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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frica 방문기(선교와 선교사)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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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6.05  21:5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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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frica 기독교와 선교역사

1.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 침탈과 고난의 역사
2. 아프리카 교회와 신학(저항과 동화)
3. 아프리카와 기독교(선교와 선교사)   
4. 아프리카의 희망과 미래(에티오피아 MCM)
   
   
 
아프리카의 역사는 북부아프리카(지중해 연안)와 중부 아프리카(사하라 이남) 및 남부 아프리카가 각각 그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고 있다. 북부 아프리카는 일찍이 나일강 유역에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를 이루어, 그리스와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해안에 발달, 유럽 및 서남아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이 결코 고립된 대륙이 아닌, 예로부터 여러 다른 민족과의 접촉을 통해서 영향을 받아왔다. 사하라사막을 넘는 교역, 동아프리카 해안에 진출한 아라비아 상인들과 명나라때 정화의 원정등 끊임없이 교류가 이어져왔었다.

중부 아프리카는 원시적인 농경과 수렵을 하는 암흑대륙으로서 최근까지도 그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 유럽세력이 진출하기 이전에는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있었는데, 이는 극소수 국가를 제외하고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문명이 뒤떨어진 아프리카 대륙은 15세기 ~ 16세기에 걸친 포르투갈 사람들의 본격적인 탐험으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유럽인들에 의한 흑인노예무역이 번성해지기 시작하는 단계를 의미하였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경영에 노예의 노동력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았으며, 노예상인들에게 노예무역은 그야말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당시 에스파냐를 무찌르고 제해권을 쥐어잡은 영국의 경우, 노예무역을 거의 독점하다 시피 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리버풀과 같은 도시가 번성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해안지방으로부터 차츰 내륙지방에서이 유럽인들의 탐험과 유럽열강국의 식민지 정책이 형성되어 갔다.

18세기에 이르러 탐험은 활기를 띠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유럽 사람들에 의한 내륙지방의 적극적인 탐험이 계속되어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몇 개의 독립국(이집트·에티오피아·라이베리아 등)을 제외하고는 전대륙이 영국·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의 유럽 제국 식민지로 되면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식민지 대륙은 대전 후 독립하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발전이 장차 기대되고 있다. 대륙의 주요 탐험을 들면, 1486년 희망봉의 발견으로부터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1840년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잠베지 강 유역과 탕가니카 호수 탐험, 1871년 헨리 모턴 스탠리의 탐험 등이 유명하다.

고고학에 의하면 아프리카대륙은 약 5억년 전에 암석이 형성되었고 원시인류가 살게 된 것은 약 400만년 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기후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케냐에서는 140만년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됐다. 이러한 발견들을 통하여 아프리카에 고대 선사시대로부터 사람들이 계속하여 호모 사피엔스 즉 현생인류의 조상들이 살았으며 긴 세월에 걸쳐 혼혈하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아프리카의 특이한 종족을 이루었다고 한다.

BC 1000년경에 아프리카의 흑인왕국으로는 쿠시왕국이 처음으로 건설됐으며 BC 660년 이후부터 아프리카 전역에 여러 왕국들이 창건됐다. 메로웨왕국과 에티오피아왕국, 누비아왕국, 사헬왕국 등 여러 다양한 흑인왕국들이 아프리카 전역에서 창건됐는데 아프리카 고대 역사의 특색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아프리카 고대인들은 글이 없는 무문자 사회에서 살았다. 하지만 문자가 없다고 해서 역사가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실제로 아프리카 고대 역사는 구전으로 전해진 생생한 역사적 자료들을 통하여 역사학자들은 활약하고 있다.

둘째, 아프리카는 결코 고립된 대륙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침략하기 오래 전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사하라 사막을 넘나드는 교역과 동아프리카 해안에서 아랍인들과의 교역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 때 당시에 노예무역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BC 331년에 아프리카 북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이집트 항구도시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붙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는데 그 당시 이집트의 수도로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등대 (파로스의 등대)가 있었으며 고대 세계에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다. BC 3년에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심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의 구약성경원문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됐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은 통치지역을 3구역으로 분할했는데 <마케도니아-아가야>, <소아시아>, <아프리카-이집트> 3개 지역으로 분리하여 통치를 했다. 기독교 초대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유명했던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 당시 주장했던 교리가 현대의 기독교 신학에 부합되는 교리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초기의 역사에 있어서 유명한 신학자들인 것은 분명하다.

1. 성 어거스틴은 354년에 북아프리카 알제리아 타카스에서 출생했다.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수학하였고 아프리카 토속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386년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391년에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카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어거스틴은 화려한 로마를 떠나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동안 봉사했다. 그는 431년에 독일 게르만족이 히포 레기우스를 점령하는 전쟁터에서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열병을 얻어 7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어거스틴의 저서로 유명한 <참회록>을 비롯하여 <행복론>, <독백론>, <교사론>, <신앙 교리교육론>, <신국론>, <삼위일체론>, <재고록> 등 후대에 많은 저서들을 남겨 놓았다.

2.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293-373)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활약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였음으로 후대에 그의 명칭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라고 부른다.

그때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하여 아리우스논쟁을 일으켜 기독교의 이단설을 권력을 이용하여 퍼뜨리고 있었다. 로마교황의 권력에 대항하여 싸움다 투옥도 당하고 또 대주교의 파면도 당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는 끝까지 권력에 굴하지 않고 싸움으로써 대주교의 위치도 다시 회복됐다. 그는 신약성경의 27권의 목록을 체계적으로 확립시킨 유명한 성서학자였다.

3. 클레멘트(150-215)는 본래 아테네 태생이지만 180년에 그는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곳에서 기독교신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됐다. 클레멘트는 특히 기독교의 영성신학의 창시자로 유명한데 그는 철학과 신앙심을 하나로 연결하여 우주만물의 생성과정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기도를 역설했는데 “언어의 기도”, “ 마음의 기도”, “영적 기도”, “관상기도”를 주장했다. 클레멘트가 주장한 “지성적 기도”는 오늘 “기복주의적 기도”가 유행하고 있는 타락한 한국교회가 명심해야할 중요한 교훈이라고 여겨진다.

