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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총회에 소개되는 한국산업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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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1.03  10: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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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CC 부산 총회에 소개되는 한국산업선교

   
                      

WCC 총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세계교회의 축제이다. WCC는 1948년 창립 이후 아시아에서는 인도의 뉴델리 에서 열리고 두번째이다. WCC와 한국교회는 산업선교(Urban Indutrial Mission) 를 통하여 가장 강력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7-80년대 한국에서의 산업선교를 시작하게 한 PC-USA의 지도자 죤 화이트 목사는 연대 도시문제연구소를 통하여 빈민선교를 지원하였고 죠지 타트 목사는 후일 WCC의 URM의 총무가 되여 아시아교회 협의회(CCA)에 URM를 설치 적극지원 했다. 그리고 해리죤스 역시 미장로교회의 목사로 아시아의 일본 인도 한국 필리핀에 산업선교를 개척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영등포의 조지송 목사를 국제기구에 불러 훈련시켰고 오재식 선생을 미국에 유학시키고 그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CCA와 WCC 본부에 근무하도록 주선도 하였다.
   
                       *  2012년 성탄절 조지송 목사 댁을 방문한 명노선 목사(전 산선 간사)

그후 WCC 에는 박상증 목사(CCA총무도 역임)와 박경서 박사가 아시아 데스크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금주섭 목사가 전도와 선교국장으로 김동성 목사가 아시아 담당으로 있으면서 이번에 한국에 총회가 유치되는 과정에서 부터 지금 까지 많는 준비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한편 미국장로교회의 목사인 화이트 목사와 해리죤스는  PCK 전도부내에 산업전도부를 창설하고 지도자들을 훈련시켰고 그후 WCC를 통하여 영등포, 인천, 청주산선을 지원하였고 한국의 노동자 문제를 세계교회에 알리고 국제적인 연대를 해왔다. 그후 한국에서는 안재웅 박사(URM총무와 CCA 총무를 역임) 와 인명진 목사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80년 초 신군부의 집권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받던 산업선교는 문을 닫기 직전까지 이르렀고 이후 더 이상 산선이라는 이름을 갖고는 활동하기 어려워지게 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시대를 위하여 새로운 세대들을 준비하셨다. 70년대 학생운동과 기독청년운동을 하던 이들이 대거 신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학내에서는 최초로 진보적인 써클들을 조직하였고 이들이 졸업을 하면서도 기성교회에 가지 않고  전국의 공단지역에서 가난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하여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노동자 교회들를 세워갔다. 개신교회의 특성상 설립자들의 목회철학에 따라서 교회는 운영되는 것을 착안하여 시작을 한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인명진 목사가 내엿고 이 구룹들중 가장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는 1983년 10월 이였고 성수동(뚝섬)의 성수삼일교회(정태효 목사)이다.
   
           PCK 최초로 창립한 노동자교회인 삼일교회가 작년 부터 사용하고 있는 페넌트

이후 대구의 달구벌교회(안기성 목사) 안양의 버린돌 교회(박진석 목사) 현재 한무리 교회 대전의 빈들 교회(김규복 목사) 가 함께 세워져 갔다. 이후 신학교을 졸업후 매년 4-5명이 지원하여 현장(노동)훈련 1년과 이론과 학습을 한후 지속적으로 교회들을 세워나갔는데 약 40개를 정점으로 2000년이후 더 이상의 지원자도 없고 한국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변화 지역운동의 분화로 각기 다른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

교회를 여전히 유지 하는 곳도 있지만 지역의 특성과 목회자의 관심과 달라진 환경과 요구에 따라서 다문화 사역, 생명선교, 자활쎈타, 장애인, 쉼터, 기독교 기관, 신학교, 해외선교사등으로 분화되였다. 그리고 올해 30주년을 맞아 11월 4일 오후 4시 30주년 기념예배를 갖는 다. 

현재 한국산업선교 특히 PCK의 URM 정신과 역사를 계승하고 있는 "일하는 예수회" (회장 우예현, 총무 장창원 목사) 가 이 모임을 주관한다. 한편 3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위원장 진방주 목사)를 조직하고 지난 30년을 함께한 회원들의 회고록(간증집)을 준비중이며  내년에 출판할 예정이다. 이미 20주년 기념을 맞아 2권의 책으로 역사와 회원사역들을 소개한바 있다. 특히 이번에는 한국산업선교의 산증인 인명진 목사(갈릴리교회 은퇴)의 회고록(영문과 한글) 출판도 준비되여 있다.
   
