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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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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5  21: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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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정적 심환지와 나눈 편지

조선시대의 붕당(파벌)으로는 노론 · 소론 · 남인 · 북인이 대표적인데 이를 ‘4대 붕당’이라고 한다.  이 중에서 영조 시대 정치를 주도했던 이들은 노론이었다. 그런데 노론이 벽파와 시파로 분열되는 데 신하들의 분열은 왕권의 향방을 좌우하게 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했던 사람들이 벽파,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사람들은 시파라고 한다.  당시 남인과 공동 전선을 꾸려 벽파에 대항하는 데 앞장선 이가 바로 영의정 심환지다.

정조 시절, 정치 주도권은 노론(벽파)에게 있었다. 그럼 왜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묵인하거나 앞장 선 이들과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을 까? 사적으로는 원수지간 이지만 당대 실세인 벽파의 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도 노론 벽파들은 정국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정순왕후와 짜고 정조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이를 주도했던 벽파의 우두머리가 바로 심환지였다는 정설이었다.

그런데 지난 2009년 당시 영의정을 지낸 심환지의 용인 묘를 후손들이 이장하는 과정에서 정조(삼청동)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찰 297통이 나온다. 서찰을 받은 심환지는 받은 일자를 기록해 놓고 간직한 후 사후에 묘소에 넣어 줄 것을 후손들에게 부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환지는 문신으로 영조 4년 1771년에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이조 판서, 병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지낸 최고의 실세였다. 이 서찰에서 보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정조의 인간성이 보이는 데 ‘개혁 군주’, ‘학문의 군주’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은 중국에서 유래했는 데 과거에서 배운다였다. 그래서 현재를 기록하고 옛것을 외우고 꺼내서 옛날에는 이랳고 저랳고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역사관은 발전하여 과거는 거울로 하고 미래를 놓고 현재를 보는 해석학적 관점이 나온다. 그러나 이 역시 역사 주인공을 왕이나 장군 승리한 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관이었다. 그러나 이후 식민사관이나 민중사관이 나오고 지금은 역사 중심을중심이 아닌 주변부등으로 확대한 해석학적 관점이 대세다. 
   
                                 * 심환지
정조의 업적
정조는 어떤 군주였을까요? 그는 조선의 역대 왕 중 세종과 더불어 가장 뚜렷한 업적을 가진 명군주로 대왕의 칭호를 얻는 다.  그것은 어린 시절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구도와 고뇌로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부친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의 노여움과 고모의 미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는 모습을 11세에 목도한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조부는 냉혹하게 뿌리친다. 그러나 모친 혜경궁 홍씨의 안정된 심성과 지혜로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낸다.

정조는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속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마음에 들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살해 위협을 넘김다. 그래서 정조가 왕으로 즉위하자 무술을 연마하고 실제로 병법서를 편찬하여 신하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또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 육성과 학문 발전의 토대로 삼는 데 이는 최초의 왕실 도서관으로 이후 조선의 문예 부흥은 모두 이곳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여기서 일하는 사서, 검서관을 서얼 출신 인재들로 체운다. 조선의 제상인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등이 서얼 출신이지만 정조에게 발탁되어 여기서 학문적 업적을 남기게 된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해코지했던 노론 벽파 세력을 정치 적재자가 아닌 동반자로 하면서도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세력을 들여 각 붕당이 균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나라 발전에 나서도록 한다.

또한 자신의 신변 보호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운영한다. 당시 호조나 병조에 예속된 파견 경호대가 아닌 직속 경호실 겸 특수부대 역할을 했던 왕의 친위 부대다. 이후 왕의 침소에 들더라면 문 앞에 상궁인 여성들이 잠을 자지 않고 지키게 했으며 어떤 왕은 내시들로 구성된 근접 경호원도 둔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왕들은 독살과 살해을 많이 겪었기에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만든 골욕지책이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배척했던 외척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영조의  탕평책이 오히려 외척 세력의 득세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탕평파가 외척이 된 것이다. 이들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부홍파와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공홍파가 나뉘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 외척 세력에 대해서 "진실로 그 화의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그것은 바로 척리(戚里)이다."라고 할 만큼 외척에 대한 불만이 컸다.
   
