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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지식인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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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8  20: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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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 지식인

   
 

『열하일기』는 조선 정조 때의 수많은 실학파 가운데에서도 특히 북학파의 대가인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이다. 물론 많은 견문록이 있지만, 『열하일기』는 다른 견문록과 눈에 띄게 다르다. 일단 그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당시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뒤, 피폐해져 가는 농민현실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새로운 학문의 필요성이 주창되었고, 그 대안으로 실학이 급부상하여 실용주의와 경험주의적인 사상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대였다.

연암은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의 견문을 보고 느낀 바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나뭇더미, 외양간, 가옥 구조, 기왓장, 벽돌에 이르기까지 본받아야 할 부분, 실용적인 측면 위주로 기술하였고 당시 문학가들의 창작 경향을 벗어나 문학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열하일기에 대해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란 후 조선의 상황, 당시 북벌론 속에서 주창된 북학론, 정통 고문(古文)에 충실한 당시 문학경향, 박지원의 사상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박지원과 그 시대배경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연암(燕巖)이라는 호로 알려져 있는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 서울태생으로 조실부모하여 조부로부터 성장한다. 심리적으로 정상적인 성장과정은 아닐 것이라고 보인다. 그의 가문은 당대 최고 가문의 학자 집안이지만 그는 학문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16살에 결혼한 후에야 입문하여 과학적 탐구에 주목한다. 그는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회시에 응하지 않고 35세를 마지막으로 과거를 포기한다. 연암은 16세에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연암은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는 대문 밖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고 한다.

연암은 저잣거리의 많은 분류의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20세 무렵에 민옹전, 양반전 등의 단편 소설을 냈다. 30대의 연암은 가난하였지만 많은 이들과 교류하였다. 북학파의 박제가, 시인 이득무, 천문학자 박제가, 괴짜 과학자 정철조, 뒷날 영의정까지 지낸 이서구, 발해고를 쓴 유득공, 무사 백동수 등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었다. 이들은 백탑(오늘날 탑골공원 원각사지 10층 석탑) 근처에 모여 살아서 '백탑파'라고 하였고 후일 북학파가 되었다.

1780년 연암의 나이 44세 때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사절인 사행단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원래의 목적지는 연경(북경)이었는데, 건륭제가 더위를 피해 열하에서 머물고 있어 열하까지 여행하였다. 5월 25일 한양을 출발하여 10월 27일 다시 한양에 당도하는데 약 5개월이 걸렸다. 이 여행에 대한 기록이 '열하일기'이며 연암이 3년 동안 26권을 저작하였다.

   
 

그는 종종 다산 정약용과 비교되곤 하는 데 다산은 주변부로 중심부에 들어오기 위해 입신양명을 꿈꾸웠다고 하면 연암은 집안 어른들의 종용으로 과거에 응시를 하게 되는 데 답을 알면서도 동문서답을 써내는 등 출세와 권력의 길에서 주변부로 나간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당시 지식인이 많아 다산의 친구들과도 교류가 있었지만 둘이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박지원은 정치적인 이유로 1777년 서울을 떠나기 전 이미 문장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기거한 곳은 황해도 금천의 산마을인 연암이다. 아마도 그의 가문이 전임 왕 영조를 지지한 노론에 속했는데 후임인 정조) 치하에서 어떤 고초를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권력 이양에 잘못하면 몰살을 당할 수 있기에 시골로 이사한 결과, 박지원은 삶의 현장에서 농민들을 알게 되고 훗날 농업 정책에 큰 관심을 보인다. 신학자로 말하면 해직교수가 되어 사위나 노동현장에서 민중 신학을 발견하는 것과도 비교할 수 있다.

그의 산촌 생활은 훗날 저작들 가운데 촌부들의 삶에 대한 것들이 나온 것이고 그의 호인 연암도 그 마을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유배 기간 동안 노동과 학습으로 지행합일의 엄격한 방식을 따랐다고 한다.  또 문장과 경전 연구에 경제학, 정치사, 자연과학 그리고 천문학까지 그 폭을 넓힌다. 그것은 당대 18세기 일반적인 지식인들의 것과는 정반대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중국 경전을 답습하는 협소한 암기와 반복식의 연구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는 중국 장안의 사신사의 일행으로 외국을 경험한 후 독서의 다양함과 유럽의 근대적 지식인 천문학과 자연과학 분야를 섭렵한다. 그것이 청년 박지원에게 조선 시대의 전 톡과 상식적인 가정과 결혼제도 출세와 권력에 대하여 깊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지식인의 이반에 대하여 국가권력은 그를 싫어했고 심지여 죽이려고 까지 했는 데 지식인의 고발로 인한 양반체제의 붕괴에 두려움 때문이었다. 