 
 
   
                         WCC 총회장소에서 전시되고 있는 산업선교 부스(인명진 목사 회고록 출판기념 사인회 광고도 보이다)

그리고 작년에 회원중 처음으로 60회 생일을 맞은 손은하 김규복 목사의 회갑행사를 한바 있는 데 이번에는 창립 기념 행사후 올해로 회갑을 맞는 정태효 이근복 목사의 60회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다음의 원고는 2011년 한 모임에서한 회원의 내부 발제 원고

1.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 왔는가?
83년 성수삼일 시작하고 안양 버린돌(박진석) 대전 빈들(김규복) 대구 달구벌(안기성) 영등포산선(이근복, 손은하) 울산(김영락) 태백 복지회(윤창현)가 처음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인목사님이 항상 같아 모였습니다. 초기 모임이고 열정이나 결합도도 높았습니다. 알다시피 그때 선배들은 교회개척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고 “산업선교실무” 에 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공장노동과 이론실무등입니다. 그때 조목사님은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는 생각을 갖고 계셨는데 2010년 12월에 만났는데 지금도 그렇더라구요. 그러나 인목사님은 달랐습니다. 더 이상산업선교를 확장은 커녕 영등포도 지탱하기도 힘든 판이지만 우리가 목숨걸고 지켜왔고 노동자들이 아직은 자생적이며 자구적인 힘으로 설수 없는 상황에서 산업선교를 포기할 수 는 없다는 생각으로 개신교회의 특성으로 개척한 교회는 개척한목사가 목회의 방향과 내용을 정할수 있지않느냐? 그러니 여러분들의지역적인 연고나 전국의 중심되는 공업도시에 노동자 교회를 세워서 거기서 산업선교의 내용을 담아내면 산업선교는 확장될 것이고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을 들어 김규복목사는 당시 결혼 축의금으로 대전에서 빈들교회를 시작했는데 정직하게 말하자면 위장 교회지요. 교회의 간판을달고 특정한 계층에 포커스를 맞추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진방주(현장-영산-총회) 우예현(오산-기관-한무리) 강우경(디딤돌) 황홍렬(친구-유학-교수)가 훈련을 받고 교회를 개척 했습니다. 4기라고 하는 오규만(한벗-일반목회-영성훈련가) 최주상(한무리-소천) 정태효(성수삼일) 안하원(부산 새날), 서덕석(성남 열린),김정은(영광 사랑방)  이후 이동규(구미 등대-친구) 김영철(인천-유학-새민족) 박충호(일반-울산 등대-소도-일반) 유승기(군산 돌베개)  목사가 각 지역에서 노동자 교회를 세워나갔다.
   
                                           2012년 5월 손은하 김규복 목사 60회 회갑 축하연  

제가 강조를 하려는 것은 그때 훈련생은 장신대에 재학중인 학생중 신실하고 믿음이 좋고 열린사고를 하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친구들을 발굴하여 훈련과정 참여를 권하였는데 아무래도 “현신” 에 그런 친구들이 많이 모였으니 현신활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주로 나왔습니다. 현신이 장신대 76부터 시작되였는데 그때 같이 시작을 한 77기 78기의 중심도 그렇고 모든 기수에서 예노목 회원들은 헌신적이였고 중심이였습니다. 예을 들어 76-80기 정도는 이미 장청이나 기독학생운동으로 학내 이전 부터 느슨하지만 학생 청년 운동의 연대와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조직력과 단결력이 높았습니다. 서로 호형호제 하며 지내는 사이들입니다.

이런 변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되거나 변질되기도 되였다고들 하지만 설립 초기에는 교회개척을 위한 훈련으로 목회적인 내용을 교육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산업선교에 관한 내용들이 였는데 당시 강사로는 노동문제 전문가 에큐메니칼 운동가 정치 사상가등 주류였다. 그러나 훈련에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현장노동” 이였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가볍게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지만 대단했습니다. 그때 훈련 일지를 작성했는데 지금 보면 그런 고민과 생각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후 변혜숙 회원을 말만듣다가 처음 만났는데 그 회원이 그때 훈련을 받고도 교회를 하거나 기관에서 사역하지 않고 노동현장에서 살기로 했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고 이건 뭔가 잘못되였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그 개인으로는 정말 엄청나고 위대한 결단을 한 것 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조직원으로써는 자격상실입니다. 훈련도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노동의 경험을 통하여 엄중한 현실을 보고 노동자로 이전을 생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가 되여 목사로서의 사역보다 더 귀한 일을 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목회자라는 틀속에서 우리 조직의 내용과 외연을 확대해 가는 판에 찬물을 끼얹은 것입니다. 변혜숙 회원은 소위 명문대학을 나와 현장 노동자와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성자나왔네” 했습니다.

