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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게서 배우는 지도자의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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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21  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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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에게서 배우는 지도자의 도리  

동양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지식인은 공자(孔子)자 그는 B.C.551년 현재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지방인 노(魯)나라의 작은 마을인 추읍( 邑)에서 태어났다. 그는 모든 남자들이나 지성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읽고 써야 하는 학문의 기초을 만든 사람이다.  이후 나라의 지도자나 학문을 숭상하는 이들은 그가 남긴 책을 읽고 외는 필수과목이 되었다.  등용문인 과거시험도 어떤 글짜를 주고 이를 넣은 문장의 시를 쓰느 방식이었다. 

지식인들은 이렇게 한문 문장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냈다. 이방언과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겼다는 '하여가' 와 '단심가' 는  당대 정치가와 충신의 마음을 잘 표현한 명시다.  한문 문화권의 나라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를 갖고 시문장을 만들어 자신의 지식과 학문의 깊이를 표현한 것이다. 

"하여가"  如此亦如何(여차역여하) 이런들 또 어떠하며, 如彼亦如何(여피역여하) 저런들 또 어떠하리. 城隍堂後苑(성황당후원) 성황당의 뒷담이 頹 亦何如(퇴비역하여) 무너진들 또 어떠하리 吾輩若此爲(오배약차위) 우리들도 이 같이 하여 不死亦何如(불사역하여) 죽지 않은들 어떠할까. 

"단심가"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경사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 진토 혼백유야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흥지)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런 모든 학문의 교과서를 남긴 이가 난 때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태어난지 10여년 뒤이고,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시기에 해당한다. 공자는 은(殷)나라 왕족의 몰락한 후예의 집안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하급무사였던 숙량흘(叔梁紇)이고, 어머니는 어린 안징재(顔徵在)로 치성을 드려 공자를 낳았고 공자의 머리가 움푹 들어갔기 때문에 공자의 이름을 구(丘), 자를 중니(仲尼)라고 하였다고 한다.
   
 
가난을 공부로 승화

공자가 태어날 때 그의 집안은 불우하였고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매우 가난하고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장례식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할 정도였던 모양이다. 당시 공자의 집안은 몰락하여 겨우 벼슬을 할 수 있는 계급인 사(士)에 속해 있었다. 사계급은 위로는 귀족과 대부, 아래로는 서민의 중간에 있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으면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공자는 18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를 모시느라 여러 비천한 일들을 해야만 했고, 공부도 15세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늦 공부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과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고 할 정도로 배움에 대해 간절한 소망을 가졌고, 자기처럼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 당시에 교과내용은 역사, 경전, 문학, 예악(禮樂), 산수, 글쓰기, 활쏘기, 말몰기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일정한 스승의 지도 없이 당시의 학교와 인물로부터 두루 배웠으며, 나중에는 주(周)나라로 가서 노자(老子)를 찾아 뵙고 예(禮)에 대해 묻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20대에 노(魯)나라에서 제자가 생겼고 22세에 높은 학식을 인정받고 이름을 얻고 성의를 가지고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로부터 그들의 능력에 알맞는 폐백(幣帛)을 받고 그들의 수준에 알맞는 공부를 시켰다.

세상으로 나가다

나중에 벼슬을 하기는 하였지만 공자의 일생을 통틀어 보면 젊은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남을 가르치는데 보낸 직업적인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많이 지닌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공자 나이 24살 되던 기원전 528년에 어머니는 4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방(防) 땅에 아버지와 합장하여 묻고 삼년상을 지낸 뒤 또 2, 3년 지나서야 다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다. 공자가 꿈꾸던 세상은 예(禮)와 덕(德)과 문(文)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공자는 그러한 이상을 실현한 주(周)나라를 동경하였고, 그 반대로 당시의 권세 있는 대부(大夫)들이 제후(諸侯)들을 무시하고 권력을 농단하던 사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공자가 정치에 관여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공자가 살던 당시 춘추시대에는 국가간이나 나라안이나 간에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횡행하여 온갖 명목의 전쟁과 난리가 연이어 일어나 민중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인(仁)의 실천, 곧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했던 공자로서는 그러한 현실을 목도하고서도 책이나 읽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만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치가들에게 자기의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설파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여러 나라를 주유하기도 하였고, 직접 벼슬을 맡아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벽은 그의 꿈을 실현하기엔 너무나 두터웠고, 많은 좌절과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합리적인 도덕정치철학은 시대를 넘어 후대에 계승되어 한(漢)나라에서 국정이념으로 채택된 이래 동양의 역사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교육자와 뛰어난 정치철학자로서의 일생을 보낸 공자도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 같이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아들 리(鯉)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顔淵)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으며, 여러 나라를 떠도는 가운데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고 테러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직업으로의 최초의 교사

공자는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개방하기를 원했고 교직을 직업으로, 즉 하나의 생활수단으로 확립시킨 첫번째 교사로 알려져 있다(→ 교수). 공자 이전의 시대에 귀족가문에서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특정분야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담당시켰고, 정부관리들은 하급관리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사회를 개조시키고 향상시킬 목적으로 일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 사람은 공자가 처음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기수양으로부터 덕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장래의 지도자들을 위한 인문과목 교육과정을 처음 실시했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문호를 개방했으며, 배움이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인격의 도야까지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공자에게 있어서 교육의 일차적 기능은 군자(君子)를 훈련시키는 적절한 방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자기향상과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배움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즉, 배움의 목적은 자기발전과 자기실현이라고 역설하는 한편, 공직(公職)이 참교육의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공자는 속세에서 벼슬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야망을 비웃는, 학식있는 은자(隱者)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속세에서 벗어나 '금수(禽獸)와 벗하며 살자'는 유혹을 뿌리쳤고, 세상에 속해 살면서 세상을 변모시키려고 노력했다.

공자는 40대말과 50대초에 이르러 중도(中都)의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이어 노나라의 재판관이며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노나라의 군주 정공(定公)을 수행하여 참가한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평화회의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적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자, 당시의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자(季孫子) 가(家)에서 견제해왔고, 또 그의 도덕적 엄정성 때문에 왕에게 환락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던 왕의 측근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56세에 공자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이상을 펼 수 있는 다른 나라를 찾아보기 위해 노나라를 떠났다.

그래서 노년에는 이런 모든 것을 잊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같은 책을 엮고 역경(易經)에 재미를 붙여 책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떨어질 정도로 공부하는 한편, 고향의 이상이 큰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다가 기원전 479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명언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않는 것이 군자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일이 잘못되면 군자는 제 탓을 하고, 소인은 남을 탓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중요한 귀절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어서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고,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돈을 일으키지 않았고,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고, 60세가 되어서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것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爲政篇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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