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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적신학(public Theology)인가?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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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30  21: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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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교회(public Church)성의 대두

신학이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를 붙힌 신학이 나오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한 시대 지역이나 상황에 대한 신앙적 응답에서 기인하는 데 신학자들은 이것을 학문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그런 신학들이 일정한 역할들을 하고 그 수명을 다하기도 하고 여전히 유효하기도 하다. 예을 들어 민중신학을 People Theology 라고 하지 않고 한글 그대로 발음한다. 이유는 '피플' 이라는 단어가  서구와는 그 개념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란 국가에서 한이 서린 이들과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이들이다.

이는 사회주의에서 혁명의 주체로 일컷는 무산계급이나 프레레타리아와도 다르다. 민중이란 체제에 순응하는 듯 하지만 잠재적으로는 변혁을 갈망하고 때가 되면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자신들의 세상을 구현하는 이들이다. 조선말 동학교도나 70년대 진보적 신학자들에 의하여 표현된 이들(노동자 빈민, 농민)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반드시 가난한자 만을 의미하지 않는 다. 사회학자 한완상은 이를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민중신학은 이제 제 3세대가 나왔다. 1세대 신학자들의 논문이나 개념은 서구에서도 일부 관심을 끌기는 하였으나 이후 꽃을 피울 틈도 없이 져버린다. 그러나 지금도 꾸준히 후학들에 의하여 연구하고 정리되고 있다. “공공신학 (Public Theology)” 이라는 학문은 이에 비하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신학은 사회에 대하여 순응하던지 저항하던지 해야 발전한다. 이에 공공신학은 시대에 참여하고 대화하는 신학일 수 밖에 없다. 이 신학은 학국적 상황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 진보든 보수든 가장 의미 있게 보여지는 신학적 개념이다.
   

이형기 외, <공적신학과 공적교회>, 킹덤북스, 2010 :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공적신학과 교회
연구소’에서 출간한 책으로 장신대 교수들의 논문 모음집이다.

한국에서 진짜 필요한 신학
미국 프린스턴의 스택하우스 교수나 남아공에서 공부한 최경환 박사등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이 신학은 진보진영이 아닌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토양에서 나왔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면 그 반대를 생각하면 좋다. 공공의 반대는 사적(privat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공신학이라는 말은 사회에서 말하는 공공성의 의미도 있지만 공교회라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공공신학자들은 이 신학의 원류를 칼빈으로부터 찾는 데 칼빈은 그의 신학적 단초를 성경에 기초하면서도 그 시대를 읽고 적용한 신학자로  목회적 과제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은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를 통하여 목회적으로 발전한다. 이후 계속해서 이 신학을 발전시켜온 이들은 개별적으로 의미 있는 노력들을 해온 것이다. 그리고 이미 10년전에 한국에서도 장신대 이형기 교수를 중심으로 공적신학회가 조직되여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후 이 신학을 발전시키고 목회 현장과 접목하는 데는 아직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공공신학은 특별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일반계시 영역인 사회생활 속에서 신자가 어떻게 활동할 것인지를 탐구하고 적응해가는 분야로 보인다. 따라서 그동안 정교분리를 지켜온 한국교회가 지난 촛불집회와 조국장관 임명을 둘러싼 서초동과 광화문집회의 양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격한 정치광장의 참여가 이뤄진다.  오랜동안 금기시 해온 정치참여, 혹은 관여가 봇물처럼 이뤄진 것이다. 특히 한기총 전 회장 전광훈 목사의 광화문 정치집회에 몰린 동인과 이들에 대한 분석도 학문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짐 월리스, <하나님 편에 서라: 공동선은 어떻게 형성되며, 우리 사회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IVP, 2014 : 복음주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미국 사회와 정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목소리를 낸 짐 월리스가 공동선(common good)이다.
공적신학의 목회 적용 꼭 필요
공공성에 대한 일반 목회자들의 언급은 신학과는 별개로 그동안 개인구원(영혼구원)이라는 논쟁은 지났다는 의미다. 또 대형교회나 유수한 교회의 후임자로 부임한 이들의 지적 신학적 수준과도 관계가 있다. 이들은 한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지만 SNS의 발달로 한국 사회 아니 세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깊이 들어가지는 않치만 공공신학, 공공성, 공교회라는 단어들이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언급되면서 공공성은 이제 한국교회가 피할 수 없는 큰 화두가 되었다.

이는 보수와 중도에도 지식층이 증가하고 세계화에 대한 정보의 균등화로 인하여 ‘불합리 하니까 믿는 다’ 라는 식의 신앙갖고는 안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진보와 중도 보수를 막론하고 교회 개혁에 대한 열망과 오히려 보수진영에서 더 깊은 개인의 헌신과 공공성, 공적책임을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대형교회가 이제 큰 예배공간만을 만들지 않는 다. 지역사회를 의식하여 아동교육이나 노인케어를 위한 시설이나 지역사회를 문화 공간을 만든다. 그 만큼 사회와 지역의 요구와 평판에 민감해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공공신학의 목회적 적용에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나 기능적으로나 부속적으로 하는 이것을 공교회성이라고 부르기는 이르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추구해온 개교회 주의는 교회성장의 동력이었고 여전히 한 교회의 교인이나 교파교회의 신도로 국한시키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제 말하는 교회와 개혁의 담론에서 말하는 공공성의 회복은 성경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아주 복음적인 가치다.