4. 오리겐(185-255)은 북아프리카 태생으로 알렉산드리아대학의 교장으로서 저서 <헥사플라> (약 6000권의 책)를 출판하였다. 이 책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옹호하는 성서신학책들이며 그 때 당시 성행하고 있는 이단을 반박하는 책들이다. 하지만 오리겐은 그의 후기에 많은 변화를 일으켜 구약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하는 등 전통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는 주장도 많이 했다. 어쨌든 그는 순교를 원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로마제국의 박해로 투옥되어 옥사를 했다.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는 BC 80년경에 로마공화정의 침입을 받기 시작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아프리카의 북부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의 제일 크고 번성한 교구가 바로 북아프리카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와 신학연구가 이곳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이른바 제3세기 위기 이후부터 기독교의 박해가 극심해지고 알렉산드리아의 무역과 경제가 차츰 나일강 유역으로 옮겨지는 등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는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AD 313년에 이르러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왕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기독교의 자유화를 선언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됐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의 중심지가 로마로 이전이 됐다. 아프리카대륙은 이때부터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게 됐다. 하지만 AD 350년에 악숨왕국의 등장으로 인하여 로마제국의 통치는 끝나고 말았다.

악숨왕국은 현재의 에티오피아의 전신이며 아라비아반도와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6세기에 페르시아에게 패망했다. 8세기에는 가나제국이 번성하여 아랍인들과 교역하였는데 금과 소금을 교환하기도 했다. 11세기에 아랍인들이 무라비트왕조를 창건하여 가나제국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는데 가나제국은 1076년에 멸망했다.

1240년에 말리제국이 창건되었다가 1473년에 송가제국에게 패망했는데 송가제국은 이슬람종교를 보호하면서 북방 나라들과 교역을 활발히 하여 이슬람종교와 이슬람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송가제국도 1500년에 북방에서 남침을 받아 패망했다.  동아프리카해안에는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의 후계자 싸움에 패한 시아파 사람들이 오만에서 대거 이동해 왔다. 시아파 아랍인들은 이곳에서 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인도양 교역으로 번영하고 있었다. 1417년에는 중국 명나라가 동아프리카에 왕래했고 1498년에는 포르투칼이 동해안 도시들을 습격했다.

AD 300년대에 로마제국의 등장과 600년대에는 로마제국의 분열과 패망의 시대를 겪으면서 아프리카는 모슬렘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북아프리카는 아랍족의 식민지화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이슬람제국의 정복은 점차로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급속히 뻗어 나갔다. 아프리카는 수 세기 동안 아랍인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백인들의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한 침략은 백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마다카스카라의 교회
마다카스의 기독교회는 1968년에 주재 선교사들로부터 재산과 교단을 인수받으면서 교파통합을 하여 연합교회가 된다. 선교의 역사는 1888년 영국 LMS(현 CWM의 전신) 데이빗 죤스와 프랑스 개혁교회의 토마스 패간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노르웨이와 미국선교사들도 방문을 했지만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영국교회였이며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식민지를 거쳐지면서 프랑스 개혁교회와도 관련이 있다.
   
                                       * FJKM 총회 직원들과 함께, 앞줄 중앙이 부총회장

우리는 FJKM 총회 본부를 공식방문하였다. 부 총회장 카라사카(PCK 2015년 청주총회에 참석) 과 사무총장 마리나스 그리고 부서 책임자들의 공식 환대와 보고를 받았다. 이 총회는 해외 선교사들이 철수 하면서 수도 안타나나리보외 많은 자산과 중심가에 큰 빌딩들을 이양 받았으며 총회 본부와 부속건물이 있다.

신학교의 학제는 4년으로 거치는 데 3년은 각 지방에서 나머지 1년은 2개의 총회 신학교에서 가족동반하여 교육을 받는 다. 그리고 다시 3년 동안 인턴과정(전임전도사)를 개 교회에서 훈련을 한다. 목사고시는 신학과정에서의 학점이수와 과목패스를 하고 학교에서 실시하는 고시를 치루면 목사로 안수받기 위한 절차가 끝난다. 즉 목사고사는 총회가 아니라 신학교가 주관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점은 우리와 다른 데 아무래도 목사후보생을 지도한 학교가 주관하는 것이 옳다고 보겠다. 학생지도와는 아무 상관없는 총회에서 무작위 공천된 고시위원들이 목사고시를 주관하는 것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안수도 노회에서 모두 일괄적으로 하지 않고 청빙이 있는 교회에 노회의 안수위원들이 방문하여 집례한다는 것이 특이하다.

마다카스는 한반도 4배의 큰 땅이지만 일자리와 국가 인프라가 전혀 없어 최빈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전체 인구 2천만 가운데 기독교 인수가 70% 이고 고용되여 일정한 소득이 있는 사람들이 100만명이 좀 넘는 다는 통계다. 목사나 교사나 공무원의 1달 임금이 15만원 내외이다. 따라서 빈곤지수가 높고 국민소득도 1천불에 불과하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교파의 분열이 없었고 밝고 감사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이다. 노회는 38개이며 모든 신학교육은 무료이며 임금의 평준화도 원칙적으로는 이뤄지지만 교세에 따라서 편차는 있다.

7천 교회와 1천 5백명의 목회자가 있는 이 교단과 협력하는 개신교 수도원을 방문한바 있는 데 이름은 마므레(창18:1) 수도원으로 1988년에 현재와 같은 제도를 정비하였는 데 초기 프랑스 미션의 마리 ‘옹비쉬’ 가 세운 곳이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성의와 스톨을 제작한다고 한다. 19세 이상 35세 이하가 지원할 수 있고 독신으로 성령체험, 건강하고 공동체 생활을 받아드려야 하고 기도에 소명이 있는 자가 지원할 수 있다. 또 다른 프랑스 선교사들이 세원 아동보호소 토파즈도 가봤다. 합법적인 아동보호시설이다. 스위스 개혁교회와 프랑스 미국장로교회가 지원하고 있으며 미혼모 시설인 FPCK도 방문한바 있다.
   
