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 강연회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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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 강연회장윤재 교수(이화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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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03  01: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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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후스와 체코 종교개혁 강연회

올해는 종교개혁의 선구자이며, 마틴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서 종교개혁의 큰 다리를 놓았던 얀 후스(Jan Hus)가 순교한지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후스는 타락한 중세 교회 안에서 누구보다 깊게 ‘교회에 대하여’ 고민했고, 교리와 예전의 현실화된 삶에 대해 고민했다. 비록 타락하고 쇠락해 가던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아 화형을 당하게 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7월 6일 부산시 중앙대로 부산YMCA 세미나실에는 열린 이 세미나는  부산NCC, 부산교회개혁연대, YMCA, 성서부산, 예수살기, 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가 공동주최하였는데  강사로는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가 나서고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와 류의근 교수(신라대)가 논찬을 한다.  주최측은 “올해 후스 순교 600주년에서 시작해서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에 이르기까지, 교회 역사의 시계는 종교개혁의 열망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한다. 후스 순교 600주년을 기념하여 진지하게 교회에 대하여 고민하고 개혁의 길을 모색하며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장윤재 교수의 강연 "얀후스와 체코 종교개혁" 의 전문이다.   

   
토마시 부타/이종실 역  | 동연출판사

- 그의 화형 600주년을 맞이하며 -

장윤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당신들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를 만나게 될 것이다.” - 얀 후스

체코의 프라하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곳은 아름다운 블타바 강 위에 놓인 ‘프라하 다리’이다. 이 다리는 설립자 카렐 4세의 이름을 따서 ‘카렐 다리’라고도 한다. 한국의 한 TV 드라마에서 주인공 남녀가 이 다리 위에서 낭만적인 키스를 한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다리는 종교개혁의 역사와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다리의 탑에는 가톨릭교회에 저항하는 개신교 지도자 11명을 참수해 경고의 의미로 10년 동안이나 이들의 머리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올해 2015년 7월 6일은 얀 후스(Jan Hus)의 화형 6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100년 전 체코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이종실 체코 선교사가 말하다시피, 힘없는 소수민족의 이 실패한 종교개혁은 한국교회로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만 바라보고 다양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년 앞선 후스의 종교개혁부터 기념되어야 한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한국 개신교회는 2015년 후스 600주년 – 2017년 루터 500주년 – 2019년 3.1운동 100주년으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일정 속에서 혁신의 동력과 계기를 찾아야 한다. ‘제1차 종교개혁’ 또는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후스의 종교개혁은 루터 종교개혁의 전야(前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종교개혁이었다.

언어혁명과 공간혁명에서 시작된 체코의 종교개혁
체코는 크게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의 세 지역으로 나뉜다. 지리적으로는 유럽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유럽의 교차로 역할을 한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어원도 ‘문지방’ 혹은 ‘문턱’이란 뜻이다. 프라하는 체코의 왕 카렐 4세가 135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건설한 도시로 당시 유럽에서는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그가 1348년에 중부유럽에 세운 최초의 대학이 카렐 대학인데 바로 이 대학이 체코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된다.

체코 종교개혁의 진앙지는 카렐 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이었다. 오늘날 프라하 공과대학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채플은 1391년에 체코어 설교를 위해 건립되었다. 유럽의 첫 번째 종교개혁은 바로 이 ‘언어혁명’에서 일어났다. 라틴어가 아니라 토착어로 예배가 드려지고 말씀이 선포된 것이다. 또한 거기에서는 ‘공간혁명’이 일어났다. 후스의 적대자들이 ‘창고’라고 부른 이 커다란 강당 같은 구조물은 교회 건축사에서 이단아에 속한다.

이 건물은 전통적인 성당 건물처럼 긴 직사각형의 모습이 아니라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후스는 이 공간 안에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다. 가장 중요한 혁신은 정사각형의 건물 한 면 가운데 위치한 설교단이다. 모든 청중은 이 건물 안 어디에 앉든지 간에 모두 이 설교단으로부터 등거리에 위차하게 된다. 직사각형의 전통적 성당에서는 제단의 앞쪽으로부터 뒤쪽으로 위계적인 질서가 만들어진다.

맨 뒤에 앉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예배와 성만찬을 멀찍이서 ‘구경’해야 했다. 그런데 베들레헴 채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위계질서가 없어진 것이다. 말씀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간혁명과 언어혁명으로부터 체코의 종교개혁은 시작됐다.