대표적인 신학자로는 최경환 교수로 그가 집필한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이라는 연구서는 공적신학에 있어서 가장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아직은 서론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공공신학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와 담론, 그리고 공공신학이 뿌리하고 있는 이론적·역사적 배경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해서 소개한다. 또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공공신학의 전체 지형도를 그려 준다. 이는 신학뿐 아니라 공공신학의 가장 큰 이론적 파트너가 되는 현대 정치철학의 논의를 충분히 다루고 있다는 분석이다.

공공신학 목회현장에서 꽃피워야 
신학자들은 이 시대를 이론적으로 공적신학이라는 주제를 제시했다. 이제는 목회자들이 이 주제를 어떻게 목회현장에서 설교로 녹아낼 것인가가 과제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분열된 골을 더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 하는 데 관심갖아야 한다. 더 이상 교회나 그리스도인은 한 진영에 가담하기 보다 중재가되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다. 이 심각한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마다 하는 것은 공적신학의 정신이 아니며 우리는 한국 사회를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진보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분열된 광장은 공론의 장이 아니다. 공론장(public sphere)이란  단어에서 나타나듯  공공성이란 1961년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가 문명과 지성 국가라고 자랑하는 독일에서 나찌즘이 나타나고 국민들이 이에 미쳐 열과하는 것에 대한 광기를 심리적 철학적 정리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지난 1년동안 한국사회는 가른 것은 진보나 보수라는 이념이지만 이것이 공론의 장이 아닌 광장에서 충돌한 것 이다. 논객들이 나오고 급진적인 유투버들이 나오고 이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시청하고 더욱 공공히 되가는 중이다. SNS에 상에서도 현 정권을 옹호하고 조 국장관 변호에 이어 정의연 사태나  서울 시장 고 박원순 시장 사건을 지나면서 이젠 피미까지 합세를 하게 된다. 

그리고 목회자들중에는 하루종일 이런 일 변호에만 열을 올리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과학적이고 심층적인 분석과 비판을 해야 한다. 여당이나 조국 추미애 장관등을 옹오하는 전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이 문제를 분석하고 예측하고 대항해야 대중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 아직도 거대 민주당을 선거에서만이 아니라 정당인 처럼 너무 정치에 몰입하는 것은 문제다.

전광훈 목사의 정치 집회에 열광한 보수 기독교인들이 왜 열광했으며 몇개의 대형교회 나이들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장로들은 젊은이들 처럼 깃발까지 들고 나왔는 가? 를 분석해야 한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보면사 이제는 보수적인 목사가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이 나섰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제 한국교회나 교인들은 도  '정치적' 이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목회자들이나 목회 환경운 예전애 보지 못했던 낮선 풍경을 접하게 될 것이다. 급격한 정치환경과 몰입에 대하여 준비해야 한다.   

과거에는 구원받은 이들이 늘어가면 사회는 복음화되고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이젠 없다.   공공신학자들은 “교회를 개혁해서 공공성을 회복하는 게 아니라, 공공성이 회복되면 교회가 개혁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젠 좋은 기독인만으로는 부족하고 건강한 시민이 필요한 시대로  '공적인 신자' 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사회복음화의 목표가 되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관심갖고 전개하고자 하는  몸글은 “왜 공교회인가?” 이다. 우리교단만 놓고 본다면 최근 지교회의 자유와 공교회성의 충돌이 잦다. 교회는 개체교회에서 출발한다. 총회나 노회가 구성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게 아니라 지 교회가 세워지고 독노회가 만들어졌고 이후 총회가 구성된다. 따라서 헌법에도 그렇고 교회는 그 자체로써의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결체다. 노회나 총회는 행정적으로 목사 안수와 헌법체계등을 규정하는 최고 치리기관이다.
   