                                        * 마므레 수녀원이다.
주일에 방문한 안타나바우교회는 하니튜라라는 여성 목회자가 1200명의 성도들과 절도 있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년중 4회는 전체 교인들이 참여하는 헌금과 교회내부와 외부사용을 위한 헌금과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구제성 헌금을 전달하는 것이 이체로웠다. 약 3시간의 예배시간에 헌금순서만 30분이 넘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다. 마침 그날 성령강림절 성찬식을 거행했는 데 한해 4번의 절기에 그런 헌금을 한다고 한다.

오후에는 부총회장인 카라사카 목사의 교회에 방문했는 데 성령강림주일 찬양발표회가 있었다. 1959년 싸이클론 태풍으로 집들이 대거 전파가 되자 새로운 형성된 도시었다. 그는 한국과 교회 방문을 인상깊게 생각하고 있었는 데 모든 일을 빨리 빨리하는 것과 농업의 기계화, 청년들의 비젼, 저축과 근면한 생활에 대해서 언급했다.

마지막 날에 방문한 교단 신학교가 인상깊다.

FJKM 교단의 신학생들이 마지막 1년동안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이바토 신학교가 갔었다. 학교를 포함하여 2개의 신학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한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졸업후에는 개 교회에 청빙을 받는 후보생들을 노회가 안수를 받기 이전의 최종과정이다. 라자피라리소아 학장의 학교와 교육과정, 목회자들의 애환을 들었다. 그녀는 영국버밍햄의 셀리옥 과정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 대하여 인상깊은 만남을 기억하였고 한국도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한다. 학장은 한국교회로부터 배울점이 많고 지원도 바란다고 했다.
   
                               * 이바토 세미나리의 학장과 함께
학교에는 구형 컴퓨터 2대를 학생들이 시간을 쪼개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기숙사는 배드가 없어 바닥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가난한 학생 가난한 신학교수들이지만 그래도 교단을 이어갈 신학생들을 위해 총회는 학비전액 무료에 용돈까지 주고 가족이 있다면 같이 기숙생활도 하게 하고 있다. 물론 숫자는 많치 않다. 그러나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깊다.

가난하고 문명화되지 못만 교회지만 우리가 배울 것이 많었다. 신앙과 믿음은 가난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다. 오히려 풍요와 부유함으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 아닌 가? 마다카스에는 우리교단의 선교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평신도인 이대훈 선교사(의료)가 있다고는 하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은 약 40여명이 있다고 한다. 전체 한인 200여명 가운데 반 이상이 선교사와 그와 관련된 가족으로 알려졌다.

우리교단이 세계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선배들은 이미 은퇴를 하셨지만 대만의 김달훈, 손중철, 한숭인, 서정운, 최찬영, 박무수, 김순일, 신상길, 이성호, 임순삼, 박종무, 유동원, 김영자 등이 있다. 나름 모두 선교지에서 전설을 남긴 분들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교단의 파송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세계로 나가고 있다. 선교사 자신이나 파송교회의 선정으로 가고는 있지만 선교사 지원동기가 달라졌는 가는 몰라도 아직도 개인적 동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요구나 현지 동역교단의 요청이나 선교적 비젼보다는 주관적면이 강하다. 또 과거에는 미종족전도, 저개발 국가에 대한 개발, 타문화권, 영어권, 서구화가 주류였지만 이제 사역의 영역도 다양화되고 있으며 선교사 자신이 미션을 세워서 운영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규모가 커지고 성과가 많다지만 현지인의 눈으로 본 한국선교사의 모습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만델라가 1999년 은퇴하고 부통령 터보 음베키가 대통령에 취임한 아프리카에서 가장 근대화를 먼져 이룬 곳이다. 후임 음베키는 흑인 경제력 강화 정책을 실시하고, 백인 기업의 직함과 권익을 다른 인종에게 분배하여 경제적 격차를 축소하려했다. 그러나 인종 간의 차이는 다소 완화되었으나 문제의 근본인 소득 분배의 불평등과 실업은 개선되지 않고 치안이 점점 악화되는 상태라고 한다. 또한 음베키 정부는 에이즈 퇴치에 실패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 생산노동 인구의 21.5% (2004년 기준)가 HIV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2008년 부통령 제이콥 주마 ANC 의장이 음베키를 실각시키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주마 행정부는 에이즈 문제, 지니 계수 0.73이라는 세계 최고의 소득 격차, 실업 문제, 세계에서 가장 나쁜 치안 등 문제가 산적한 상태이며 인종차별의 그늘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2010년에 《2010년 FIFA 월드컵》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개최되는 것을 계기로 민간 중심으로 치안 개선 운동이 일어나고, 또한 대중 교통이 취약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도시 근교 고속철 《하우트레인》(Gautrain)이 개통되는 등 개선을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남아공의 선교역사는 19C 모라비안의 보헤미아지방의 얀후스 후예들이 결성한 “모라비안 형제단‘ 에 의하여 남아프리카 코이족에 선교한 이래 런던산교회, 웨슬리안, 카토릭교회가 선교한다. 1799년 케이프타운에서 죤데오도르 반델은 3개의 선교기지를 세우는데 서쪽으로는 시에라리온 동쪽은 이티오피아 남쪽은 케에프타운에서 리빙스턴과 화란의 의사출신 죤 필립과 죤 모토는 부쉬맴과 호탠도트 카리프와 접촉한다. 존 필립은 SM의 책임자로 30년간 흑인 인권보호로 백인과 저항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선교는 독일경건주의 운동의 결과였다. 진젠돌프와 모라비안의 영적각성운동의 운동은 독일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사회봉사 선교의 원동력이 된다. 그후 세계선교운동의 근원이 된다. 1700년대 헤른후트(주의 보호자)흩허진 형제단이 가세한다. 독일은 마틴루터 사후 100년이 되자 생명력을 잃은 사변적 기독교로 전락된다. 30년 전쟁전후 정치권과 손을 잡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었으며 유럽의 교회는 세속적으로 타락했고 학교와 교회는 불타고 빈자는 거리에 넘쳐났다.