지난 정권에서도 문화계 브랙리스트라는 말이 있었는 데 예술인(작가와 그림 작품)을 하는 이들은 현실에 순응하기 보다 창조적 파괴라는 이름으로 도전과 파괴를 일삼는 행동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속에서 바로 현실에 대한 눈을 뜨게 하고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 싹트게 된다. 70년대 김지하의 담시나 김민기의 노래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시 조선을 지배한 학문은 실학이었다. 중국에서 실학은 원래 기본적으로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지식인들의 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지원은 실학의 한 분파인 북학의 계승자였다. 실학이 천문학에서 고대 문법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실질적인 학문이라면 북학은 고도의 정확성을 가진 중국의 경전뿐만 아니라 당대 중국을 이해하는 학파였다.

박지원은 그의 친구이자 스승인 홍대용(1731-1783)으로부터 북학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의 저작을 통해 공개적으로 그것을 선전하였다. 북학의 지지자들은 중국과의 무역이 주는 잠재력을 강조하였고 외국과의 관계에 대한 비이념적이고 실질적인 접근을 고취하였다. 그들은 만주에 대한 분개감이 한국의 경제 발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부분적으로 북학파들이 노력한 결과 당대 중국 제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서 북경으로 사신들이 파견되었다. 비록 18세기 중국이 군사기술과 혁신에서 서구에 뒤지기 시작했으나, 사실 중국은 대단히 기능적인 사회로 남아 있었다. 조선은 여전히 14세기에 정착된 제도들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더 이상 기능적이지 않았다.

중국은 17세기 들어 대규모의 제도적인 재편이 진행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지식인들의 대다수는 만주에 대해 깊은 의심을 갖고 있었으며 소멸한 명대의 제도들(심지어 송대의 그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북학은 한국의 다루기 힘든 문제들에 대한 많은 가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였으나, 성취는 간헐적이었고 열의가 없었다.

심지어 그가 가장 개인적이고 아이러니한 산문을 쓸 때조차도, 한국의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중국과의 관계가 박지원의 사고를 지배했다고 한다. 허나 그의 저술은 적극적으로 당대 중국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였으며 북경으로의 여행 동안 그가 배운 것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건륭황제 치세하의 중국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그에게 분명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박지원이 처음으로 중국에 간 것은 1780년 그의 종형 박명은(朴明源)이 외교사절로 북경을 방문할 때 동행하였으며, 그 때 그는 건륭제 치세의 중심에 있던 중국의 문화적이고 지적인 환경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다. 사절단은 건륭제의 70세 생일연회에 참석했는데 그것의 화려함과 형식에 압도되었다.

중국은 당시 물질적인 힘에서 최고의 전성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주의 깊은 관찰자들에게는 제도의 경직성과 기술적 쇠퇴의 징조가 보였다. 박지원은 중국의 제도들을 고찰하면서도 그러한 점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여행에서 그가 약기해 놓은 것들을 혼합하여 “열하일기(열하에 있는 여름 궁궐로의 여행에서 얻은 일기)”라는 제목의 산문을 만들었다.

그의 생생한 중국에 대한 묘사, 만주 지배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그의 객관적인 평가, 그리고 한국의 보수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판은 지식인 세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 책은 개인적인 경험, 시 그리고 중국사회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식견을 혼합한 고전으로 남아있다.

이 열하일기가 실제로 박지원이 썼는지에 대하여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나타난 소재들과 호탕한 전개는 이전의 문학과는 천양지차다. 양반들의 엄숙주의와 질서를 모두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 장르에 재미를 도입한 것으로도 불린다. 이후 한국의 언문 문학은 모두 연함의 글쓰기로부터 새롭게 시작이 된다는 말도 있다.

