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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대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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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2.16  14: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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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대동계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장계(첩보문건) 한 장이 조정에 당도한다.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정여립이 '세상을 전복시킬 엄청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첩보는 구체적이다. 정여립이 자신을 따르는 일당과 호남, 황해도에서 동시에 봉기해 한강의 얼음을 딛고 한양으로 진입, 훈련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려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때까지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다. 선조조차도 정여립이 모반할 까닭이 없다고 단언했다.

정여립과 한 길을 걸었던 동인 계열은 그가 스스로 한양에 올라와 무고를 주장하면 사건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판단은 어긋났다. 10월7일 금부도사 유담으로부터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급보가 조정에 당도했다. 변고는 거듭됐다. 10월18일 정여립은 진안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월20일 선조가 직접 나선 정옥남에 대한 친국을 시작으로 기축옥사가 시작됐다. 옥남은 정여립의 아들이다. 이듬해 7월까지 무려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선조 4대 사화의 희생자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임진왜란을 4년 앞두고 동인인 이순신, 권율등이 음모에 휩쓸리지 않은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4~500만 명이었다. 모반에 대한 치죄는 매우 엄했다. 삼족을 멸하고, 정여립과 조금 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잡아 죽였다. 정여립의 시신은 능지처참된 뒤 조선팔도로 흩어지고 그와 서신 한 번이라도 주고받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말 한 마디 건넨 이력이 있는 사람도 죽었다. 이웃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집단이

죽임을 당했다. 전주와 한양에서 국문이 109일 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까지도 묘향산과 오대산 사찰에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여립의 근거지 전주는 동래 정씨가 아예 살 수 없게 됐고, 그의 고향 금구는 현으로 강등됐다. 집을 파괴하고 역적의 기운을 없애기 위해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으로 지목돼 이후 인재등용에서 배제가 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이 조선시대가 망할때까지 집권을 하였으니 결국 그들의 기록은 믿을만한게 못된다.

   
 

진실은 무엇인가?
정여립 역모사건과 기축옥사는 조선역사에서 늘 문제가 되는 악적 서인들의 철저한 시나리오에 의한 잔인한 음모라고 볼수 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역대 최악의 임금중 하나로 꼽히는 선조이며, 당시는 임진왜란을 고작 몇년 앞에 두고서 동인들이 주도적 집권세력을 형성하고 있을때 였다. 힘을 잃고 정권을 찾을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은 완벽한 시나리오를 구성하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모 사건이라 하면 조선시대에는 정권을 충분히 뒤엎을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운장산/구봉산의 이름을 만들게한 간신 송익필(자가 운장, 호가 구봉)과 동인백정으로 불리웠던 송강 정철 등이 음모를 꾸며 율곡의 추천으로 서인에 들어왔다가, 1년후 율곡이 죽자 서인들의 행태에 실망하고 동인으로 옮겨간 정여립을 역모의 주역이자 도화선으로 삼아 동인정권을 끌어내리고 집권을 할 계획을 세운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으로 옮겨간 이후 서인들의 행패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하여 천반산 일대에서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한달에 한번씩 모여 무술훈련도 하고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도 하였다고 한다.

열혈남아였던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씨에게 돌아갔는데, 한 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거침없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게 또한 서인들이 정여립을 역모의 주동자로 몰기에 좋은 구실을 제공해 준것이다. 당시 정여립의 거침없는 발언은 선조 앞에서도 할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동사만록>에도 음모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사건을 만든 사람은 송익필이고, 각본에 따라 연출한 사람은 송강 정철이라고 전해온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서인들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작한 당쟁의 산물일 뿐, 역사 속에서 역모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한 서인은 계획된 대로 사전에 내통한 황해도 관찰사를 시켜 정여립이 역모를 꾀한다는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보내면서 준비된 음모가 시작되는데 그때 이미 정여립은 서인들이 보낸 자객에게 천반산 앞 죽도에서 암살을 당한 이후 였다고 한다.

이율곡과 선조도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천재 정여립이 역모를 꾀할일이 없으니 같은 동인들도 가볍게 생각하고, 졍여립이 나와서 진실을 밝히면 아무 문제가 없을것으로 가볍게 보았는데, 죽은 정여립이 어찌 나와서 진실을 밝힐수가 있었을까. 서인들은 정여립을 죽여놓고 열흘이 넘게 시간을 끌면서 매일 매일 매수된 관원을 시켜 거짓된 상소를 올리면서 그가 도망중이다, 궁지에 몰리자 자살했다 는등 계획된 거짓정보를 왕에게 전달하여 점차 국면을 엄청난 역모로 몰아간다.