비판적 기독교 지성이 주도한 체코 종교개혁
얀 후스는 1371년에 남부 보헤미아의 후시네츠 마을에서 태어났다. 후스(Hus)라는 이름은 영어의 거위(Goose)이고 후시네츠는 거위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의 가정은 가난했고 부모들은 검소했다. 후스는 어머니에 의해 사무엘처럼 소년시절부터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는 카렐 대학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496년 이 대학의 교수가 되어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다가 이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다.

체코 종교개혁은 이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 말은 체코의 종교개혁이 비판적 기독교 지성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라는 뜻이다. 카렐 대학은 전폭적으로 후스를 지지했다. 많은 책들을 체코어로 출간하면서 보헤미아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이는 교권으로부터 비판적 자유의 거리를 상실한 오늘의 한국 신학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카렐 대학의 교수이자 총장인 후스는 ‘대중적 설교가’로, ‘백성들의 교사’로, 그리고 ‘찬송가 작사자’로 명성을 날렸다. 먼저 그는 대중적 설교가였다. 그는 1402년부터 이 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유명한 대중적 설교자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여기서 12년간 목회를 했다. 설교자로서 후스는 체코의 다양한 계층에 영향을 주었고 많은 설교집을 출간했다.

그러면서 그는 ‘백성들의 교사’가 되었다. 후스는 또한 뛰어난 ‘찬송가 작사자’이기도 했다. 베들레헴 채플은 체코어로 설교가 울려 퍼졌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체코어로 찬송이 울려 퍼졌던 곳이기도 하다. 자기 말로 찬송을 부르는 것의 감동을 아는가. 후스는 실제로 몇 개의 찬송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1412년부터 후스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 그리고 교회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그는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2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때가 그는 생애 가운데 가장 풍성한 집필 활동을 하는 시기가 된다. 이 때 쓰인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 하나가 『교회에 대하여』(De ecclesia)이다. 1413년에 라틴어로 완성된 이 책은 체코 종교개혁의 기념비적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훗날 후스의 적대자들이 그를 이단으로 정죄할 때 후스의 전집에서 약 30쪽 분량의 글을 뽑아냈는데 이중 20쪽이 교회에 대한 것일 정도로 이 책은 중요하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 앞에 선다
사실 후스는 주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연구했던 신학자였다. 중세시대에 교회라는 주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교황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회에 대한 신학적 토론보다는 법적인 문제가 더 중요했다. 하지만 서방교회가 두 교황으로 난립하여 대립하는 분열의 시기를 맞이하자 (1309년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파벌주의 때문에 고민하다가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후 그레고리우스 11세는 다시 교황청을 로마로 옮겼다. 이때 추기경회는 교황을 따로 선출해 아비뇽에 그를 앉혔다. 두 명의 교황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그 때가 되서야 비로소 교회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스는 ‘지상의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를 구별했다. ‘눈에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bilis)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bilis)를 구분했다. 계급화 된 중세의 제도교회는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와 동일시했다. 게다가 자신을 마지막 심판을 수행하는 절대적인 권위자로 이해했다. 하지만 후스는 놀랍게도 교회 역시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최후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 이후의 교회는 지금의 심판 이전의 교회와 똑같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참된 교회는 아직까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아직 없었고, 현재도 있지 않으며, 오직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후스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강조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영적인 몸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엡 1:23)이다.

『교회에 대하여』에서 특별히 후스는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것이 복음의 역설이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한 말씀은 잘 기억하면서도 “너희는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기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라”는 말씀은 기쁘게 받아들이면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회피하는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에서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좋아하지만 가난, 침묵, 겸손, 관용, 덕행, 인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그가 감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릴 때 친구들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체코의 친구들에게”)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교활한 사람들, 특별히 선하지 않은 사제들, 즉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구세주가 말씀하신 사제들을 주의하십시오.” 사실 모든 교회의 문제는 정확히 성직자들의 문제이다.

창녀들에게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다
후스의 교회론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교회론』(1378-79)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참된 교회’란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당시 제도교회인 로마교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위클리프는 1384년에 지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교회는 1428년에 그의 무덤에서 유골을 끄집어내 그를 화형에 처한다.