박지원이 일찍이 관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그가 마지못해서 나이 50이 되어서 겨우 지방 관리가 된다. 그는 열심히 농업 정책과 같은 행정 문제에 대해 집필하였다. 그는 1799년 농업 개혁에 대한 정교한 제안을 담은 토지 소유의 제한을 제시하였다. 불행하게도 지식인으로서 박지원의 실천은 그 유용성에서 수명을 다한 체제인, 조선의 경직된 제도와 끔직한 부정의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풍자적인 많은 소설들은 부패하고 경직된 양반들 하에서 고통 당하고 있었던 농부들과 상민들에 대한 그의 염려에서 쓰였다. 특히 그가 부인과도 사별하고 형수의 돌봄을 받는 데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가족 간의 지극한 사랑과 우애는 여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만년에 벼슬로 양양군 산지기로 일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부자들이 호화로운 집을 짓기 위하여 법에 어긋난 가장좋은 춘향목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런 일은 호주머니 가욋돈 채우는 방법으로 통용되는 것이지만 이를 거부하는 등 지방 관리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현실 정치와체제에 동화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박지원은 1805년에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으나 때때로 고독한 지적 싸움을 벌였다. 그의 수입은 일생동안 수수했고 그는 결코 사대부(지배 양반) 계급의 많은 구성원들이 누릴 수 있었던 금융상의 혹은 사회적인 혜택을 누린 적이 없었다.

거의가 그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도움으로 살았다. 그가 한때 지방 생활을 할 때면 그의 친구들을 그곳에 근무하게 하여 연암의 생활을 돌봤다는 기록도 있다. 참으로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삶을 산 지식인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귀향한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친구들은 그를 먹이고 살리고 존경하였다.

사실 농민 계급에 대한 그의 관심과 동정은 부분적으로 그 자신이 선택했던 겸손한 환경으로부터 나타났다. 박지원은 철학, 역사, 천문학, 지리학, 군사문제, 농업과 경제학에 대해 광범위한 독서를 했던 치열하게 독립적인 독학자로서 알려져 있지만, 기성 제도들과는 거리를 유지하였다.

그는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나라를 상상했다. 비록 박지원은 그 자신이 양반이었고 사대부가의 일족이었지만, 정부의 직위는 그의 시대에 한 줌의 가문에 의해 독점되어 거기에 줄을 서지 않는 한 출세의 기회는 제한 되었다. 그러나 제도권으로부터의 그의 소외는 그로 하여금 한 걸음 물러서 놀랄만한 정도로 자신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박지원이 현실의 문제를 무시한다는 이유로 양반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아마도 사회를 위태롭게 할 선동분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중세 조선의 양반이나 지식인들의 학파는 학문의 근간을 이룬 귀중한 근거로 남아있었지만, 사회에 대한 봉사나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혈통에 대한 분파적인 충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대조적으로 박지원은 학파나 당파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지적 소속을 만들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에 반대하였다. 그는 지배 계급의 위선과 무능력에 대해 두려움 없이 그리고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박지원의 깊은 헌신은 가차 없는 풍자로 한국사회를 묘사할 때조차 그 빛을 발하였다.

난해할 대로 난해한 그의 저작들에서, 그는 풍자와 제안을 통해 어리석어 보이게 하는 18세기의 보수주의로부터 조선을 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박지원은 후기 학자들에게 영웅적 인물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한국 사회의 부적절함을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지식인들은 유럽으로, 이후 일본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주목을 돌려 진보와 근대의 모델을 찾고자 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서구화 그리고 산업화와 씨름하는 한편, 그들은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정책들을 실행하고자 했다.

계몽기를 낳은 문화적 제도적 혁신들은 훌륭하게 문서화되어 있고 한국적 경험의 결정적인 일부이다. 허나 현대의 독자들이 계몽기 이전 한국에서 재활성화에 대한 열망과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재했다고 추측할 때, 그들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서구 기술과 문화에 대한 노출이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박지원의 저술들은 18세기에 조선 왕조의 편협한 정책들을 받아들이기 거부한 지식인들이 존재했음을 가리킨다.

박지원은 진보한 나라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청으로부터 제도들과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당시의 시점에서 기술상 중국을 능가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보다 질서 있고 제도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위생과 관습이란 측면에서 더욱 문명화된 나라였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박지원을 이 시대 가장 멋진 선비로 부활시킨 고전연구가 고미숙 선생(고려대)에 의하여 연암의 전기와 사례는 풍성하게 소개 되었다. 그 중에 보면 그는 젊어서 요즘 말로 우울증 같은 병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새로운 학문과 사람, 격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치유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상상할 수 없는 데 똥치는 사람에서부터 저잣거리의 노동자, 장례를 치르는 상여꾼 등 당시 하층민들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삶의 의미와 도전, 재미를 얻은 것이다.