결국 음모는 성공하기에 이르고 조선시대 최악의 왕 선조는 동인의 반대파인 서인의 수장 정철을 시켜 기축옥사를 진두지휘하게 하고 동인 사냥을 시작케 한다. 이때의 모사꾼이 송익필 이다 (정감록과 정여립을 결부시켜 거짓 소문을 퍼트린 이가 송익필 이다). 그렇게 동인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쥔 狂人 정철의 손에서 원래 계획된 동인의 씨를 말리려는 음모대로, 당시 집권한 동인들은 수장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관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삭탈관직을 당하고 동과 서는 더 이상 말로써 회복할 수 없는 극한의 원수가 되어 버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 이라며 한탄을 했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또한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을 쓴 신정일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6세기 말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정여립의 역모가 거짖인 이유들로 언급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당시 집권층은 정여립의 동인이다. 불만은 서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집권파인 정여립이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2. 역모의 진원지는 전라도 천반산인데,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고변은 천리길도 넘는 황해도에서 했고, 전라도지역에서 역도로 붙잡힌 사람들은 역모 자체를 부인하다 장살된 반면 해서지역 역도들은 역모를 사실이라 자백했다고 한다.
3. 정여립이 암살을 당할시 그는 천반산 앞에 있는 작은산 죽도에 아들과 수하 한명을 동행하고서 단풍구경을 하고 있었다.
4. 수백명의 무술을 하는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지만 그는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5. 역모사건후 그의 집에는 그가 평소에 쓰던 그대로 방치되어 그와 교류했던 선비들과의 안부 편지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후 그 편지들로 인해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되었는데, 역모를 준비한 사람이 집안에 중요한 문서 등을 집에 방치해 두며 단풍놀이를 간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단풍구경 갔다가 암살을 당한 것이다.
6. 그가 역모후 도주한곳이 죽도 라고 하는데, 잠시후 아래에서 죽도 사진을 올릴것 이지만, 죽도는 말만 섬이지 밤톨만큼 작은, 그러면서도 사방이 강물에 에워 쌓여진 조그만 야산에 불과 하다. 정말 역모라면 지리산 같은 큰 으로 도망을 가던지 해야지 마을 뒷산보다 작은 죽도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 이다.

서인들의 음모에 의해 일으켜진 기축옥사는 1,000명 이라는 엄청난 지식인 선비들을 죽이고 끝이 났다. 당시 인구가 400~500만 가량이고, 이중에 양반의 비율이 약 2%로 정도인데, 이중에서 동인과 정여립과 친분이 있던 당대의 최고 엘리트 지식인들 1,000명이 죽었으니 엄청난 일이 아닐수 없는 것이다. (※참고 :: 1910년 호구조사에서 전국 가구수가 289만4777호로 집계되었는데 이때 양반은 5만4217호로 전체인구의 1.9%에 불과 했다고 한다)

결국 4년후 임진왜란을 맞아 고전을 한 큰 이유중의 하나가 기축옥사때 당대의 지식층을 너무 많이 죽여서 임란때 주도적으로 전쟁을 치를만한 인재가 없었다고 한다. 더 웃기는 것은 지난번 화양구곡과 송시열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말했듯이 이 기축옥사를 일으킨 문제의 서인들은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인물이 한명도 없다는 것이다. (원균, 신립 = 서인, 도움이 전혀 안되고 그나마 있던 병력과 장비를 말아먹은 인사들이다)

참고로, 기축옥사로 조선의 인재들을 싹 죽이고 임란때 왜적을 맞아 싸운것은 곽재우, 권율, 이순신등 동인들이고...서인들은 임란중에 이순신을 시기하여 백의종군케 하더니 기껏 한다는짓이 원균을 앞세워 그나마 잘싸우던 수군을 전멸을 시켜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서인이 내세운 신립은 방어에 유리한 문경새재를 버리고 조총의 위력을 모르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는 어리석은 전술로 육군을 몰살시켜 버린다. 이렇듯 임란때도 서인측이 한 공적이라고는 아군을 몰살시켜 국가에 큰 위해만 끼쳤는데, 임란이 끝나고 다시 힘을 일케 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는 계기가 바로 자신들 스스로가 실제 역모를 일으키는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의 추악함에 대해서는 지난번 화양계곡과 송시열을 언급하면서 충분히 설명하였음으로 그만 하고자 한다. 기축옥사 이후 재능있는 선비들은 왕 앞에 바른말 하기를 꺼려하고, 동인과 서인의 갈등의 골은 돌이킬수 없는 원수지간이 되어 이후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에너지를 잘못된 곳에 소모를 하게 된다. 조선이 망할때까지 쭈욱 권력을 잡은 서인 정권은 주변 나라들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되어 가는 와중에 애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두차례나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키고는 자신들은 싸움 한번 안하고 나라에 치욕만 안기고선 이후 주자학과 숭명사상에 빠져 결국 조선을 망하게 하더니 그 주역들은 죄다 친일파 주축이 되어 현재까지 그 부를 이어오고 있다.