사실 후스에 대한 위클리프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역사가들은 위클리프와 후스를 종교개혁의 ‘전야’를 밝힌 사람들로 묘사하곤 한다. 위클리프는 “죽은 뒤 화형당해 개혁의 불씨를 뿌린” 사람으로, 후스는 “혁명 전야에 시끄럽게 운 거위” 정도로 묘사하곤 한다. 종교개혁의 역사를 ‘위클리프 – 후스 – 루터’의 연속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의 한 그림도 이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위클리프는 부싯돌 두 개로 불꽃을 일으킨다. 후스가 그것을 받아 촛불에 옮긴다. 루터가 다시 그것을 받아 횃불을 치켜든다. 대부분의 교회역사가들은 후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루터의 성공을 예비한 선구자 정도로, 하지만 결국은 실패한 선구자 정도로 인식해 온 것이다.

하지만 후스는 독자적인 사상가였다. 그는 단순히 위클리프를 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중세 후기 체코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을 얻는다. 후스가 교회를 위클리프의 개념적 언어로 표현한 것은 맞지만 후스의 뿌리는 위클리프가 아니라 체코의 토착적 종교개혁 사상가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왜 위클리프의 가르침이 자신의 고향인 영국이나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특별히 보헤미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후스는 체코에서 새로운 대중적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후스는 오랜 체코의 토착적 개혁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헤미아가 위클리프라는 외래 전통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만든 요인은 다름 아닌 체코의 토착적 개혁 전통이었다.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는 코로몌르지시의 얀 밀리치(Jan Milíč z Kroměříže)이다. 밀리치는 개혁의 중점을 성만찬에 두었다. 그 이유는 성만찬의 개혁이 곧 사회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나 수도원 담장 밖에서의 영적 개혁을 주장했고 그것을 과감히 실천했다. 그는 특히 프라하의 중심에 있는 홍등가에서 창녀들에게 체코말로 성만찬을 베풀면서 체코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다.

그 때가 후스가 태어난 바로 다음해인 1372년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던 창녀들이 모국어로 설교를 듣고 나서 복음을 이해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마셨다. 그 결과 프라하에서 악명 높았던 창녀촌인 ‘베나트키’(작은 베니스라는 뜻) 지역이 개혁된 창녀들의 중심지로 변했다.

이후 이곳은 ‘예루살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무려 200명의 창녀들이 이 작은 베니스에서의 옛 직업을 버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밀리치의 열정적인 개혁의 지지자가 되었다. 밀리치는 거기서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었다. 왜 그랬을까?

가난하고 배고픈 창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예전적 상징만이 아니라 실제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들에게 성만찬은 특별한 예식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었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사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단지 상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먹을 것을 나누는 사회저변의 열린 식탁 운동이었다.존 D. 크로산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가장 밑바닥 민중들 사이에서 영적인 치유(spiritual healing)와 물질적 음식(material eating)을 나누는 나눔의 평등주의”였다.

초대교회 역시 예수의 이 식탁/밥상 공동체를 그들의 삶 속에서 재해석해 실천했으며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연결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의 식탁은 교회의 식탁으로 흡수되었고 주의 만찬은 제의적 의식으로 바뀌면서 그 종말론적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다. 주의 만찬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위한 기본적 질서라기보다 교회의 예전적 질서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다시 돌려놓은 이가 밀리치다.

결국 밀리치는 아비뇽으로 소환돼 이단으로 선고 받았고 거기서 1374년에 죽었다. 프라하의 ‘예루살렘’은 폐쇄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감명 받은 추종자들이 그가 시작한 개혁의 불씨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야노보의 마테이(Matej z Janova)가 스승의 뜻을 이어나갔다. 그는 파리대학 유학파여서 ‘파리선생’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지식인이었는데 교회개혁을 넘어 봉건제도 자체의 타파를 주장했다.

그 역시 점증하는 교회의 타락 속에서 성만찬의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호사로운 생활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오직 진정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물론 체코의 초기 개혁자들은 화체설이라는 가톨릭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적은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기적은 사회 안에서도 일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마테이는 끊임없이 평신도들이 성만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실제 수시로 성만찬을 베풀었다. 마테이에게 성만찬은 생명의 빵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빵/밥’(요한 6:35-58)이라고 했다. 수시로 베푸는 성만찬은 사회 변화의 통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테이는 ‘이종성찬’(utraquism)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 이종성찬이란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에게 빵뿐만 아니라 포도주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후 후스주의 운동(Hussite Movement)의 상징이 된다.

바로 이 밀리치와 마테이가 후스의 뿌리이다. 후스는 단지 영국의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위클리프의 사상을 독일의 루터에서 전해준 단순한 중개자가 아니다. 그는 밀리치와 마테이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체코 토착적 종교개혁 운동의 독특한 성만찬 신학에 기초하여 체코 종교개혁의 꽃봉오리로 활짝 피어올랐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체코 종교개혁은 위클리프의 복제품이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단순한 전야(前夜)가 아니다. 체코 종교개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종교개혁이다.

