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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개혁가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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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02  2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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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개혁가 조광조

왕조시대에도 위대한 개혁가들이 있었다. 고려말 변방의 장군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 개국을 하게 하고 그 아들 이방원까지 왕으로 만들고도 버림 받은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 개혁주의로 이상 정치를 추구했던 조선 선비의 사표 조광조, 대동사상을 꿈꾸었던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 역모사건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한 조선의 아웃사이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 조선의 자주와 근대화를 꿈꿨던 갑신정변의 3일천하의 주인공 김옥균, 선한 사람들이 승리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접주 전봉준을 도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김개남이 있다. 

그중 조광조(1482~1519)는 조선시대, 나아가 한국 역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개혁가로 그의 가슴에 철저한 이론적 기반인 성리학적 이상을 품고 이를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려고 인생을 바쳤다. 그의 정치철학은 왕권이 바로서야 한다는 성리학을 중심으로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당대 조선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꿈이었나? 라는 게 연구자들의 소회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상은 결국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됐지만 훗날 역사는 그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신병주 건국대학교 교수가 저술한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그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의미를 보면 조광조가 태어난 15세기 후반은 ‘사화(士禍)의 시대’ 였기에 그가 등용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몰락한 것이기도 하다. 조선은 성종 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는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훈구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고 오히려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사건인 사화가 발생했다.

특히 연산군은 무자비한 독재 정치는 조선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패륜적인 왕으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사화의 사전적 의미는 곧은 선비가 화를 당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당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면 죽은 사람까지 부관참시할 정도로 가혹했던 연산군의 폭정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 마침내 박원종을 위시로한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제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남에서 즉위한 중종은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사화의 시대’에 성장한 조광조 또한 성리학 이념으로 완전 무장한 채 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만 해서는 정치 못한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유배 길에 올랐던 사림파의 핵심 인물인 김굉필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갈고 닦았다. 그는 29세인 1510년(중종 5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한 후 34세가 된 1515년(중종 10년)에는 알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한다.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를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이라는 조광조의 대책문(마지막으로 임금이 낸 문제를 작문하여 써내는 과정)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에 발탁됐다.

이 때 알성시에서 왕이 낸 시험문제는 “옛성인들의 가르친 이상적인 정치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나” 였는 데 이 문제에 대하여 조광조는  “임금이 마음으로 백성들을 감동시켜야 하고 신하를 믿아야 한다” 라는 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답이 중종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게 되고 이후 그를 등용하여 3개월만에 언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다.

그런데 폐비 신씨의 복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데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왕후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중종반정 일주일 만에 폐위되어 쫓겨났는데, 1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이 폐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을 폐위한 훈구파가 장학한 조정 대신들로는 이를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런 상소를 올린 두 사람들이 유배 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때 조광조는 언관직에 제수된 지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그가 김정과 박상을 유배 길에 오르게 만든 대간들의 전원 파직을 주장하고 이어 상소를 올린다. 이유는 삼사의 사간원은 언로를 확대해야 하는 기관인데 언로를 막은 것은 잘못으로 3사의 관리들 전부를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몇 달에 걸친 논쟁 끝에 이들 대간들이 전원 교체되므로 조광조는 일약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성리학을 통한 이상 사회 실현
이렇듯 화려하게 중앙 정계에 등장한 조광조는 본격적으로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개혁정치에 나섰다.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벽해야만 제대로 된 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경연을 활성화했고 중국에서부터 유래하여 조선조부터 모신 경복궁 옆의 도교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 혁파에 나섰다. 『소학』과 향약을 보급해 조선 사회 곳곳에 두루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 했고, 지방 사회를 중심으로 은거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일종의 천거 제도인 현량과를 실시했다. 그때 등용된 관리가 나중에 참수를 당하게 되는 김정으로 이들이 바로 조광조의 붕당이라는 오명을 받기도 한다. 