   
 

송강 정철의 두얼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 사미인곡, 속미인곡등 왕을 향한 절절한 충정의 글을 남겨 훌륭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고 있는 송강 정철의 이면은송시열 만큼 다르다. 해방후 국사편찬 까지도 당시의 서인들이 맡고 있으니 현재 국사의 기록도 여전히 서인들의 왜곡한 잔재들이 남아 있을수 밖에 없을 것 이다. 선조실록에는 송강 정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독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다.' <선조실록 145권> '정철이 항상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역적의 변이 신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오늘이야 말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날이라 여겨 자신이 신문하는 관원이되어 일망타진 할 계책을 세웠다.' <선조실록 84권> '정철의 일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 듯하니 방치하는 것이 옳다.' <선조실록 54권>

이외에도 선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정철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 정철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고 전한다. 선홍복을 사주하여 이발, 이길, 백유양 등을 거짓으로 고변하게 하였다, 이는 정철 등이 꾸민 일이다 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백성들이 연좌되어 감옥이 가득차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 김천일의 상소 이는 모두 정철이 지휘한 것이다.

술을 좋아하여 늘 술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그 때문에 실수도 많았던 천재 시인 정철, 예술가의 피를 타고난 그는 타협할줄 모르는 고집센 성격으로 강원도 지역에 내려오는 정철 관련 설화등에선 성질이 고약하고,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잘 잡는 쪼잔한 인간으로 나온다. 동인의 수장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어가며 대립각을 세우더니 서인의 수장으로서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세우는 음모를 꾸미고 기축옥사를 책임지며 반대파를 잔혹하게 숙청해 버린다.

그의 문학작품속에 광기어린 이면이 감춰지고 있는데 기축옥사를 통해 정철의 다른 모습을 알수가 있다. 그런 정철도 결국은 선조의 눈밖에 벗어나고 결국엔 선조가 정철을 일컬어 간철(간사한 정철), 흉철(흉악한 정철), 독철(독한 정철) 등으로 부르며, 선조실록에 험한 평가가 올라가고 내처지게 된다. 당시 정철과 언쟁을 벌이며 정철이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던 정철의 정적 동인 출신 이발의 식솔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종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여 극적으로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광산 이씨 이발의 후손들은 지금도 명절이나 제사때 고기를 다지면서 '철, 철, 철' 하고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고 한다. 

광기어린 천재 정철이 선조를 이용해 음모를 꾸미고 정적을 제거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 순진한 시인이 정치9단 선조의 계략에 이용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정철이 기축옥사를 이용해 엄청난 살륙을 저지르고 정권을 잡은 건 사실이다.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성장하며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닦고 결혼을 하고 관직에 들어선 정철이 음모로 시작된 거짖 역모와 기축옥사를 통해 호남지역의 인재들을 몰살 시키고 이후 호남이 역적의 땅이 되어 그쪽 인재들의 등용을 막았던 것은 자신이 살기 위한 몸부림 이었을까?

기록에 남아 있는 정여립 사건 재 구성

기축옥사(己丑獄事)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2]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성혼, 송익필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정여립의 모반 사건 (1589)
정여립(1546∼1589)은 본관(本貫)은 동래(東來), 자(字)는 인백. 전주(全州) 출생이다.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으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년) 식년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1583년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退官하였다. 본래 庶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落鄕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政權을 넘보기 위하여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全州府尹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 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때 안악郡守 이축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으며, 이 때부터 전라도(全羅道)를 反逆鄕이라 하여 湖南人들의 登庸이 제한되었다.