성직자들은 교리논쟁에 빠졌고 신앙은 지적유희와 진술로만 간주되었다. 야곱 슈페너(1635-1705) 프랑크프르트에서 19년 동안 목회했는 데 개혁적 설교가로 이름을 떨쳤다. "경건수련을 위한 모임"에서 개신교 내부의 부페와 타락에 관하여 비판서를 출판한다.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이라는 책의 1부는 세속정부의 결함 성직자 문제, 평신도 문제, 비롯된 범죄들 개선의 방법으로 1.하나님 말씀의 광범위한 적용 2. 영적 제사장직의 확립 3. 지식인 아닌 향함의 기독교 4. 기도 사랑 실천을 통한 5. 학교, 대학교의 개혁. 6. 설교촛점의 변화 지식의 화려함이 아닌 경건과 복음전파 위로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손윤탁 목사의 논문인용)

전통적인 선교사 유형은 구령열과 개인구원의 동기다. 그러나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선교전략상 아직도 그런 고집을 할 필요가 있는 가? 이다. 해외동경과 자녀교육의 결과는 영어권과 안정된 사회를 선호하게 된다.  선교사의 유형도 현지에서 원주민처럼 사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돈이나 나눠주고 거느리는 선교도 최종목표는 아닐 것이다. 정착선교사, 순회선교사, 협력선교사, 투어선교사, 현지와 후원교회를 연결하는 선교사, 기관이나 시설 사역선교사, 미래선교사 종류는 많치만 현지 교회의 요구와 협력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좋은 곳에 깃발꼽고 나 선교사라고 하고 후임들에게 갑질하는 식의 선교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국내서 실패하고 현실 도피형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선발과 입허 관리에 좀더 강력한 룰이 적용되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남아공은 남부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중 가장 문명화된 곳이고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프리카의 주도권을 갖은 나라다, 일찍이 백인정권이 통치하여서 가장 서구식 근대화가 잘된 곳이며 케냐와 같이 아프리카의 관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신앙의 자유와 영어권, 다른 지역으로의 접근로로 케이프타운과 프레토리아, 더반에는 많은 미션들과 선교사, 선교지를 찾는 이들이 많다. 다른 아프리카 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미션단체들이 세운 유서깊은 국제학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은 의료와 교육은 흑인과 백인간의 차이가 있고 지역에 따라 무상에서 부터 고액까지 현차가 크다. 인구는 5천 5백만으로 우리 땅의 4배가 넘는 다, 흑인 80% 백인 0% 컬러와 아시아가(8:2)로 GNP는 5천불이다. 백인거주지와 흑인 거지주가 분리되어 있는 데 예전에 백인정권하에 이뤄진 '아파트헤이트' 정책 때문이다. 그후 만델라와 그 흑인 후계자들이 집권을 했어도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문제라고 한다. 아직도 안전한 주택단지는 삼엄한 경계가 있고 전기 철조망에 두 개의 문을 여닫는 곳이 한 두곳이 아니다. 모든 도시는 차량이 아니고는 이동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흑인 원주민들이 어디를 얼마만큼 가는 지 몰라도 고속도로등 모든 도로를 무한정 걷고 있는 것을 본다.

김승범 선교사가 사역하는 스토펠교회의 예배는 그야 말로 감격적이다. 찬양과 춤 열정을 보았다. 그러나 흑인 스럼가에서 세상에 절망한 가난한 흑인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생각같아서는 이런 교회는  현지 교단에게 이양하고 한국선교사는 다른 사역을 권하고 싶다. 특히 이단성 교회들이 창궐하고 성행하는 현지 사정도 그렇고 선교사가 현지인들과 동거동락하며 함께 사역 할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그리고 남아공은 아직도 외국인들이 거주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으로도 보였다.

우선은 선교사의 건강과 가족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지금 운영하는 유치원도 많은 아동들이 오고 지역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고 있고 넓은 교회대지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시기심도 그렇고 유치원 운영도 차츰 지역이나 현지 교단으로 이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물론 교인들은 김 목사 부부를 좋아하고 젊은이 많아 희망적으로 보인다. 원래 스와질랜드에서 사역했고 평소 지향했던 의료선교나 다른 미션을 모색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 스토펠 교회 청년들과 함께
아프리카선교회 제 5차 선교대회 열려
우리가 방문하기 한주전 5월 10일-14일(케냐, 몸바사, 마사이마라) 총회 세계선교부 아프리카 지역의 선교사들의 공식 모임이 있었다. 제 5회차인 이 선교대회에는 아프리카 동부를 대표하여 김용주(탄자니아) 선교사, 서부, 한경훈(콩고) 선교사, 남부, 이희상(잠비아) 선교사, 북동부, 송의광(이티오피아) 선교사, 지역의 선교보고가 있었다.

이보다 이앞선 선교 특강 '세계화상황속에서 지상명령의 재해석' 이라는 주제와 (아프리카 선교적 상황의 관점에서) 라는 부재로 우리 교단 아프리카 선교사 1세대인 임종표 선교사(케냐) 와 동부 아프리카 전반 사역에 대하여 이은용(케냐) 선교사가 특강을 하였고 이 두 주제에 대하여 장남혁 교수(서울장신대)의 논찬과 가나교회와 영등포 노회가 협력하고 있는 사업에 대한 "에큐메니칼 협렵선교 : 더불어 함께 하는 선교" 라는 주제로 이명석(가나) 선교사가 발제했다.

