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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대한 총회장에 나카에 요이치 목사가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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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2.03  22: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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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인으로는 2번째로 총회장에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장 조영철 목사) 제 56회 총회가 지난 11월23일 오사카(大阪)교회(정연원 목사)에서 열려 2년 임기의 신임 총회장에 나카에요이치(中江洋一, 히로시마교회) 목사를 선출하고 업무를 처리했다. 또 우리 총회 파송 일본선교사로서 지난 8년간 총간사(사무총장)를 역임한 김병호 목사의 임기를 2년간 연임했는 데 규칙상 10년 이상 할 수 없는 조항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재일대한에는 일본서 출생한 동포 자녀, 한국서 파송받은 선교사, 직장 유학생으로 와 목회자가 된 분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각각1/3 씩 점하고 있다. 그중 우리교단이 선교사가 가장 많은 데 17가정이다. 이번에 나카에요이치 목사가 총회장이 된 것은 1966년 제22회 총회서 일본인 오다나라지(織田楢次, 한국명 田永福) 목사가 선출된 이후 두 번째라고 한다.

   
            * 중앙 노란 타이 나가이 총회장 왼쪽 직전 총회장 조영철 목사 우측 전 총회장 정연원 목사

나카에요이치(中江洋一)목사의 생애와 신앙동기  

1962년 규슈(九州) 나가사키현(長崎県) 나가사키시(長崎市)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은 기독교를 믿는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학을 위해 오사카(大阪)에 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재일동포의 존재를 알게 된다.

특히 대학생 시절에 오사카(大阪) 이쿠노구(生野区)에서 살게 되면서 재일동포 2세 여자 친구(현 부인)의 권유로 오사카교회를 나게 된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처음에는 신앙적 관심 보다는, 청년들과의 교류가 더 즐거웠던 기억이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일본사회에는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지금 보다는 더 컸는 데 당시 지문날인(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의 거주 자격 등록증을 만들거나 갱신 할 때 지문을 찍게 하는 것) 거부 운동 등에 참여하면서, 재일동포 문제를 접하고, 일본의 역사(재일동포의 역사를 포함)와 사회 문제 등을 알아가면서, 일본인인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으며 그때, 지금까지의 인생관이 바뀌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일본 사회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사는 동시대의 친구들을 통해, 신앙이 싹트게 되었고 점차 심화되여 결국 오사카교회에서 자원하여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 대학 졸업 후 건축 회사에 취직하였지만 ‘재일동포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 데 꼭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 만는 아니였다고 한다. 앞으로 기독교 기관이나 문화가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갖게 있었는 데 그러려면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성경이나 신앙에 대한 지식이 너무 부족하니 공부를 하고자 하는 생각 떄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정서는 재일속에 있지만 한인들은 전체 일본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우호적인 감정은 없었던 아니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서 신학 졸업을 해도 당시 교회(총회)는 일본인을 담임 목사로 초빙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비록 일본 교단과는 선교협약을 맺어 서로 목회적인 교류를 하고는 있었고 일본교회 출신 목사가 협력목사로는 있었지만, 담임 목사가 된 곳이 없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목사가 된다(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없었다고 한다.

그런 여정속에서 당시 오사카교회 김덕성목사님 소개로 고베(神戸) 개혁파 신학교에 입학을 하여 신학 공부를 하게 된 다. 신학교을 졸업 후 그는 한국에 유학을 하게  되고, 노량진교회등에서 2년간 목회 훈련을 받고 다시 돌아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재일대한기독교회 목사가 된 것이다. 

   
 * 총회 임원 목사 부총회장 양영우, 장로 부총회장 김일환, 서기 장경태목사,부서기 정수환목사, 회계 배양일 장로 

“재일동포와 함께 산다”는 것 

한국 유학은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노량진교회, 덕수교회, 희성교회, 도원동교회 등에서 지원과 훈련을 받고, 그곳에서 알게 된 목사님들과 교우들의 기도로 유학기간을 잘 마칠 수 있었다. 도원동교회에서는 교회학교 중등부 설교를 매주 담당하였는데 설교 준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것이 바탕이 되여 한국어로도 설교할 수 있는 좋은 훈련이 된다. 

2년간 연수를 마칠 때 쯤 일본의 한인교회서 목회 하기를 소망했지만 막상 청빙이 오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중 어느 날 서남지방회(노회)에서 강도사로는 인허를 해 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후쿠오카(福岡)의 후쿠오카중앙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거기서 반년 후, 키타큐슈시(北九州市)에 있는 오리오(折尾)교회로부터 정식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으며 6년간 목회후 현재 시무중인 히로시마(広島)교회로 부임한지 20년이 된다. 전임자는 김신환목사로 36년의 목회를 마치고 은퇴하심과 동시에 나카에 부임하였습니다.