그는 그때 현장에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노동을 하면서 했다고 했는데 그 만큼 노동체험 자체는 자기의 진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와 비숫한 케이스가 진방주목사도 현장훈련이 끝났는데 연장해서 더 있었는데 아마 개척을 해야 하는 압박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현장훈련은 어디까지나 훈련이지 조직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어디 까지나 노동운동의 보조축으로 머물러야지 노동운동가 혹은 조직 운동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오래된 원칙들이였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현장에서 "이렇게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평생 그렇게 살지 못하겠구나 그러니 속죄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목회 하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으로 설교하고 심방하고 목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각각 다름 느낌과 결단을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초기에 “예장노동목회자연합”라고 하는 데서 알수 있듯이 “노동목회” 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그후 시대적인 변화와 주변부 운동의 성장에 따라서 빈민쪽과 교류를 하면서 “예장 도시민중교회연합” 이라고 하고 사무국장도 두고 ‘한민련“ 에도 조직하거나 참여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애들 NCC" 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부 할 수 없는 시대적인 변화는 우리 조직에게도 비겨가지 않았습니다. 장신대에서 통합되던 목회자들이 지방신학교에서 배출되었고 노동자들의 외부적인 조건도 “민노총”이나 자구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목회적인 내용도 노동자에서 노동자들의 가족문제(주거 교육 위생 복지등) 지역주민들의 문제(교통, 일자리, 건강, 문화등)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발맟추워서 목회적인 변신을 한 교회도 있고 아예 교회를 접고 지역사회를 아우르는 사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손은하목사는 농촌으로 이희운 회원은 선교사로 유학 후 교수나 총회나 기관 실무자들로 분화되였습니다. 우리 모임의 결속력과 결합도는 자연히 느슨하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은 지역에서 안정적인 거점을 확보하고 유명인사가 된 사람들, 교회를 건축하거나 지속적으로 목회을 한 사람들은 지역과 노회내에도 평가받고 총대도 되고 임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회도 아니고 기관으로도 자리잡지 못한 회원과 자리가 없는 회원들도 있습니다. 지금 후배들이 안나오고 훈련도 없어져서 그렇습니다만 산업선교를 하려면 훈련을 거쳐야 하고 특히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세계교회 URM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에는 재정적인 것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전에 조목사님이 인목사님이 감옥갔을때 쓰지 않는 경비를 모아서 안양에 집을 산적이 있습니다. 산업선교를 확장할 계획이였죠. 그러나 그걸 팔아서 후배들을 훈련시킨다고 하여서 그걸로 훈련비를 섰습니다. 제가 관리도 했습니다. 그후 박진석목사가 관리한 것으로 압니다. 남은 돈으로 아파트를 샀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노동” 목회를 안한다는 이유로 훈련비를 안주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지금 그 돈을 찾거나 규명하자는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 “일하는 예수회” 철저히 산업선교에서 파생되였고 거기 붙어있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11월 영등포산선이 총회 유적지로 민주화운동 기념비를 제막할때에 생각이 난 것 인데 우리가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총회와 영등포산업선교를 뿌리로 해서 나온 것 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문서로도 작업을 해야 합니다. 아니면 잘못하면 사생아되고 불임 조직되여 경로당됩니다.

다음은 회원들을 기관과 지역사역자 목회자라는 영역으로 평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주관적일수도 있습니다.

사역분석
다른 회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낳은 여건에서 사역했던 이들은 이근복 진방주, 전익상, 서경기, 오상렬, 최수철, 손은정등입니다. 나름 대로는 어려움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젠 모임에 적극성이 없고 결합도가 떨어집니다.  지역의 기관과 교회를 겸하는 사역자들로 김용식(울산 자활) 조용희(전주 자활) 정태효(성수자활) 박천응(안산 외국인) 안승영(안양 자활) 인데 김경태(대구) 정충일(수원) 이들은 목회보다는 다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고 아직은 노회와 지역교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느슨하지만 존재의 고민이 많은 분들이다.

