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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김육을 소환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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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2.26  1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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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법의 김육을 소환한 정치

4년전 임기 시작부터 선언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개혁에 사활은 건 문재인 정부의 도덕성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의 부동산 투기 때문이었다. 이후 민정수석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과정에서 검찰과 충돌을 일으킨다. 여기서 윤석열 총장을 너무 쉽게 본 것도 패착이고 그의 개인적 야망도 있었겠지만 검찰내부가 그들의 밥그릇 개혁에 저항하려는 검찰 집단의 항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조국 장관을 밀어 붙힌 것이 화근으로 보인다. 이전 장관들과 달리 불법이나 부정은 없었는 지 몰라도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정의와 도덕의 표상으로 보여온 것과는 괴리가 있어 보였다. 

헤겔의 말대로 역사는 정반합의 연속인가? 새로운 힘이 낡은 세대을 밀어 내지만 언제가 개혁과 진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유당 정권을 밀어낸 국민의 힘을 박정희는 군사쿠테타로 부정하여 역사를 되돌린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의 동지 김재규와 부하인 신군부 전두환과 그의 동료들에게 정치 길을 열어주게 된다.신군부는 최초의 문민정부 김영삼에 의하여 개혁된다. 김영삼정권은 금용 실명제와 하나회 해산 군부 개혁등으로 정치와 정당의 민주화에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 정부가 추진하려는 지방분권과 재벌개혁은 당시 기득권층의 큰 저항을 받았다. 이렇게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노래를 부르던 당시 재벌과 구 세력을 견제한 한 것은 그나마 강성이라는 민노총과 공무원 노조의 합법화와 지방분권이었다. 보수의 집요한 저항으로 민주당은 고 노무현 대통령을 내주고 이후 10년간 이명박근혜 정부에게 정권을 뺏긴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하여 다시 정권을 되찾은 민주당은 이전 정권에서 뒤틀어진 사(사대강)자(자원외교)방(방위산업) 비리, 국정농단을 범죄로 단죄한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적폐를 도려내기에 역부족이다. 양승태 법원을 정점으로 한 불법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수진, 최기상 판사등을 15대 총선에 등판시켜 승리를 거둔다. 결국 양승태를 구속하였지만 민주당 내부의 문제로 흔들린다. 이 일에 밀월을 하던 검찰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전직 2명의 대통령을 조사하고 구속한 윤석열과 그의 사조직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굳어진 검찰의 무소불위의 관행은 해방후, 여러정부를 거치면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군대나 국정원, 경찰도 문민통제를 받고 있지만 검찰은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였다. 재벌 언론 법관들도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법조 카르텔 이번에 손봐야
판사나 검사가 변호사로 개업하고 먹고 살려면 판사, 검사들과 잘지내야 하는 데 가장 견고한 검사들 눈에 찍혔다가는 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중심의 한가운데 서 있는 윤석열 총장을 언론들은 법치를 지키며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포청천같은 이미지로 포장했다. 그리고 이권집단과 야당, 정적들의 비호아래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장관도 대통령도 아랑곳 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이번 징계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법원이 윤석열에게 면죄부를 준 것으로 그래도 어쩌지 못하는 게 3권 분립이고 정치다. 또 하나 윤석열때 와서 검찰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전 부터 그런 것을 몰랐던 것 뿐이다.  

지지자들은 그 법관을 탄핵하라고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하고 민주당 더러 탄핵를 하라지만 쉽지만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을 위한다는 핑계지만 이런 정치 과잉이 오히려 이 정부의 짊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이제 민주당원 만으로는 정치를 하기가 힘들어 졌다. 하루종일 정치 글을 올리고 나르는 극성 네티즌들 때문이다. 노무현 처럼 문재인을 내줄 수 없다는 학습효과로 인하여 물불을 안가리는 극성분자들로 인하여 피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건 좌나우나 똑 같다. 손혜원 전의원은 민주당과 자신이 주도한 작은 집 열린당을 향하여  “문 대통령과 추 장관이 광야에 대하여 누군가가 광야로 내몬 각본의 희생양이 아니냐는 식의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다 죽은 윤석열을 살려내고 마침 내 검찰총장으로 천거 하고 올해 4.15총선 당시 민주당 공천을 쥐락펴락 했으며, 지난 11월 20일 ‘부엉이모임’ 대신 친문 친문재인 의원들의 싱크탱크 자처하는 ‘민주주의 4.0연구원’ 이사장 도종환을 든 배후로 알려진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소리다. 이미 나꼼수의 김용민도 주진우와 양정철 윤석열이 합석한 자리를 애둘러 비판하며 정체를 밝히라고 하고 김어준에게도 드리대며 나꼼수 탈퇴를 선언했다. 이렇게 진보는 분열중이다. 

