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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투투 주교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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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2.27  09: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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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공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별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에 대한 저항과 투쟁의 기독교적 상징이자 주역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지난 26일 케이프 타운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다. 현재 90세인데 그는 성공회 주교로 이런 생전의 공적으로 안하여 지난 1984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WCC 총무 대행 요한 사우카 박사의 조전
“에큐메니컬 운동의 충실한 공헌자였으며 우리에게 끈기의 가치를 가르쳐 준 투투 대주교를 추모한다”며 “90년 동안 우리에게 투투 대주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삶과 수많은 업적을 통해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줬으며 하나님이 각자에게 준 재능을 통해 이웃을 섬기라는 교훈을 줬다”며 “교회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삶으로 보여줬다”고 전했다. 

WCC 국제문제위원회의 의장 프랭크 치카네 목사는 “투투 대주교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함해 전 세계를 누비며 다른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며 “그는 불의에 대항했지만, 용서의 예언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용서 없이 미래도 없다고 강조하면서 ‘인간적인 사회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 ‘만약 가슴에 증오를 품고 산다면 자신뿐 아니라 여러분의 공동체도 비인간적으로 만들 것’이라며 용서를 앞세웠다”고 회상했다. 

생애와 사역 
투투 대주교는 1931년 10월 7일 요하네스버그 서쪽 작은 마을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태어났다. 학자·성직자·인권운동가로 아프리카 원주민 최초로 성공회 주교로 임명된 이래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될 때까지 비폭력 저항을 주도하고, 인종차별 정책의 반대자들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흑인 및 백인 공동체 간의 평화로운 협상을 통한 화해를 모색했다.

그믐 코사족과 츠와나족 부모에게서 태어나 아버지가 교사로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리스도교 계통 학교에서 공부했다. 의사가 되고 싶었으나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1954년에 교사가 되었다. 1957년 교사직을 그만두었고, 1961년 성공회 교구사제로 임명되어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1960년대말 런던으로 유학해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흑인 최초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 의장
1970년대 들어 정부의 부패와 빈곤한 생활상으로 가득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실상을 살펴본 투투는 해방신학에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한 사회적 역할을 발견했다. 투투는 1972~75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부의장을 지냈으며, 1975~76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요하네스버그 대성당의 수석사제가 되었고, 1976년 레소토의 주교가 되었다. 1978년 흑인 최초로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 의장에 임명되었고, 남아프리카 흑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주요 대변인이 되었다.

투투 주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해 1948년부터 시행되어 온 악명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실상을 세계에 고발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국민을 백인, 흑인, 유색인 등 인종으로 구분하고, 거주지와 출입구역의 분리, 혼인의 금지, 스포츠 참여의 제한 등을 강제한 제도로, 백인을 위한 비 백인에 대한 차별을 명시한 정책이었다.

투투 주교는 이 정책이 비 민주적이고 비 기독교적인 정책임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철폐를 주장했지만, 한편, 인종차별 정책의 반대자들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비난하면서, 대신에 흑인 및 백인 공동체 간의 평화로운 협상을 통한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교역국들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경제압력을 가하도록 촉구하면서 정부의 직간접적인 압력과 친정부적인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노벨 평화상 수상
1980년대에 이르자 장기 복역중이었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와 함께 투투는 국제연합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인원을 이끄는 대표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인종차별 정책을 유지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을 묵인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항의를 제기했다. 1984년, 투투 주교는 비폭력 운동으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한 공적을 기려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되어, 1960년 수상자인 앨버트 루툴리(Albert Lutuli)에 이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두번째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투투 주교는 1985년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 성공회 주교로 임명되었고, 1986년 역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케이프타운 대주교가 되었으며, 이로써 160만 명의 신자가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공회의 명목상 수장이 되었다. 지속적인 저항운동으로 수감되었던 넬슨 만델라가 1990년 석방된 후 투투는 만델라와 연대하여 백인 정부와 협상한 끝에 1993년 아파르트헤이트는 실질적으로 효력이 상실되기 시작했다. 1994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는 4월 27일 이 정책의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말년
투투 주교는 1995년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 의장에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는 지난 수십년 동안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및 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운동가에 의해 자행된 인권 침해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회복, 화해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이후 독재 정부 치하에서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진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모범적 사례가 되었다. 투투는 1996년 대주교의 직위에서 물러났지만 동성애자 인권 운동 등에 앞장서며 다양한 사회적 차별의 철폐를 위해 노력했다.

2010년 투투는 공직에서 은퇴했으나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견을 표명했다. 투투는 1955년 노말리조 레아 투투(Nomalizo Leah Tutu)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작가이자 성직자 음포 투투 반 푸르스(Mpho Tutu van Furth)는 2015년 네덜란드 여성과 결혼했으며. 투투는 성공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석하여 이들을 축복했다. 2021년 12월 26일 투투는 케이프타운에서 전립선암으로 타계한 것이다. https://www.tutulegacy.com/

   
 

평가
투투는 1984년 노벨 평화상 수상 외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그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가 수여한 세번째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2015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서 영국 명예 훈장을 받았다. 1982년 강의 모음집〈하느님의 뜻(The Divine Intention)〉, 1983년 설교 모음집〈희망과 고통(Hope and Suffering)〉이 출간되었고, 1994년 출간한 논픽션 〈하느님의 무지개 백성 : 평화로운 혁명을 위하여(The Rainbow People of God : The Making of a Peaceful Revolution)〉는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교사였던 그는 흑인 아이들에게만 가혹했던 교육 환경에 분노해 성직자가 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무너지고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을 때 이를 상징하는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를 제안하였다. 만델라 전 대통령과 함께 남아공 민주화와 흑인 자유 투쟁 운동의 지지자며 동지로 이후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구성하여  ‘용서 없이 미래 없다’는 구호로 흑백간의 인종화해를 이뤘다. 이러한 그의 화해와 평화의 신학은 모두 wcc가 창립이래 주창해온 신학이며 그 열매로 호주 켄버라 총회 브라질 총회에도 참가 했다. 

1996년 은퇴했지만 그의 신학과 정신은 남아공을 넘어 세계의 약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는  “하나님이 동성애를 혐오하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겠다” 며 동성애 혐오에 반대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땅 점령을 비판하는 등 지구촌의 억압받는 민족 편에 섰다. 또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옹호하며 조력자살에 찬성했고, 2015년 세계 지도자들에게 35년 안에 재생에너지로 달리는 세상을 만들 것을 촉구하는 청원에 나서기도 하여 그는 평화의 사도에서 환경과 생명의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에 가까이 가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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