                                                    * 정조의 근영과 행차도
정조와 수원 성
정조가 남긴 가장 유명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성의 축조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는 것을 계기로 이곳을 단순히 군사적 기능만이 아닌 이후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 준후 내려와 살며 자신이 추진해 온 각종 개혁 정치를 총결산하려고 한다. 어머니의 회갑연을 맞은 잔치 행열 기록도를 보면 학자적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원성 설계는 다산 정약용이 했으며, 축성 과정에서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기법이 도입하여 우리 민족이 만든 성곽 중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성을 만들 때 백성들을 강제동원하지 않고 일정한 품삯을 주고 일을 시켜 민생 안정에 최대한 기여한다. 이런 자료들을 기록하고 글과  그림으로 남긴 것도 정조시대의 큰 유산이다.

정조는 요즘 말로 민생 시찰정치를 도입했는 데 이를 신하들은 반대한다. 그러나 저거리에 나가 어려운 이들을 만나 ‘다 내 잘못이다’ 라고 하면서 민초들의 힘든 삶을 위로한 선왕이었다. 또 정조는 세금 확보를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을 국가가 직영하자는 신하들 건의에  ‘국가에 이득이 되더라도 백성의 생계를 빼앗으면 안 된다’라며 세곡 운반선을 운영하는 이들의 삶에 지장이 없도록 한 일화도 있다.
   
                                                  * 정조 서찰중 하나
정조의 서찰 내용은 충격 
이 서찰은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과 한국고전 번역원이 번역 편찬했고 드라마로도 만들어 졌다. 전체 어찰의 수신자는 5명 안팎으로 대부분 측근에서 정조를 모시던 신하이거나 친인척이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僻派) 영수 심환지와 남인 영수 채제공에게 서찰을 보냈으므로, 노론 시파(時派)와 소론(少論) 등 다른 파벌에도 어찰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1797년 1월17일에는 하루에 4통을 보냈고, 1799년 9월20일에는 아침에만 3통을 보낸다. 임금이 이렇게 조급하게 하려고 했던 말은 무엇이었을 까?  특별히 중한 일은 없어 보이는 데 아마도 성격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해 8월10일 예조판서 심환지에게 "금강산 1만2000봉을 유람하는 일이 매우 통쾌한 일인데, 공명을 누린 사람이 산수의 즐거움까지 누린다니 어떨지 모르겠다"고 썼다.

다음 날에는 "1~2일 안에 휴가서류를 올리고 길을 떠나라"고 하면서 정승으로 발탁하겠다는 언질을 미리 준다. 정조는 8월28일 심환지를 우의정에 임명하고 조정에 올라오기를 독촉하는 글을 금강산에 보냈다. 이렇게 정조는 비밀편지를 통해 심환지가 사직소를 올릴 시기와 문안(文案)까지 상의한 끝에 10월28일 심환지를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런 내용을 알 길 없는 정조 측근 서용보는 심환지가 느닷없이 여행을 떠나자 뒷말이 생길 것을 걱정했다. 정조의 막후 정치에 측근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1800년 6월15일)고 하여 특급비밀인 왕의 건강을 나눌 사이로 독살설은 근거가 없다는 증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 정조가 어려서 숙모에게 보낸 한글 서찰
큰 정치는 적도 품어야
동아시아 제왕학에서 군주는 자고로 말이 적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정조는 정반대였다. 말이 많은 다변(多辯)의 군주로 보인다. 이는 격정적이고 화를 참지 못 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밀 편지에서 보이는 신하들에 대한 가감 없는 평가가 그런 성격을 증언한다고 보겠다. 지도자는 온화하고 덕이 많고 화를 안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개인적 인격보다는 큰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예컨대 정조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영보(徐龍輔·1757~1824)에 대해서는 "호로자식"(胡種子)이라 하는가 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 김매순(金邁淳)은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자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혹평했다. 나아가 황인기(黃仁紀)와 김이수(金履秀)라는 신하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정조는 반대 세력인 심환지와 은밀한 방법으로 서찰을 교환하며 당대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했으며, 특히 심환지를 통해 노론 벽파계 인물들을 통제하려 했고, 주요인사 문제를 협의하고 국정운영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또 심환지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번 사직상소를 올린 것으로 나온다. 한데 이번 비밀 어찰을 통해 이 또한 정조와 심환지가 미리 각본을 짜고 벌인 일종의 '정치 쇼'였음이 드러난다.