총회에서는 세계선교부 부장인 심창근 목사와 서기 서좌원 목사와 위원들이 먼길을 가서 위로와 격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총회 직원으로는 총무인 이정권 목사와 김지한 목사 이동한 목사 신윤정 집사와 본부 선교사 3인이 동행을 하였다. 총회 파송 해외 선교사는 장기등 전체 88개국 756가정 1,420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아프리카 선교대회에는 현지와 국내에서 118명이 참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방문한 남아공과 케냐에는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사역중이다. 특히 보수교단에서 유학차 왔다가 머문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나중에 그 교단의 선교사로 가입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 부터 선교사로 헌신하고 나온 것이 아니니  기본 교육이나 자세가 안된 것은 사실이다. 그나마 우리교단 선교사 선발이나 교육, 현지 조직이 낳기는 하다. 그러나 더 잘하고 잘되어 있는 선진국의 씨스탬을 봐야지 거기다가 우리가 비교를 하면 안된다. 남아공이 해외동경 목회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영어권이고 경비싸고 자녀들 교육시키기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곳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교대회 자료집에는 각 지역별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역내용이 나오는 데 남아공의 선교회는 현 회장인 이상훈 목사( 아프리카선교교회 한인 사역 및 현지인 사역) 총무 문찬주 목사(케이프 타운에서 현지인 교회) 회계 김승범 목사(프레토리아에서 현지인 교회와 병원선교, 프레토리아 대학에서 공부)가 임원이며 전준수 목사(프리토리아 한인교회 담임) 우정구 목사(프레토리아에서 타문화 사역)  김진경 목사(프리토리아 현지인 및 어린이 사역) 김현태 목사(케이프 타운 현지인 목회)  임인모 목사(케이프타운에서 교육과 농장 교도소사역) 김인식 목사(케이프타운에서 유치원과 교수 사역) 양형필 목사(케이프타운에서 현지인 협력과 교회 학교사역) 최인규 목사(케이프타운에서 타문화권과 사역준비) 이효준 목사(프리토리아 현지인 사역)  12명이며 아프리카 선교사로 현지에서 세상을 뜨신 고 김신일 목사의 사모인 홍혜영 선교사 (더반 항구 선교 및 현지 유치원 사역) 와 김준기목사(프리토리아 사랑의 교회)가 있다.

선교사들에게 가장 오래되고 끊질긴 질문은 왜 기독교 인구가 7-80%인 나라에 기독교 선교사가 더 가야 하는 가? 이다. 초기 유럽의 선교사들은 구령목적과 국가이익에 복무하기 위하여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갔다고 하면 그들이 이뤄논 기독교 기반의 문화와 정서가 고스란히 이양된 땅과 나라에 왜 우리 선교사가 더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 가? 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를 이미 3년전에 아래 링크한 일본 관서지방 방문기 6-7회분에서 선교사 후기라는 글로 독백처럼 쓴바 있다.

사실 남아공 같은 곳은 선교사 비자(종교)는 주지 않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신 자원봉사비자라는 것이있는 모양인데 이게 바로 후임들 군기잡고 말안들으며 갑질하는 도구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행 선교부 규정에 현지인과 결혼을 하거나 영주권을 취득하면 선교사직을 해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남아공의 경우 거의 안정적인 체류를 위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유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주권은 안정된 일정한 수입을 입증해야 할 것인데 페이퍼컴퍼니 같은 것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한국인은 선교사나 일반인이나 거의 같은 짓거리를 한다는 소릴 듣는 다.  이런 것이 총회 선교사 파송규정에 선교사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다는 규정과 어떻게 되는 지 궁금하다.  사실 언제까지 한국인 선교사들이 외국가서 이짓들을 해야 하는 지 걱정이다.  

사실 선교사들에게 비자를 안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자국민과 자국의 종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주체성이 있는 국가라면 현지 교회의 동의를 받아야 할 문제다.  오래전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었는데 여기도 선교사 비자는 없었다. 그래도 한인선교사는 무슨 수를 쓰던지 체류하여 넘쳐난다. 다만 교수사역등 현지인을 성장시키고 훈련시켜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는 사역하라는 도센(교수)비자를 주고 있었다.  그래서 남아공의 선교사들은 거의가 선교사 비자를 받지 못한 체 학생비자이거나 은퇴자 비자를 받고 선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제 까지 이렇게 되는 지 그러고도 국제문제가 안되는 것이 다행이다. 그 나라들은 왜 선교사 비자를 주지 않을 까? 이 문제를 살펴야 할 것이고 거기서 선교사의 과제가 도출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를 태국과 비교하여 보자 태국에 선교사로 가며 태국기독교연합회(CCT)에 할당된 숫자만 추천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은 태국 땅에 아무나 와서 아무데서나 함부로 선교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교사 비자를 받는 다면 그들이 지정하는 곳이나  협력할 파트너와 당분간 일해야 한다.  그것은 태국교회와 우리교단이 그런 상호협력을 맺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이런 내용이 잘지켜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국은 선교도 불법이고 사역도 그렇다. 

필리핀의 UCCP와 우리교단이 선교협력을 맺고 있어 비숫하지만 아직도 한국선교사들은 현지교단이나 교회와는 협력하기 보다 새로운 미션을 만들고 심지여 신학교까지 만들어서 한국 돈 갖다가  멋대로 한다.  그런 곳일 수록 먼져가서 자리 잡으면  대단한 일이다. 현지 영주권이나 기득권을 갖고 물설고 낮설은 후배들 오면 언어도 익히고 문화도 익힐 동안 몸과 영혼을 팔기를 강요한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모른다면 길고 지루하게 고생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가 아니다. 특히 아프리카  현지 선교사들간의 갈등도 공개된 비밀이다. 고소와 고발에 도를 넘는 비방과 갑질은 유명하다. 최근 나는 문제가 된 선교사들 간에 오간 상호비방 서신을 접한바 있다.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 선교사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역지

