였다. 1990년 2월 흑인지도자 만델라가 수감 27년만에 석방되었다. 194년 4월, 그 시대의 요구에 디 클락 정권의 과감함 결단으로, 일인일표의 흑백 모두가 참여하는 첫 민주선거가 실시되어 넬슨 만델라가 백인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의 첫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디 클락과 만델라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9년 만델라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타보 움베키 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정치적 평화가 지속되게 하였다.

2.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1) 아프리카 다른 지역은 백인이 식민통치를 했지만, 이 지역에서는 백인이 아프리카에 이주하여 스스로 아프리카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자신들을 아프리카인(Afrikaners)라고 불렀다. 물론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갈등이 있었지만, 거주 지역을 영원한 고향으로 생각하였다.

(2) 아프리카에서의 선도적인 위치 : 평화적 정권교체의 모범을 보인 곳이다. 백인정권에서 흑인정권으로 전환하는데 전쟁이나 쿠데타없이 평화적 정권교체의 모범을 보였지만 당시 남아공의 흑백분리정책은 국제사회와 유엔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소수의 백인통치를 해서는 국익도 사회적 문제의 노정을 방치할 수 없어 손을 든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의 정치 불안정이나 종적간의 갈등에서도 보듯이, 아프리카에서는 정권 교체시기에 무자비한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는 달리,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이 폭력과 복수로 점철되지는 않았다. 흑백의 정권 교체시기에 진리와 평화를 위한 청문회(Peace and truth committee)를 통해 흑인의 탄압과 관련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실을 시인하는 고백적 증언이 있었고, 복수극을 펼치지 않고 용서와 화해를 통한 국민대통합을 이루어내었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 아프리카 전역에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남아공의 Afrikaners 종교지도자들이 인종차별에 침묵하고 묵과한 점은 잘못되었으나 그것이 “죄”였음을 공적으로 시인하였다.

특히 정권교체시기에 흑인 모두에게 한 표씩 선거권을 주며 정권은 당연히 바뀔 것을 알면서, 불안한 시기에 매일 시간을 정해, 마을의 교회종이 울리면 모두가 일손을 놓고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마침 이웃나라 짐바브웨가 흑인정권으로 바뀐 후 백인에 대한 학살사건들이 일어났지만, 불안한 속에서도 흑인들을 신뢰하며 새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 결과 흑백의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실행되었고, 이를 두도한 넬슨 만델라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남아공의 원주민은 아프리카 남부에서 살았던 최초의 원주민인 부시맨들이 수천년동안 유목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사냥 방법이나 제사 지내는 모습을 동굴 벽화로 남겨 두었다. 인류의 기원이 되는 종족들이 살았고 전대륙으로 퍼져나갔다고 역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이 있었고 이슬람의 세력확장으로 교류가 활발했으며 북, 중, 남쪽 지역등에서 여러 종족과 왕국이 탄생되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워낙 자연자체가 척박했기때문에 아프리카 대륙의 전체 인구는 많지않지만 수많은 왕국, 종족들이 다양한 문명을 일으키며 아프리카의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아프리카의 고난과 착취

16세기가 되면서 아프리카에 엄청난 양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다는걸 알게된 유럽의 열강들은 앞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을 하면서 식민지를 세웠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가 주인이 없는 빈땅으로 여겨졌고 그들의 눈에는 그곳에 살고있던 토착민들은 사람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럽 열강들은 서로 자기들 마음대로 아프리카 땅에 경계를 세우고 땅을 사고 팔면서 엄청난 금과 아이아몬드를 유럽 본토로 가져갔다. 이로 인한 노동력은 그땅의 주인인 토착민들을 노예로 부리게 된 것이다.

유럽인들의 욕심으로 16세기 이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착취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두 대륙에는 농사지을 땅과 풍부한 노동력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유럽인들이 먹고 마실 수 있게 만들었으며 필요한 노동력은 토착민들을 노예로 만들면 해결되었다. 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었고 그 땅에 유럽인들의 거주지와 대규모 농장이 세워졌으며 인디언들을 강제 이주, 격리를 시키는 과정에서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약 98%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인디언들의 숫자는 너무 작았고 유럽인들의 눈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보였다. 그들에게는 튼튼해서 잘 죽지않고 일을 잘하며 값조차 쌌던 아프리카인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고 아프리카 인들을 납치해서 아메리카로 데려와서 파는 노예무역이 생기게 된 것이다. 흑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한게 아니라 화물로 1톤, 2톤 단위로 팔게되면서 화물선에 수백명씩 태워 아메리카로 보냈으며 이 과장에서 절반은 죽었다. 살아남아 아메리카에 도착한 흑인들은 약 150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농장으로 팔려나가 죽을 때까지 일을 했으며 그들의 자손들까지 대를 이어 노예의 삶을 살게되었다.