정조는 1798년 9월18일,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심환지에게 첫 번째 사직상소를 언제 낼 것인지를 물었으며, 그에 대한 답변과 사직상소 문안이 도착하자 "사흘 후(9월24일)에 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하고 직접 사직상소 문안까지 서로 입을 맞추고 손 본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여 왕명을 거역하고 관을 벗고 나가라고 하고 삭탈관직을 하고 이후 다시 부를 것도 귀뜸 해준다.  왕과 영의정의 이런 냉기류에 대관들은 아연질색했고 고모의 회갑연은 큰 말없이 지나가는 데 고도의 정치다. 

이 편지들 중에는 심지어 "내일 어전 회의에서 이런 사안을 논의할 터이니, 심환지 당신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 놓으면 내가 승인하겠다"고 미리 입을 맞추는 내용도 있다. 공개된 비밀 편지를 보면 정조와 심환지가 긴밀한 협력 관계로 보아 심환지가 정적이라기보다는 심복이었음을 입증한다. 독살설도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정조의 편지는 정조가 말년에 각종 질병으로 고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조와 심환지에서서 배울 점
과거 TV의 사극은 주로 여인네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노력과 역사 발굴은 ‘용의 눈물’ 등우로 남성들을 부라운관으로 모은 다. 그러나 여전히 왕이나 왕비, 권력자였다. 그러나 이후 시대의 변화는 드라마에서 그 주인공 변화하는 데 역사의 조연들까지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명회나 장금이, 무수리나 후궁, 내관, 지관(명당)등 주변부의 역할에 주목한다.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의미다. 그후 '왕과 나’ 라는 드라마는 왕과 내시를 동격으로 논다. 내시가 왕(하늘)도 갈수 있다는 식의 권력의 중요한 축으로 한 드라마다, 이렇게 역사연구나 상상력은 우리가 몰랐던 것을 알려주고 풍요롭게 해준다.

원래 임금의 어찰을 받으면 그 수신인은 정독후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정조는 여러번 편지에서 실명을 쓰지 않았고 그리고 서찰을 태우거나 찢거버리거나 물에 씻어 버리라고 한다. 임금의 어찰은 극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국가기록원을 세워 봉인제도가 생겻다. 정조의 경우도 국사를 논한 것이기에 역사에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심환지가 자신의 묘까지 이것을 가지고 간 것을 보면 그가 예사 속에서 하려고 햏ㅇ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 흥미롭다

시대가 이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지혜다. 우리는 둘이 밀담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첫째는 생전 그리고 400년동안 그 비밀은 유지된 의리다. 둘째  아주 사적으로 심환지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어느 때인가는 선비로 충절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했고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군신으로 충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보인다.

불행하게도 심환지의 답장은 남아있지 않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낸 내용은 정치의 극비 사항만을 논하기 위해 편지를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서같은 쪽지도 보낸 다. 그것을 보면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게 되는 데 심하게 꾸짖는 내용도 있어 정조에게 보는 어진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역사의 주인공은 어디에 
역사는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따라서 그 역사를 오늘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따로 있다.  당시 심환지는 받은 편지를 없에라는 왕명을 어겻다. 그 이유는 앞서도 읜급했듯이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려주려고 했는 지도 모른다. 정적과 내통하는 왕의 진면목을 후대에 교훈으로 알리고 싶어했는 지도 모른다. 이를 보면 정조의 이런 행위는 통 큰 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는 현재 한국의 정당이나 현 정권의 지도자들도 배워야 할 점도 있다. 명분만 찾고 서로 격식만 따지는 식의 기쌈이 아닌 나라를 위한 일에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만나야 한다.  공식 비공식이 있을 수 없다. 하루에도 몇통의 편지를 쓴 정조의 심정으로 국정을 살려야 하는 것이다. 남북간의 핫라인도 마찮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그런 점에서 부족한데 민생을 살피는 잠행과 현장 방문이 너무 없다는 평이다. 

교회 지도자들도 배워야 할 점이 있다. 나와 다른 지역이고 서클이 다르더라도 적대시 할 것이 아니라 큰 목표를 갖고 협치을 해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출신이 다른 사람들과도 내통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하겠다. 얄팍한 자리나 명예가 아닌 대의와 명분이 있다면 말이다.  누가 옳았는 지는 후대가 평가하는 것이다.  아니 평가를 받지 못해도 그런 역사의 씨줄과 낱줄을 엮어가는 사람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다. 그런 통크고 멀리 보는 지도자가 아쉽다. 자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져 손을 내미는 것이 진짜 지도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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