급진적 기독교 평등주의를 이루다
가톨릭교회는 평신도들에게 성찬잔까지 베푸는 것을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잔은 사제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스주의자들에게 주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현 시대가 새로운 종말론적 질서로 변모함을 의미했다. 성만찬은, 특히 성찬잔은 먼 훗날 묵시적으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내 몸으로부터 변혁적인 세상이 도래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평신도들에게 주어지는 성찬잔은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종성찬은 교회의 위계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였다. 성찬잔은 그렇게 교회와 사회의 민주화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성찬잔은 한마디로 사회적 특권의 제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실로 당시의 성직자 집단은 오랫동안 사회적 특권층의 지위를 누렸다. 후스와 후스주의자들은 성직자들의 특권이 성서와 하나님의 법과 또한 초대교회의 정신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물론 그들은 사제집단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후스의 목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사제집단은 계속 존재하지만 그들의 특권적 우월성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성찬잔이 교회 안에서의 평등주의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회 안에서도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했다. 대안적인 교회는 곧 대안적인 사회를 의미했다. 바로 이것이 체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

대안적인 교회와 대안적인 사회는 불이(不二)의 관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후스주의 운동으로 인한 교회개혁의 혜택이 실제로 가난한 농민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후스주의 개혁운동 중에 교회가 소유했던 토지의 75% 이상과 수도원 건물 중 170개가 사회로 환원되었다. 15세기에 전 유럽을 걸쳐 이렇게 봉건적 권력과 질서가 파괴된 곳은 보헤미아 말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체코 농민들이 후스주의 운동을 광범위하게 지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체코 종교개혁 운동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여성들이 높은 영적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실로 후스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장에서 그들은 남성들과 함께 전사로서 싸웠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 활동했다. 프라하에는 많은 여성 설교자들이 활약했다. 후스주의는 여성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허용했다. 우리는 이러한 후스주의 운동의 핵심적 성격을 가히 급진적 기독교 평등주의(radical Christian egalitarianism)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화형 당한 ‘평화의 사도’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1414-1418)에서 이단으로 선고를 받고 1415년 7월 6일에 전격적으로 화형을 당했다. 원래 콘스탄츠 공의회의 목적은 3명의 교황으로 분열되어 있는 가톨릭교회를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공의회는 마르티노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해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교회개혁의 화두가 된 신앙의 문제로 다루기로 하고 후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다.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신변안전 보장을 믿고 콘스탄츠로 갔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3주 후 그는 전격적으로 체포된다. 화형 당일 주교들은 그의 사제복을 벗기고 그의 머리에는 ‘이단의 주모자’라는 글과 마귀가 그려진 모욕적인 종이모자를 씌웠다. 후스는 노래를 부르며 죽었다. 화형대에 오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우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 태우지도 끓이지도 못할 백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후스가 죽으며 예언한 백조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로 알려져 있다. 후스의 유골은 라인 강에 뿌려졌다.

후스는 겸손한 사람이었고 ‘평화의 사도’였다. 그는 박해를 피해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가서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설파할 설교의 제목으로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작성했다. 이 설교는 자신을 반대하는 성직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설교는 행해지지 못했다. 읽혀지지 않은 이 설교문에서 그는 두 종류의 평화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평화’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세 개의 차원을 갖는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둘째는 자신과의 평화이며, 셋째는 이웃과의 평화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다른 두 평화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두 평화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과 평화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리고 나서 자기 자신과의 평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후스는 이 세 가지 평화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함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평화와 달리 세상의 평화는 사람들의 교활한 협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법을 포기한 고위 성직자들은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면서 하나님의 평화를 파괴하는 ‘죄 중의 죄’를 짓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는 겸손이고 자발적 가난이며 복음의 실천적 설교이다. 후스는 선하고 악한 사람 모두가 세상의 평화는 가질 수 있다고 썼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화는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누린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집에 평화를”(마태 10:12)이라는 그리스도와 사도의 인사법에 따라 이렇게 “평화에 대한 이야기”라는 설교를 마무리한다. “이 집에 첫 번째의 평화가 있도록, 즉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간구합시다. 그리고 두 번째의 평화가 이 집에 임하여 거룩하게 다스리도록 간구합시다. 또한 세 번째 평화가 이 집에 임하여 모든 이웃을 구원에 이르게 하도록 간구합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평화를 사랑하고 희구하던 ‘평화의 사도’가 교회의 폭력 앞에 무참히 희생됐다.