사실 어떤 사역지 보다 모든 아프리카는 위험하고 낮선 땅으로 보인다. 우선 거리상으로도 그렇고 피부색과 생활상태나 수준으로도 그렇다. 그렇게 아프리카는 어려운 땅이고 눈물 나는 곳이다. 나는 거기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 불만은 없지만 엄두가 안나지만 거기서도 롱런을 하는 선배선교사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갖으면서도 서구 선교사들이 했던 일을 언제 까지 답습해서는 안된다는 원론적인 주문만을 할 뿐이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사고 나면 순교라고 우기는 것이 현실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랫동안 아프리카와 선교문제에 고민하며 지난 30년간 축척된 시각과 감각으로 현지를 직접 볼때 전체 선교지와 선교 인식에  큰 전환이 와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다. 이제 더 이상 합법적이지 않은 선교를 당당하게 안된다.  좀 더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서  어려워도 현지 교회와의 동반자적 협력선교가 절실하다.  이제 정보의 발달과 공유는 이제 더 이상 자기혼자 보여주기식 자화자찬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현지 교회의 요구와 그들의 경험에 대하여 좀더 겸손하게 응답하고 성실하게 협력하는 선교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자기 혼자 사명받았다고 말뚝박고 나와바리(텃세와 갑질문화)를 쳐서는 안된다. 

사실 선교사가 사역지에서 교회나 하자고만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거기 만족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우리도 그렇듯이 어느 시점엔가는 현지인 교회는 현지인들에게 모두 이양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현지인만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교회 이외의 사역은 무엇을 할까? 이 지점이 고민이다. 전통적으로 하고 싶고 돈되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편할 것이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절대로 현지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내가 무엇을 도울 것인가는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은 기독교인이 80% 가넘는 필리핀에서도 마찮가지다.

미션을 만들과 사람을 거느리고 신학교를 만들고 안수를 주고 교단을 만들어야 볼꺼리 일꺼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멀쩡한 나라에 와서 결국은 교파분열만 일으킨다. 그런 비판에 대하여 이렇게 반문 할 것이다. 아프리카의 교회와 기독교는 진실하지 않거나 복음적이지 않다고, 그럼 무슨 기준으로 그렇게 말하느냐고 묻고 싶다. 그것은 개인의 주관적기준이거나 교파신학의 결과일 뿐이다. 아프리카 영혼 까지 걱정하는 것이 선교인지는 몰라도 이것이 바로 개종전도라고 볼 수 있다.

또 그들의 교육수준이 낮고 성경관이 올바르지 않다고도 한다. 물론 아프리카의 정서상 한국의 장로교회의 신앙과 풍토로 보면 이단성도 보이고 우리 식의 눈으로 보면 거기 구원이 있냐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고 주제 넘는 일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지금 같은 교단의 파송 선교사들에게도 자신의 사역을 인정받고 못하거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캐    냐
케냐에도 한인선교사들이 남아공만큼 많은 곳이다. 이곳의 개신교 역사는 1844년에 시작된다. 케냐의 이은용 선교사 발제문 인용하면  동부 아프리카 선교는 AIM(Africa Inland Mission) 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프리카 한인 선교사의 교두보는 1971년 미국의 박희민 목사(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한다. 그 다음이 1981년 임종표(황화옥) 선교사다. 그러나 1999년 1차 사임을 하고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하고 2011년 재파송을 받고 현재 케냐에서 사역을 하는 전체 아프리카 선교사를 통털어서 전설로 남아있다. 그 외 송용은, 박양미, 김증중, 전준수, 이은용, 서숙자, 김은숙, 유영국, 김옥실, 김종우, 이원재, 박삼일, 김재혁, 정순자, 노치형, 김홍일, 고은심, 이동관, 황보아름, 허미란, 김성영, 이승일, 봉준태(2016년 1월 17일) 선교사가 파송되거나 귀국하거나 사역하고 있다

케냐에는 PECA(남부 장로교)등 몇 개의 큰 교단이 있다. 그 외 AIC와 이은용선교사가 세운 HMAN(열방선교회) 등 13가정 23명이 사역하고 있다. 아프리카 선교사의 원조격인 임종표 선교사가 세운 미션인 EMA(아프리카선교회) 박삼일 선교사가 세운 EAN(모든 민족선교회)도 있다.  

그러나 현지교단인 케냐 남부 장로교회가 케냐의 주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직 총회장(오출라는 기독교장로교회와 교류)나 총무(장신대 연수) 모두 한국장로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교단의 교인수는 400백만인데 목사수는 4천명도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목회자 배출 숫자를 조절하는 데 전액 교육과 생활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그럼 목회자가 없는 교회는 어떻게 하는 가? 평신도 사역자가 설교을 하는 데 약 4만명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설교할 수는 없고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친다. 예전에 우리네 교회도 장로나 집사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한적이 있다.

그리고 행정과 성찬 치리는 순회목사제도를 두고 있다. 감당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는 것이다. 무조건 목사숫자를 배출해서 목사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미자립교회(동반성장)라고 다시 돕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생활대책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배출하는 총회가 잘하는 것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하기를 바란다. 케냐 교회를 우습게 알면 안된다. 이들은 이미 1970년 선교사 모라토리엄을 선포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정신과 열정만 두고 건물과 땅 재산을 다 케냐교회에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자립하고 자생하고 자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케냐 교회의 지도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AACC(범아프리카교회협의회) 에 방문한 것이 기억이 남는 다. 아프리카 1억 2천만의 회원을 갖고 있으며 1963년에 조직되여 아프리카 42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 있는 아프리카 유니언(AU)와 더불어 아프리카 최대 기구이다. 총회장 1인과 5인(지역대표)의 부총회장이 상근을 하고 있다. 당일 우리는 부 총무를 면담하고 대화를 나눴다. 아프리카의 교회는 평화에 대하여 소중하게 생각하고 '신학은 모든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다' 고 설교설명했다.