조광조 개혁의 정점은 정국공신 개정이었다. 중종반정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정국공신에 책봉된 사람 가운데는 공이 없는데도 인맥으로 공신이 된 인물이 많았다. 조광조는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을 탐내고 이(利)를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여기서 말미암으니,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려지게 하려면 먼저 이의 근원을 막아야 한다’면서 정국공신으로 책봉된 사람 중 공이 없는 이들의 훈작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종은 자신의 정통성과도 연관된 정국공신 개정에 반대했지만, 조광조를 비롯한 신하들의 뜻에 밀려 마침내 정국공신 120명 가운데 무려 2/3에 달하는 76명을 공신에서 삭제하기로 했다. 그렇게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를 통하여 밀리게 된 훈구파는 젊은이들의 파동을 더 이상 묵과했다가는 다 죽게 생겼다는 위기의식으로 뭉쳐서 반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종이 정국공신 개정을 선언한 지 불과 4일 뒤인 11월 15일 상황이 반전되는 데 중종은 갑작스레 조광조 세력을 전격적으로 체포한다.

이유는 붕당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형성하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며, 자기들만 요직을 차지했다는 명목이었다.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 성균관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펼치며 조광조의 죽음만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중종자신도 조광조의 개혁요구에 피로를 느끼고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드리게 된다. 중종은 그렇게 한때 최고의 파트너였던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그를 제거했다.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하나로 꼽히는 기묘사화가 발생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정국공신 개정, 현량과(과거시험이 아닌 전국의 유능한 인재를 추천받아 훈련하여 관리로 삼는 제도)등 조광조가 추진했던 정책을 번복하며 개혁의 흔적을 지우는 일도 진행됐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 일파가 널리 보급했던 성리학 이념서 『소학』과 『근사록』이 잘 읽히지 않을 정도로 기묘사화의 정치적,사상적 파급 효과와 후유증은 컸다.

사후에 평가받은 조광조의 사상
하지만 역사는 조광조를 실패한 개혁가로만 놔두지 않았다. 조광조가 추구했던 개혁정치를 인정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계속 나타났다. 홍문관 부제학 송세형, 성균관 유생 신백령 등 수많은 사람이 조광조의 복권을 요청했고, 마침내 조광조가 사망한 지 26년 만인 1545년(인종 1년)에 인종의 유언으로 조광조는 복권됐다. 광해군 대에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면서 조선 최고의 유학자 반열에 올랐다.

“지금 성리학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광조의 힘인 것이다”라던 이이, “조광조의 부음을 듣고 사로(仕路, 벼슬길)의 험난함을 알았다”라며 낙향했던 조식 등 사림파의 영수들 또한 조광조를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로 숭상했다. 후대에 역사의 승리자로 남은 조광조가 정작 당대에는 패배한 이유가 뭘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의 한계다.

조광조는 왕이 성리학 이념 위에 군림할 때 연산군의 폭정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했고, 이를 막기 위해 경연(왕과 세자의 교육)등을 통해 끊임없이 왕을 성리학이라는 견제 장치를 통해 군주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성리학 이념의 ‘확신범’이라는 비판도 있다. 중종이 한때 그토록 총애했던 조광조를 제거한 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의 갈등이라는 구도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림파와 갈등하던 훈구파도 중종에게 힘을 보태면서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는 사화(士禍)의 시대, 보수와 개혁 사이의 진통이 따르는 시대였다.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은 당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결국 조광조는 미완의 개혁가로 남았다. ‘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요즈음,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유다.

당대 조선의 지식인과 지도자는 권력만을 지키려 백성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탐욕과 태만으로 물든 조선이 아닌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삶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급격하고 굽힐줄 모르는 그의 개혁은 권력다툼과 개혁피로증으로 인하여 기묘사화의 칼날에 사라졌다. 그리고 훗날 조광조의 개혁은 민생이 아닌 유교적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는 의혹마저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조광조 평전이 주는 교훈
『조광조 평전』은 우리가 몰랐던 조광조의 개혁일기를 펼쳐 보인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진정 무엇이었으며, 어떤 힘겨운 투쟁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했는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열일곱 나이에 유배지의 스승 김굉필을 찾아 떠난 조광조의 길이 결국 자신의 유배지에 이르기까지, 그 극적인 서사 한 장면 한 장면을 읽다 보면 ‘개혁가 조광조, 인간 조광조’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개혁이란 무엇인가? 지식은 어떤 모습으로 실천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가치가 지켜지는 세상, 그를 위해 투쟁했던 조광조의 숨겨진 개혁일기는 오늘의 개혁을 정치가나 이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 그가 묻는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의 도리는 무엇인가? 그 ‘정신’의 실천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누리는 삶을 만들 수 있다. 인간의 가치가 살아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용기가 권력 앞에 사라져버린 조선 개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 까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개혁은 실패한다는 교훈이다. 