문재는 민주당이다. 
그럼 사선을 넘나들고 살아온 윤총장의 향후 어떤 스탠스를 보일 것인가? 여부에 따라 정국은 요동칠 것이다. 윤은 이제 검찰총장이 아니라 우리정치의 핵이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으로 그의 민낮은 드러났다. 급기야 민주당은 그간 검경수사권, 공수처만 갖고는 안된다고 한다. 검사를 변호사 경력 5년 이상자로 하자는 안은 바로 이런 카르텔의 고리를 자르고 다양화하자는 얘기다. 이 판에 네티즌들은 이재명이 더러 왜 너는 왜 가만히 있느 냐고 하지를 않나 윤총장을 탄핵하자는 의원도 나오는 가운데 내년 서울, 부장 시장 보궐선거와 맞물려 여권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민주당이 174석이고 범여로 연합하면 180석이 넘지만 의원들 속셈은 알 수 없다. 가장 큰 계파가 약 50여명이 되는  민평련으로 과거 노무현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모여있다. 여기서 부엉이 모임이 민주주의 4.0으로 문재인으로 변신하는 데 기본적으로 문프가 계파를 원치 않는 다는 데 큰 고민이 있다. 그러나 현 원내 대표 김태년이나 전 대표 홍영표와 이인영 외에도 원로 구룹인 이해찬등과 겹쳐 있어 더 커질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그 다음 결속력이 강한 것은 호남인데 박지원등이 나갔다가 들어오는 바람에 무주공산이다. 당 대표 이낙연에 총리 정세균이 호남으로 현 정부 가장 강력한 지지계층들이다. 둘이 손잡고 호남 의원들이 이합집산한다면 큰 힘이 될 수 있지만 그럴 공산은 없어 보인다.

반대로 영남은 아직 큰 인물이 없다. 그 외 학연과 지연의 힘보다는 이념적 친소관계로 분화가 되어 있어 보인다. 가장 각광 받는 임종석등 586인데 이들에 대한 견제가 심하다. 아마도 이번 서울시장 우상호의 실험으로 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당에서 꽃을 피워 보지 못한 김민석등이 있지만 학생운동 출신들이 재 생산을 하지 못하여 시간이 갈수록 협소해 질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재야의 최배근, 우희종, 김민웅, 김정란교수와 직장 따라 분열된 김어준, 주진우, 김용민같은 방송인에 전우용, 황교익등 시사 평론가와 통제 불가능한 문재인, 노무현, 유시민 지지자들로 포진해 있다.

   
 

대동법과 김육 

이런 시기에 지난 12월 25일자 동아일보가 이헌창(66세) 고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를 통하여 역사속의 한 인물을 소환했다. 사상 초유의 현직 검찰총장 징계건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난 이 때다. 성처는 문재인 정부만이 아니라 이런 것은 국가적 손해이고 망신중인데 말이다. 최근 들어 역사 공부 특히 한국사 열풍의 일환으로 보인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연구라고 한 한 학자의 말이나 동서양을 무론하고 과거에서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설계하는 것은 오랜 현실 지식인들의 몫이다.

신동아에서 2020년 12월 9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이 교수와 인터뷰 한 것을 잠깐 소개한다.  그렇다면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한 김육은 누구인가? 김육은 1580년에 태어나 1658년 사망했다. 그의 사망을 전하는 ‘조선왕조실록’ 졸기에는 김육이 “평생 경제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는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지도자의 자세와 결기 그리고 교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신동아 기자의 첫 질문은 이렇다.