끝까지 교회를 잡고 고분분토하는 목회자로는 김규복(대전) 강우경(구로) 김영철(새민족) 안하원(부산) 서덕석(성남 열린) 새터(안지성) 차정규(서울) 이진형(청지기) 현제식(안산) 정병진(여수) 김경태(대구) 곽은득(군위) 유승기(군산) 광주(오석회 ) 그 외로는 김영락(홍천)와 신승원(장수)는 수도자적인 실험을 김정은은 영광에서 지역목회를  전영미, 박후임은 결혼후 귀농하여 여성농민 운동가로 오규만은 투병후 영성전문가(과천교회)로 황홍렬(부산장신대) 최승기(호남신대)는 교수로 변혜숙은 논산에서 어린이를 위한 공부방 사역을 허 연은 일반교회에서 부목사로, 정요셉은 선교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남덕은 아직도 미국에서 공부중이고  이희운은 인도선교사로 유재무 목사는 일본선교사로 사역하다가 귀국하여 현재는 창립한 성수삼일에서 동역을 하고 있다. 

사역의 영역에서 보면 방대하지만 공통점은 있는 데 모두 일은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하는 예수회”라는 이름은 잘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작년에도 나온 말이지만 이도 정도 안되니 친목이라도 열심히 하자는 말에 시대의 과제와 현실을 너무 외면한 일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회원간의 끈끈한 친밀감은 그 조직의 혈맥과 같은 것으로 하고 자 하는 일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이 현실로 이 두가지를 잘 아울러야 조직도 일도 잘된다고 본다.

이제는 모두 우리자신을 냉정히 돌아보고 결단 할 때가 되었다. 이제 난 자생적으로 아무런 관계없이도 살아남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판단되는 회원들은 과감히 정리을 하기를 바란다. 여기서 자리를 풀어주는 곳도 아니고 지도 노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을나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모임이 아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의 헌신성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희생할 수 없다면 이제 그만 두워야 한다. 유명무실한 체 서로 미안해 할시간은 지났다. 그러나 회원들의 열심과 결단 열정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 조직도 변모해야 한다. 회장이나 바꾸고 사람이나 가는 총회가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본인은 이번에 깃수와 지역 사역별로 구성되는 “비대위” 를 꾸리고 담을 헐고 넘던지 더 견고한 담장을 새로 쌓던지 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가야할 곳
현재 이런 고민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농목도 비슷하다. 지원자가 없고 농촌목회라는 경계가 애매하다. 수도권과 경기도 일원도 지역은 농촌이지만 노동자가 있고 도시로 출퇴근을 하는등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 구만리 교회 근처 농촌선교쎈타를 지였다고 한다. 상근자도 나오고 우리가 몸담았던 예장의 “현신”이라는 조직도 “건목”으로 개편하고 근근히 이여 가고 있다.  모이는 숫자와 일도 줄지만 모든 모임이  잘안된다고 해서 불필요 조직이 아니다. 예장내의 그래도 진보적인 목회자 조직이 전국적 연대를 갖아야 한다. 기존의 선배구룹들의 "예목협”을 “바목” 으로 “생목”으로 이름만 바꾸웠는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 조직들을 아울러 단일대오의 “진보적목회자” 조직으로 건설할 필요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건목과 생목이 정치적인 색을 보인다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생명력을 다 했다는 소리이다. 그래서는 좋지않습니다. 조직은 언제까지 재야로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건강하고 오래간다. 천주교 정의 구현사제단도 숫자는 많치 않습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다, 정신과 이념이다. 그리고 존재의 고민인데 이 단체들을 견인하고 예장내의 진보적인 가치를 세우고 싹을 키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추동할 중심조직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생각이다 (중략)

예장 노동목회 훈련생

1기(1984)

이근복, 손은하

2기(1985)

김규복, 박진석, 안기성, 유재무

3기(1986)

강우경, 진방주

4기(1987)

김정은, 서덕석, 안하원, 오규만, 정태효, 故최주상

5기(1988)

김영철, 박충호, 오필승, 유승기, 이동규, 황남덕

6기(1989)

박천응, 안정찬, 우예현, 전익상

7기(1990)

민은영, 故이경로, 이철규, 조신제, 최승기, 故현제식

8기(1991)

김경태, 서경기, 오재현

9기(1992)

김용식, 장창원

10기(1993)

오상렬, 이희운, 정충일

11기(1994)

오석회, 이상은

12기(1995)

강수은, 김광선

13기(1996)

신미경, 조용희

14기(1997)

신승원, 진광우, 박은애, 전영미, 변혜숙

15기(1999)

손은정, 한선영

16기(2000)

정병진

17기(2001)

이상학

18기(2002)

정요섭, 허연, 박평숙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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