남아공의 투투주교도 의장을 지냈으며 WCC의 직전 총무였던 셈 코비아와 현재 중앙의 의장인 아그네스 붐 교수가 케냐인이다. 1975년에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WCC 제5차 총회도 열린바 있다. 한국선교사들이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요한 회원국가인 아프리카 나라들이나 지도자들과 얼마나 교류하고 관계하는 지는 알 수 없다.
http://veritas.kr/articles/4176/20090831/%EC%A7%80%EC%97%AD-%EC%97%90%ED%81%90%EB%A9%94%EB%8B%88%EC%BB%AC-%EC%9A%B4%EB%8F%99%EA%B8%B0%EA%B5%AC%EC%9D%98-%EC%84%A4%EB%A6%BD-%E2%85%A1.htm(안재웅 박사의 연재물, 지역에큐메니칼운동 기구)

이번에 이원재 선교사가 재직중인 PCEA 산하 교단 신학교를 방문하였다. 이 학교에는 기독교장로회의 이장식 박사가 한신대 은퇴후 이미 10여년간 교회사 교수로 사역을 한 곳이다(이장식 교수 인터뷰, 베리타스) http://veritas.kr/articles/1805/20090228/%EC%BC%80%EB%83%90-%EC%8B%A0%ED%95%99%EA%B5%90%EC%84%9C-%EB%B3%B4%EB%82%B8-14%EB%85%84%E2%80%A6%EA%B7%B8%EA%B0%80-%EB%A7%8C%EB%82%9C-%ED%95%98%EB%82%98%EB%8B%98%EC%9D%80.htm기쿠유족의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교단의 모 교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케냐의 초대 대통령 조모가 다닌 것으로 알려진 곳이고 현 집권정당의 지지세력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원재 선교사는 이 학교 교정에 기독교교육원구원를 개설하기 위하여 학사를 건축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는 데 서울의 한 교회가 건축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건물이 완공되면 열악한 케냐의 기독교 교육과 관련된 자료와 현장지원 교사훈련을 위한 사역을 할 것으로 보인다.
   
                                           * PCEA 교단 모 교회에서 
아프리카에 빚진 자들

아프리카 내전을 통하여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것은 프랑스인데 그러고도 예술의 나라라고 예찬하는 것이 이상하다. 영국도 중동등에서 많은 유물을 훔쳐가서 대영박물관을 만든 도둑의 나라다.  따라서 아프리카를 알려면 서구나 기독교의 눈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인류는 서구와 기독교는 아프리카에 무한대의 빚을 진 나라들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는 독재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츠와나는 1966년 영국서 독립을 하고 다이아몬드글 광물자원의 이윤을 국부창출과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하여 국민경제의 파이를 크게 하여 부를 개인이 아닌 국가가 축척한다.

대통령 페스토스 모가에(1988-2008) 는 재임한후 평화적 정권교체의 모델을 이뤄냈다.  가나(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의 대통령 크암 은크르마는 1966년 쿠테타를 했지만 부패 무능정권을 극복했다.  케냐의 정치가이자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1940-2011)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무심기운동을 통하여 나무들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고  200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라이베리아의 멜렌죤스는 철의 여인으로 통한다. 그년는 하바드 케네디스쿨출신에 IBRD와 씨티뱅크 임원을 거쳤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헌신했다. 1980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이래 다른 지도자들 처럼 감옥과 망명을 반복하며 2005년에 당선된 이래 2012년 재선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가나의 코피아난(1977-2007)은 유엔 최초의 아프리칸 사무총장 출신이다. 2001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남아공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만델라의 후임인 타보 음베키가 있다. 잠비아의 담비사 모요도 하버드와 옥스퍼드출신으로 저술과 강연활동이 왕성한데 죽은 원조(dead AID) 승자독식(Winner Take all) 이 있다. 모잠비크의 그라샤 마셀은 자신의 조국 모잠비크와 남아공의 first lady가 된 진기록을 소유하고 있다. 그녀는 조국의 장관시절 대통령 당선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의 사고사후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재혼했기 때문이다. 나이지라아의 당고데 구룹도 자수성가한 재벌가로 2012년 112억불의 매출에 포브스와 모건스탠리같은 곳에서 인정하는 표준윤리로 도덕성을 인정받는 곳이다.

남아공의 토쿄쎅스 오일은 3번째의 다이아몬드업자로 박애주의자다.  남아공 출신의 CNN앵커 이샤 시세이와 유력기관지 시티 프레스의 주필 아파지가 있다. 2000년 들어 아프리카 여인들의 세계 모델로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여장 록가수 데이빗 보위와 결혼한 소말리아 출신의 이만압둘 마지드다. 같은 소말이아 출신의 와리스다리는 "데져트 플라워" 라는 영화로 유명해진다. 에티오피아 출신의 이만 케베테, 수단출신의 알렉웩, 앙골라 출신의 마리아 보헤스가 있다. 흑인들의 색상과 패션은 뉴욕과 파리 런던에서 인기가 있으며 특히 고질적인 곱슬머리가 패션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결론
15-19C 유럽은 아프리카해협과 해안의 것을 다 착취하고 본격적으로 대륙으로 진출한다.  탐험가들이 등장하고 영토의 쟁탈전이 시작된다. 리빙스턴은 남아공 미션을 설립하고 기업의 후원을 받아 내륙으로 들어가 지도를 만든다. 그는 큰 폭포를 발견하자 이 폭포의 이름을 국왕 빅토리아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이름 짓는 다. 아프리카의 노예사냥 종식은 기독교와 유럽사회의 루트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서구기독교는 아프리카인에게 다가가 일방적으로 물질적 요구와 영혼의 혜택(2C, commerce & christian)이 필요하다고 강요했다. 베른린 선언을 주도한 비스마르크는 한술 더 떠서 여기에 civilaization 를 추가하여 3C로 아프리카를 자기식의 문명화하려고 했다. 