서른여덟 짧은 삶이었지만 ‘따뜻한 이상’과 ‘뜨거운 실천’의 힘으로 조선의 정신을 설계한 그가 5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조광조, 그는 누구인가. 단지 유교적 이상주의자일 뿐일까? 그의 개혁은 한낱 실패한 꿈일 뿐일까? 절망의 시대를 바로잡고 민생을 구하려 했던 한 지식인의 포부와 고뇌를 찾아보자

선비의 강직한 기개를 보여준 조선 유학의 태산북두이자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 그러나 지나친 성급함 때문에 결국 개혁에 실패했지만 그가 꿈꾸던 세상은 진정 무엇이었으며, 어떤 힘겨운 투쟁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했는지 열일곱 나이에 유배지의 스승 김굉필을 찾아 떠난 조광조의 갈길을 예측할 수 있겠다. 

당시 성종이 존경하는 스승이자 벗이요 당대의 지성, 누구보다 정의롭고 강력하게 조선의 정신과 미래를 닦아간 정치적 지도자, 조광조. 백성들 또한 ‘우리 상전’이라 칭송했던 그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사랑받았던 이들로 부터 멈춘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는가? 그것은 모든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개혁의 속도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군신관계에 넘어선 이상주의로 왕과의 대결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지식만으로는 안되는 게 정치
너도나도 임금에게 아첨하고 ‘은혜’를 구하던 시대, 조광조는 임금에게 건언을 한다. 올바름을 위해, 백성을 아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질문과 대답은 무엇인가. 백성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관료라면 당장 파직하라, 권력의 억압으로 감춰진 역사를 바로 세우라, 《소학》으로 세상을 교화하라, 청탁과 뇌물을 단호히 처벌하라, 거짓된 공으로 백성을 착취하는 정국공신들을 개정하라. 법과 제도는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권력층만을 위한 잘못된 구습을 타파하라! 그렇게 ‘실천하는 지성’으로서 세상을 도道의 길로 이끈다.

“무엇이 올바른 정치인가?” 서책 속 낡은 정신이라 여겨지는 유교의 도덕을 현실 정치로 이끌어낸 조광조.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보기 힘든 조광조의 이 도덕적 개혁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학자인 이황, 조식, 서경덕, 이이 등을 비롯한 후대들이 그를 ‘조선 성리학의 진정한 스승’으로 추앙하는 이유다. 조광조는 단단한 이성의 힘으로 근본과 개혁을 이었던, 자신의 지식과 도덕과 용기를 그리고 목숨조차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던진 선도자였다.

그러나 도리보단 권력이, 세상보단 나의 위치가 소중했던 지도자와 기득권층. 그들에게 조광조의 개혁은 서슬 퍼런 공격이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삶으로서도 아름다웠지만 아직은 왕조사회의 질서를 읽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경연(왕자 교육)에 왕도 직접 참관케 하는 데 이는 성종이 일찌기 왕세자로 책봉되여 어려서부터 왕자 수업을 받지 않은 왕이기에 더 경연에 매진토록 한다. 그는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진성대군이었다가 사화로 갑자기 왕이 되었으니 더욱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는 조광조의 충성이 결국은 왕과의 관계에서 정적들에게 올무가 된 것이다. 