아프리카는 약 500여년간 유럽에 끝없는 착취를 당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프리카는 훗날 홀로 서는데 필요한 모든 기능을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지금도 아프리카는 강대국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몇몇 강대국들은 구호와 보호를 핑계로 교묘하게 그들을 이용하고 있다.

3. 케냐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하며 적도 상에 있는 국가로 '케냐'라는 국명은 케냐 내에서 최고봉이며, 아프리카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인 케냐 산(Mlima Kenya)에서 따온 것이다. 수도는 나이로비(Nairobi)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한 대도시로 알아준다. 케냐는 아프리카의 허브로 남아공, 에티오피아와 유일하게 항공사를 보유한 나라답운 아프리카의 관문이다. 

국제기구와 선교단체들이 모두 케냐에 입주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현 대통령은 우후루 케냐타로 나라의 면적은 582,650 ㎢, 인구는 4592만명(2015)이다. 언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데 스와힐리어로 된 잠보 브와나라는 노래가 케냐를 상징하는 노래가 있는 데 국가는 아니다.  고대로부터 해안가 지역에서 이슬람, 인도 상인들과 상아와 노예무역을 했다. 내륙지방은 반투족, 마사이족 같은 호전적인 부족들이 주로 있었다. 이후 몸바사를 비롯한 해안가 지방은 포르투갈이 잠시 지배했다가 오만 해상 제국의 산하로 들어갔고 이후 1895년 베를린 회의로 인해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정치체제는 식민지배를 받았으나 꾸준한 독립운동으로 1963년 12월 12일 영국에게서 독립했다. 식민지 시대 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영국도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케냐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프랑스가 알제리 전쟁 와중에 알제리인들에게 벌인 학살을 영국이 비난하자 케냐에서는 알제리에 견줘 죽은 사람들 숫자가 적을 뿐이지 영국도 프랑스와 다를거 없는 학살자라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의 영도아래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누렸다. 1978년 케냐타가 죽자 대니얼 아랍 모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는 PCEA의 장로교인인데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부정부패와 인권탄압으로 국제사회에 악명을 쌓았다. 2002년 음와이 키바키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지만  독재체제는 이어지고 있다. 

케냐는 커피로도 유명한데 Kenya AA는 세계 최고급 커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진하고 깊은 향과 건포도와 와인을 연상시키는 고급스러운 신맛이 특징으로, 주변의 에티오피아 및 탄자니아산 커피보다 더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화폐는 케냐실링으로 2015년 기준 한국돈 1000원당 88케냐실링이다. 사회의 빈부격차는 다른 아프리카와 비슷하다. 특히 세계 최대의 슬럼가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코로고쵸(Korogocho)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쓰레기마을이 뜰 정도로 눈뜨고는 못 봐줄 수준이다.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 산처럼 쌓인 쓰레기더미와 그것을 뒤지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고 '현실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라고 말했을 정도.

그래도 케냐는 그나마 중부와 동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람이 살 만한 나라로 꼽히는 편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아프리카에 일상화된 내전이 없다는 게 가장 장점이다. 주변 나라들이 독립해서 몇 십년 넘은 지금까지도 내전과 쿠데타가 흔한 일상인데도 여긴 유달리 내전이 거의 없다. 그러나 다른 아프리카와 마찬하지로 종족 갈등은 불안요인이다. 특히 2007년 대선을 전후해서 극심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2007년 대선에서는 키쿠유족 출신의 므와이 키바키 후보와 루오족 출신의 라일라 오딩가 후보가 맞붙었는데, 공식 결과에 의하면 키바키 후보가 47%를 득표하면서 44%를 득표한 오딩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데 선거 이후 부정선거 의혹이 발생하면서 양 민족 간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졌고, 최대 1500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그래도, 케냐는 인근의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나 수단같은 나라들이나 멀리 시에라리온이나 콩고에 견주면. 이 정도 폭동이라면 정말 평화로운 거라는 주장이다. 2000년대 들어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또한 문제. 2013년 케냐 쇼핑몰 테러로 한국인을 비롯한 61명 해외 관광객이 사망했기에 해외 관광객이 줄고 세계적으로 검문검색이 강한 나라중 하나이다.  게다가 알 샤바브가 2015년 4월 2일 케냐 북부 가리사 대학교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건강한 걸음걸이로 유명한 유목민족인 마사이족이 이 나라에 분포하고 있다. 케냐의 국기에 그려진 방패도 마사이족의 방패이다.

육상, 장거리 종목이 강하기로 유명하며 마라톤은 세계 최강국이다. 단거리에선 미국과 자메이카가 라이벌.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종합 3위를 달성했을 정도로 육상강국이다. 또한 남자 3000m 장애물 달리기에서도 68년 이후 단 두 차례를 제외하고 전부 제패했을 정도로 강호로 손꼽히고 있다.