-보통 사람들은 조선왕조 문신으로 퇴계나 율곡을 떠올립니다. 김육 같은 관료는 업적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학자를 우대하는 조선 시대 문화 때문이죠. 조선 시대를 지배한 유학은 누구나 안정된 일자리를 갖는 도덕 사회를 지향합니다. 유토피아와 비슷한 이상향이죠. 정치를 아무리 잘해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에요. 그러니 유교 문화권에서는 공자보다 위대한 사람이 없고, 이상을 제시한 학자가 정치가보다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실현한 관료·정치가도 (제대로) 평가해야 합니다.”

마지막 질문은 이렇게 맺는 다

-문 대통령은 김육과 송시열 중 누구에 가깝습니까. 진영 논리에 빠져 있다는 지적을 고려하면 송시열을 닮았고, 탈원전 등 정책 소신을 끝까지 추구하는 면을 보면 김육이 떠오릅니다.

“저는 문 대통령이 김육과 송시열 사이에 위치한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김육에 가깝다고 생각해 기대가 컸는데, 갈수록 송시열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김육은 열린 마음, 합리성, 실용적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문 대통령에게는 그런 점이 부족해요. 김육은 정책에 대해 숙고하며 노력한 경험이 있는데, 문 대통령이 품은 정책 소신은 그에 미치지는 않습니다. 김육은 정파를 초월해 정책적 협력을 얻었는데, 문 대통령 재임기에는 진영 논리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고요.”

-진영 논리가 발현되는 사례로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이 생각납니다.

“윤 총장과 여권의 갈등을 보면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사림 정치의 성립이 생각나요. 세조 때 이후 기득권층이 문제로 떠오르자 주자가 주창한 도학(道學) 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는 사림이 출현했습니다. 도학 정치란 유교 도덕이 구현되는 정치죠. 기묘사림은 도학 정치에 입각한 개혁을 추구하다 1519년 사화로 희생됐어요. 그렇지만 이후 도학 정치를 추구하는 사대부가 점점 늘었죠. 결국 선조가 즉위한 직후인 1570년대에는 사림 정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윤 총장이 훗날 역사적 성과를 거둔다는 뜻인가요.

“윤 총장이 징계받는다 해도 기묘사화가 사림의 성장을 막지 못했듯 독립성·중립성을 지향하는 검찰의 각성은 이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망합니다. 그러면 검찰 문화도 성숙하겠죠. 조선왕조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라는 사정(司正) 기관이 건재해 정치에서 도덕성을 강화하고 장수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재형 감사원장이 탈원전 정책을 감사(監査)한 일은 인상적이에요. 훗날 문 대통령이 윤석열·최재형 두 사람을 임명해 법치 확립에 기여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나올지도 모르죠. 역사의 아이러니예요.”

이헌창은 1955년생으로 66세인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경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가 1993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로 옮겨서 가르치다가 지금은 명예교수다. 경제사학회와 한국고문서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民籍統計表의 해설과 이용방법』, 『한국경제통사』, 『조선시대 최고의 경제발전안을 제시한 박제가』, 『경제ㆍ경제학』이 있다. 편저는 『류성룡의 학술과 사상』,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경제체제론의 접근』 등이 있다. 이외에도 경제사, 사상사, 정치사 등의 분야에서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 김육의 친필

김육은 누구인가? 

그럼 김육은 누구인가? 조선 중기 형조참의, 병조참판,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실학자이다. 17세기 후반의 공납제도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였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김식(金湜)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김육은 1580년 7월 14일 한양(옛 서울) 마포에 있는 외조부 조신창(趙新昌)의 집에서 태어났다. 

1588년 조부인 김비(金棐)가 강동 고을 수령이 되자 부친과 함께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12세에 [육송처사전(六松處士傳)]과 [귀산거부(歸山居賦)]를 지어 글솜씨를 뽑냈고, [소학]을 읽다가는 “낮은 벼슬아치라도 진실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두어야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정자의 글을 읽고 백성 구제의 큰 뜻을 품기도 했다.