근주, <복음의 공공성: 구약으로 읽는 복음의 본질>, 비아토르, 2017 : 국내 구약학자가 구약성서를 ‘공공성’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풀이한 책이다.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신자 개인을 공적인 삶으로 부르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공공성이 실현된다고 말한다. 공공신학에 대한 성서적 주해가 빈약한 국내 상황에 단비와 같은 책이라는 평이다.
공교회성 회복은 왜 무너졌나
따라서 교회는 어디다가 어떤 이름으로 세울 것인지 누구를 목사로 하고 장로를 선출하는 등의 모든 권한이 지교회의 교인들에게 있다는 의미다. 예을 들어 당회원은 지 교회 소속으로 숫자와 안수등은 당회가 관할한다. 그러나 목사는 안수와 청빙등은 노회가 관할한다. 그리고 목사 교육과 고시등은 총회가 관장한다. 따라서 지 교회의 자유를 기초로 하지만 공교회로의 상회와 긴장과 협력관계를 갖는 다.  그러나 과거 처럼 사회가 모든 면에서 지 교회 보다 앞서고 이끄는 시대가 아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그렇고 교단이 아닌 독립교회들이 성한 것이다. 상회가 돈이나 걷어가고 실제로 지교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의식하는 순간 교파 교회로의 소속감은 없어진다. 지금 현장의 정서는 상회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지 교회의 목회를 간섭하고 억압한다는 소리도 나온 다. 예을 들어 법이 있으니 못한다는 논리보다는 공 공교회성과의 문제가 제기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총회가 한번이라도 공교회성을 엄하게 실현해 본적 없는 힘없는 총회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공교회 실현을 위해서 
장로교회는 당회 정치가 중요한다.  구성원인 장로들의 숫자는 노회에 보고된 세례교인 숫자에 비례하기에  그 숫자를 제한한다. 그러나 선출방식과 임직은 지교회가 관장한다. 따라서 노회에서 장로와 목사의 숫자는 같을 수 없다. 또 총회로 가는 총대는 목사와 장로의 숫자를 같아야 하기에 노회장과 서기는 자동이지만 그외는 무기명 투표를 한다.  그런데 일부 정치 장로들은 그 기원이나 원리를 모르고 노회에서 숫적으로 목사들에 적자 총회처럼 노회도 목사와 장로를 동수로 하자는 의견들을 낸다.

장로교회의 원리를 전혀 모르는 분들의 소치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숫적으로 이겨보려고 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조합이 과거에는 문제가 안되던 것인데 최근 들어 불거진 것은 장로들의 입김이 세지고 교회에서 나와 교권에서 전문적인 활동하는 분들이 늘어가면서 자리와 이권에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목사들과 장로들이 대결구도로 가는 것은 장로교회의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일부 장로들이 장로란 목회를 협력하고 돕고 봉사하라는 장로직을 감독직으로 오해를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런 배경은 미국장로교회에서 그 단초를 제공한 바 있다. 먼져 뿌리를 내릴 화란장로에는 없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목사도 장로라 하여 가르치는 장로(Teching Elder)라고 하고 장로를 치리 장로(Ruling Elder)라고 하여 헌법에 동격으로 두웠기 때문이다. 미국 장로교회에서는 장로 노회장 총회장 모든 영역에서 목사와 동격이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와 다른 것은 년령과 그 직임기간의 차이가 있다. 항존직이지만 직분의 항존이지 임기의 항존이 아닌데 한국에서는 인위적으로 종신직이 된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장로제는 변형된 장로제다. 우선 년령적으로 그렇고 임기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면 40세에 장로가 되고 30년을 시무하고 70세에 은퇴하면 원로 장로가 되는 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섬기는 직임이라고 실제로는 그 교회의 상왕인 것이다. 목회자는 교체되고 은퇴하면 떠나지만 장로는 그렇치 않으니 실제로 오너가 되는 셈이다. 요즘처럼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아 신임 장로가 정체되자 교회는 원로와 은퇴장로들의 숫자가 시무장로를 역전하였다.

대의제 망각이 공 교회성 무너트렸다.
장로선출은 세례 교인중에서 나오고 그들이 선출한다. 그렇다면 선출된 장로가 시무중 자신을 선출한 교인들을 의식하고 대의자로 교회를 섬기는 가? 할 때 그렇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한번 장로로 선출이 되면 교인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를 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분들을 많이 본다. 그렇게 해서 목사를 갈고 교회분쟁의 주역이 되어 교회분열의 주인공이 되는 게 일반이다. 총회에 접수된 재판의 원고나 피고는 거의가 목사와 장로들이지 평신도들은 극히 드물다. 따라서 이제 장로직은 예전에 존경받던 어른에서 분란의 진원지 중심지로 전락했다.

이런 일은 지 교회에서의 장로선출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장로는 세례교인에 비례하여 숫자가 제한기도 하지만 노회 총대로 가려면 다른 장로들과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가장 민주적인 것은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가면 되지만 선임장로나 노회 일에 길이 난 분들의 교권화가 문제다. 그리고 노회에서 총회로 파송하는 총대 선거에서도 목사나 장로들은 회원들의 무기명투표를 통하여 선출되는 데 이 과정에서 지역과 학연 파벌의 쪽지를 돌리는 등 여전히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총대인선를 타락시킨다.  

또 총대로 파송을 받더라도 자신을 뽑아준 이들과 교감보다는 교권세력들과 연대하여 아주 개인적인 활동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이 글에서 지적하려는 공교회성의 파괴다. 공교회에서 총대로 비례로 파송받은 이들이 노회나 총회에서 하는 발언이나 일을 보면 장로교회의 대의제를 발현되지 않다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자신이 어느 노회에서 누구에 의하여 선출된 것인지 전혀 의식하지 않는 분들도 있다. 다른 이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여 복무하고 활동을 하는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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