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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의 생애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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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2.14  1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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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나와 현실을 바라본 지식인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인 조식(1501∼1572)은 1501년(연산군 7)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토골(兎洞, 외토리)에서 아버지 언형(彦亨)과 어머니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이다.

본가는 삼가 판현이고, 토골(토동)은 조식의 외가이다. 다섯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자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는 조선 처사의 상징이다. 처사란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은둔하면서 학문에 정진하는 이를 일컫는다. 누구보다도 학문을 강조하고 숱한 제자들을 길러냈으나, 남명은 책에서만 길을 찾은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늘 몸에 방울을 달고 칼을 차고 다녔다. ‘성성자’라고 불린 방울을 차고 다닌 이유는 걸을 때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해서였고 ‘경의검’이라고 불린 칼을 품고 다닌 이유는 사욕이 일어나면 단칼에 베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치열한 자기 수양과 실천으로 일관했던 남명은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처사로 우뚝 선다.

   
 

행동하는 지성

남명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벼슬을 제안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1555년 단성현감을 제안 받았을 때 썼던 남명의 사직상소는 조선을 뒤흔든다.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하면서 타락한 권력을 질타한다. 또한 남명은 이론만 앞세우고 현실을 외면하는 학자들도 통렬하게 비판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제자 50명이 의병장으로 분연이 일어났던 것 역시 평소에 이론보다 실천을 강조한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권력에는 한 줌 욕심이 없었으나 지리산에 대한 남명의 사랑은 지극했다. 지금도 오르기 쉽지 않은 지리산을 살아 생전 열 두 번이나 오른 것이다. 더이상 지리산을 오를 수 없는 나이가 되자 남명은 아예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자신의 마지막을 지리산과 함께 한다.
부조리한 현실과 결코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던 선비, 그러나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책과 칼을 들도록 가르쳤던 선비. 남명 조식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돌아본다.

청년기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게 된다.

당시 사대부가나 지식인들의 최고의 덕목이며 목표였던 과거를 치루고 관직에 나가는 것이 오히려 불의에 가담하는 것이 인륜과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사고는 당대로써는 흔치 않은 일로 한마디로 구조나 상황에 의한 재야가 아니라 스스로 택한 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일설에는 배척되었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는 처가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는 데 의병장 곽재우가 손녀사위인데 그에게 무예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문만이 아니라 무예을 자신을 갈고 닦은 지도자로 보인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중종 26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경제적인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1531년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가 한성부에서 그에게 선물로 ≪심경≫과 ≪대학≫을 보내왔다. 그는 선물받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고, 성운·이원·신계성·이희안 등과 더불어 담론, 토론하거나 편지 서신으로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문적 기반을 쌓아나가게 된다.

중년기​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37세 되던 해 늦갂이로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되자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그해 6월에 유일한 적장자였던 조차산을 병으로 잃었다.

그의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참봉을 내려주었으나 조식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퇴계 이황의 추천으로 단성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퇴계 이황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였으나 후일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리기(理氣)의 사단칠정에 관한 7차 논쟁을 듣고 물뿌리고(灑) 마당쓰는(掃), 쇄소(灑掃)하는 생활 방법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논하며 선비를 참칭한다고 비판하면서 선비관에 대한 차이로 이황과 갈등하게 된다.

   
 

관직 사의와 낙향​
1545년 인종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렀지만 다만 그는 인종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명종 즉위 후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48년 전생서 주부(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 닭이 알을 품는 집)과 뇌룡사(雷龍舍; 우레와 용의 집. 장자의 '尸居龍見 淵默雷聲'에서 따온 말)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1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뒤에 인종 때와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그 뒤 선무랑에 제수되었다가 1555년 단성 현감,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라 불린다.