13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피난 중에도 옷소매에 항상 책을 지녀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부친 김흥우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임종 당시 부친은 김육을 불러서 가문을 일으킬 것을 명하고 평생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유언했다. 부친의 유언을 받은 김육은 평생 동안 청풍 김씨 가문을 일으키는 데 노력했다고 한다. 전쟁의 발발과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 연이은 흉년으로 김육은 모친을 모시고 청주에 살던 이모부 남익수의 집으로 가서 의탁했으나 모친마저 21세에 세상을 떴다. 김육은 평구(현재 남양주 삼패동)에 부친과 모친의 묘를 본인이 직접 흙과 잔디를 날라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관직과 낙향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광해군 2)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오현(五賢)의 문묘 종사를 청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후 자신의 근거지인 경기 가평군 잠곡리(潛谷里)에 은둔,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인조 초반에 음성현감 ·전적 ·병조좌랑 ·지평 ·정언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음성현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백성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632년 인목대비가 죽자 장례를 담당하는 산릉도감의 관원이 되었고, 1636(인조 14)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도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1638(인조 16)년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그곳에서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상황을 점검하였고, 비리를 확인하고 대동법 시행을 주장하였다.

1643(인조 21)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고, 겨울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원손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갈 때 세자를 모시고 선양[瀋陽;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귀국하면서 평안도 일대의 사신접대 폐단을 없애는 데 애썼고, 곧 우부빈객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646년 강빈(姜嬪)의 처벌에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입어 체직되었다. 1649년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652(효종 3)에 좌의정에 이르고, 1655(효종 6)년에는 76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대통법이란?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줄곧 전면적으로 실시 되지 못하였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충청도관찰사시절에 백성 수탈의 방법이었던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미포(米布)로 대납하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1651, 효종 2), 1657(효종 8)년에는 전라도 지방에도 실시하였다. 이에는 자신이 가평 잠곡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목격한 백성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이해와, 각 지방의 수령 ·감사로 여러 번 재직한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1623년 음성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조정에 대해 부세를 재촉하지 말고 요역을 감면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에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려, 전쟁의 참화와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어린애 어루만지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공격할 때를 대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그의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효종 연간에 정승으로 있을 때 호서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려고 진력했는데, 스스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 이야기만 꺼내니 사람들이 웃을 만도 하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이것은 확고하고 냉철한 현실감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고위직에 있던 인조 말년과 효종 대에는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극심한 가운데, 그들에게 해마다 바치는 세폐와 북벌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부담이 백성에게 집중된 시기였다. 여기에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가뭄 ·홍수 ·풍해 ·지진 등 각종 천재지변이 발생하여 위축된 백성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민심의 이반을 막는 것을 국왕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하였다. 대동법은 바로 그 해답이었던 셈인데, 그는 대동법의 효과를 한마디로 “호서에서 대동법을 시행하자 마을 백성은 밭에서 춤추고 삽살개도 아전을 향해 짓지 않았다”라고 표현하였다.

어떤 법이든 정착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려는 노력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대동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로 인하여 수령 ·관료 등의 반발이 일어나자, 이러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하여 국왕을 확고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 때문에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과는 정치적 갈등이 생겼고, 이른바 산당(山黨) ·한당(漢黨)으로 정파 대립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경우도 죽은 뒤 그의 유지를 이은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실현되었다.

그는 또 백성을 유족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布]만을 유통수단으로 사용할 뿐 변변한 화폐가 없는 데서 찾았다. 그래서 동전 사용을 강조하였고, 1651(효종 2)년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를 건의하여 서울 및 서북지방에서 유통되게 하였다. 나아가 백성에게 각지에 퍼져 있는 은광 개발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김육의 업적
김육은 대동법 외에도 상평통보의 주조, 마차 및 수차의 제조와 보급, 새로운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의 사용 등 혁신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하였고, 이 가운데서도 특히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도 전라도 대동법안을 유언으로 상소할만큼 강한 의지와 집념을 보였다.   김육은 1658년 향년 79세로 일기로 세상을 떴다.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三牌洞)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육(金堉)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저술로는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天聖日錄)』·『청풍세고(淸風世稿)』·『조천일기(朝天日記)』·『기묘록(己卯錄)』·『잠곡필담(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 「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類苑叢寶)』는 우리 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된다. 그리고 『구황촬요(救荒撮要)』·『벽온방(辟瘟方)』·『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 위민적(爲民的) 생애의 단면을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업은 자손 대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 나라 화폐인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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