박지원의 글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농부와 민중, 문맹자들이다. 소설 자체는 한문이었지만 소재가 중하층민으로 이를 구성하는 데 새로운 방식으로 혁신적인 것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동시에 박지원은 고풍의 언어로 독자들에게 도전하며, 그는 가장 평범하고 무시당해온 사람들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회와 지식인들이 외면하고 싶었던 주제들에 집착했다. 그는 전통과 예절의 인간을 발가벗긴다. 호질과 같은 소설은 중국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살아있는 한국인 민중들의 삶이었다.

박지원은 문체 상의 실험을 통해 소설의 소통적인 잠재성과 사회성을 확장시켰으며 이후의 소설가들과 지식인들에게 모델을 제공했다. 소설은 학자들이 개인적인 경험과 특별난 일들을 창조적이고, 여유롭고, 익명의 방식으로 기록하는 비공식적이고 심각하지 않는 매체로 봉사하는 부차적인 문학 장르였다.

박지원의 손에서 소설은 이데올로기, 경제체제, 제도, 철학 그리고 심리학적 논쟁에 딱 들어맞는 그릇이 되었다. 유교적인 전통에서 이전에는 주변적이었던 장르에 그가 취급하는 주제를 투사함으로써, 박지원은 이전에는 지적인 담론의 협소한 한계 내에서 출입이 금지되었던 주제들을 다룰 수 있었다. 박지원은 소설을 사회를 조사하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비판적인 도구로 만들었다.

때로 그의 소설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문학적 담론처럼 보인다. 소설에 그러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관심을 표현하는 기본 장르로서 소설이 시를 대체했던 19세기 후반이 되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박지원은 똑같은 의도를 갖고 있었으나 한국 사회는 아직 소설을 소통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저작은 거의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박지원은 문학자로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아들의 저작  ‘나의 아버지 박지원’ 을 통해서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볼 수가 있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인 박종채는 심혈을 기울여 한문판을 한글로 초고를 집필 후 4년에 걸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아버지 박지원을 후세에 제대로 전하기 위해 고심했던 박종채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위대한 문학가로서의 면모만이 아니라 그 인간적 면모와 함께 목민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들도 자세히 들려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박지원이 활동했던 18세기 영·정조 시대의 지성사와 사회사에 대한 풍부하고 생동감 넘치는 보고서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다. 그는 박지원의 차남으로 자()는 사행(士行)이고 호는 혜전(蕙田)이다. 벼슬은 음직(蔭職)으로 경산현령을 지냈다. 개화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박규수(朴珪壽)의 아버지이다. 저서로 《과정록》(過庭錄)이 있으며, 《나의 아버지 박지원》로 번역 출판되었다. 생전 관직은 현감에 이르렀으나,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여러번 추증,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박지원의 현대적인 이해는 그가 활동했던 시대와 우리의 시대의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연결에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박지원의 저작을 아무런 상관없이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제들과 그가 어떻게 투쟁했는가를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사회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겉모양으로 치장하는 동안 그 밑에서 땀흘려온 노동자들과 농민 빈민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하여 애써 무관심하였다. 그것은 문하이나 신학의 소재이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미 박지원의 상상력은 이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어때야만 하는가 라는 화두를 던진 가곽 같다.

경전에는 유학자들이 농민과 평민들의 복지에 기본적인 관심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 한국이건 중국이건 간에, 유학자들은 다른 목적들 보다 먼저 스스로의 영속성을 추구하는 자조적인 계급이 이었다. 18세기가 되면 조선 사회에서 사회적 동원성의 상대적 유연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양반 엘리트 가문들은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의 수를 줄이는 경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유학은 평민들과 스스로를 구별하는 수단이 되었고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상에 사는 것이었다. 박지원의 저작들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고통 받는 인간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선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평민들을 교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단계는 현대 독자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그 간극은 너무나 커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완전히 문맹이었고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박지원의 이야기들은 그것들이 계급 전선을 넘어서고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질서를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왜 박지원은 당대 한국에 대해 쓰려고 선택했으며, 가장 어렵고 박식한 한문을 상상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지배계급의 요구를 축소하려고 했을까? 그는 더 넓은 독자들을 위해 집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혹은 최소한 자신의 초점을 교육받은 자들에게 애매하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이 시도한 고전주의는 그가 이 글들을 집필할 때, 최고의 교육을 받은 당대 지식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임을 가리켜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의 다른 저작들로부터 판단해보건대, 그가 동료 지식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회에 대한 변화와 지식인의 역할을 호소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대에 그의 글을 볼 수 있는 이들은 양반이나 글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당대의 학문적 도구를 통하여 평민들의 삶을 전해주고 싶었고 지식인에게 사회적 책임을 환기시키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역사적 계기에 우리가 박지원과 그의 소설에 접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의 상상력을 통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가난한 농부들과 거지들 사이에 놓인 간극에 다리를 놓으려 하는 지식인은 잃어버린 시대의 흥미로운 결과물인 것처럼 보인다. 현실에서, 우리는 박지원이 당시에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과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 박지원은 누구인가? 