(중략)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하늘의 뜻은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벌레가 속을 파먹고 진액도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까지 이른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중략) 자전(紫殿)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려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가지, 백가지나 되는 천재(天災),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중략)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 1559년(명종 14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되어 부임했었으나, 부임한지 얼마 뒤에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지리산 은거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주역에 '山天 大畜'괘를 따서 이름 지었다.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山天'은 하늘을 품은 산을 뜻한다.)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덕산에 묻혀 산다(德山卜巨)'라는 시[5]이 칠언절구는 산천재 네 기둥의 주련에 새겨 있다.

“春山底處无芳草 / 봄날 어디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只愛天王近帝居 / 옥황상제가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白手歸來何物食 /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猶餘 /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

그가 출사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후일 유홍준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와 불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6]'라고 평하였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과 사림들이 그를 추천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이황은 그에게 한성부로 올라올 것을 권고하지만 이것 역시 거절한다.

1567년 5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하였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 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황과 기대승 등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와 기에 대한 이기 논쟁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의 이괄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관료들의 부패 지적과 최후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또한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 등이 전한다.

1571년(선조 5년)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음력 2월 8일에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바로 예장을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바로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이황과는 동갑이지만 다른 길을 선택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 남곤,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宋)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 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자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북인이 모두 역으로 몰려 죽임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 남명학파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 등 경상우도 일대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이황과의 논쟁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처사로 남았다. 한편 1544년 벼슬길에 나가보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이황이 그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고 사퇴하면서, 자신더러는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저의가 뭐냐며 추궁하기도 한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15]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14] 했는데,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 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습니다. 이황은 과거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이황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노장의 도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과 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출임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노장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 국립 경상대학교 고문헌도서관이 최근 남명 조식 선생의 후손 조영기 씨로부터 남명 선생의 친필 1점을 남명 선생 친필은 남명이 28세 때(1528년) 부친 조언형의 생애를 기록한 ‘선고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부군 묘갈명’(先考 通訓大夫 承文院 判校 府君 墓碣銘)이다.

실천 강조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大學)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조식은 우리 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실사구시​
조식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였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사후​
선조 때 증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1615년(광해군 7)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해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 추증되었다.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은 이황의 문인으로 수학했지만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의 문인들은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대북 정인홍과 정인홍의 문인 이이첨이 인조 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을 받았다. 그밖에 진주의 덕천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북인의 몰락으로 그는 조선사회에서 저평가되어오다가 187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부터 이이, 이황, 성혼, 서경덕에 필적하는 성리학자로 인식, 재평가되었다.
 
'유두류록(流頭流錄)'
백두대간이 뻗어내려 남녘땅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 한 번 오르기도 힘든 지리산을 열두번이나 오른 인물이 있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은 왜 지리산에 열두번이나 올랐을까?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전. 교통편도, 등산로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조선 시대다. 지금이야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지만 그 옛날엔 한 번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지리산을 남명 남명 조식이 생존에 쓴 글을 모아놓은 문집, <남명집(南冥集)>에 지리산을 둘러보고 쓴 글이 한 편 남아있다.

'유두류록(流頭流錄)'. 지리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록으로 오늘날의 기행문에 해당한다. 이 기행문은 1558년, 남명이 지리산에 열두번째 오르고 난 후 남긴 것이다.  우선 남명의 지리산 여행기를 살펴보면 자신이 살던 합천의 삼가를 떠나 진주, 사천을 거쳐 남해를 따라 섬진강 뱃길로 지리산 초입인 악양까지 갔다. 거기서부터 쌍계사, 불일폭포, 신응사까지 지리산 일대 주변 지역까지 아우르는 16일간의 일정이었다.

경상남도 합천 삼가에 있는 뇌룡정((雷龍亭). 남명의 나이 마흔 여덟,  김해의 처가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집이다. 남명의 지리산 생활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남명은 1558년 음력 4월 11일 출발하는데
진주목사 김홍, 고령현감 이희안, 청주목사 이정, 그리고 이공량 등 절친한 선비 네 명이 남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하룻밤을 꼬박 새워 도착한 곳은 하동땅. 밤새 동풍이 불어 일행을 태운 배는 돛을 달아 이곳에 닿았다.