가장 극악하고 비난받는 사람은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이다. 후발주자인 벨기에는 오늘 날의 콩고를 왕의 사유지로 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했다. 그는 스탠리를 고용하였고 이권을 위하여 콩고를 두동강낸 범죄자다. 레오풀드빌의 콩고와 프랑스 집정권의 이름을 딴 브라자빌 콩고다.  그들은 저항하는 콩고인의 손목과 발목을 절단하였고 훗날 아프리카의 내전과 제노사이트과정에서 이런 폭력은 다시 재현되었다. 그러나 마사이족도 그렇고 아직도 자신들의 선조들의 생활방식과 복장, 전통를 바꾸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구습이라고 미신이라고 파기한 것들을 오히려 끈질기게 이어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비빌이다.

그나마 우리교단 선교사들의 선발이나 교육 파송과 정착이 낳기는 하지만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다. 우선 선교사 개인이 나벌어 나먹기 식의 후원개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니 학연과 인맥으로 얼룩져 노회와 교회의 말뚝지원으로 생존이 보장되는 구조는 문제다. 평가를 하고 받아야 한다. 후원교회에서 좀 더 현지 정보와 사정을 알필요가 있다. 특히 세계선교부의 업무가 문제일 수 밖에 없는 데  정책 세미나를 해도 총회에서 공천된 분들 위주로 하니 전혀 의사 소통이 안된다. 이 세미나에는 총회 정책위원들과 대륙별 현지 선교사, 후원교회 3자가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선교사의 노고와 고민들도 공유될 것이다. 

선교사들이 고국 교회와서 간증이나 하고 징징짜고 눈물이나 흘리는 식의 구걸 보고 보다는 정확한 틀을 가지고 자기 평가를 하는 정직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선교사 파송식에서 총무인 신방현 목사의 부탁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일기를 쓰라고 했다. 그래서 실제로 순진하게 일기를 썼다. 처음에는 진솔하게 그리고 잠시 소설을 썼다. 그리고 나중에는 시를 썼다고나 할까. 점점 분량이 줄고 의례적이고 사무적이며 누가 보지도 않는 데도 볼 것 같아 씨나리오를 썼다.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에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본다.  길눈 떠지고 사람이 분별되고 익숙해지고 전문가가 되면 그때부터는 타락하는 것이다. 늘 처음 처럼, 코람데오해야 한다.  

참고서적

* 아프리카를 말한다. 류광철(세창미디어)
*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윤상옥(시공사)
* 칼라풀 아프리카 기획팀.(매경 연재물)
*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마라. 1.2권
   김명주(미래를 소유한 사람들)
*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루츠판다이크(웅진지식 하우스)
* 나는 아프리카인이다. 막스 두프레즈, 장시기 옮김(당대)

*  아프리카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에 관한 선교신학적 연구
    이원재, 주안 대학원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제 5회 아프리카권역 선교대회 자료집(총회 세계선교부)

*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나 더 준비하여 4편으로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아프리카 3국(우간다, 아티오피아, 케냐) 방문을 계기로 떠오르는 “희망과 기회의 땅” 이라는 제목으로 이어집니다. 그간 3편의 글은 주로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측면에서의 성찰이었다면 남은 4편에서는 아프리카의 미래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조망하려고 한다.

아프리카는 미국면적이 3배, 250개의 국립공원이 있는 인류자원과 천혜의 자원이 있는 곳이다. 특히 30세미만의 인구 60%가 아프리카에서 증가일로에 있으며 많은 자원과 기회의 땅인 것은 사실이다. 6700KM의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며 콩고강과 니제르강도 400KM가 넘는 다. 그 외에도 유전자적 다양성이 있다.

아프리카는 서구의 수탈과 착취 전쟁과 서구의 할례로 강요 당한 땅에 부족간의 전쟁과 학살 질병과 기아로 죽어갔지만 새로운 생명이 왕성하게 잉태되고 있는 곳이다. 몇 개 안 남은 군사독재와 장기집권은 종언을 고할 것이다. 노예시대, 식민시대, 신식민시대를 거쳐서 독립과 자립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특히 국제정치에서 아프리카문제는 한번도 이슈가 안된 적이 없다. 종교적으로도 미종족 전도지역이다. 이슬람인구는 3억 4500만이 넘는 다. 전 세계 회교도의 37.5%다. 남부를 제외한 북부와 서부 동부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 외에도 모든 종교의 기저에 자리잡은 그들의 토착종교에서 나오는 민속신앙도 끈질기다.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낼 수 있는 나라는 우리 뿐이다.

그런면에서 기독교의 마지막 선교지는 바로 아프리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현직 아프리카선교사들의 노고는 익히 아는 바지만 이번 글은 깊은 연구와 조사가 아닌 여행기이며 주마가편으로 쓴 글이다. 그러나  이번 아프리카 선교사 모임에서 임종표 선배가 낸 발제문에 제시된  "반성, 변혁, 대안" 에 주목한다.  현지에서의 사역에 대한 성과나 평가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반성과 제언이니 모두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번 모임이 아프리카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여  긍정적이다.  다른  미션보고는 논평을 유보하고 싶다. 다만 영등포노회와 가나교회와의 에큐메니칼협력선교는 많은 시사성이 있다.  독일 팔주주의 권유로 시작된 이 협력선교가 롱런하기를 바란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아프리카에 파송된 한인 선교사들에게서 희망의 끈을 놓치 않고 있다.  

그리고 선교를 전투에 비교하면 보병과 포병 병참과 군수가 필요하듯이  선교사 개인의 사역이 이 소총수라면 포병이나 공병과 같이 선교기관(학교 병원 봉사시설) 를 통한 봉사도 필요할 것이다.  그중에 이미 10년전에 명성교회가 에피오피아에 설립한 MCM 병원 사역은 재평가 받아야 한다. 이런 시설투자는 아무래도 대형교회의 몫이 아닐 까 한다.  바라기는 아프리카의 선교는 현지 기독교와 지도자들의 경험을 존중하고 그들의 에큐메니칼운동의 공과에서 배워야 할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선교의 기본인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나 사역이 아니라 현지교회와 교인들이 주인공이 되야 한다" 라는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아프리카를 객체화 대상화 하는 것으로 벗어나야 할 때이다. 그래야 현지교회와 동역하고 협력하는  동반자 선교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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