사건의 배경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당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

이이가 죽자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이이에 대한 선조의 믿음도 점차 변하여 이른바 삼찬 사건(1583년 이이를 탄핵한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유배시킨 사건으로 이들 셋을 삼찬이라 했다. 계미변란이라고도 한다. 관련자들을 용서한 일이 일어났다.[6] 이때 정여립은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려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는데 앞장 선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은 궁지에 몰린 서인들에게 절호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1583년 수찬이 된 후 서인을 비판하다가 귀향하였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호남 금구현으로 간 뒤로는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고, 김제와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그가 물러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에게 다시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는 신하들이 나타났지만, 선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재령 군수, 안악 군수, 신천 군수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정여립은 토굴에서 자결하고,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다가 동인이었기에 물러 나온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

정언신은 체포 후, 정언신의 아들 율의 상소와 성혼의 권고로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에서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음이 드러나, 유배형이 내려졌다. 정언신에 이어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정철은 정여립의 도주를 예견하였고, 자원하여 입궐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초기 수십일 간은 선조 임금이 직접 심문하였고, 1590년 5월 이전까지 정철이 위관을 담당하였다. 이후로는 류성룡과 이양원 등이 위관을 담당하였다. 옥사는 20개월 간 계속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고, 1591년 5월에 끝이 났다. 옥사로 인한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억울한 죽음
조대중(曺大中)은 당시 전라도 도사로 있으면서 관내 순찰 중 전라남도 보성에서 정여립 자살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때 그가 눈물을 흘렸다는 죄로 장살을 당하였다고 한다. 사실은 마침 부안에서 데려온 한 관기가 이별의 정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잘못 전달되어 그런 참혹한 형벌을 당한 것이라고 하는데, 한 여인과의 '이별의 눈물'이 나라에 반역한 '역적의 눈물'로 오인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또한 조사 김빙은 추국관(推鞫官)이 되어 추국에 참여하였는데, 원래 눈병이 있는 데다가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어 눈물을 닦은 것이 같은 서인이었음에도 김빙과 적대관계였던 백유함(白惟咸)의 눈에 띄어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당하였다. 이러한 사건을 두고 오익창은 상소문에서 "간교한 무리들이 그 기회를 타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을 빌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날조를 하다혀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죽이고야 말았습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정여립 사건을 빌미로 이에 얽혀 들어 희생을 당한 사람이 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전라도의 인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조작 논란
정여립이 조직했던 대동계가 역모의 가장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만일 대동계가 역모를 위한 조직이라면 서인당인 남언경이 어떻게 동인계로 전향한 정여립에게 협조를 요청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미 서인당인 전주 부윤이 알고 있을 정도의 조직이라면, 더욱 마음 놓고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그래서 정여립은 매월 공공연하게 모임을 갖고 국난을 당하여 협조했을 것이며, 만일 그가 진정 임진왜란을 예상했다면 그의 이러한 조직은 의병 활동에 크게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동인의 영수 이발의 노모를 비롯한 가족들의 죽음, 처사 최영경의 죽음을 비롯한 1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여 이후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 북인이었다가 남인이 된 허목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기축옥사에 대한 것을 접하고 서인들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는 정여립 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은 선비가 많다며 이들의 신원과 복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허목의 증언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 당시 호남의 선비들 중 정개청을 추존한 사실 때문에 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린 자가 50명, 그 중 유배형을 당하고 혹은 목숨을 잃은 자 20명, 금고된 자 4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허목은 또 "일찍이 정개청이 정철을 가리켜 소인이라고 지탄한 그 한마디의 화가 이토록 심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당시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골하게 피해를 입었는 지 알 수 있다. 허목 외에도 북인, 남인계 인사들 일부에는 서인에 대해 이 사건에 대해 오래도록 원한을 품기도 했다.

   
 

평가 및 복원 노력
이후 동인과 그 후신인 북인, 남인이 집권했을 시 정여립의 옥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광해군 퇴출 후 북인이 숙청당하고,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남인마저 숙청당하면서 옥사, 반란으로 규정되었다. 이후 정여립의 난이 서인에 의한 조작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현재는 송익필이 조작했다는 설, 정철이 조작했다는 설, 서인 전체가 조작에 가담했다는 설, 정여립의 혁명적인 주장이 옥사를 초래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공존하나, 정설은 없다.

그러나 이미 조선조에 이미 왕에 대하여 재평가하는 민본사상이나 대동계와 같은 협동조합 개념을 서양보다 앞서서 설계한 이상은 대단하다. 조선중기 이후에 홍길동을 쓴 허균에게 보인 유토피아와 같은 율도국의 이상도 그렇고 왕조 사회에서도 면면히 흐르는 민초를 다스림이나 지배의 대상으로가 아닌 하늘과 땅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대단한 발상이다. 그러나 권력과 국가 질서의 힘에 의하여 발현되지 못한 불온상 사상으로 거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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