이 역사적 시점에서 전 지구적으로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사이에 커져가는 불균형은 우리를 둘러싼 고통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리고 우리 스스로 보호막을 치고 살고 있기에 스스로를 좋은 시민이라고 믿게 될 위기를 만들어 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심각해서 그것은 지식인을 압도하게 될 것이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제 손을 들고 항복해 버렸다.

요즘 진보와 개혁을 표방한 이들인 지식인의 변절과 배신의 문제가 우리사회의 연구거리다. 물론 이런 일은 역사적으로 항상 있어 왔다. 일제하에서도 처음에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았던 지식인들이 구차한 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친일을 한 것을 보아왔다. 춘원 이광수도 그렇고 모윤숙, 서정주 등 당대 지식인이 가장 먼저 이탈을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삶의 여유와 풍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보수가치니 개혁이니 애국이니 하는 것도 다 부차적인 것이다. 속 사정은 더 여유롭고 편하게 잘 먹고 잘 사는 단계를 넘어서 욕망과 과시와 부유함이 목표다. 이는 유신시대와 야당의 정신이 끊어지는 3당 합당, 합종연횡, 정권에 부역하는 자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말로는 구국이고 애국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 결과, 혹은 그런 자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적 유익이다. 개인적 영달과 유명세이다. 일제하도 그렇고 군사독재와 이명박 박근해 정부에서도 그런 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 같이 가진 자들의 더 갖고자 하는 욕망이다. 2016년 대통령 탄핵과 정치적 위기에서도 그런 변절자들은 출현했다. 과거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산업선교  환경운동 경실련 등 모두가 자신의 출세와 영화를 위한 발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 변절자들이 입으로는 개혁이니 애국이니 국격이니 하지만 그 속내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 바로 정치권력에 기댄 자리 구걸이며 향유요 이권이다. 반대로 민중의 삶을 위하여 살았던 의인 허준이나 홍길동을 기록한 허준, 민족 해방과 독립운동, 민주화와 국민주권의 요구에 대한 대가는 죽음과 감옥, 도피와 은둔 그리고 가난 뿐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우리시대 지식인들이 배워야 할 사표다. 그의 끊임없는 학문적 욕구와 차별없는 친구와 대화, 폭넓은 사유와 세계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질과 자리에 대한 탐욕을 거세한 것이다. 그는 가난했다. 글을 쓰고 연구하는 자는 가난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지식인이 공부하지 않고 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비난받을 수 있지만 돈을 벌지 못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비난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글도 잘 쓰고 부자로 살았다면 그는 가짜 지식인이거나 위선자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지식인들이 존재했기에 많은 자료와 사료가 남겨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부터 민간의 각종 기록들이 그것이다. 그들이 비록 음주가무와 잡기를 즐기고 시를 짓고 토론을 즐겼지만 권력과 당파에 초연하게 초야에 묻힌 이들이 많았다.   이것이 지식인이다. 먹고 사는 일과 권력에 연연했다면 그는 지식인이 아니다. 가장 멋진 조선의 지식인 박지원의 책과 그의 정신을 소개한다.

                         연암 박지원관련 문헌

* 박수밀, 연암 박지원의 사유방식, 한국학
* 조동일, 박지원의 문학사상과 소설론, 고전문학회
* 임형택, 박지원의 실학사상과 문학, 사회문화원
* 고미숙, 열하일기, 휴머니스트
* 고미숙,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 하 2권)
*
고미숙, 길진숙,김풍기 공역 ,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북드라망
* 고미숙, 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하 , 그린비
* 김명호, 박지원 문학연구, 성대, 대동문화연구원
*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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