범사에는 기한과 때가 있음을 알아야
처음에는 중종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정치에 입문한 지 3년 만에 종 2품으로 승진,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에 오르며 급부상했는 데 그럼 중종은 왜 조광조를 그토록 신임했던 것일까? 그것은 중종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대신들의 힘에 눌린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하여 그들을 견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왕권이 강화되자 조광조도 내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럴것이 마지막 반정공신인 성희안이 죽은 즉위 8년 후. 훈구대신을 견제할 새로운 세력으로 사림을 대거 등용하며 왕권 강화에 나서는 데 바로 조광조와 같은 젊은 선비를 등용하여 그들의 힘을 빌린 것이다.

그러나 조급한 개혁인 위훈삭제는 조정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다. 훈구파들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은 훈구파를 결집하게 만들었고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귀 ‘주초위왕’ 를 후궁들이 왕에게 보여줘서 중종은 왕권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 '주초위왕' 이란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써 벌레가 글자 모양대로 갉아먹도록 조작해 왕을 선동하여 조광조를 없엔 것이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국가를 경영할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에 나간 결과,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중략)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으로, ▲조광조의 학문의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조광조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평가와 적용
이것을 목회적으로 적용해보자 개혁이라는 이름과 명분으로 목사의 모든 것, 어떤 것이든 다 용서되는 가? 아닐 것이다. 많이 배우고 의욕에 넘치는 젊은 목회자들이 깊은 신뢰와 믿음을 얻기도전 섣부른 개혁으로 이상을 펴보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게 현실이다. 이상은 그것을 실현할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적하는 것, 가르치는 것이 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뒤짚는 것도 아니라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의 대상이면서 주체여야 하는 평신도들과 함께 하지 않는 한 사람의 이상 실현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기성교회와 당회 지도자들 모두가 개인주의와 기복주의에 젖어있는 게 사실이다. 이전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천국가는 대합실의 손님이자 교회생존의 수단으로의 관리대상이었지 개혁의 주체로 단독자로 하나님과 만나게 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자기 양떼들을 두고 나와 잘못한 놈이나 찾아내서 지적하고 성명서 내는 게 다가 아니다. 하나 걸린 놈 패는 게 개혁이 아니다. 지 교회에서는 아무소리도 못하면서 남더러 바뀌라고만 하는 건 개혁이 아니다. 개혁은 내가 먼져 변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을 용기가 없다면 그건 개혁이 아닌 개혁주장자에 불과하다. 세습이 문제가 아니라 세습을 가능케 하는 목사 위임제를 내려 놓치 않은 체 세습한놈 패는 건 비겁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세습만 바로잡으면 개혁되는 것 처럼 아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세습은 혈연적인 것만도 아니다. 지역과 학연, 써클, 코드, 영적 세습도 있다. 따라서 세습은 막는 다고 해서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하 여 우리교단 총회나 노회, 교회,개인들이 지불한 사회적 비용이 얼마인가?  그렇게 해서 지금 무엇을 얻었는가? 이번에 나온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 직무 정치 가처분 인용 재판에 대한 언론들 비판과 옹호, 백가쟁명식 처방이나 논평도 차고 넘친다. 그러나 교단 내 세반운동가들의 결집과 성과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이다.

법을 어긴 교회나 사람을 제지하고 응징하는 것은 일반 목회자들이 나서서 할일은 아니다. 해당 치리회나 치리부가 하는 것이고 못하면 못하는 대로 가는 것으로 교회나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일이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 되는 일이다. 성경에서도 죄을 짓는 자들을 경고하고 비판할 지언정 나서서 바로 잡으라는 말씀은 없다. 잘못된 것과 어긋난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큰 일을 하는 것이다. 세습하는 교회들 마다 쫒아다니고 반대하고 망신주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는 소리다.  

개혁이 예을 들어 현재 한국의 대형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놔두고 세습교회가 아들만 아니면 된다는 것인가? 이 법 이전엔 아들에게 목회를 물려주는 것은 장려되고 축복된 대물림이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양을 한 교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목회를 해 본 분들이라면 총회법이 있다고해서 그걸 지켜가면서 하는 분들은 거의 없다. 자기교회나 목회자가 좋다면 가는 게 목회관행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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