김신환목사님은 1974년부터 시작된 “재광(在広) 한국인·조선인 피폭자 구원회”에 이어, 1978년부터 시작된 “한국 피폭자를 히로시마 병원으로 초대하는 모임”, 그리고 1984년부터 시작된 “주한 피폭자 도일치료 히로시마 위원회”에서 한국·조선인 피폭자들을 위한 지원 활동을 하신 분으로 재일동포의 가장 가슴아픈 원폭의 그림자를 간직한 곳이었다. 

   
 

피폭자 2세로 피폭지 한인 교회로 부임 

그렇게 보면 그도 피폭지인 나가사키 출신이면서 피폭자 2세이기도 하여 피폭의 비참함을 알고, 또한 평화 교육을 받아온 것이 히로시마 교회에 초빙되게 된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는 간증이다. 다만 나카에 목사가 부임했을 때 재한 피폭자들은 거의 노령화로 감소되는 추세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카사키교회의 원폭지원 활동은 지난 2016년에 32년간의 활동을 마쳤는데, 32년간 600여 명의 주한 피폭자들을 히로시마에 초대하여 치료지원을 한 것이다. 원폭으로 가장 큰 희생을 당한 히로시마 한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신앙공동체 히로시마교회의 역사에 가장 의미있는 사역이었던 것이다.

히로시마 교회는, 지난 32년간 지역을 위한 선교활동으로 재히로시마(在広島) 외국인에 대한 지원활동과 지역의 복지활동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모이는 교회의 평균 신도 수는 60명 정도로 그 중의 30%는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베트남인, 미국인 등도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거스릴 수 없는 세계화 시대를 반영하는 다문화 현장이다.  

나카에 목사는 현재 재일대한기독교회 안의 유일한 일본인 목회자로 한일간의 대립을 마음 아파하고 있는 일본인 중에 한사람이라는 고백이다. 따라서 한일간의 정치적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한일국가간의 갈등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일본인인 자신이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 지 여전히 기도중이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선교변화 

그것은 재일대한 총회가 걸어온 역사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일본사회 속에 사는 한인에게 일차적으로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재일동포의 인권획득을 위해 투쟁해온 총회는 1990년대 이후 재일동포라는 것에만 머물지 않고 일본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초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일대한기독교회가 과거의 아픔 기억과 감정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과거는 절망과 분노를 갖고 살았다면 이제는 희망과 통합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일본인으로 재일한인들을 다른 일본인 보다는 더 이해한다고는 믿는 사람중에 하나지만 한국인이 아니기에 섣부르게 그들을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정직한 자세다.

그리고 이제는 양국이 화해를 해야 한다고도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 밝은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필연의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며 실현되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고백하기를 부족한 사람을 청빙한 히로시마교회나 이번에 총회장으로 나가이 목사를 만든 것은 재일대한기독교회 선배들과 동역자들의 바램이 무엇인지 그는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약자이고 피해자이면서 먼져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본교회에서 사역중인 재일대한출신 목회자들이 있다. 총간사를 역임한 분도 있고 일본으로 귀화하여 이름까지 개명한 분도 계시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고 여전히 한국 이름으로 계신 분도 있다. 그 역사 일본인으로 그리고 일본 이름으로 한인교회에서 목회중이나 이로 인한 불편함은 없다. 

이미 장로들 중에는 일본인들이 몇명 나왔다. 그러나 일본인이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도 흔한일도 아니다. 그런 가운데 나가이 목사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2년 임기의 총회장이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예을 들어 미국장로교회에서 한인이 총회장이 된 예는 있어도 한인교회에 미국인이 총회장이 된 예는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정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120년 역사의 재일대한기독교회 

재일대한기독교회(KCCJ) 역사는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모였던 YMCA를 배경으로 하여 최초로 세워진 동경교회가 그 모체다. 이때 본토에서 장,감교단의 목회자를 교대로 파송하여 시무케 했다. 그러나 일본제국하에서의 활동은 생존 그 자체였고 전쟁시에는 일본교회로 통합이 되는 등 고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후1954년 11월 15일에 재일대한기독교  총회로 다시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김기삼 목사, 부 총회장 김원식 목사, 총무에 박명준 목사였다. 그리고 제 22회(1966년) 총회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전영복 목사가 총회장이 된다. 그는 한국 본토에 파송받아 목회를 한 경력도 있는 분이다. 

그리고 다시 56회(2021년) 55년만에 다시 일본인 출신 총회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인터뷰을 하면서 총간사 김병호 목사에게 질문하기를 나카에 목사가 일본인으로 총회장이 되는 과정에 회원들의 반대나 이의는 없었는 지를 물었더니 선의의 경쟁은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총회원 다수가 나카에 목사를 선택했으니 하나님이 준비한 분으로 보인다. 이미 청년시절 부터 재일대한기독교회서 세례받고 일본 신학교를 졸업하기도 했고 한국에서 어학과 목회훈련을 받고 서남지방에서 목사가 되고 히로시마교회에서 사역한지가 벌써 20년이 되는 분이다.  한국으로 치더라도 한 노회 한 교회에서 짬밥으로 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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