종교로는 CIA 월드 팩트북에 따르면, 기독교가 80%(개신교 29.3%, 가톨릭 23.3%, 정교회 2.2%, 기타 종파 기독교 13%)이며 이슬람이 11.1%, 토착 신앙이 1.6% 정도라고 한다. 특히 90% 이상의 무슬림이 라무섬-말린디 그리고 몸바사를 잇는 동부 쪽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2010년 헌법 개정을 통해 다수를 차지하는 기독교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2010년 8월 샤리아법을 포함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이슬람 지역에서는 쿠란의 고유 경전에 기초한 독자적인 재판을 시행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획득했다. 이것은 케냐에 대한 소말리아 알샤바브 이슬람 근본주의 집단의 공격과 더불어 케냐의 국내 정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또 최근 들어 알샤바브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설치는 문제 때문에 막장 국가가 된 이웃나라 소말리아에 군사 개입도 했고, 이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게 원한을 사게 되어 많은 종교 갈등과 테러들이 일어나는 등 문제가 있다. 케냐 출신 유멍 인물로는 왕가리 마타이로 나무들의 어머니로 환경문동가로 2004년에 노벨평사믈 수상한다 또 도토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아버지가 바로 이 나라 출신. 그래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자 케냐에서도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 1964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같은 해 수도 나이로비에 주 케냐 한국대사관이 설립되었는데 동아프리카에 세워진 대한민국 대사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깊다. 북한과는 1975년 수교합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케냐는 사실상 대한민국과 우방국인지라 지금까지도 북한의 상주공관 설치는 허용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의 대기업이 곳곳에 진출하고 있으며 특히 삼성과 LG가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대륙 공략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하고 있다. 2012년 6월 21일 부로 대한항공에서 인천 - 나이로비 간 직항 노선을 주3회의 형태로 취항한바 있다.

하지만 2014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사태로 인해 2014년 12월까지 운행이 잠정 중단되기로 한 계획이 있었는데, 대한항공은 에볼라의 악화와 확대를 핑계로 2015년 7월까지 무기한 휴항을 선언했다. 이것은 선점의 의미에서 취항했던 대한항공이 매회 운항에 따른 엄청난 재정 결손이 그 근본원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케냐 정부에서는 유일하게 케냐 취항 외항사 중에서 에볼라를 이유로 휴항한 대한항공에 대해 자국 이미지를 이유로 재운항을 강력히 권고하면서 불응하면 운항 취소도 검토한다는 소식도 있다.

한국에는 세렝게티 혹은 사파리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정확히는 광활한 세렝게티 초원은 탄자니아와 케냐에 걸쳐서 존재하는데, 케냐에 위치한 세렝게티 초원을 masai mara(마사이 마라)라고 부른다. 여기서 마사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마사이족이 맞다. 성수기는 7월~8월 쯤이며, 이시기에 방문할 경우 초식동물들의 그리고 이 초식동물들을 주식으로 삼는 육식동물들 거대한 이동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사자, 기린, 얼룩말 등의 다양한 동물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라는 말에서는 뜨거운 사막과 가난을 떠올르기도 하고, 때로는 화려한 색감과 넘쳐 나는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프리카 동쪽의 케냐는 자연의 신비와 무한한 생명력을 보여 주며 살아 있는 아프리카의 모습을 가진 나라다. 나일 강의 시작인 빅토리아 호수,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 동물들의 천국인 세렝게티 대평원까지 꿈틀거리는 자연의 모든 것이 케냐에 살아 있다. 무엇보다 케냐에는 아프리카의 자존심이라 불러도 좋을 마사이족이 살고 있다. 큰 키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기다란 막대기 하나만 들고 끝없는 평원을 걸어가는 마사이족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 순박한 인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케냐도 1593년 포르투갈의 침입을 받은 뒤 영국의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1963년까지 4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서양의 지배를 받았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서양 지배의 아픈 기억을 지닌 곳이다.

케냐에는 마사이족 말고도 키쿠유족, 루야족, 루오족, 아캄바족, 칼렌진족, 캄파족 등 43개 종족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케냐의 종족들은 자신들만의 신앙과 종교의식을 기본으로 다른 종족들과 구분되는 장신구, 복장, 행동 들을 가지고 있다. 힘든 노동을 서로 나누기 위해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거느리는 일부다처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마사이족은 고유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부족’의 개념은 유럽 사람들이 자기 기준에 따라 만들어 낸 모호한 기준인데 부족을 나누는 기준이 핏줄인지, 사용하는 언어인지, 공유하는 문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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