아침해가 떠오를 무렵 일행들은 안개낀 지리산을 봤다. "그때 남명 일행을 태운 배에서는 난리가 났다. '방장산이 삼한 밖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멀지 않구나'하며 환호하는 장면이 유두류록에 나온다." 배는 섬진강변에 있는 삽암을 지났다. 그곳은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지금 그곳에는 후대에서 한유한을 사모한다 하여 새긴 '모한대(慕韓臺)'가 있다. 남명은 이곳을 지나며 한유한의 삶을 떠올린다.

남명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을 찾아 나섰다.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에 있는 악양정(岳陽亭). 영남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큰 학문을 이룬 유학자 정여창의 옛집이다. "정여창 선생은 함양 출신의 유종(儒宗)이다.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으나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부조리한 시대에 맞선 두 인물에게서 남명은 자신의 모습을 봤고 처사로서의 삶을 다잡았던 것이다.

쌍계사를 지나 불일폭포를 올라갔다. 등산길이 험해서 열걸음에 한 번 쉬고 열걸음에 아홉번을 돌아보며 오른 불일폭포. 지리산이 품은 최고의 비경 중에 하나다. 남명은 유두류록에서 불일폭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바람소리, 우레 같은 물소리가 서로 뒤엉켜 아우성치고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는 듯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상태가 되어 문득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었다. 이곳에는 신선의 무리가 살고 있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명은 이곳에서 마치 신선 세계에 온 느낌을 받은 것이다. 남명 일행은 지금의 의신마을에 있던 신응사에 도착한다. 그러나 지금 신응사는 사라지고 조그만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신응사 터 -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 왕성초등학교 초등학교 뒤 야산에서 신응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예 누워버린 부도와 부도를 세운 좌대만이 남아있다.  남명 일행을 맞이한 것은 신응사 앞 계곡의 절경이었다. 남명의 신응사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로 이십대 무렵 친구와 함께 천왕봉을 들러 내려오는 중 들린 적이 있으며 그리고 삼십 년 뒤 여름 한철을 이곳에서 보내기도 했다.

넘친 계곡물로 천왕봉 등반이 어렵자 남명 일행은 등반을 미루고 신응사에서 사흘을 보낸  뒤 그대로 하산한다. 여행 막바지, 남명은 진주로 돌아오는 길에 경남 하동에 삼장마을에 들렀다. 이 마을 출신 조지서가 생원, 문과 등 과거에 연이어 세 번 급제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삼장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을 지녔는데 연산군이 왕의 자질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지리산에 은거했다.

그러나 갑자사화때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참수되었다. 조지서가 죽자, 그의 아내 정씨는 두아들을 데리고 절개를 지켰다. 남명은 조지서와 함께 정여창, 한유한을 높이 평가하며 이번 여행에서 세 군자를 만난 것이 무엇보다 큰 소득이라고 했다.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는  십층 봉우리에 옥 하나를 얹은 격이요 천이랑 물결 위에 둥근 달 하나가 비치는 격이다."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살다갔던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통해 역사적 인식을 더욱 명확하게 하고 또 자신이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산수유람에 대한 남명의 기본 관점은 사람과 세상을 읽고, 다시 역사를 생각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리산은 참 아름답습니다. 남명은 '유두류록' 그 뒷부분에 이전에 자신이 올랐던 지리산 등반 코스를 적어놓고 있다. 지금의 산청군 덕산동쪽으로 세 번, 그리고 화개동천이 흐르는 청학동과 신응동쪽으로 세 번, 또 용유동으로 세 번, 덕산동 입구인 백운동으로 한 번, 그리고 대원사가 있는 장항동으로 한 번, 그리고 그의 나이 쉰 여덟에 신응동쪽으로의 마지막 등반까지 경상도쪽에서 오르는 지리산 코스는 모두 밟아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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