후스주의 혁명과 체코형제복음교회의 탄생
후스에 대한 화형은 체코에서 전 민족적인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귀족들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는 로마교회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다. 프라하대학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은 이 결의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물론 로마교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교황은 우선 모든 성직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후스의 사상을 채택했거나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모든 사람을 파문시키라고 명령했다. 박해가 극도로 심해지자 보헤미아 개혁가들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의사당을 공격해 12명의 의원들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밑에서는 뾰족한 창을 든 사람들이 빽빽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위 ‘1차 창문 투척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후스주의자들이 보헤미아를 장악했다. 격분한 교황은 십자군을 모집해 1420년부터 1431년까지 5차례나 보헤미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후스주의자들은 얀 지쉬카(Jan Žižka) 장군의 지휘 아래 똘똘 뭉쳤다. 맹인으로도 알려진 이 장군의 지휘 아래 후스주의자들은 교황이 보낸 다섯 번의 십자군을 모두 물리쳤다. 이를 기화로 후스주의는 오히려 유럽 전역으로 확대돼 나갔다.

다급해진 로마교회는 1433년에 바젤공의회에서 후스주의자와 협정을 체결한다. 불행히도 이 협정을 놓고 후스주의자들은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뉜다. 결국 1434년 형제간의 전투로 후스주의는 급격히 약화된다. 형제간의 전투에서 승리한 온건파는 로마교회와 평신도의 성찬잔을 허락하는 문제만을 다루는 최종협상을 체결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급진적 후스주의자들은 ‘체코형제단’을 구성했다.

결국 보헤미아는 1620년 유명한 백산전투(Battle of White Mountain) 이후 가톨릭교도들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이후 체코는 300년 동안 재(再)가톨릭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후 체코의 종교개혁은 체코의 역사에서 거의 완전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약 8만 명의 비밀 개혁교도들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1백 년 이상 존재했다. 결국 제1차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설립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선포되면서 박해는 끝나게 된다.

그 때 각기 따로 존재하던 루터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체코개혁교회가 1918년 하나로 연합하여 오늘의 ‘체코형제복음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교회가 중부유럽의 첫 연합교회이다. 이 새 연합교회의 상징은 성경 위에 놓인 성찬잔이다. 여기서 성경은 형제단의 상징이었고, 성찬잔은 물론 후스의 상징이다.

진리로 향하는 길
프라하의 구(舊)시가 광장 북동쪽에는 후스 화형 500주년인 1915년에 세워진 후스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전 체코인의 재정적 헌신으로 건립되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와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후스의 뒤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상이 있다. 이 아기는 희망을 상징한다. 죽음의 불길 속에서도 새 생명이 태어나 후스의 정신과 신앙을 이어갈 것임을 보여준다.

이 동상의 제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강인했던 후스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콘스탄츠의 화염 속에서 깨어났다. 그의 육체는 타버렸지만 그의 정신은 살아남았다. 그의 명성은 체코 역사의 정신과 생명이 되었다. 후스의 순교로 인류는 진리로 향하는 길과 인식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진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한국교회는 다시 이 길로 향해야 한다. 600년 전 체코에서 종교개혁의 불을 붙인 얀 후스는 오늘 우리를 다시 이 진리의 길로 부르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역사 500년 중에서 가장 부패한 교회”라는 오명을 안고 있는 한국의 개신교회는 올해 2015년 7월 6일 후스의 화형 600주년부터 뼈를 깎는 자기개혁과 갱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것이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과 2019년 3.1운동 100주년으로 이어져야 한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순교자 후스는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되돌아갈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토마시 부타, 이종실 옮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동연, 2015).
이동희, 『역사를 바꾼 종교개혁가들』 (지식의 숲, 2013).
Thomas A. Fudge, The Magnificent Ride: The First Reformation in Hussite Bohemia
(Aldershot, England: Ashgate Publishing Limited, 1998).
_____, Jan Hus: Religious Reform and Social Revolution in Bohemia (London: I.B
Tauris & Co Ltd, 2010).
_____, The Memory and Motivation of Jan Hus, Medieval Priest and Martyr
(Turnhout, Belgium: Brepols Publishers, 2013).
Victor Verney, Warrior of God: Jan Zizka the Hussite Revolution (London: Frontline
Book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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